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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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1차 침공
3.2. 2차 침공
4. 결과


1. 개요[편집]


乙卯倭變

조선 명종 10년, 왜구가 침입하여 1555년 6월 9일(음력 5월 11일)부터 7월 25일(음력 6월 27일)까지 현 전라남도에 있었던 여러 군현들을 유린하고 제주도를 약탈거점으로 삼고자 공격한 사건.

왜선 70척에 5~7천명 규모로, 당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왜구의 침입이었다. 을묘왜변과 니탕개의 난(1583년)은 각각 당시에는 건국 이래 최대의 외침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전훈은 37년 뒤 더욱 큰 규모로 발발한 임진왜란 초기의 대패에도 불구 조선군을 지탱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2. 배경[편집]



세종 때의 계해약조를 시작으로[1] 조선왜구에게 세견선과 쌀과 같은 물자를 주고 달래는 계약을 맺어왔으나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과 같이 계약을 자꾸 어기자 중종 때에 임신약조를[2] 명종 때에 정미약조를 맺어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이는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이에 왜구는 불만을 품고는 7천의 병력과 군선 70척으로 1555년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하였다.


3. 경과[편집]



3.1. 1차 침공[편집]


1555년 5월 16일(음력), 전라도 관찰사 김주(金澍)로부터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達梁)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워 버렸고 결국 성이 포위되고 말았다.'는 내용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왔다. 기록에 의하면 왜구들이 해안가로 상륙해서 행패를 부리자,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세린(李世麟)이 즉각 병사(兵使) 원적(元績)에게 이를 알려서 원적이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그를 구원하려고 달량으로 달려갔다가 포위되었다고 한다.

결국 한온은 전사하고 남은 조선군 병력은 달량에서 버티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왜구에게 화친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점령당하고 그렇게 해안가 일대는 순식간에 장악당하고 만다. 한온을 대신해서 온 강진현은 대군을 이끌면서도 겁먹어 꽁무니를 빼고는 조정에는 "부하들이 명령을 듣지 않사옵니다."라고 거짓 장계를 올리고 이에 기세가 오른 왜군이 "이 길로 걍 한성까지 가자!"라고 하는데 이때 이윤경이준경 형제가 오면서 전세가 급변한다.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준비를 하는데 그런데도 겁먹어하는 남치근[3]에게 호통을 치는 등 준비를 잘 갖춰 적을 물리친다만,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하고 적은 유유히 사라지고 만다. 이유는 그렇게 이겼는데도 인근의 장군들이 왜구를 무서워서 나올 궁리를 하지 않아서였다. 결국 왜구들을 완전히 격멸시키지는 못한 셈이다.

3.2. 2차 침공[편집]



1차에서 전라도를 약탈유린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왜구는 같은 해 6월 1차때와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도를 침략했다. 1차의 단순한 약탈이라는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왜냐면 이 시기의 왜구는 중국인 왕직이 대두목 중 하나로 참여하는 등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제주도-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4] 절해고도인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던 왜구는 1555년 6월 1,000여 명이 선박 60여 척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하였다. 이후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제주민과 왜구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5]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왜구와 치열하게 싸웠고 끝내 격퇴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의 이른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공이 컸다. 이에 명종은 김수문에게 벼슬을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6] 그리고 치마돌격대[7]에게는 건공장군 벼슬이 제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수문장 교대식과 무예 24기 공연을 겸한 연극《김수문 목사와 결사대》를 만들어 혹서기를 제외한 매주 일요일 오후 제주목관아에서 공연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여담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전투는 74명으로 13배가 넘는 1000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첩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척계광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 적은 없었다.


4. 결과[편집]


왜구들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조선 조정은 이전과 다른 대규모 침략에 충격을 받았기에 이를 대비하고자 제승방략을 도입하고 비변사를 상설화하였다. 특히 3정승과 공조 판서를 제외한 5조 판서, 각 군영 대장, 국경 지방 관찰사, 강화 유수 등이 모두 참석한 비변사는 이후 권한이 점점 막강해져 세도 정치 때에는 다른 모든 기구를 초월한 강력한 부서가 되어버렸다.

이 일은 임진왜란 직전의 작계 기준이 되었다. 을묘왜변 당시의 왜구의 병력 숫자는 약 5,000명~7,000명이었는데 조선 조정은 "또 왜구들이 노략질할 거 같다고? 그럼 일단 10,000여 명 정도 방어할 정도의 대비를 해야겠다."라고 해서 삼남 전체에 걸쳐 전면적인 방비 태세를 갖췄다. 물론 을묘왜변 당시에는 일본이 전국시대였기에 전국의 다이묘들끼리 서로 싸움을 벌이는 탓에 수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워 이만하면 적절한 수준이었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통일된 상태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대로 각오하고 군사력을 동원한 결과, 조선 조정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은 약 200,000명의 일본군[8]이 침략함에 따라 최대 50,000명 정도의 침공만을 상정했던 당시 조선의 방비 태세는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다.[9]

이때 제주도가 대대적으로 공격받은 경험을 잊지 않은 조선은 임진왜란 때 능력있는 장수 이경록[10] 지휘 하에 제주도에 상당한 육, 수군 병력을 주둔시켜 두었으나, 막상 임진왜란 때는 제주도가 공격받지 않았기에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경록이 조정에 지원병을 보내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비도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다만 물자 지원은 받아들였다.

[1] 대마도 정벌 이후 줄긴 했는데 문제는 이 왜구들의 노략질이 먹고 살려고 하는 행위인지라 무조건 막으면 또 날뛸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삼포 개항, 삼포에 왜관을 두어 거주 허용(단 왜관 하나당 60명씩만), 세견선 50척 허용, 세사미주 200석 하사, 고초도에서의 어업 행위를 승인하에 허용.[2] 세견선과 세사미두 절반으로 축소, 삼포 거주 불허, 제포로 오는 직로 외의 배는 전부 왜구로 간주.[3] 임꺽정 때문에 난리가 났을 때 조정에서 백성들 위로하라고 보냈더니 가혹한 처벌만 일삼은 인물이다.[4] 이미 1552년 7월에 왜구는 제주 동쪽 천미포에 상륙해 2일 동안 조선군과 교전을 벌여 왜구를 격퇴하기는 했지만(천미포 왜란) 당시 제주목사 김충렬(金忠烈:1550~1552)과 정의현감 김인(金仁)은 이들을 막지 못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고 제주목사와 정의현감으로는 남치근(南致勤:106대, 1552~1555)과 신지상(愼之祥)이 부임하였다. # 여담으로 제주목사 남치근은 1554년 5월에 천미포 인근에 정박한 왜인 10명 가운데 한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당시 비변사에서는 "때맞추어 추격하여서 한 놈을 쏘아 맞추어 참획하였으니 그 공로를 논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남치근에 대한 포상을 주장했지만, 명종은 "우리 변방을 침범했다면 적으로 간주한다고는 했지만, 이미 가버렸으면 굳이 끝까지 쫓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저 사람들이 처음부터 도적질하려던 게 아니라 항해하다 급해서 물 좀 얻어가려고 잠깐 배에서 내린 걸 가지고 적병인 줄 알고 죽였다면 그게 사람의 의리로 볼 때 가당한 일이겠어?"라는 반응을 보였고, 사관도 "지금 제주의 왜는 우리 국경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 그냥 표류해온 힘없는 한 척의 상선에 불과한 것이고, 관할 구역 안에서 이상한 배를 발견하면 변방 장수로써는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쫓아버리는 것이 맞고, 그네들이 상륙해서 실제 교전이 일어났다고 한들 그건 변방 장수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공이랍시고 포상을 주네 마네 하냐? 이 따위 공을 가지고 '관례'라면서 포상을 주면, 정말로 큰 공을 세운 사람한테는 뭘로 포상할 건데?"라고 평하고 있다. # [5] 107대 제주목사(1555~1557)이다.[6] 당시 비단은 고급 옷감이라서 비단옷을 하사한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큰 영광이었다.[7] 정로위 김직손(제주목사 김수문과는 6촌 재종형제 지간으로 김수문이 목사로 제주목에 부임할 때에 같이 파견되었다), 갑사 김성조·이희준, 보인 문시봉[8] 아무리 조선과 일본이 비교적 가깝다 하더라도 전근대 전쟁에서 20만에 육박한 병력들을 상륙시키는 것 자체가 당대 상식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정신나간 규모다. 조선보다 큰 나라인 명나라도 몽골과 청나라의 침략군이 많아봐야 10만인데도 황제가 사로잡히며 수도가 공격당할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9] 다만 상정했던 규모를 훨씬 넘는 대규모 침공에 결과적으로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이 짠 작계는 전근대국가 답지 않게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여기에 명나라의 지원이 있어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게 되어 일본군도 초기와 달리 더는 조선군을 압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예로 임진년 겨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나온 일본군 잔존 병력은 고작 7만이었다. 한 마디로 반년 만에 침공군 15만명 중 8만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어 전열에서 이탈한 것이다.[10] 이순신이 북방에서 근무할 때 벌어진 녹둔도 전투 당시 이순신과 함께 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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