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오 3세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제221대 교황.
독보적이었을 정도로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그는 바오로 3세의 타계 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약 5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대부분을 자신의 향락에만 쏟아부었으며 정작 당시 시대적 소명이었던 가톨릭 개혁에는 소극적이었기에 가톨릭 역사상 최악의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다.
말년에 그는 통풍에 시달리다가 소화기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위암 혹은 식도암으로 추정된다.
2. 인노첸조 스캔들[편집]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그의 평판을 완전히 바닥 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일명 인노첸조 스캔들이다.
인노첸조 초치 델 몬테는 원래 파르마 지역의 거지였으나 율리오 3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후 그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당시 소년의 나이는 14세에서 17세 사이로 추정된다. 율리오 3세는 인노첸조에게 지나친 애정을 표했는데, 교황은 자신의 비혈연 조카에게 추기경 직책은 물론 몽생미셸 수도원를 포함한 수십 개의 수도원과 연계된 다수의 직책을 부여했다. 이러한 그의 노골적인 편애는 교회에서의 반발을 일으켰고 율리오 3세의 주변 인물들은 이에 대해 경고와 충언을 전했으나 교황은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인노첸조를 감쌌다. 이에 율리오 3세와 인노첸조는 "단순한 친척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가 아니냐?"는 소문도 무성했다.
한편 교황의 지지로 기세등등해진 인노첸조는 제멋대로 만행을 일삼았다. 율리오 3세의 타계 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결국 두 명의 남자를 살해하고, 이후에는 두 명의 여자를 강간하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그는 인맥을 동원해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려 했으나 끝내 암담한 말년을 보냈고 약 45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으며 교회 성직자들의 축복과 추도문도, 심지어 묘비도 없이 모두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채 매장되었다.
3. 평판[편집]
교황의 책무는 뒷전으로 두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만 시간을 쏟아부었던 율리오 3세는 살아생전에도 물론 후대에서도 최악의 교황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사람들은 그는 악랄하고 오만하며 머리가 이상하다며 새로운 교황에 대해 온갖 안 좋은 이야기들을 씁니다."
궁정 신하 및 시인 '지롤라모 무치오'의 편지 中
이러한 악명으로 인해 율리오 3세 이후로는 그 어떤 교황도 율리오라는 이름을 채택하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율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은 그가 마지막이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15:56:19에 나무위키 율리오 3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