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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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문묘 배향 아국 18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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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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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색: (동배향) 조선 5현
■ 진한 색: (서배향) 조선 5현
{{{#c00d45
적색}}}: 조선 종묘 배향공신
※ 순서는 선후배 순으로, 동순위일 경우 동쪽이 서쪽보다 선배이다. ※ 조선 5현: 조선시대에 최초 종사된 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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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李珥|Yi I


파일:이이 표준영정.jpg

1965년에 김은호가 그린 표준영정
본관
덕수 이씨[1]

숙헌(叔獻)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시호
문성공(文成公)
출생
1537년(중종 31년) 1월 17일[2]
강원도 강릉 오죽헌
(現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 3139 번길 24)
사망
1584년(선조 17년) 2월 27일[3] (향년 47세)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분야
정치, 교육
가족
아버지 이원수, 어머니 신사임당, 4남 3녀 중 삼남, 부인 노씨, 서자녀 2남 1녀
친인척
증외고조부 최만리[4]
저서
격몽요결, 성학집요,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
종교
유교 (성리학)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구도장원공
2.3. 붕당 정치
2.4. 말년
3. 평가
3.1. 관료로서의 면모 - "경장", 시무, 무실
3.2. 십만양병설 논란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여성 예술가이자 한국의 어머니상인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아들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가. 우리나라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며, 신사임당이 오만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며 모자가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본인은 평생 붕당의 대립 해소에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5]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생전에 이이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6]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중 하나로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1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뭐가 대단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가독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1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사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에는 학습 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겨우 23세에 정립해 일관되게 유지했던 이기일원론으로 조선 유학의 사상적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놨던 뛰어난 사상 때문이다.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 신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6살 때 모계 집안인 강릉[7]을 떠나 부계 집안으로 이사했는데 이이 본인의 고향은 강릉이지만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8]라는 곳에 있었고 이이의 아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두고 있는 곳을 의미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된다. 다만 실질적인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인데 왜냐하면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9]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 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유일한 장점은 근기(서울)에서 가깝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이이가 남긴 기록 중 아버지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이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집안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신사임당이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이원수 본인이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10]

154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18세(1553년)에 관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었으나 모친을 잊지 못하였으며 봉은사에서 불서를 읽고 나서 감명하여 속세를 떠날 결심을 한다. 19세(1554년)에 친구들에게 편지로 이별하며 절에 들어간다. 그리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가에 회의를 느끼고 하산하여 이후 유학에 전심한다.[11]

22세(1557년)에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68)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12]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삭발을 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13][14] 그 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 전해지는데 머리가 좋은건 유학에서만 작용한게 아니라 불도에서도 작용한 것. 이 부분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는데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쓰고 있는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비판받아 마땅한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15] 실제로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 신입 길들이기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는데 심지어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숨졌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에 대한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이 심했을 것이다.

23세(1558년)에 퇴계를 만나기 위해 도산으로 갔고 이후에도 서찰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학문을 보완하게 된다. 퇴계를 만난 율곡은 자신이 불가에 들어갔던 사실을 이야기했는지 퇴계가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16]

26세(1561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치른다. 이후 출사 준비를 마친 이이는 29세인(1564년)에 생원시[17], 진사시[18]를 거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선조 재위 1년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당시 율곡은 상소하여 하직하며 '어릴 때에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선조는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들어 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전에 선문(禪門)에 종사(從事)했다는 작은 실수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논사(論思)하는 중대한 직책을 경솔하게 체차할 수는 없다.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 그 뜻이 가상하다.' 비답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었다.


2.2. 구도장원공[편집]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 / 진사과(소과) 초시 → 생원과 / 진사과 복시 → 문과(대과) 초시 → 문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 시험인 별시[19]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 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 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20]한 이상의 대업적이다. 그런데 응시자인 양반들 입장에선 9번이나 열명 단위로 뽑히는 커트라인이 올라간 셈이다.

실제로 당시 이 부분은 정적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미 합격해서 안 쳐도 되는 시험까지 억지로 중복 응시를 감행하는 행동이 장원이라는 타이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 생원과 초시 : 29세
  • 생원과 복시 : 29세
  • 진사과 초시 : 13세, 29세
  • 진사과 복시 :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 하고 합격)
  • 대과 초시 : 29세
  • 대과 복시 : 29세
  • 대과 전시 : 29세
  • 별시 초시 : 23세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다고는 하나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23세 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21]

“그런데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 그렇다면 이의 상(常)과 이의 변(變)을 어찌 한결같이 천도에 맡길 수 있겠는가? …… 성왕(成王)이 한번 잘못 생각하매 대풍(大風)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周公)이 수년을 교화하매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았으니, 그 기가 그렇도록 시킨 것도 또한 사람의 일(人事)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아아, 일기(一氣)의 운행 변화가 흩어져 만수(萬殊)[22]

가 되나, 나누어서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일기(一氣)이지만, 합하여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같은 일기(一氣)이다. …… 이로써 본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 어찌 임금 한 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

율곡 이이의 과거시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의 마지막 부분 출처



2.3. 붕당 정치[편집]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켰다.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며 분열한 사림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양비론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니,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이란 것이 풍문ㆍ명목으로 존재하여도 그들은 모두 군자당이므로 결국 공존하고 화합하지 계파가 나눠 대립한다는 생각부터를 않으려 했다.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훈구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언에선 붕당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특히 이이를 한 축으로 지목하기까지 한 이준경을 '말이 사악하다'라고 비난했고, 죽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류성룡 등의 동인이 반대해서 무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유언으로 말미암은 이 이슈 또한 동서 분당의 무수한 전개 과정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림이 자기들끼리 분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의 정치적 수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붕당의 문제와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 현실을 자각한 이이도 자신의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8년)에 있었던 을해당론(乙亥黨論).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는데,[23]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여 본래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당시 심의겸은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기는커녕 이이에게 보호를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붕당을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물급 유학자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 동인에게는,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이었던 반면 훈구들에게 우호적이던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 만한 거물이 없었던 서인들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 등 이이의 성격과 행동은 당대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29세로 젊은 나이에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이미 합격을 해놓고도 계속 장원 자리를 노리며 불필요한 과거시험에 중복응시까지 감행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며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었다. 40~50살까지도 과거급제 33인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본인은 갑과 장원을 하겠다고 중복응시.... 이뿐만 아니라 실록을 보면 이이는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박시백의 의견이 흥미로운데, 정리하면 이이는 이황이나 조식, 서경덕 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 그들의 학파가 정립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영향과는 별개의 학술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선배 학자들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 초년에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이황, 이언적[24], 권벌, 이준경, 기대승은 다 비난 대상이었고, 특히 기대승이나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준경은 자기 스승이 위훈 삭제를 하려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이는 이준경의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건 이준경과 이이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그리고 이준경이 죽으면서 붕당을 경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말이 악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추천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비판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이는 "이황의 학문은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김성일은 발끈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박하였고, 이황의 또 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성품이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25]

또한 서경덕이 죽고 나서는 우의정 추증에 찬성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도에 너무 치우쳤다"라고 비판했는데, 조선시대에 멀쩡한 유학자를 도교불교에 엮는 것은 대놓고 조롱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이도 한 때 불교 심취한적이 있다. 이렇게 서경덕을 비판한 것은 제자이자 허난설헌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26]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27]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혐오하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며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서 파직당했고 귀양에서 풀려난 직후 병사한다.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최종 승리자는 이이와 그의 문파였다.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볼 때 이이가 주변인들의 어그로를 잘 끄는 성격이기는 했던 모양[28]


2.4. 말년[편집]


1581년에 그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후술.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29]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산에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장남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실록의 율곡 졸기는 다음과 같다.링크[30]


3. 평가[편집]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31]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이 크게 받듦으로써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졌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시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았다.[32]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제자로 김장생, 정엽, 조헌, 이귀가 있다. 이이의 학문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준길, 송시열로 이어져 나가며 서인의 뿌리가 되어 조선 후기 사상계를 장악하게 된다.[33]

중국에선 명나라 대부터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라면 정답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1. 관료로서의 면모 - "경장", 시무, 무실[편집]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 전반기를 이이 중심으로 그려낼 만큼 이이의 경장을 높게 산다. 이순신만 아니었어도 <중종실록> 편의 조광조처럼 표지 모델로 썼을 거라는 평가. 다만 사상사 - 제도사 등 큰 그림에서 역사를 보지 못해서 이이의 경장론이 후대의 서인에게 이어지는 대목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 또한 해당 책에는 '경장'이라는 단어만 강조되나 이이는 '시무(時務)'[34]와 ‘무실(務實)'[35]이라는 표현도 즐겨 썼다.

이이가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시절, 조선이 가장 우려한 외세의 공격은 일본이 아닌 여진족이었다. 여진족들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나 해적들보다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는 위협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시기에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이 경험한 가장 큰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바로 니탕개의 난이다. 이이는 장장 1년에 걸쳐 병력의 선발과 양성, 보급으로 니탕개가 호시탐탐 노리는 함경도에 중앙군 파견을 지속했다.

이이의 관료로서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전시 국방 장관으로서의 업적이다. 또한, 이 시기의 여러 긴급 조치들이 동인들에게 탄핵받으면서 "망국의 간물"이 하는 공세에 시달린 것도 이 때다.

사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이이는 1564년 급제 직후 차관보~국장급인 6조 좌랑에 오를만큼 능력이 뛰어났던 관료였다. 불가에 잠시 몸을 담근 적은 있으나 보우, 윤원형 탄핵에 가세하는건 물론 3년 뒤 선조가 즉위할 때는 인순왕후의 외척을 탄핵하는 파이터이기도 했다.[36] 그 직후 즉위 사신단 서장관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 - 대사간을 거쳤다.

특히 1574년 대사간에 오른 이후부터는 사실상 대사간에만 6년을 있었다. 이전에는 승진이 늦어진 것 아니냐는 소리일 수 있으나 사림들에게 가장 중요한 직책이었던 3사 중 최고위직을 이렇게 오래 역임했다는 것은[37] 그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기술에는 삐져서 만언봉사를 올렸다 하는데 정작 만언봉사를 올린 시기는 1574년으로 막 대사간에 올랐던 시기이다.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하는 곳이었으니 오히려 이건 이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임금에게 피력하는데 더활나위없이 좋은 직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이이가 1580년부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1584년에 이조판서가 되는데 참고로 친구였던 송강 정철도 1583년이 되어서야 예조참판으로 갔다가 특별 제수되어 예조판서가 되었고, 3살 정도 어린 이산해도 1580년에 가서야 형조판서가 되었다. 한마디로 이이는 늦게 승진했다기보다는 되리어 호조판서 제수 이후 이이의 승진속도를 봤을 때에는 이이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영의정은 무조건 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선조의 신임을 꽤나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이조판서 다음 직책은 우의정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때 당시 분위기상 1590년이 되기 전에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다행히 왕의 신임이 있을 때에 떠나 좋은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동료들이 적어 홀로 개혁하는데 일생을 바쳤지만 결국 염원을 이루지 못한 정계에서 파란만장하게 산 고독한 정치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3.2. 십만양병설 논란[편집]


그가 서인의 종주로 추대된 이후 임진왜란 종전과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정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명 조식과 그 직계인 정인홍 등의 북인, 특히 대북 계열은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고, 상단에서 언급된 이이와 직접 대립했던 이들의 평가도 아작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이에 대한 평가가 대폭 수정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선조실록에는 없으나 선조수정실록에는 실린[38] 십만 양병설이다.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이이가 선조에게 여러가지 국방과 세제개혁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기록인 시무 육조는 있으나, 십만이라는 구체적 숫자를 언급한 기척은 전혀 없다. 십만 양병설은 서인들이 이이를 높이기 위해 짜맞추어 만든 기록일 가능성이 높아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우선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던 1583년 올린 시무 육조에는 양병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십만이라는 숫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이는 양병은 양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면서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건 마치 중국의 삼국 시대 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던 삼국 정립설과 같이 당시에 통용되던 의견들과 비슷하다.

그럼 십만양병설은 이후에 주장했다면 시급하여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만양병설에 대한 주장은 1582년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다. 여기서도 본문에는 없고 덧붙여진 기사로 10만을 양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선조실록에는 없고, 서인 집권 이후인 선조 수정실록에만 존재하는 이 내용은 그 외에도 여러 글들에 등장한다. 문제는 이게 모두 이이의 제자인 서인들의 문집으로, 그나마도 양이 점점 불어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글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이 1597년 편찬한 율곡행장이다.

'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위급한 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혼의 제자로 역시 서인이고 이이가 죽었을 때는 겨우 13살이었던 안방준이 '임진기사'에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다. 그 내용은 역시 서인으로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율곡연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연에서 아뢰기를 "국세가 부진한 것이 극도에 달했으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마땅히 토붕와해의 화가 있을 겁니다. 원컨대 10만의 군병을 미리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비치하고, 세금을 덜어주고 재주 있는 자를 훈련시켜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다가 변란이 있으면 도성을 파수하게 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글들에서는 10만이라는 수 외에도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이라는 구체적 방법과 더해서 앞서 언급된 글의 10년이 되지 않아서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참고로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에는 1582년 4월 조에, 선조수정실록은 1582년 9월에 기사를 올리고 있는 것은 상당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역시 서인인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의 율곡신도비명, 성혼의 문인이었던 어우당 유몽인이 1622년 편찬한 어우야담 등에서 십만 양병설을 언급하고 있다. 십만 양병설 회의론에서는 이들이 모두 김장생의 율곡행장[39]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게 볼 분명한 근거는 없다. 특히 이항복은 조정 내부 사정에 대해 어느정도 정통한 인물인만큼 이이가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몽인은 북인이었고 실제로 류성룡이 한양에서 후퇴하며 '문성(文成, 이이)의 말이 과연 사실이었구나.' 식으로 후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문성' 칭호는 인조가 내렸으므로 임진왜란 때 류성룡이 이이를 문성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문정은 참 성인이다'라는 표현은 뛰어난 선견지명에 대한 당시의 관용구로 쓰였고, 실제로 율곡행장의 초판이나 율곡연보에도 이문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항복이 쓴 이이신도비에는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李文靖眞聖人也)라고 쓰여있고, 율곡전서에도 문성이 아닌 문정으로 되어 있다. 문성으로 나오는 것은 후대의 것이다. 이문정은 북송 때의 명신 이항으로 류성룡이 이이를 이항에 빗대어 찬탄한 것인데, 율곡전서의 후기 교정자가 문정을 문성으로 잘못 교정한 것이다. 따라서 교정자의 실수에 불과한 것을 십만양병설 후대 조작설의 근거로 볼 수 없다. 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지어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도 십만 양병설이 등장하고 유성룡의 후회도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유성룡이 이이를 숙헌(이이의 자)이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덕사마는 이 꼬투리를 잡아서 십만 양병설을 율곡연보의 저자인 송시열이 조작했다고 우기고 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으로 볼때 10만 양병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200만 정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훈련하고 먹이는 비용은 상상도 못할 비용이라서 그 때 당시 조선으로서는 안하는 것이 상책이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10만의 군대를 모았다 해도 백성들의 민심이 나라를 떠나버리기 때문에 의병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40]

게다가 그 1200만명 중 절반은 여자임이 명백하고 그럼 나머지 600만 중에서도 왕족, 노비 등의 천민을 제외하면 징발 대상은 더욱 한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조선이 유지한 상비군인 갑사의 숫자가 14800명이였는데 4교대제라 평시 근무 인원은 3천 ~ 4천에 불과했던 것을 보면 10만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만, 상비군이 아닌 예비군으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유형원의 반계수록 등에는 임란 전 조선의 군액 중에서 보인, 수군을 제외한 정병 기보병을 17만 ~ 18만으로 잡고 있다. 이렇게 10만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가 가능한 것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체계가 교대 근무이기 때문이다. 4교대라면 정병 17만 ~ 18만에 상번군이 4만 남짓이 되며 이 숫자는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17만 ~ 18만에 달하는 정병은 엄연히 전시가 되면 정상적으로 동원될 수 있는 병력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방군수포화되거나 노동 부대로 전락해서 실전에 투입될 수 있는 훈련은 사실상 전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선조도 "병사들을 농사에 부치는 것을 비록 말하길 좋은 제도라고는 하나, 우리 나라(조선)는 병사가 없다. 다만 농민을 몰아 싸움할 뿐이니 마땅히 그 패함이 있다.(兵寓於農, 雖曰好制, 而我國則無兵, 只驅農民以戰, 宜其敗也)"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따라서 10만의 상비군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력 10만을 갖추자는 것은 현실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군제에 맞는 대응책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전근대 국가에서 상시 유지 가능한 군사력의 한계로 여겨지는 기준이 대략 총 인구의 1% 정도이다.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고 나머지 절반인 남성 중에서도 또 대략 절반정도는 징병에 적절치 않은 연소자, 노약자, 환자나 장애인 및 기타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인원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총 인구중 징병대상인 건강한 성인 남성의 비율은 약 1/4(25%) 정도라고 어림잡을 수 있다. 따라서 총 인구의 1%는 곧 건강한 성인 남성 인구의 4%(1/25)이며, 성인 남성 25명 중 1명이 군인이 되는 정도가 전근대 사회에서 정상적인 사회의 기능의 유지를 전제로 상시 유지할 수 있는 전력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보면 당시 조선의 인구가 1200만이면 상비군 10만 유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론 정말 상비군 10만을 편성하여 유지하려면 양반 및 노비의 비율 및 징병문제도 따져야 하고 전반적으로 가벼운 세금-작고 검소한 정부를 지향했던 조선 정부의 유지 방침 자체가 제고되어야 하며, 정기적인 군사력 투사를 정책화-산업화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이 정도의 군사력을 유지할 이유가 있는가, 정 유지하려면 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부터 문제가 되겠지만...

결국 지봉유설이나 반계수록 등에 나왔다는 정병 17~18만에 상번군 4만은 총 인구의 1.5% 정도를 전시 동원 가능한 예비군으로 유지하고 총 인구의 0.3%~0.4%를 상시 전력으로 유지하는 선으로써, 조선 정도 규모의 국가면 으레 유지해야 할 병력의 수준으로써도 결코 무겁거나 가혹하여 국가경제에 부담을 줄만한 규모는 아니며, (조선에서 운영하던) 교대근무식 징병제의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만 하다. 결국 무(武)보다 문(文)을 더 중시하던 조선왕조에서도 국가의 안전보장에 필요한 수준의 군사력은 합리적인 수준에서 유지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통해 안배되어 있었으나 이 시대에는 그러한 제도가 형해화되어 국가의 군사력 자체가 유명무실한 상황에 이르렀고, 이이의 양병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줄 알고 군대를 이렇게 허술하게 내버려두냐. 유사시에 대비하여 유명무실해진 군사제도를 정비해놓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조선을 포함한 전근대 동아시아는 숫자에 그렇게 민감한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10만이라는 숫자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있는지는 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이가 주장한 것이 십만 양병설 하나가 아니라 십만 양병설은 그저 그가 주장한 경장의 일부였을 뿐이다. 이이는 기본적으로 사회 개혁을 주장한 경장론자였고 그의 경장에는 대동법의 전신인 수미법, 세제 개혁 등 여러 개혁이 있었으며 10만 양병론으로 대표되는 것은 그 중 군제 개혁 방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만 양병론 때문에 이이의 군제 개혁의 기반을 위한 양민 정책이 묻혀 버린 성향까지 존재한다. 이이의 주장은 시종일관 양민 후에 양병이었다.

여하튼 학자적인 성취는 상당해 지금은 여러 나라의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며 조선의 엘리트층을 길러낸 밑거름이지만 당파 싸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위치와 서인들의 신격화 흔적 등은 그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다.

물론, 이 문단의 평가는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단, 학계에서는, 이 십만양병설을 부정하는 논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해야 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십만양병설을 긍정하는 것이 주류다. 더욱이 손쉽게 편집 가능한 나무위키의 특성상, 이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보다는 학계에서는 이러한 견해도 있다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이와는 별개로,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니탕개의 난으로 위협성이 증명된 여진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한 이후 다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조선은 일본이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되어 안정을 찾을 것인지조차 예측이 쉽지 않았다.[41]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국방상 집중할 곳은 정치 전황 자체를 예측하기 힘든 일본보다는 당장 침략이 자행되어서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있는 북방의 여진족이었으며,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이와 연계된 것이지 임진왜란이란 일본의 침략과는 별개의 사항이라는 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물론 율곡 이이가 왜적이 아닌 여진족을 염두에 두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더라도 니탕개의 난-임진왜란-정유재란-이괄의 난, 이렇게 4개 큰 변란으로 날라간 북방군과 대내외적인 혼란, 그리고 1570년대 말부터 요동총병 이성량의 비호를 등에 엎고 세력을 키워나가던 누르하치[42]를 고려해본다면, 그 현실가능성은 차치했을 때, 필요한 것이었다. 심지어 병자호란 이후로도 루스 차르국의 만주 침공이 있었고 이는 결국 나선정벌로 이어졌는데, 비록 조청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서 루스 차르국의 한반도 및 중국 본토 침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백인들의 동아시아 침공이라는 점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43], 시대 및 침략자가 속한 문화권을 막론하고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큰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찬양하는 부분은 '당장은 없더라도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군사적 변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지, 미래의 외국 정치 상황을 예언하는 노스트라다무스식 신통력이 아니다. 그러한 '미래의 변란'이 임진왜란으로 상당히 빨리 현실화된 것 때문에 이이의 식견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 뿐이므로, 이이가 구체적인 변란의 내용까지 예측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동시대 다른 정치인들 중에는 국방의 허약화에 대해 문제를 확실히 인식, 제기하고 구체적인 개선 정책안까지 표출한 사람은 이이 말고 없으므로 십만양병설의 병사 숫자는 후대의 부풀림이라 해도 상당한 현안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4. 여담[편집]


  • 민담 중에는 이황과 이이의 밤일에 대해 비교를 해놓은 것이 있다. 어느날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부관계를 엿보는 일이 있었는데 과연 대학자였다는 이이는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점잖은 빠르기로 조용히 일을 1회 치르고 바로 잠들었다 한다. 이이의 제자들은 라이벌이었던 이황의 제자들을 만나서 "실로 우리 선생께서는 방사조차 거유(巨儒)답게 하신다."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약이 오른 이황의 제자들은 "우리 선생께서 율곡에게 점잖음으로 처지실 리가 있겠느냐." 하며 자기네도 스승의 부부관계를 훔쳐보기로 계획하곤 즉각 실천했는데, 뜻밖에 이황은 보기 드문 체위로 격렬하게 몇 번이고 일을 치렀다고 한다. 제자들이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스승에게 전말을 고하고 그 까닭을 따졌더니 이황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릇 남녀의 정사란 천지간의 큰 화합과 같아,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 한다. 율곡이 그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필경 후사가 포도알처럼 많게 되지는 못하리라.

  • 이이의 부인인 곡산 노씨는 이이가 사망한 뒤 8년을 더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이이의 묘를 지키다가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 가까이 지내던 하녀도 함께 살해당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는데 본래는 이이의 묘에 노씨를 합장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난 탓에 노씨와 하녀의 두 시신 중 어느 쪽이 노씨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별개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이의 경우 이황과는 달리 자식 복이 부족한 편이어서 정부인인 노씨와는 딸만 1명이 있었고 그나마 일찍 죽었다. 이 때문에 이이가 죽은 후 서자 이경림이 대를 잇게 되었다. 양반들은 적자가 없으면 친척에게서 양자를 들였지만 이이처럼 서자가 있으면 양자를 들이지 못함이 원래 예법이다. 단 서얼은 과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문의 격이 떨어져서 친족들 중에 양자를 들이는 것이다. 가장이 적첩구무자(嫡妾俱無子), 즉 가장과 적실 또는 첩 사이에 낳은 아들이 없어야만 가능하였다.# 만일 서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입양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적자가 없고 서자가 있으면 성서탈적(聖庶奪嫡)이라 하여 서자를 양자로 들여야 함이 본래 예법이다.[44]

  • 이이는 인간의 감정을 긍정하는 사람인데 비해 이황은 감정 이상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일단 이이와 이황은 한 세대 정도 다른 시대의 인물임을 감안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도 이황은 적손이 있어 이황의 종손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세계에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반면, 이이는 적자를 낳지 못했다. 본처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못했지만 전주 김씨에게서 1남 1녀, 용인 이씨에게서 1남을 보았으며 이 중 서녀는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에게 첩으로 들어가 아들들을 낳았는데, 적자가 없던 김집은 서자에게 후사를 물려줬다. 서장자인 경림에게 대를 잇게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면도 보였는데 후손들은 그렇게 해서 근근히 이어진 것이다. 불천위 제사도 멀쩡히 잘 지내고 있다.# 이를 생각하면 진실일지도...

  • 민간 설화 중에 젊은 시절의 이이가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천 년 묵은 구미호에게 홀렸다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소감이 "주변 충고 더럽게 안듣는 찌질이"다. 실제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 안듣고 멋대로 굴어서 자기를 도와주는 신들을 여럿 피보게 만든다.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한데 이이가 젊은 시절 금강산에 가서 수도하던 중에 일이다. 어느 날 자신을 누가 애타게 부르자 달려가보니 큰 잉어(또는 자라)가 어부의 그물에 잡혀있었는데 이이가 측은하게 여겨 어부에 사정해 물고기를 풀어주었다. 얼마 후 이이는 금강산 주막의 노파로부터 금강산에 혼자 사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데 얼마 못 가 이이는 한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유혹을 받는다. 아무래도 처녀가 노파가 말한 여인 같아 자리를 피한 후 노파에게 일러바친다. 노파는 처녀가 천 년 묵은 구미호니 접근하지 말라며 퇴치할 방법을 여럿 내주지만 그 때마다 처녀의 유혹과 충동에 사로잡혀 실패. 마지막으로 노파가 이전에 살려준 물고기에 도움을 받으라고 충고해주는데 알고보니 물고기는 용왕의 아들로 이이에게 목숨을 구원받아 은혜를 갚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용왕의 도움을 받아 용궁의 병사로 구미호를 퇴치하려 하지만 노파가 말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실패. 결국 마지막 수로 이이는 용왕을 통해 상제에 건의해 간신히 구미호를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45]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진작에 퇴치할 수 있었는데 이이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여러번 그르쳤다. 여담으로 주막의 노파는 원래 금강산의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 나도밤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이이가 어린 시절 한 지나가던 스님이 이이를 보고는 "아깝다. 이 아이는 커서 큰 인물이 되겠지만 10살이 되는 해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대책을 물어보자 스님은 "뒷동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원수는 그대로 행했다. 이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승려로 변신한 호랑이가 이이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자 이원수는 지나가던 스님이 말해준 대로 "밤나무 100그루를 이미 심었다"고 하자 호랑이는 직접 밤나무를 세더니 "1그루가 말라 죽었으니 데려가겠다." 하고 주장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너도밤나무가 "나도 밤나무다"라고 말해 호랑이는 도망쳤다는 이야기.[46]

  • 파주에 별장이 있던 이이는 화석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이 때 이이는 비싼 송진과 기름을 정자에 수시로 발랐는데(또는 잘 타는 나무로 정자를 지었다고) 당시 사람들은 이이가 사치한다고 비웃었다. 이이 사후 터진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파주 나루터에서 불이 꺼져 배가 안 보이자 애를 태우게 된다. 이 와중에 생전 이이와 친했던 도승지 이항복이 이를 기억해내 정자에 불을 지르자 송진을 먹인 덕에 잘 탔고 멀리서도 비출 정도였다. 그 덕에 빈 배를 발견해 선조는 무사히 피난을 갔고 모두 이이의 혜안에 감탄했다는 얘기인데 다만 근거가 별로 없다. 이 내용은 류성룡의 <징비록>에 비슷하게 언급되는데 임진나루를 건너면서 나루터를 관리하는 관청인 승정 건물을 부숴서 불을 질러서 밤길을 밝히고 왜군이 뗏목으로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여담으로 화석정은 700m나 떨어져 있어서 너무 멀다는 점에서도 현실성이 부족하다.

  • 이이에게도 어느 기생과의 러브스토리 이야기가 있으며 그녀를 위한 시까지 남겼다. 1574년 38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황주에 머물던 이이는 '유지'라는 12살짜리 기생의 시중을 받았다. 그 기녀는 본래 양반 출신이지만 천애고아가 된 후 기생으로 전락하고 만 불운한 소녀였다. 이이는 유지를 아껴주며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게 해 주었으며 당연히 그런 이이를 유지도 잘 따랐다. 얼마 후 이이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어 두 사람은 헤어졌고 9년이 지난 후에 이이가 다시 황주에 잠시 들르게 되어 21살이 된 유지와 재회한다. 유지는 재회를 기뻐하며 술을 대접했고 어릴 때부터 품어온 흠모의 마음이 더욱 커져 밤에 홀로 이이의 숙소를 찾는다. 이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지만 이이는 당연히 가정도 있고 자신은 이미 47세로 늙고[47] 병든데다 나이차도 많이 나는지라 유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으나 밤이 깊어져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이이는 유지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 그대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으로 얼마 후 이이는 병사하게 되는데, 죽기 3달 전에 유지와의 사연과 그녀에 대한 마음을 이름없는 시와 글로 남겼다. 이는 후세 사람들에게 '유지사'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지는 결국 맺어지지 못했지만 이 시와 글들을 보고 이이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 충무공 이순신과는 같은 덕수 이씨촌수로 따지면 19촌이었다. 이순신이 하급 군관이었던 시절 이조판서로 재직 중이던 이이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동문 사람이라 하여 한번 불러 만나보고자 하였지만 이순신은 인사권을 가진 이이와 자신이 같은 문중 사람이라는 이유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대로 따지면 일선 소대장을 먼 친척인 행정안전부 장관이 만나보려고 먼저 불렀는데도 거절한 것이 된다.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는 먼 친척이었지만 현대에도 항렬로 '대부님'이나 '아저씨' 등 호칭으로 촌수 상관없이 문중 사람들을 경칭하는 것이 남아 있을 정도에다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 이권이나 혜택이 오고가는 것이 우리나라이다.[48] 하물며 종법에 훨씬 깐깐했던 조선 시대였으니 고급 관료로 재직 중인 같은 문중 사람이 있으면 찾지 않아도 먼저 찾아가 다리를 놓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후일 한국사 최고 유학자와 최고 명장이라 칭해질 이들의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됐을 수도 있었다. 결국 이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이의 성품을 생각해보면 서운함을 느끼기보다는 촌수 먼 일가 사람의 올곧기 그지없다는 소문이 정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해했을 듯하다.

  • 흔히 세간에서는 이이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이가 강릉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본래 강릉은 이이의 모친 사임당 신씨가 태어났던 고향이었으며 이이에게는 어머니의 친정인 외가가 있던 곳으로 사임당 신씨는 이이가 태어나기 전에 친정에 와서 이 곳에서 이이를 출산하였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49]과 친영례(親迎禮)[50]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남귀여가혼이 주자가례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든 성리학자들이 인정했다는 것은 차처하더라도 결혼하고 2년이 지난 후에야 시가(媤家)에 인사를 간 신사임당의 경우는 특이한 사례이다. 다만 아이를 친정에 가서 낳는 풍속은 남귀여가혼과 별 상관없이 별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장자 상속과 친영 등 종법 질서가 자리잡는 것은 17세기 중후반이 지나서야 가능했는데 이이가 태어났던 16세기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과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이 또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가진 문서가 남아 있다. 이이는 6살 때 가서야 아버지의 고향인 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자랐고 이후 파주에서 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다가 숨을 거두었고 묘소도 파주 자운산 근처에 있다. 아호인 율곡도 실제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율곡'에서 본딴 것인데 '알밤이 자라고 나는 골짜기'라는 뜻. 이이가 정착한 곳은 처가가 있는 황해도 벽성군 석담인데 수 백년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소련군정하에서 사유 재산 몰수가 한창 이루어지던 1947년 14대 종손이 월남했다. 월남 도중 북한의 내무서원들에게 잡혔으나 운 좋게도 직원 중 1명이 한때 종가집의 하인 일을 한 적이 있어서 몰래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시대까지도 양반 상놈 노비하던 시절이라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결국 다른 종가집처럼 한옥 고택에서 기거하기는 곤란해서 경기도 고양시의 평범한 아파트에서 종가를 꾸려나가고 있다. 14대 종손도 원래는 셋째였는데 형제 중 장남은 한국전쟁 때 행방 불명되었고 차남은 종가에 남아 있다가 남북 분단으로 소식이 끊어져서 종손 자격을 잇게 되었다.

  • 이이의 저서인 <성학집요>를 보면 왕조의 변천사를 창업 - 수성 - 경장의 3가지로 분류했다. 창업은 요, 순, 탕, 무의 덕을 갖추고 개혁해야 할 시대를 만나 하늘과 사람의 뜻에 순응해야 하므로 논할 필요가 없고, 수성은 성왕과 현명한 재상이 법령을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다스릴 수 있는 도구를 모두 갖추고 예악을 훌륭하게 하면 후대의 임금과 신하는 이걸 따르기만 할 뿐이라고 하였다. 경장나라가 세워진 지 오래되면 초기에 세웠던 정책과 제도가 본래의 뜻을 잃고 폐단이 발생하므로, 밝은 임금과 총명한 신하가 나라의 뼈대를 다시 세우고 묵은 폐단을 고쳐서 공적은 선열에 빛나게 하고 사업은 후손이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수성은 중간쯤 가는 평범한 임금과 자리만 채우는 무능한 신하라 할지라도 할 수 있지만 경장은 현명한 견해와 빼어난 재주가 필요하므로 더 어렵다고 적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무너지려고 하는 집을 가진 집주인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집수리에 쓸 재목을 구하려 것이라는 예시를 들어 경장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이이는 당대의 조선이 창업과 수성을 지나 경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전정, 군정, 환곡, 공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개혁책을 내놓았다. 훗날 대동법의 전신이 되는 대공수미법[51]이 대표적인 예.

  • 정치에 있어서는 서인 쪽이 압도적으로 앞서서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노론은 조선 후기 붕당 정치사를 주도하게 된다. 이걸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묘에 배향된 18인을 의미하는 동국 18현이다. 동국 18현은 고려 시대에 헌액된 최치원, 설총, 성리학을 전래한 안향(또는 안유)가 종사되었고 조선 시대에 광해군 때 5현 종사를 시작으로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 종사되었다. 이 중에서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과 조헌(성혼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이 둘은 김집의 제자이기도 하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이자 이이의 사위이고 김집의 제자가 박세채이다. 이이의 후대로는 이이의 문열이 아니면 아무도 문묘 배향이 안되었다는 것이다.[52] 이황의 문열조차 이황을 제외하면 18현에는 없는데 기대승, 서경덕, 김안국, 조식[53] 등 굵직한 인물들의 명단은 하나도 없는 것을 봐도 위세를 알 만하다.

  • 율곡 이이는 친척에게 양자를 들이지 않았고 자신의 혈육인 서자가 제사를 잇게 했다. 그러나 당시 서얼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므로, 사실상 양반 신분에서 탈락한다는 의미였다. 사후에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의 혼인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명문가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 이이의 이름은 16세기의 중세 한국어에서 성은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니'로, 이름인 '귀고리 이' 자는 현재는 사라진 반치음 이었고, /zi/로 읽혔다. 따라서 이이가 생존해 있던 당대에 그의 이름은 니ᅀᅵ로 적고 /ni.zi/로 발음하였다.

  • 평생 쇠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단순히 국법을 잘 지키는 모범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대부들이 몰래 쇠고기를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의 힘으로 지은 곡식을 먹고 또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옳겠는가'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진심으로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한 모양. 현대에도 이이의 제사상에는 쇠고기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 KDX-III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 2번함인 DDG 992의 함명은 그의 이름을 따 '율곡이이함'으로 명명되었다. 22사단은 원래 '뇌종부대'였지만 이후 부대명을 변경하기로 하고 명칭을 공모했는데 22가 '이이'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율곡'으로 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여 '율곡부대'가 되었다.

  •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이이는 다시 한 번 부상되는데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전면에 들고 나왔던 율곡사업 때문이었다. 이 시기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이슈가 되어서 수많은 논문이 쏟아지고 교과서에도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율곡 사업은 '율곡 비리 사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리의 온상으로 드러났고 마침내 부정부패의 상징이 되었다. 이 때문에 덕수 이씨 문중은 비리 사업에 율곡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조상 이름을 더럽힌다고 항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비리 사업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 신유학(新儒學)을 주창한 두웨이밍 교수는 한국의 천 원 지폐와 오천 원 지폐를 가지고 다니며 유학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링크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74년 KBS 일일연속사극 <이율곡>에서 탤런트 신구가 연기했다.

  • 게임 대항해시대 6에서 항해사로 등장한다. 스킬 중 구도장원공이 있다.

  • 대체역사물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2부 초반에 등장하며 어지간한 판서직에는 다 이름을 올린다. 일본에 대해서 강경책을 제시하는 모습도 보이나 얼마가지 않아 사망한다.

  • 웹소설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는 주인공이 조선으로 왔을 때 처음 만나며 실제 조상이라는 설정으로 둘의 얼굴이 서로 닮았다. 머나먼 후손인 주인공에게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형이라 불러서 주인공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있다. 유럽에 대한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주인공을 골아프게 하기도 하며 잉글랜드로 파견되는 사신단에 서장관으로 따라간다. 천재적인 두뇌덕에 외국어 마스터 기능이 탑재돼 사신단에 합류하자마자 중국어를 익혀 몇 주만에 중국어 구사 능력이 통역 가능할 정도로 올라가고 엿듣는 것만으로 영어를 마스터 해버리는 수준에 라틴어까지 탑재했다. 독자들은 잉글랜드에 유학을 퍼뜨릴 것인지에 대해 잔뜩 기대하는 중.[54] 잉글랜드에 머무르며 마키아벨리군주론에 빠져 번역 중이다. 이것으로 인해 조선에 일어날 변화도 기대되는 장면.

  • 대체역사 소설 근육조선에서는 근육이 크게 붙기 힘든 체질을 가졌다는 설정으로 등장하며, 그 대신 치밀한 근육 커팅을 통해 진짜 조각과도 같은 세밀한 근육을 도포 안에 감추고 있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를 본 2부 시점의 주인공 김성원은 자기도 모르게 '이소룡'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왔으며, 이를 들은 이이는 자신의 별호로 소룡을 칭했고 다른 이들에 의해 소룡식 입신체비라는 학풍으로 새로이 만들어졌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실록 초반을 이이를 중심으로 할 정도로 굉장히 비중이 크다. 기대승이 낙향한 후 이이가 조정의 이데올로그로 떠오르면서 첫 등장한다. 선조의 경연 자리에서 이준경과 대립한다. 이때 이준경이 “기대승보다 더 막가는 인물일세.”라며 이이를 깐다. 그리고 이준경이 유언을 남기고 죽자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그 말이 선해진다고 했는데 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라며 이준경을 맹비난 한다. 하지만 그의 예언이 얼마안가서 실현 되면서 이이는 당쟁의 격화를 막기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리고 동인이 이이에게 “공께서는 양쪽 다 옳다고 주장하시는데 세상에 둘 다 옳은 것이 어디있습니까?”라거 말하면서 이이를 거세게 비판한다. 이 일이 있는뒤 이이는 동인 강경파 이발과 서인 강경파 정철을 불러서 “두 분이 서로 싸우지만 않는다면 이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라고 이 둘에게 싸우지 말라며 경고하고 이발과 정철이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불안정한 평화가 지속되었다. 얼마 뒤 또다시 이발이 정인홍과 같이 서인의 핵심인물인 심의겸을 탄핵 하려하자 소식을 듣고 온 이이는 성혼, 김우옹과 함께 와서 심의겸 탄핵을 취하토록 하라고 요구한다. 그날 밤 이발이 이이의 집에 찾아와서 “사림이 공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공께서 의겸을 져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공이 의겸을 버린다면 동서를 막론하고 공을 따르게 되어 동서간의 화합을 이룰수 있을 것 인데, 공이 자꾸 의겸을 감싸려 하면 정인홍도 공을 떠나고 말 것 입니다.”라며 이이를 심의겸을 탄핵하려고 설득하자 이에 걱정이 피어난 이이는 어쩔수 없이 이를 수용했고 허나 초안은 이이가 직접 작성하겠다 하자 이발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 초안을 정인홍에게 건네며 다른건 절대 추가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정인홍은 이 기회에 서인 세력을 없애려고 윤두수, 윤근수, 정철이 심의겸과 사류를 맺었다고 쓰자 이에 분노한 이이가 “아니, 이리 나오면 어쩌자는거요? 정철은 심의겸의 당도 아니요. 그는 지조있는 선비인데 왜 그가 외척과 결탁했다 생각하는거요? 그리고 내가 일전에 정철을 크게 칭찬한 적이 있는데 오늘날 갑자기 내가 그를 비판하면 내 꼴이 뭐가 되겠소? 이 일은 그대가 반드시 책임을 지고 바로잡은 뒤 피혐해야 할 것이오. 자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소.”라며 정인홍에게 따지자 정인홍은 어쩔수 없이 이 일을 책임지고 낙향하자 동인 전체가 낙향하고 이이와 정철까지도 낙향하자 동서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선조가 이이를 중용하자 이이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빡시게 일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이가 실수를 하자 동인은 이이를 오국소인이라 깠고 결국 선조는 이이를 유배 보낸다. 이후 1584년 (선조 17년) 이이가 병으로 죽으면서 등장종료. 이이 사후 동인은 이이, 성혼, 정철을 서인으로 몰아세우며 서인을 대거 실각시킨다. 광해군일기에서 엑스트라로 등장한다. 여담으로 박시백정광필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시각이 거의 없는 인물이다. 이순신이 아니었으면 표지 인물로 했을 거라고 후기에 적었을 정도.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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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당공파(春塘公派) 13세 玉변 항렬. 춘당공파의 지파(支派) 중 율곡문성공파(栗谷文成公派)의 파조이다.[2] 음력 1536년 12월 26일. 한국은행권 오천원권에는 음력 생일에 맞춰 1536년생으로 표기한다.[3] 음력 1584년 1월 16일.[4]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5]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 라인으로 이어진다.[6] 이른바 사림의 대두 이후 임진왜란 이전 까지의 정치제도 현황을 살펴보면 전근대 행정력의 한계로 수취, 재분배 체계에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연산군이 국역 체제를 심각하게 이완시키면서 걷잡을수 없어졌지만 서로 근간이 되는 사상이 다른 정치세력이 대립하고 중간에서 절대 한쪽손만 들어주지 않는 국왕과 미묘한 눈치게임이 벌어져 문제의식은 있으되 실행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던 상황이 초유의 국난을 맞아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어 신속하게 실행된 것이다.[7]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이이에게는 따라서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8] 그래서 파주시 곳곳에 가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율곡로, 율곡수목원, 율곡습지공원 등 시설명에 호를 붙였다.[9] 사실 이는 조선 전기에 일반적인 결혼 형태였다. 아들은 사돈 집에 들어가고 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것.[10]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딸 신사임당을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인 이원수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평생 아내에게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한다.[11] '불씨(佛氏:부처님)가 그 제자에게,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별다르게 기묘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내달리는 길을 끊어 정신을 집중시켜 정(靜)함이 지극하여 허명(虛明)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할 뿐이다. 화두(話頭)를 두고 거기에 매달려 공부하게 하는데, 또 그 사람이 미리 이런 뜻을 알면 선(禪) 공부가 알뜰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런 금법(禁法)을 만들어서 속이는 것이다.'[12] '선생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인데, 곡산(谷山)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玄孫)이다. 그 아버지 노경린(盧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요,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나서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다.' - 출처: 행장, 김장생 저, 링크[13] 이걸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실제로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기보다 거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 숭유억불로 유명하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그 중에 법명을 가진 거사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루 술 3잔 설화로 유명한 손순효(칠휴거사).[14] 장유는 율곡을 직접 만났던 두 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게 사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링크[15] 조선 전기에 유학자들이 주변인의 사망에 충격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는건 아니었는데 세종의 경우에는 유학을 따랐지만 소헌왕후와 아들들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16] '지난날 남들이, 그대가 불교 서적을 읽고 꽤 중독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일전에 나를 찾아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이제 두 번 온 편지의 뜻이 또 이러함을 보니, 나는 그대가 도에 함께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L&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144B_0130_010_0050\링크[17] 장원 급제[18] 12위 급제[19]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에 학문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시험은 몇 달 동안 출제자들이 고심하여 제출한 문제였는데, 이이는 단 세 시간 만에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인 듯.[20] 과거시험은 보통 9세부터 일평생을 바쳐 공부해야 한 번 될까 말까한 시험으로 문과 평균 합격자 나이가 35세였다.[21]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 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 앞글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퇴계선생문집 제14권'에 퇴계가 율곡에게 답하는 2개의 편지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런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링크[22]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 다름.[23]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심의겸은 외척 나부랭이로 허명을 얻었고, 김효원은 중망받는 사림인데, 이이의 해결책에서 심의겸은 조금 가깝고, 김효원은 멀리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지방의 거리까지 측정해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곳으로 보내라는 것은 괴상하기 짝이 없다.[24] 율곡은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윤임파 사림을 취조한 일을 문제삼았다.[25] 류성룡이 좀 보수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작 류성룡은 이이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이이의 정책과 사상을 지지했던 서인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이후에 이이의 경장론과도 부합하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류성룡은 이이가 제안했던 대공수미법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는데, 이는 뒷날 대동법의 토대가 된다. 다만 이이 생전에는 이이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긴 류성룡도 마찬가지였다.[26] 흥미롭게도 허엽 - 허균 - 기자헌 등의 동인 인사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때 법명까지 받아가면서 불법을 공부했던 이이도 그렇고, 조선 성리학에 불교 냄새가 강한 것이 괜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성리학부터 주희가 유학에다 불교, 도교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27]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였다. 토끼라는 게 아니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열둘로 나눈 것인데, 이렇게 하면 묘지는 정동(正東)이 된다! 그야말로 타협 없는 동인이었다는 이야기다.[28] 이후의 그의 학통은 정계를 장악한 집단이 되면서 조선 후기 많은 잘못들을 저지르게 되지만, 이런 비판적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후학들이 주체적으로 선배들의 학설을 연구하여 보다 옳은 것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되기도 하였다.당장에 정몽주부터 퇴계까지의 성리학의 학통이 이어진다는 것에서는 남인과 동일했다. 따라서 퇴계는 서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선배로 위치할 수 있었다.[29] 지금의 인사동 관훈빌딩 언저리이다.[30] 물론 이 졸기는 선조수정실록에 있는 졸기로 서인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고 있는 졸기다. 참고로 원래 선조실록에는 그냥 졸하였다 한 줄만 쓰여져 있다. 다만 이이와 같은 명망 있는 신료의 죽음에 사관이 평을 안 했을리가 없고, 아무래도 선조실록을 편찬했던 북인이 이이와 대척점에 서있던 동인 계열 강경파였다는 점에서 일부러 졸기의 내용을 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31] 카를 마르크스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 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되었다.[32]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 분속설(理氣 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33] 이이의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성혼의 학문은 사위 윤황과 외손자 윤선거를 통해 계승된다. 윤선거는 김집을 사사하기도 했고 아들 윤증으로 학맥이 이어져 나가며 소론의 뿌리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34] 시급한 일, 혹은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패러다임과 같은 말이다.[35]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 써야한다는 뜻. 쉽게 말해 일을 해도 성과가 제대로 나도록 해야한다는 뜻이다.[36] 좌의정 심통원으로 심의겸의 작은 할아버지라는게 압권이다. 하지만 심의겸은 이를 일절 문제삼지 않았고 이것이 이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배경이라고도 한다.[37] 심지어 중간에 자리를 잠깐 옮긴 자리도 홍문관 부제학이었다.[38] 다만 이 사례에는 문제가 있는데, 선조실록은 굉장히 부실할 뿐더러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정철을 비판했다.[39] 율곡전서에는 십만 양병설이 본편에는 없고 부록에 들어가 있다. 물론 율곡전서 역시 김장생의 율곡행장보다는 편찬시기가 느리다.[40] 당시에도 군역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문제는 왈가왈부가 많았다. 후대로 가면서 개선을 꾀한다고는 하나 불합리하게 군역을 져야했던 대상들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던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에서조차 병역 징집 대상에서 누가 들어가고 누가 빠지고를 결정하는 일은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데..[41] 오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사망한 것이 1582년 6월이었고 노부나가의 家臣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압한 것이 1586년, 규슈 토벌이 1587년이었고 1592년에 조선 침공이 일어났다. 1583년에 왜국의 침략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42] 비단 누르하치가 아니더라도 조선과 국경을 맞닿은 건주 여진과 야인 여진에서 세력을 키우던 왕고, 왕올당 등의 여진 추장들은 1570~80년대 조선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43] 심지어 한참 후에는 또 다른 백인 민족들의 중국 침공으로 아편전쟁이 일어났으며, 해당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것은 한민족이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는 여러 원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44] 장자는 양자로 들이면 안 되지만 이 규정도 편법으로 무시했다. 지손 가문의 장자를 종가의 양자로 들이기가 성행했다.[45] 여기서 더 이어지는 버전도 있다. 구미호를 퇴치한 한 후 노파가 구미호의 시체가 있던 곳에 여우 석상이 있을테니 절대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이이는 이를 역시나 어긴다. 이이가 석상을 만지자 석상이 연기가 되어 이이에게 빨려 들어가는데, 놀란 이이가 노파에게 상담하니 구미호가 이이의 딸로 환생하여 재앙을 내리려 하니 나중에 태어날 딸을 죽여야지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며 마지막 충고를 한다. 그러나 이이는 딸을 죽일 수 없었고 그 대가로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고 끝을 맺는다.[46] 이야기의 다른 버전에 따르면 죽은 밤나무가 승려로 변한 호랑이에게 "죽은 밤나무는 밤나무가 아니더냐~!"라고 호통쳐서 호랑이가 달아났다고도 한다. 또다른 전승으로는 이원수가 심은 나무들 중 상수리나무가 1그루 섞여있었는데 상수리나무가 호랑이에게 "자신도 밤나무"라고 이야기하여 아이를 구하기 위해 상수리나무가 신통력을 발휘한것에 감명받은 호랑이가 이이를 포기하고 이원수에게 "아이를 잘 키우라"고 하고는 산으로 돌아갔다는 내용도 있다.[47] 당시 기준.[48]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초반에는 설설 기다가 최민식이 하정우가 같은 성씨며 항렬이 낮음을 알고 사실상 남과 다름없는 하정우에게 족보를 들먹이며 하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49]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본가로 돌아가는 형태[50] 남자의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서 혼례를 남자집에서 치르고 신혼을 보내는 형태[51] 현물로 거둬들이는 공물을 대신하여 로 걷는 제도. 조광조가 먼저 주장한 바 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52] 이이의 문묘 배향은 비교적 늦었으며 김장생, 김집, 송시열이 인조-효종-현종 시기에 정계를 장악한 서인들의 중심축을 형성하였기에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당장 송시열은 '宋子'라고 불렸으니 문묘 배향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53] 조식은 광해군 때 문묘 배향이 될 뻔하였으나 제자들의 어그로로 실패하였다. 자기 스승만 올리면 되는데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 배향된 것을 시비 걸며 남인과 서인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54] 실제 유교에서 강조하는 군주에 대한 충성 사상은 모든 군주에게 있어서 매력적이기에 가능할 법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