윤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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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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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1970

정상희

1970 ~ 1972

조용달

1972 ~ 1973

조우동

1973 ~ 1982

강진구

1982

강진구, 정재은

1982 ~ 1986

정재은

1986 ~ 1987

정재은, 한형수

1987 ~ 1988

안시환

1988 ~ 1989

강진구, 안시환

1989 ~ 1990

강진구, 김광호, 정용문

1990 ~ 1991

강진구, 김광호, 황선두, 윤종용, 김영수, 정용문

1991 ~ 1992

강진구, 김광호, 윤종용, 김영수, 정용문

1992 ~ 1993

강진구, 김광호

1993 ~ 1995

강진구, 김광호, 이윤우

1995 ~ 1996

강진구, 이해민, 김광호, 이윤우

1996 ~ 1997

강진구, 이해민, 윤종용, 이윤우

1997

강진구, 문병대, 진대제, 송용로, 이해민, 윤종용, 박희준, 이윤우

1997 ~ 1998

강진구, 문병대, 진대제, 송용로, 윤종용, 박희준, 이윤우

1998

문병대, 진대제, 송용로, 이학수, 윤종용, 이건희, 박희준, 이윤우

1998 ~ 1999

문병대, 진대제, 윤종용, 이학수, 이건희, 박희준, 이윤우

1999

문병대, 진대제, 윤종용, 이건희, 이윤우, 이학수

1999 ~ 2001

윤종용, 이건희, 이기태, 이상현, 이상완, 이윤우, 이학수, 임형규, 진대제, 최도석, 한용외, 황창규

2001 ~ 2003

윤종용, 이건희, 진대제, 이윤우, 이학수, 최도석

2003

윤종용, 이건희, 이윤우, 이학수, 최도석

2003 ~ 2004

윤종용, 이건희, 이윤우, 이학수, 최도석

2004 ~ 2008

윤종용, 이건희, 이학수, 최도석

2008

윤종용, 이윤우, 최도석

2008 ~ 2009

이윤우, 최도석

2009

이윤우

2009 ~ 2010

이윤우, 최지성

2010 ~ 2012

최지성

2012 ~ 2015

권오현

2015 ~ 2018

신종균, 윤부근, 권오현

2018 ~ 2022

고동진, 김현석, 김기남

2022 ~ 현재

한종희, 경계현







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윤종용
尹鍾龍 | Yun Jong-yong


파일:윤종용.jpg

본관
파평 윤씨[1]
출생
1944년 1월 22일 (80세)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2]
가족
배우자 이수곤, 아들 윤태영
학력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졸업 / 11회)
서울대학교 (전자공학[3] / 학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대학원 (수료)

1. 개요
2. 개요
3. 경력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


2. 개요[편집]


1944년 1월 22일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11회)와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1966년 삼성그룹에 입사하여 한국비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력사업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해야 했고 신규사업동력을 물색하던 중 전자 분야를 택했고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삼성전자 전신)이 생기면서 이동했다.

삼성전자 도쿄지점장, 기획조정실장, TV·비디오 사업본부장, 종합연구소장을 역임하고 1990년 가전부문 대표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 삼성전자를 떠나 삼성전기 사장, 삼성전관 사장, 삼성그룹 일본본사 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주류에서 밀린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1997년 삼성전자의 총괄 대표이사 사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냈다. 구조조정, 기술혁신, 인재혁신, 브랜드이미지 혁신 등을 주도했다.

2000년대 삼성을 '글로벌 톱 전자기업'으로 만든다는 전략을 주도하였고 소니를 필두로 한 글로벌 전자업체들과의 경쟁 속에서 세계 1위의 목표를 달성했다. 12년간의 삼성전자 CEO 생활을 2008년 5월에 마친 후 2011년까지 상임고문을 맡았다.

12년간 CEO를 맡으면서 기쁜 때가 별로 없었다고 하며, 그 이유는 매일 긴장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004년 삼성전자가 순이익 11조 원을 기록했을 때, 그리고 세계 TV 시장에서 1위에 등극했을 때 보람을 느꼈지만 기쁨을 내색할 수 없었고 곧바로 회사가 위험해진다는 생각부터 했다고 한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3. 경력[편집]



4. 여담[편집]


  • 진지하고 담백한 성격이며 앞에 나서는 것을 워낙 싫어한다. 언론에서 인터뷰 잡기 어려운 기업인이었으며 인터뷰를 잡아도 재미는 솔직히 떨어지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면도 있고 의외로 달변가이며, 한 번 말문을 열면 화제가 이쪽 저쪽으로 옮겨다닌다고 한다.

  • 흡연자다.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웠다고 하며 담배를 끊지 못한 이유로 기업을 경영하면서 고민이 많은 점을 꼽았다.

  • 아들 윤태영이 이 사람의 아들로 유명해졌다. 본인의 뒤를 이어 기업 경영인이 되길 바랐지만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처음에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이 꾸준한 노력 끝에 사람들의 인지도를 얻어가자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식 투자에서 아들이 성공을 거두자 비결을 물어보기도 한다.

  • 아들 윤태영의 결혼식을 신라호텔에서 했으며 재계, 정계, 관계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연예인들은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식을 봐야했다고 한다. 무뚝뚝한 성격이나 손주를 보자 손주바보가 됐다고 한다.

  • 공과대학 학생들이 전공 45학점만 따도 졸업하는 게 무슨 공대냐고 할 정도로 한국 공과대학이 너무 공부를 안 시킨다고 비판하였다. 본인이 1966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기 위해 전공학점으로 무려 150학점을 따야했다고 술회했다.#

  • 짤방[4]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소액주주를 향해 한 발언인데, 물론 소액주주가 의결권을 가지지 못하나, 표현을 굳이 "남의 회사에 와서 행패냐"는 말은 소액주주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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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위공파-전서공파 35세 종(鍾) 항렬.[2] 파평 윤씨 집성촌이다.#[3] 학창시절에 철학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철학은 배고프고 수학이 약해 전공을 전자공학으로 정했다고 한다.[4] 파일:17f90c280ff4fb8cc.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