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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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28년 5월 21일에 태어났다.

1947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에 진학, 1950년 7월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사단 민청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 1960년 6월, 금강산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4월, 조선인민군신문사 주필에 임명, 총정치국 선전부에서 일하면서 조선인민군 내부의 선전사업을 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74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으며 1975년 8월, 중장으로 진급하여 1976년 5월에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79년 12월 조선인민군의 책임주필을 겸하였다. 1979년 10월, 군정치요원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다녀왔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11월, 기자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70~80년대 사이 김정일의 군부 장악에 큰 도움을 주는 등 김정일의 측근 대열에 합류한다.

이후 총정치국 대표단장으로 1981년 10월, 불가리아, 1982년 1월, 헝가리, 1982년 10월, 중국, 1984년 6월, 소련, 1984년 10월, 유고슬라비아에 다녀왔다. 최주활의 논문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에 만성질환인 방광염으로 크게 고생을 해서 헝가리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신병 문제였는지 중간에 한번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는지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다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하지만 불과 4개월 후인 1988년 7월 28일 23시 45분에 60세를 일기로 심폐질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인민군대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당의 군사로선을 관철하며 혁명무력을 정치사상적으로 튼튼히 꾸리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쳤다. (...) 윤치호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우리 당을 견결히 옹호보위하고 인민군군인들을 당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우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는데 부고에서 약간의 이력을 소개하는 이색적인 모습을 보였다. 최종계급은 중장이었다.

이후 시신은 서장회관에 안치되어 성대한 대접을 받았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조명록, 김광진, 김두남, 전재선, 리동춘, 김하규, 리진수, 심창완과 함께 윤치호를 언급하였다.


3. 참고문헌[편집]


  • 최주활, 북한 체제에서의 당-군 관계 연구(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조선대백과사전.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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