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반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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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uyễn Văn Cốc (1943~)
1. 소개
2. 혁명가족 출신
3. 조종 유학과 참전
4. 첫 격추, 그리고 로빈 올즈와의 대결
5. 1967년 하반기의 격추 행진
6. 마지막 격추와 그 후
7. 북베트남의 에이스들


1. 소개[편집]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상공은 가히 미군 항공력의 독무대였다. 북베트남 상공에서 영웅적인 공중전을 치러낸 미 공군로빈 올즈 대령이나 스티브 리치, 미 해군랜디 커닝햄 같은 에이스의 활약도 눈부셨지만, 그렇다고 북베트남 공군이 조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미군기들에게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베트남 상공을 누비고 다니던 미군기를 9대나 격추한 응우옌반꼭은 이 전쟁을 통틀어 가장 많은 격추 스코어를 올린 에이스이며, 북베트남 공군에는 그 말고도 여러 명의 에이스를 배출했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베트남 공군(Không quân Nhân dân Việt Nam)이 배출한 최고 에이스는 호찌민이 직접 만나 훈장을 달아주며 크게 치하한 응우옌반꼭 대위였다.

2. 혁명가족 출신[편집]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조종사는 최고의 엘리트이며, 그중에서도 전투조종사가 되려면 실력도 뛰어나야 하지만 출신 성분 또한 매우 중요했다. 그런 면에서, 하노이 북서쪽 지방인 박장성(Bắc Giang)의 비엣옌(Việt Yên)에서 1943년 12월에 태어난 응우옌반꼭의 집안은 타고난 애국자이자 혁명 가족이었다. 그의 아버지 응우옌반바이는 프랑스 항전 당시 고장의 지방 유격대를 이끌던 대장이었으나,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어 우물 속에 던져져 죽고 말았다. 아버지와 함께 반군 활동을 하던 삼촌 또한 프랑스인들에게 사살되었다. 아버지와 삼촌을 침략자들에게 잃고 고향을 떠나게 된 응우옌반꼭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양 압제자들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자랐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배경에서 성장한 꼭은 고등학교를 졸업[2]하자마자 1961년 공군에 자원 입대한다. 그가 이사왔던 집은 바로 추 공군기지 부근이어서 어린 꼭은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군용기들을 보면서 비행을 동경해왔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3. 조종 유학과 참전[편집]


엄격한 시험을 거쳐 하이퐁 부근의 깟비 공군기지[3]에 있는 비행학교에 입교한 그는 졸업한 후 120명의 동기들과 함께 소련에 조종 유학생으로 파견되어 크라스노다르 현지에서 과거 독소전을 치르고 한반도에도 파견되었던 소련 공군베테랑 조종사들에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되고 힘든 훈련을 받았다. 베트남에서도 고르고 골라 선발하여 보낸 120명의 조종 훈련생 중에서 겨우 23명만이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혹독한 코스를 통과하고 교육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 중에는 응우옌반꼭도 끼어 있었다.

돌아온 그는 공군의 정예부대인 붉은 별 사단(Đoàn không quân Sao Đỏ)에 배속되어 MiG-17을 몰며 탁월한 조종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정예 파일럿으로 선정된 그는 최신예 요격기인 MiG-21의 기종 전환 훈련을 받으러 다시 소련으로 보내졌다. 꼭의 두 번째 유학 생활은 1년이나 되었고, 이번에도 무사히 모든 과정을 수료한 그는 6명의 유학생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1965년 12월부터 베트남 공군 최초의 MiG-21 운용부대인 제921전투기연대(Trung đoàn 921)에서 조종사이자 교관을 겸한 생활을 하던 그는 연대가 실전 배치 단계에 돌입하면서 마침내 세계최강이라는 미 공군에 대항하여 요격 작전을 수행해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게 된다.

실제로 꼭은 첫 격추 전과를 올릴 때까지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1967년 1월 2일, 전설적인 제8전투비행단장 로빈 올즈 대령이 성가신 MiG-21을 소탕하기 위해 볼로 작전을 실시했을 때 함정에 빠진 921연대 조종사 중에는 그도 끼어 있었다. 동료기가 다섯(미 공군 격추 전과 주장은 7기)이나 격추당하는 와중에 꼭은 간신히 빠져나와 기지로 복귀할 수 있었고, 나흘 뒤 921연대가 다시 비슷한 덫에 걸려 MiG-21 2기를 손실했을 때 역시 현장에 있다가 AIM-9 미사일을 세 발이나 피해내고서야 이탈할 수 있었다.

4. 첫 격추, 그리고 로빈 올즈와의 대결[편집]


미 공군의 유인 전술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921연대는 3개월 이상 전열에서 물러나 재편성과 전술 개발에 몰두해야 했다. 그리고 연대가 전선에 복귀한 1967년 4월 말, 드디어 응우옌반꼭은 첫 격추전과를 올리게 된다. 롤링썬더 작전이 계속되던 1967년 4월 30일 편대장 응우옌 응옥 도(Nguyen Ngoc Do)[4]의 윙맨으로 비행하던 그는 소련군의 방공 교리에 따라 월맹군 지상 레이더의 통제 하에 미 공군 F-105 썬더치프 전폭기 편대를 공격했다. 2500m 상공에서 우측 30도 아래를 날아가는 썬더치프 12대를 발견한 둘은 그대로 후상방에서 강하하며 R-3S 아톨 공대공 미사일을 사격하여 각기 한 대 씩을 격추시켰다. 그의 첫 격추이자, 921연대가 전투에 다시 투입된 후 두 번째로 달성한 격추전과였다.

그러나 미 공군은 여전히 무시무시한 상대였으며, 꼭은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그로부터 겨우 나흘 뒤인 1967년 5월 4일, 응우옌반꼭은 하노이 일대의 목표를 타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미 공군 공격편대군을 요격하기 위해 (흔히 푹옌Phuc Yen 비행장으로 불리는) 노이바이 비행장에서 출격했다. 장기의 팜 타인 응안(Pham Thanh Ngan)[5]과 요기에 탄 꼭은 2000m 고도로 접근하여 편대군 후미로 급상승했다. 장기는 썬더치프에 R-3S 아톨 유도탄 공격을 가하고 즉시 빠져나갔으나 하나도 명중하지 않았다.

뒤이어 돌입한 꼭은 좌측에 보이는 F-4 팬텀 II 4기 호위편대를 공격했다. 용감하지만 무모한 선택이었고, 곧 대가를 치렀다. 기체 후미에 팬텀의 미사일을 얻어맞은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꼭의 MiG-21은 간신히 저공으로 도망쳐 나오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활강하여 접근하던 노이바이 비행장 코앞에서 고도와 속도를 모두 잃었다. 결국 그는 활주로를 겨우 500m 남겨두고 비상탈출해야만 했다. 다행히 탈출은 성공적이어서 꼭은 무사히 연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날 그를 격추한 조종사는 바로 그 로빈 올즈 대령이었다.


5. 1967년 하반기의 격추 행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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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 작전 이후 절치부심하여 새로운 전술을 연마했음에도 921연대의 손실률은 여전히 높았다. 미군이 베트남 공군의 변화에 발맞춰 빠르게 대응한 것은 물론 베트남 공군 지휘부도 적절한 지원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MiG-21 조종사들이 전과 획득의 유혹에 빠져 MiG-21에게 불리한 선회전에 돌입하는 등 계속해서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7월 중순 회의에서 위와 같은 결론이 내려진 후, 꼭이 다시 격추 기회를 잡게 된 것은 8월 23일의 일이었다. 40여기의 미 공군기로 구성된 대규모 공격편대가 포착되자 요격을 위해 출격한 그는 6000m 고도에서 15km 거리의 미 편대군을 발견했다. 꼭은 올즈와 정면으로 맞붙었던 5월의 실수를 반복하는 대신 멀찍이 돌아들어가 상대 F-4D 후미에서 완벽한 기습공격 위치를 잡은 채 R-3S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정확히 명중해 꼭에게 두 기 째의 격추전과를 안겨줬지만, 그는 기체 손상으로 곧장 기지로 귀환해야 했다. 꼭 본인은 이것이 아군 오인사격 탓이었다고 회고했는데, 다른 소스에서는 미사일을 너무 지근거리에서 발사한 탓에 팬텀의 파편이 공기흡입구로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1967년 여름 동안 빈도가 확연히 감소했던 미군의 대규모 공습작전은 10월부터 베트남 공군의 미그 기지를 직접 노리는 새로운 전술과 함께 재개되었다. 이에 맞춰 경험을 쌓은 꼭의 격추 기록도 빠르게 늘어났다. 10월 7일에는 껩(Kep) 철도조차장을 폭격하려던 F-105 편대를 요격해 한 기를 격추했고, 11월 18일에는 노이바이 비행장과 하노이 인근 목표로 공습 부대가 가는 길을 뚫기 위해 날아오던 와일드 위즐 편대를 팜 타인 응안과 함께 덮쳐 각각 전과 목록에 F-105 1기씩을 추가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20일 아침, EB-66 격추 임무를 받고 이륙한 응안과 꼭 편대는 둔중한 전자전기 대신 아마 그 호위기였을 F-4 팬텀 2기와 10km 거리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바로 도망친 응안과 달리 꼭은 R-3S를 쏘면서 공격을 시도해 보았으나 미사일은 그대로 빗나가버렸고, 이를 확인한 꼭도 즉시 이탈했다. 그러나 이날 응안-꼭 편대의 출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550시경 EB-66의 재밍 개시와 함께 팬텀 4기의 호위를 받는 썬더치프 12기가 옌바이 인근 랑라우 철교를 목표로 접근해온 것이다. 응안-꼭 편대는 다시 이륙하여 썬더치프를 요격, 후미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후 즉각 빠져나왔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미사일이 명중했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꼭은 베트남 공군 공인 에이스 파일럿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교차검증이 가능한 응안의 기록과 달리 꼭의 전과 주장은 미군 손실 목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몬순철의 악기상 때문에 한동안 잠잠하던 미 공군의 활동은 날씨가 개인 12월 중순부터 재개되었다. 12월 12일 2기 편대의 장기로 이륙한 꼭은 6000m 상공 우측에서 F-105 12기와 F-4 4기 편대군을 발견했다. 요기에게 대형의 꼬리 부분을 맡으라고 지시한 그는 선두 편대의 썬더치프를 R-3S로 공격, 피격당한 기체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확인한 후 재빠르게 노이바이 비행장으로 귀환했다. 베트남 공군 공인 6기째의 전과였다. 다만 미 공군 기록에 따르면 피격당한 썬더치프는 손상을 입은 채로 기지에 복귀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6. 마지막 격추와 그 후[편집]


1968년 2월까지 이어진 격전은 베트남 공군의 전투기 소모율이 심각해지고 미군의 주요 공습 목표가 하노이-하이퐁에서 DMZ에 가까운 남부 제4군관구로 전환되면서 휴식기를 맞이했다. 3월에서 4월까지의 휴식기 동안 베트남 공군은 가동 불능 상태의 미그기를 수리하고 남부에서의 작전을 준비했다. 다수의 비행장과 레이더 사이트, 지휘통제시설이 이미 존재하여 지상관제 및 요격이 용이했던 하노이 상공과 달리 남부에서는 비행장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지휘통제시설도 새로 구축해야 했는데,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의 항공전에서 베트남 공군 GCI는 하노이 공역보다 훨씬 덜 능률적이었다.

여기 더해 남부 해안에 바짝 붙어 작전하는 미 해군 순양함들도 베트남 공군 전투기들에 어려움을 더했다. 호출부호 "레드 크라운(Red Crown)"으로 불린 이 순양함들은 강력한 레이더를 활용해 미 항공기들이 하노이 상공에서 작전할 때보다 훨씬 효과적인 항공관제 및 조기경보를 제공한 것은 물론, 해안으로 접근하는 미그기들을 장거리 함대공 미사일로 공격하여 여러 차례 격추했다.

휴식기가 끝나고 베트남 공군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5월 7일, 당 응옥 응우(Dang Ngoc Ngu)의 윙맨으로 출격한 응우옌 반 꼭의 이날 비행은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에는 공군과 방공군의 협조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아군 대공포의 오인사격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양동 목적으로 출격한 아군 MiG-21을 편대장이 미군기로 오인해 보조연료탱크를 투하하며 공격을 준비했다가 막판에 취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 공격편대가 정말로 접근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응우는 오른편에서 해안으로부터 접근하는 미 해군 F-4 편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위해 급선회 했지만 적절한 사격 위치를 잡는데 실패했다. 뒤이어 격투전이 벌어졌으나 어느 쪽도 명중탄을 내지 못했고, 꼭은 응우의 기체와 7km 가량 떨어진 채 연료가 다 떨어져 귀환할 마음을 먹은 순간이었다. 꼭의 정면, 2500m 고도에 편대와 분리된 F-4B 한 대가 나타났다. 꼭은 즉시 접근해 1500m 거리에서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다. 팬텀은 불덩이가 되어 바다로 추락했다. 꼭의 마지막 유인기 격추이자, 베트남 공군 공인 7기째, 그리고 미군의 손실 자료와 교차검증되는 기록으로 따지면 5기째의 전과였다. 꼭은 그 뒤로도 두 건의 격추전과를 더 올렸지만 모두 BQM-34 파이어비(Firebee) 무인기였다. 베트남 항공전은 1968년 11월 롤링썬더 작전 종료와 함께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꼭 역시 1969년을 끝으로 일선 전투비행에서 물러나 후배 조종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체 전과는 불과 2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세운 전적이다. 현재까지 베트남 인민공군이 공식 인정한 그의 전과는 1기의 F-4D, 1기의 F-4B, 5기의 F-105D, 그리고 2기의 파이어비 무인 정찰기이다. 말하자면 무인기를 뺀 전과는 7대인데, 미 공군은 1967년 11월과 12월에 격추했다는 F-105를 제외하고는 그의 격추를 인정했다. 1대만 포함된 미 해군의 F-4B를 제외하면 전부 미 공군기였다. 이 무렵 꼭은 고작 27세의 나이에 대위 계급에 공군 교관이라는 직위를 가진 거물이 되어 있었는데, 자신의 전과 외에도 다른 조종사 9명이 격추를 직접적으로 엄호하거나 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이런 눈부신 전공을 바탕으로 921전투기 연대장과 제371항공사단장을 거쳐 고속으로 승진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응우옌반꼭은 1988년 5월에는 공군 부사령관, 그리고 1990년 8월에는 결국 중장 계급장을 달고 1996년 6월까지 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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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 영웅은 2002년에 퇴역했는데, 2004년,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로 척추에 부상을 입어 다리가 불편해져 휠체어를 타고 있다.

7. 북베트남의 에이스들[편집]


베트남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에 미군기를 5대 이상 격추한 북베트남 공군의 에이스는 MiG-17로 7대나 격추시킨 응우옌반바이(Nguyễn Văn Bảy : 1936~), 꼭과 같은 921연대 소속으로 6대를 격추시킨 응우옌득소앗(Nguyễn Đức Soát : 1946~)을 포함하여 무려 16명이나 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 외에도, 비밀리에 참전한 소련 조종사 1명이 미군기 5대를 격추해서 에이스가 되었고, 베트남 공군이 "Z 부대(Đoàn Z)"로 부른 북한 조종사 부대에서도 격추 기록을 세우고 돌아간 파견 요원이 있다고 한다. 퇴역한 베트남군 장성의 서한에 따르면 북한은 1967년부터 1969년 초 사이 87명의 조종사를 북베트남에 파병해 미국 전투기 26대를 격추했고, 그 댓가로 14명의 북한 조종사가 전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전쟁 당시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무덤 대령이라는 격추수 13기의 슈퍼 에이스가 북베트남군에 있다는 도시전설이 돌았다.

한국 전쟁에서는 그토록 압도적인 공중우세를 달성했던 미 공군이었지만, 베트남전에서는 단지 2대1의 우위만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은 미 육군항공대 시절부터 따져도 가장 저조했던 항공전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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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른쪽의 인물. 왼쪽의 인물은 호치민.[2] 당시 베트남 교과 과정으로는 8학년[3] 이곳은 현재 깟비 국제공항이 되어 있다.[4] 베트남 공군 공인 최초의 MiG-21 에이스. 다 합쳐 6기를 격추했다. 다만 미군 기록으로 교차검증되는 전과는 4.5기(0.5기는 팜 타인 응안과의 공동격추)다. 특이사항으로 볼로 작전 당시 존 B. 스톤 대위의 F-4C에 격추당한 적이 있다.[5] 베트남 공군 공인 격추기록 8기의 MiG-21 에이스. 사실 미군측 손실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유인기 격추 전과는 응안이 5.5기(0.5기는 응우옌 응옥 도와의 공동격추)로 5기의 꼭보다 살짝 더 많다. 상장 계급으로 베트남군 총정치국장까지 역임하고 전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