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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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윤치호가 청년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무려 60년간(1883년 1월~1943년 10월) 꾸준히 저술한 일기다. 격동의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지식인의 생생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꼽히고 있다.[1]
당초 윤치호의 일기는 사후 자녀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1968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되어 사료화되었다. 이후 유족들은 1990년에 일기 원본을 포함한 각종 관련 자료 원문을 윤치호의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후 한문, 영어로 쓰여진 원문이 국문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에모리 대학교도 기증받은 원문을 디지털화하였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 및 국역 텍스트를,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원문 이미지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어 쉽게 열람이 가능하다. (아래 외부 링크 참조)
2. 설명[편집]
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일기를 썼고[2] ,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의 일기는 국문으로 썼으며, 1889년 12월 7일 이후의 일기는 영어로 썼다.[3]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데, 이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다가 1915년에 가석방되는 과정에서 일제 당국에 압수된 후 분실된 걸로 추정된다.
윤치호의 자필 영어 일기 원문[4]
윤치호는 어학 실력이 매우 뛰어나 한국에서 제대로 영어를 배운 최초의 인물이다.[5] 그의 영어 일기를 보면 오늘날 미국인들이 봐도 어려워하는 라틴어 계열 고급 어휘를 매우 많이, 자유자재로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어휘뿐만 아니라 어법이나 문장 구성도 거의 완벽하다. 에모리 대학 재학 시절에는 그가 쓴 에세이를 교수가 영어 문어체 글쓰기의 모범 예시로 학생들에게 공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윤치호가 그의 천부적 어학 능력을 한국어를 위해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6][7] 만약, 그가 이 시기에 서양의 대표적 저작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 작업을 거들어 주었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문어 전통을 어느 정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며 현대 한국어에 대한 일본어 영향이 꽤 줄었을 것이다. 일본어 잔재론도 덜 나왔을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 중 국문(한국어)으로 기록한 부분은 대체로 발음나는 대로 그냥 쓰면서도, 과도교정으로 인해 아래아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후 영어로 일기를 쓰면서도 영어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해야 할 때는 '훌륭한 영어를 잘못된 조선어로 바꿔야 함이 고통스럽다'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 그는 조선에서의 타자기 수요가 없으리라고 염세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조선어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다중언어 구사자로 자랄 수 있게 했고, 본인도 조선어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연사들의 강연을 청취하곤 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윤치호는 한국어를 민족 교육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본인도 적극 활용했을지언정, 한국어의 어법 체계를 다듬기 위해 본인이 연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정치인으로서,[8] 일제강점기 개혁 운동가로서, 친일파로서 자신의 매우 솔직한 생각을 숨김없이 터놓았고[9] 당시 주변 환경에 대한 온갖 자잘한 내용들이 적혀있어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개인 회고록이 그렇듯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영국사와 서양 근현대사 전공인 박지향 서울대학교 교수가 이 일기를 통해 윤치호에 대한 수정론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3. 기타[편집]
당시 유교의 영향이[10]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청년 시절의 한문 일기에는 유달리 일기 첫머리에 愼(삼갈 신)자가 항상 들어가 있는데, 일기 내용상 그렇게 삼가서 행동하지 않은 듯한 날에도 적어둔 걸 보면 일종의 좌우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1] 이 당시 쓴 일기 중 1884년 5월 15일자에는 KYEKANヲシタ(KYEKAN오 시타 = KYEKAN을 했다)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있는데 이것이 '계간'(鷄姦)을 뜻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해석해놓고 있다. 정말 계간이라고 해도 단순한 남색인지 양성애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대목들 말고도 곳곳에 일본어와 근대 한국어로 주변인의 전보나 대화 등을 원어 그대로 인용해 놓은 부분들이 많아 사료적 가치가 높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번역은 이러한 디테일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는 편이다. 손글씨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오자가 많이 생겨 내용 판독이 어려운 탓인 듯.
문학 사상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기 일기 중 중요 대목을 발췌 번역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책이 나와있다.
4. 고종 독살설[편집]
'윤치호의 일기' 중 고종 독살설의 긍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 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민영달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The Emperor who enjoyed perfect health died inside of half an hour after he had taken the 食醯 or sweet rice water, in violent contortion. His limbs were so swollen in a day or two that his spacious Korean trousers had to be slit open to take them (trousers) off. When Min Yong Tal and others tried to wash the inside of the Emperor's mouth with medicated cotten they found the tongue had actually disappeared while the teeth had all dropped out of their sockets. A streak of black mark about a foot long extend from the throat to the abdomen.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
5. 외부 링크[편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 윤치호일기 1 (1883~1889):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2 (1890~1891):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3 (1893~1894):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4 (1895~1896):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5 (1897~1902):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6 (1903~1906):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7 (1916~1919):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8 (1920~1924):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9 (1925~1931):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10 (1932~1935):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 윤치호일기 11 (1938~1943): 원문 텍스트 국역 텍스트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