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흥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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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초기
3.2. 부리에서의 대패
3.3. 중간의 우여곡절
3.4. 남송과 금나라의 전투
4. 융흥화의 체결
5. 평가
6. 영향
7. 문학 작품에서


1. 개요[편집]


隆興北伐, 1163~1164년 송 효종 시기 금나라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려고 했으나, 이현충[1]추굉연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하고 만 뒤 융흥화의로 끝을 맺는다.


2. 배경[편집]


금나라 해릉양왕이 1161년 부하들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고 송 고종은 태자 조신에게 양위한 뒤 태상황이 되었고, 조신은 송 효종으로 즉위했다. 송 효종은 즉위한 지 2달 만에 악비 사건을 해결하였고, 또한 진회가 모함한 또다른 억울한 사건을 처리했다. 20년 동안이나 관직에 물러나 있던 장준을 기용하였다. 장준은 효종이 즉위하자 강회선무사로 임명되어 입경하여 대계를 회복할 것을 함께 의논하였다. 융흥 원년 정월, 송 효종은 동시에 장준을 추밀사로 임명하고, 도독 강회군마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사호[2]를 우상, 진강백을 좌상으로 임명한다.

이 무렵 금나라에서는 완안옹이 금 세종으로 즉위한 뒤 반대 세력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송나라와 화해를 시도했으나 남송에 의해 거절당하자, 복산충의를 도원수로 보내어 황하 이남의 각 로의 금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하고 남송을 전쟁으로 제압하는 정책을 취한다. 1163년 봄, 대장 흘석렬지녕으로 하여금 영벽[3]에 진군함과 동시에 장준에게 서신을 보내 전쟁으로 위협한다.

융흥 원년 4월, 효종은 반대파의 참견을 막기 위해 곧바로 3성과 추밀원을 우회하여 직접 장준과 여러 장수들에게 북벌의 조령을 내리는 등 북벌이 본격화된다.


3. 경과[편집]



3.1. 초기[편집]


장준은 북벌의 조서를 받은 후 80,000명의 병력을 이동시켜 20만이라고 불렀고, 한 부대는 이현충이 영벽을 공격하고, 다른 한 부대는 추굉연이 지휘하여 홍현[4]을 공격했다.

5월, 이현충은 무사히 영벽을 함락시켰지만, 추굉연은 홍현을 오랫동안 공격하여 항복하지 않았고, 이현충은 결국 영벽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홍현의 수장은 저항을 포기했다. 추굉연은 홍현의 전공이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현충을 원망했다. 이현충은 승세를 타고 숙주[5]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지만 추굉연은 움직이지 않았다.이현충은 군대를 이끌고 혼자 숙주를 함락하고, 성이 무너지게 되자 추굉연 부대가 전투에 투입된다.

숙주를 함락시킨 효종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이현충과 추굉연의 갈등은 격화된다. 효종은 이현충을 회남, 경동, 하북 초무사로 승진시키고 추굉연을 부사로 삼았으나, 그는 이하를 치사하고 장준에게 이현충의 절제를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 그리고 장준은 추굉연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후 이현충과 추굉연은 숙주부고 하사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였는데, 당시 남송군은 모두 배부르고 잘난 체하는 건장한 장수들이었고, 한번 부추기면 인심이 바로 흔들렸다.


3.2. 부리에서의 대패[편집]


한편 금나라의 흘석렬지녕은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이현충에게 패한다. 그러나 금군 10만의 주력이 곧 도착하여 이현충이 힘껏 싸운 반면 추굉연은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평하였다.

이 더운 날에 부채를 흔들어도 시원치 않은데, 하물며 대일 아래에서 갑옷을 입고 고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군심은 즉시 흩어지고 투지는 회복되지 않았다.
밤이 되자, 추굉연의 중부군 통제권인 주굉은 스스로 소란을 피우며 금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호언했고, 송군은 결국 싸우지 않고 스스로 무너졌다. 금군은 허공을 타고 성을 공격했고, 이현충은 2,000여 명의 적을 무찔렀으나 남송군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다.

하늘이 중원을 평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방해합니까!

그 뒤 송군의 전선이 붕괴되고 군수 장비가 거의 사라졌지만, 다행히 금군이 내막을 모르고 섣불리 추격하지 않아 송군은 회수 일선에 서게 된다.


3.3. 중간의 우여곡절[편집]


부리에서의 대패는 효종의 야망에 큰 타격을 입히고, 그는 전쟁과 화의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부리 전투에서의 대패 후 장준을 강회선무사로 강등하고 양회 도독으로 임명하여 금군의 남하를 막는다. 6월에 효종은 주화파 대표인 탕사퇴를 물러나게 한 뒤 7월에 우상을 맡긴다. 동시에 주전파 대신 장도, 신차응, 왕십붕 등이 잇따라 출조했다. 그 해 8월 송 효종은 장준을 도독강회군마로 복직시키고 탕사퇴의 건의를 받아들여 회서안무사간사 노중현을 금나라 진영으로 보내 화해를 논의하게 한다.

11월, 노중현은 화해의 조건을 가져왔는데, 송나라의 황제와 금나라의 황제는 숙질 관계로 바뀌었고, 송나라는 점령한 해, 사, 당, 등 4개 주를 반환하며, 송에 항복한 금나라 사람들을 반환하고, 소흥 말기의 세화를 보충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남송 쪽에서는 대전과 화해가 격렬하게 벌어졌고, 결국 효종은 화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2월에 진강백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탕사퇴는 좌상으로, 장준은 우상으로 퇴진했다.

융흥 2년 정월, 금나라 측에서 다시 편지를 보내왔지만, 대가가 너무 높고 어기가 너무 컸다. 효종은 주전파의 부추김에 노중현을 사주를 허가했다는 죄목으로 제수하고 천주를 편제하고 호방을 금영으로 보내 송나라가 사주를 돌려주지 않을 것을 알리자 화의가 교착 상태에 빠졌다.


3.4. 남송과 금나라의 전투[편집]


효종은 장준에게 양회 지역을 순시하게 하고, 총력전을 준비하여 금군과 자웅을 겨루게 했다. 그러나 탕사퇴와 그의 동료들은 장준을 용병발호라고 비난했다. 효종은 결국 4월에 장준을 불러 파상하게 한다. 4개월 후, 장준은 수도를 떠나던 중 사망하자 효종은 주화파 쪽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6월, 송 효종은 호북경서제치사 우윤문에게 당과 등 두 주를 포기하라고 명령했고, 우윤문은 집행을 거부하여 파직되어 평강부로 좌천된다. 7월, 해, 사 두개의 주에서 송군이 철수했다. 9월에 효종은 탕사퇴를 도독강회군마, 양존중[6]을 부도독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탕사퇴를 돕도록 명했다.

10월에 복산충의는 군대를 지휘하여 남하하여 송군의 양회 방어선을 쉽게 돌파했다. 11월 초주, 호주, 추주가 잇달아 함락되고 장강 방어선이 다시 급박해지자 탕사퇴는 양회를 포기하고 장강으로 물러나 가능한 한 빨리 금과의 화의를 주장했다.


4. 융흥화의 체결[편집]


송 효종은 이때 금나라에서 제의한 화해의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는 말을 듣고 금에 대한 적개심이 강해졌다.

나라가 망하여도 굴복하지 않겠다.

11월, 효종은 탕사퇴를 파면하고 영주로 좌천하여 거처를 정하였고, 탕사퇴가 퇴위하자 진백강은 다시 좌상에 임명되어 대국을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송군이 계속 열세를 보이자 효종은 어쩔 수 없이 왕진을 사신으로 보내 복산충의와 화해를 나누게 했다. 금나라는 전박화 목적이 거의 달성된 것을 보고 공격을 멈추고 다시 화해를 시작했다.

융흥 2년 말, 남송과 금나라는 화의에 이르렀다. 주요 조항은 송나라와 금나라는 각각 삼촌과 조카의 나라로, '세공'은 '세화'로, 은견사는 각각 20만 두 필로, 남송은 해, 사, 당, 등, 상, 진 6주를 포기하고 양측 경계는 소흥화의당시의 원상을 회복하고 양측은 전쟁 포로를 교환하며 반역자는 그 안에 없었다.

남송은 소흥 화의에 비해 융흥 화의에서 위상이 개선되었다. 황제는 더 이상 신하가 되지 않고 세공이 세화로 바뀌면서 수량이 줄어든 것이 금나라에 있어 가장 큰 양보였고, 남송은 채석기 전투 이후 수복한 해와 사 등 6주를 모두 돌려주는 것이 가장 큰 양보였다.


5. 평가[편집]


송 효종은 태상황 조구와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융흥북벌을 일으켰고, 송군은 몇 차례의 소규모 승리를 거둔 뒤 숙주에서 대패했다.

금나라에 대한 두 번의 중요한 전투에서 송 효종은 조치를 잘못하여 두 번 모두 패배했다. 섬서 전투에서 사호의 주장을 따르고 우윤문의 간언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섬서 지역을 포기하여 오린은 크게 패하고 국지적 전략적 우위를 상실했다. 부리 전투에서 송 효종은 친정하지도 않고 건강독전에도 나서지 않고 황급히 북벌하여 악전고투할 준비가 되지 않아 이현충이 패배하고 송군이 먼저 승리하고 후패하였다. 부리에서의 패배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송군을 패배시킨 장본인 추굉연을 죽이지 않고 군위가 서지 않았다. 금 세종을 상대로 한 두 번의 중요한 외교게임에서 송 효종은 임무가 불분명하고 의지가 약해 두 번의 외교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부리에서의 패배 후 효종은 금과의 화의를 의제로 올렸다. 금군의 강한 압력 앞에서 남송은 금과 융흥화의를 체결했다. 남송은 신하로서의 불리함을 벗어났지만 외교의례에서는 여전히 열세였고, 송효종은 기립하여 금나라의 국서를 받겠다는 것이 효종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융흥 북벌에서 대간, 황권, 상권이 서로 영향을 미쳤고 대간 그룹은 황권 아래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대간에게 주어진 권력은 황권의 유도체일 뿐 최종 결정권은 황권이었고, 악비평반 과정에서 효종은 자신의 힘으로 악비를 평정하여 효종의 강력한 황권독단을 볼 수 있었다. 융흥북벌이라는 사건이 계속 추진되는 각 단계에서 대간 집단이 보여준 정치력과 효종 자신의 정치행태가 뚜렷하게 인식되고, 송 효종 시기의 정치특징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며, 결국 효종의 황권독단으로 대간 집단의 역할과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특히 융흥북벌에서 사호는 남송 효종 초기에 금과의 화의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다. 덕순 전투에서 사호는 남송의 자진 철군을 주장하여 송군이 금군에게 추격당하여 큰 손실을 입었지만, 사호는 철군에 대하여 구차하게 안일을 도모하고 진취하지 않고 다른 북벌 노선을 취하여 북벌의 전과를 확대하려는 것은 군사를 몰라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였다. 사호가 융흥북벌을 반대한다고 해서 회복에 방해가 되는 항복파도 아닌 송과 금 양국의 형세를 면밀히 분석한 후 내린 실용적인 선택이며, 그 의도는 남송을 일시적으로 실력이 부진한 상황에서 평화를 틈타 자신을 성장시켜 향후 북벌에 대비하려는 사호의 선자치가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6. 영향[편집]


융흥북벌 후의 융흥화의는 새로운 정치적 지연에 기초한 힘의 균형이었다. 금나라의 양보는 정치적 불안정, 송나라의 타협은 전쟁터에서의 무기력이었다. 이 점을 떠나서 공론화의 평등이나 굴욕의 여부는 큰 의미가 없었다.

융흥화의를 거쳐 남송과 금의 관계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고, 송 영종 시기 개희북벌 시기가 되어서야 이러한 지정학적 균형상태를 다시 깨뜨리려 했다.

송 효종은 화의를 반대하고, 이에 한림학사를 선택했다. 소흥과 융흥 시대에 한림학사는 남송과 금나라 간 전투에 대한 태도가 격렬하게 분화되어 룽싱의 북벌과 화의 과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효종의 적지 않은 잠저 출신 관료들이 의식을 회복하여 융흥북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융흥북벌이 실패하자 항복파는 다시 권력을 잡았고, 장준의 북벌을 지지했던 대신들이 잇따라 좌천되자 육유는 진강에서 융흥부[7]로 옮겨 통판을 맡았다. 그 후 남송은 영종 시기에 개희북벌의 실패를 겪었고, 조정은 더욱 구차하게 되었다. 일단 타협과 굴욕으로 구차한 평안을 얻으면, 고관과 귀인은 '서호수 한 숟가락, 강을 건너와 백 년의 노래와 춤, 백 년의 만취'에 탐닉한다. 조야의 문맥이 희무념하고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위해 보국할 문이 없어 오히려 참소를 당해 전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7. 문학 작품에서[편집]


  • 장효상의 《육주가두》는 송 효종 융흥 원년(1163년)에 쓰였다. 배경은 이렇다. 당시 남송 북벌군이 부리에서 패하고 조정에서 주화파 무리가 다시 득세했다. 그리하여 금나라의 편자와 왕래를 하게 되었고, 회복 계획은 또 물거품이 되었다. 이때 장효상은 건강에서 유수를 맡고 있었는데, 이를 듣고 분개하여 당시 주전파의 지도자였던 장준이 연회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쓰게 되었다.
  • 육유의 《서분》, 《관산월》에서 이를 다루었다.
  • 유과의 《심원춘·기가헌승지》에서 이를 다루었다.
  • 신기질의 《영우락·경우북고정회고》에서 이에 관계된 구절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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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이름은 이세보였다.[2] 남송 권신인 사미원의 아버지이다.[3] 지금의 안휘성 지역[4] 지금의 안휘성 사현[5] 지금의 안휘성 숙주[6] 처음에는 양기중이었으나, 송 고종으로부터 '존중'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7] 지금의 강서성 남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