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고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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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31대 왕후
恩古夫人 | 은고부인

출생
(음력)

595년 전후
백제
사망
(음력)

660년 이후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31대 어륙
641년 3월 ~ 660년 7월 18일 (19년 4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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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고(恩古)
주군
의자왕
자녀
부여융, 부여태, 부여효, 부여풍

1. 개요
2. 생애
3. 의문점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백제왕 의자(義慈), 그의 처 은고(恩古), 그 아들 융(隆) 등, 그 신하 좌평 천복(千福)[1]

, 국변성(國辨成), 손등(孫登) 등 모두 50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소장군(蘇將軍, 소정방)에게 사로잡혀 당(唐)에 보내졌다. 아마도 이것은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징험일 것이다.[2]

- 《일본서기》 권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백제 의자왕의 처. 역사상 유일하게 기록된 의자왕의 부인이다.


2. 생애[편집]


은고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가 유일한데,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소정방이 의자왕과 그의 처 은고,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부여융, 부여연 및 대신과 장수 88인, 백성 12,087명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이후 그녀의 삶은 알 길이 없다.

의자왕당나라로 끌려가 당 고종에게 질책을 듣고 사면된 뒤에 얼마 뒤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이국에서 남편을 잃고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당 고종의자왕을 사면했으니 그에 준하여 부여융처럼 당나라에서 평생 그럭저럭 먹고 살게는 해줬을지도 모르지만.


3. 의문점[편집]


《삼국사기》에서는 '대부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나, 소정방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문>에도 '안으로는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으니 형벌이 미치는 곳은 오직 충량에 있었다'라는 기록이 전하며 《일본서기》의 다른 부분인 <제명기> 6년 7월조에 보면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하시카시(대부인, 大夫人)가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횡탈하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를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자초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인이 쓴 대당평백제국비문은 백제를 적으로서 멸망시킨 관점이므로 백제가 망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멸망 과정을 왜곡할 수도 있지만, 당시 백제와 우호 관계였던 일본이 비슷한 기록을 남겼으니, 두 나라의 기록이 교차검증된다. 즉 백제 멸망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에 이 '대부인(=요사스러운 부인)'의 존재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걸로 보인다.

이 대부인은 의자왕 후기에 파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일찌감치 장남 부여융을 태자로 세운 바 있었으나 650년대 말에 갑자기 태자를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성충과 흥수 등의 신료들을 내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본다면 대부인이 자신의 아들인 부여효를 태자로 세웠으며 이 과정에서 반발한 성충흥수 등의 신료들을 내치는데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과연 은고 = 대부인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왕건도 그렇듯 왕의 부인이 두 명 이상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일본서기》에서 은고를 의자왕의 라고 기록한 걸로 보면 은고는 의자왕의 후궁이 아니라 정실 왕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至庚申年七月。百濟遣使奏言。大唐。新羅幷力伐我 旣以義慈王。々[3]

后。太子爲虜而去

경신년 7월에 이르러 백제가 사자를 보내, 당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여 이미 의자왕, 왕후, 태자를 포로로 하여 갔다고 아뢰었다.

- 《일본서기》 <제명 천황> 6년, 660


의자왕과 같이 잡혀간 의자왕의 처는 은고밖에 없으니 은고가 의자왕의 왕후가 된다. '후(后)'라는 글자는 왕의 부인들 중 '정실 부인'을 나타내는 의미다.

《한서》 <왕망전>에 따르면 '대부인(大夫人)'은 정실 부인, 그것도 '태자를 둔 부인'을 말한다. 의자왕의 정실 부인은 은고이니까 대부인(大夫人), 즉 임금의 대부인은 은고가 된다. 거기에다 대부인은 태자를 두었다는 뜻도 포함되었으니 은고는 태자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부여효가 은고의 소생이고, 은고가 바로 대부인으로서 백제 멸망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은고가 과연 백제 멸망에 기여한 대부인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일본서기》가 은고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되는데 만약 '은고 = 대부인'이 성립된다면 은고가 잡혀가는 부분에 대해서 뭔가 평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은고에 대해서는 그저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전부다. 그리고 대부인을 중국에서 태자의 모친이라는 의미로 썼다고 해서 백제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은고 = 대부인'이 성립하지만 《일본서기》나 <대당평백제국비문>에 기록된 대로 그녀가 과연 요녀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흔히 의자왕이 즉위하고, 이듬해인 642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나 이에는 이론이 있다. 학자들은 이 친위 쿠데타의 발생 시점이 의자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642년이 아니라 의자왕 15년인 655년이라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의자왕의 친위 쿠데타가 기록된 시점이 《일본서기》에서는 642년 고교쿠 덴노의 등극 시점으로 되어있으나, 고교쿠 덴노는 잠시 물러났다가 655년에 다시 사이메이 덴노라는 이름으로 재즉위하는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이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삼국사기》를 보더라도 의자왕 15년 이전과 이후의 기록에 차이가 보인다. 의자왕 15년 이전에는 성군의 모습이던 의자왕이 15년 이후로는 놀자판 독선적인 폭군의 모습으로 돌변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은고는 의자왕의 친위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의자왕이 655년[4] 무왕의 부인인 태후가 죽은 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되었으며, 그 전까지 집권 세력이었던 좌평 성충, 흥수 등이 내쳐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군대부인이 요녀라고 기록된 것은 고대 동북아의 관습상 왕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왕을 감히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못해서 왕 본인 대신 왕의 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들을 소인배, 요망한 것들로 비난하는 것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의자왕이 기존의 귀족 세력들을 내치면서 은고를 위시로 신진 세력들을 친위 세력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했지만 이 과정에서 은고 세력이 기존 귀족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기존 귀족들이 은고를 요망한 대부인으로 폄하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4. 대중매체[편집]


1969년 김성한의 소설 《요하》에 등장했다. 고증을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 작가가 사료 수집 과정에서 찾아낸 인물. 단순 요녀로 묘사했다.

은고가 처음 사극에 등장한것은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로, 여기서는 최수지가 은고로 출연했다. 의자왕의 정실 왕후로서 의자왕의 사랑을 받았지만 병으로 죽게 되는데 신라에서 은고와 똑같이 생긴 금화라는 여성을 스파이로 백제에 보내 의자왕을 미인계로 홀리게 하면서 백제가 망국으로 치닫는다는 전개로 나온다.

SBS 대하사극 연개소문에서는 백제의 인물로써 등장한다. 의자왕과 함께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쳐놓은 요부로써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났다. 극중에서 항상 연회에서 의자왕과 함께 즐기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백제가 패망하자 나당 연합군의 백제 패망 승전 자축 파티에서 소정방의 명령에 의해 춤을 추고 소정방에게 능욕을 당하는 등 결말이 나빴고 결국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이후에 MBC 드라마 계백에서 다시 등장했다. 여기서는 송지효가 은고로 출연. 계백을 사모했으나 의자왕이 그녀를 가로챈 뒤 의자왕에게 원한을 품고, 유일하게 남은 길은 권력만을 탐하기 시작해 요녀로 변신하여 백제를 쥐고 흔들면서 심지어는 적장 김유신에게 기밀을 누설할 정도였다고 묘사된다. 막판에 가서야 다시 백제를 위해 애를 쓰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괴작 천년지애에서는 은고에게서 모티브를 딴 듯한 금화라는 캐릭터가 출연한다. 의자왕이 총애하는 후궁 격의 여인으로, 의자왕의 딸 부여주의 언급에 의하면 현명한 왕을 홀리는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인이라 한다. 사실은 신라 측이 보낸 첩자로, 백제가 멸망하는 날 나당 연합군에 의해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다 목숨을 잃는다. 참고로 금화 역은 김사랑이 맡았는데, 당시의 성유리쌍벽을 이루는 발연기인 데다가 심지어 죽을 당시 목숨을 구걸하는 대사조차도 위엄 없이 현대 말투로 처리하면서 극의 완성도를 떨어트렸다.

[1] 사택씨이다.[2] 마지막 문장은 은고와 그 파벌이 백제 말기에 군사적 충돌, 숙청, 전횡을 일삼았음을 암시하는 글귀라고도 한다. 다만 이 경우 친위 쿠데타의 피해자로 여겨지는 부여융이 친위 세력과 이권공동체로 취급된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3] 々는 앞 글자의 반복이란 뜻이니 王.[4] 기록에는 642년이라고도 하는데 정황상 655년의 일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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