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반티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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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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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독일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독일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국가원수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터키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발데즈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띠네즈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미테프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2021년

6월 14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
오스트리아
2021년

6월 16일
펠리페 6세
국왕
스페인

2021년

6월 16일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비
스페인
2021년

8월 25일
이반 두케
대통령
콜롬비아

2021년

9월 21일
보루트 파호르
대통령
슬로베니아




베트남 공화국 제2대 총통
응우옌반티에우
완문소((Nguyễn (Văn (Thiệu)

출생
1923년 4월 5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닌투언 성
사망
2001년 9월 29일 (향년 78세)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재임기간
국가영도위원회 주석(총통 권한대행)
1965년 6월 14일 ~ 1967년 9월 3일
제2대 총통
1967년 9월 3일 ~ 1975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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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국가사회민주전선|

국가사회민주전선
]][1]
종교
불교가톨릭
서명
파일:Signature_of_Nguyễn_Văn_Thiệu.svg}}}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어록
5. 기타



1. 개요[편집]


베트남 공화국의 제2대 총통,[1] 정치인, 군인.

영어와 프랑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어 리처드 닉슨과 통역없이 프리토킹이 가능했다.


2. 생애[편집]


베트남 남부의 판랑탑짬[3][4] 이라는 곳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 잠깐 베트민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46년 활동을 중지한다. 이후 사이공으로 가서 베트남 국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베트남국 육군에 입대했다. 이는 베트남 공화국 육군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의 최종계급은 중장이었다. 본래 불교 신도였으나 이 즈음인 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카톨릭교도를 편애하던 응오딘지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개종한 것이라는 소문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내 마담 티우 역시 카톨릭교도였다.[5]

1963년, 응오딘지엠 총살 이후의 쿠데타 광풍[6]을 견뎌내고 1965년에 그 역시 쿠데타로 국가원수직에 올랐다.

이후 제2차 월남 전쟁 기간의 대부분에 걸쳐 베트남 공화국의 총통직에 있었다. 1967년과 1968년의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에서는 승리[7]하고 1971년 재선에도 성공하여 쿠데타의 반복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나마 1967년 선거는 득표율이 38%였으나, 1971년 선거는 유일한 후보자로써 9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구정 공세 실패 직후의 짧은 평온기를 잘 수습하기도 했다. 70년대에는 미국 민간사회의 조언에 따라 미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 아래 중남미를 모델로 자신만의 토지개혁을 시작했다. 북부 출신 월남민들에게만 조금 혜택이 가지 사실상 실패했다고 간주되는 응오딘지엠의 토지개혁에 비해 그럭저럭 성과는 낸 편이었다고 평가된다. 외신들도 이 사업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이 멸망한 지금은 너무 늦었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독재자 응우옌반티에우는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 것은 기본에 엄벌주의를 내세워 마약 밀매, 거리 강도, 무장 강도, 강간, 매춘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누구나 사형에 처하게 했으며, 1972년 가을에는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 살인, 항복, 반란 또는 강간과 같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재판 없이 체포할 수 있는 법령을 발표했다. 1973년 초 파리협정이 체결될 당시 티에우는 정치범 32,000명을 수감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지만 CIA는 실제 정치범 수가 40,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8] 물론 응우옌반티에우는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는 서구의 발명일 뿐"이며 동양 사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의 고질적 병폐인 부정 부패와 무능에 있어서는 결코 나을게 없었는데, 심지어 본인이 재임 기간중 마약 거래를 배후 조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의혹이 있다.[9] 부총통 응우옌까오끼[10]와의 반목도 극심했다. 응우옌까오끼는 사이공 함락 며칠 전까지 총통이 되기 위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들어선 뒤 파리 평화협정에 따라 미군 철수가 이루어지고 군사 원조 삭감[11]이 이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자구책[12]을 세우지 않아 패망의 단초를 제공한다. 사실 리처드 닉슨은 남베트남에 대한 확실한 안전 보장은 제공하고 있었고 그 증거로 북베트남군의 부활절 공세 당시 폭격제한구역을 철폐하고 과감하게 라인배커 작전을 가동해 북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사임하고 뒤 이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당장 국내 문제부터 해결하느라 남베트남 문제를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미 의회는 정통성이 없는 포드 대통령의 남베트남 지원 제안을 줄곧 거부했다.

하지만 응우옌반티에우 탓만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남베트남은 소위 군벌들의 집합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중국 대륙을 지배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각 군벌들이 자기 지역의 성장(주지사)이자 지역사령관 같은 존재라 응우옌반티에우의 말빨이 제대로 서지 않을 뿐더러, 강제할 방법도 없는 실정이었다.[13] 그냥 미군이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군벌들이 마지못해 승복하는 수준, 실제로 중부 다낭 일대의 불교도 군벌은 응우옌반티에우 정권 수립 이후에도 서구식 기독교 기반 정책에 반발해서 정부군과 군벌 휘하군이 다낭 시에서 정면 충돌한 사례도 있었다. 당시 미군은 개입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당시 포병은 하루에 4발만 발사할 수 있었으며, 각 군인이 한 달에 쓸 수 있는 총알은 85발에 불과했고, 연료 및 예비 부품 부족으로 인해 공군 수송 작전은 최대 70%까지 축소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영토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티에우의 고집 때문에 군대는 잘게 분산되어 국경을 따라 쓸모없는 지형을 방어했고, 전략 예비군은 정적 탄압에 소모되었다.

거기다가 군기도 완전히 개판이었던게 남베트남군 부대들은 서류 조작으로 인해 후대의 아프가니스탄군마냥 서류상에서는 이름이 있지만 실제로 해당 병사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병사들은 탈영했다가 신원을 조작해 재입대하는 경우도 발생했으며, 심지어 남베트남군 장성들이 전대의 국민혁명군마냥 무기들을 베트콩과 거래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대규모 난민의 도시 유입과 오일 쇼크, 쌀 수확량 감소가 겹치며 남베트남은 그야말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티에우 총통의 사임 연설

1975년 봄, 공산군의 대공세로 베트남 공화국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14] '배신자 미국'을 비난한 후 재보를 실은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탈출하였다.[15] 이 때, 금괴가 든 가방을 들고 간 정도가 아니라 금괴와 미술품을 잔뜩 실은 남베트남 공군 수송기가 응우옌반티에우가 탄 비행기의 뒤를 따랐다. 당연히 이 수송기와 승무원들 또한 고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가 가져간 금괴들은 남베트남 정부의 국고에 있던 것은 아니고, 마약 판매 등 부정축재를 통해 개인적으로 모은 재산으로 알려져 있다. 남베트남이 패망하면서 그가 도망치며 가지고간 금괴가 무려 2톤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16]

그 후 한동안 영국에서 살다가 199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92년 인터뷰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종말을 예고하면서 미국 정부에게 베트남과 수교하지말라고 요청하기도 했으며[17], 공산당이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2001년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서 사망한다.

3. 평가[편집]


긍정적인 면모라면 구정 공세 당시 과감한 결단력으로 발 빠르게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내려 그 이상의 파국을 막았으며 또 응오딘지엠 시기 실패한 농지개혁을 재추진해 지주들을 혁파했다. 그 덕에 남베트남의 쌀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남베트남 국민들의 삶의 질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남베트남의 전형적인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인 독재자였다. 그는 정치적 기반을 위해 측근들의 부패를 용인했고 자기도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러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아편 밀매를 통한 재산 축적인데, 이건 이전의 응오딘뉴가 하던 짓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짓이었다.[18]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보니 미국은 명분 없는 무제한 소모전에 질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원치 않게 되었고 결국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며 남베트남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원조를 삭감해버리는 일이 발생해버렸다.

또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수 만명의 반대 세력들을 정치범으로 몰아 억압했으며, 수십 만명이 수용소에 수감됐다. 남베트남 초대 총통인 응오딘지엠이 자행했던 백색테러와 학살은 티우 정권에서도 일어났다. 전기고문, 물고문을 포함한 잔인한 고문들이 티우 정부 하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미군이 철수하던 시점인 1972년에만 하더라도 그 지역에 있던 미국 퀘이커 교회 인사들이 고문에 대해 미국에 보고했을 정도다. 남베트남 국가경찰의 숫자는 1963년 당시 16,000명이었지만 티우 정부때인 1969년에는 88,000명 1972년에는 12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경찰을 이용한 감시와 정보망이 티우 정부 하에서 남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됐다.

심지어, 그 악명높은 학살 작전인 피닉스 프로그램 또한 CIA와 티우 정부가 주도한 일이었다. 이 작전에서 살해된 수만 명의 베트콩 용의자들이 베트콩 혹은 동조자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이 작전 때문에 티우 정부는 남베트남의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남베트남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한 티에우는 결국 1975년 북베트남군의 공세에서 최악의 전략적 실수를 범하게 되면서 문자 그대로 패망하게 되었다. 더 넓게 보면 1975년의 남베트남 붕괴에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이기도 하다. 응우옌 반 티에우는 1973년 정권을 강력하게 지지해주던 미군이 철수하자 1963년 응오딘지엠 정부를 붕괴시키고도 여러 차례 계속되어 막대한 혼란을 초래한 쿠데타들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 대응이랍시고 고의적으로 남베트남군의 지휘 체계를 무리하게 바꿨다.

남베트남군은 통신장비의 부족,운송수단 결여 등의 이유로 이전까지는 하위 제대의 자율권을 어느정도 보장해주는 지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체제 하에서 생각보다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도로 정부가 무리하게 경직된 중앙집권적 체계로 갈아치우면서 대혼란과 심각한 비효율이 초래된다. 또한 정치군인 숙청 명목으로 일선 지휘관들을 하루아침에 제거하는 등 강력하게 견제했다. 이러한 정권의 안녕만을 생각하는 불합리한 조치들 때문에 남베트남군은 급속도로 약체화되어 월맹군의 최종 공세에 무력하게 패전하게 된다. 응오딘지엠의 독재와 실정이 베트남 공화국의 패망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권력욕에 찌든 정치군인에 불과했던 티에우의 실책 역시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출처

남베트남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자국을 탈출하는 와중에 자신은 부패로 축적한 금은보화와 가족들을 싣고 편하게 도주한 점도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46년 뒤 또 다른 실패 국가에서 재현된다.

쫓겨나기 직전이던 1975년 3월에는 미국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2위에 올랐다고 한다. 같은 조사에서는 당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칠레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3위였고, 1위는 바로 그 이디 아민이었단 걸 감안하면, 이 사람의 실정이 어느 정도었는지 알 수 있다[19]. 참고자료


4. 어록[편집]


공산주의자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20]


살아있지만 자유가 없다면 죽은 것이다.


강토가 있다면 모든 것이 남아있지만, 강토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미국이 계속 원조한다면, 우리도 계속 반공이다!

만약 미국이 우리에게 계속 원조를 하지 않는다면 하루가 아니라 한달, 일 년도 아니고 단 세 시간 만에 우리는 독립궁을 떠나야 할것이다.


만약 그들(미국)이 나를 암살하려한다면 그건 매우 쉽다. 암살하고서 베트콩의 짓이나 쿠데타 음모라고 일을 돌려버리면 되니까.


그들(미국)은 나의 등 뒤를 찔렀다.


5. 기타[편집]


응우옌반티에우가 1975년 4월 21일에 사임하고 탈출한 후에도 사이공에서는 누가 권력을 잡느냐를 두고 정쟁이 잇따랐으며, 쩐반흐엉이 잠시 총통직을 맡았다가 얼마 안 가 사임하였고 지엠을 실각시키고 사형을 집행했던 즈엉반민이 4월 29일자로 총통직에 취임하여 공산군과의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 즉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무조건 항복 이외에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결국 즈엉반민 정부는 다음날인 4월 30일자로 항복 선언을 발표하였다. 즈엉반민이 북베트남 대표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하자 "당신의 정권은 우리가 방금 붕괴시켰소.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포기할 순 없소."라 일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1]

대한뉴스 보도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OFFFNmd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RDEwOS8wLzMuanBn&filename=7000417573_20100315.jpg
한국 방문 (1969년 5월 27일, 서울시청)

1969년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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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구엔반티유우표.jpg
방한을 기념하여 당시 체신부에서는 관련 기념우표를 발행했었다.


그의 집무실에는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과 박정희 한국 대통령,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등의 초상화들이 배치되었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의 책을 바탕으로 제작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다큐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지만, 제사를 포함한 유교식 전통 풍습 또한 충실히 지켰었다.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도 유명했는데, 그녀의 준비된 공격적 질문공세를 받고는 프랑스어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당황했다.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응웬 반 티우는 이 인물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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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응오딘지엠 실각 이후 여러번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1965년에는 국가영도위원회라는 군정이 실시되었으며, 1967년 응우옌반티에우가 민정으로 복귀시킨다.[2] 베트남어는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온다.[3] 닌투언성의 성도로 과거 참파의 마지막 수도였던 곳인데 당시 이름은 판두랑가였으며 이것을 베트남어로 음차하여 판랑이 되었다가 도시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힌두교 사원 즉, 탑들이 모여있던 곳까지 인구가 늘어나자 참파탑이라는 뜻의 탑짬[2]이라는 도시가 생겼으며 이 둘을 합쳐서 판랑탑짬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4] 여담으로 호치민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를 겪은 곳이기도 한데 태풍으로 배가 부둣가에서 줄이 끊겨서 파도에 휩쓸려 가려 하자 프랑스인 선주가 베트남인 노동자들에게 바닷물에 뛰어들어 배의 줄을 부둣가에 묶으라는 대도 않은 명령을 내렸고 협박에 못이긴 노동자들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당연히 이들은 파도에 휩쓸렸고 프랑스인들이 이걸 보면서 온갖 인종차별 모욕을 가한것을 보고 충격을 먹었다고 하며 호치민은 죽는 날까지 이 모습을 애통하게 생각했다고 한다.[5] 본명은 응우옌 티 마이 안. 메콩 델타 지역의 부유한 한약사의 딸로 태어나 1951년 군 장교였던 티우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아들 두 명과 딸 하나였다. 마이클 메클리어의 베트남,10,000일의 전쟁에서는 북베트남의 사이공 함락이 머지않았는데 홍콩으로 고미술품 쇼핑이나 가는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제3공화국 시절 한국 언론들은 우아한 귀부인 정도로 묘사했다. 어느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는 각자의 판단일 것이다. 어느 쪽이던 디엠의 제수로서 디엠 정권 시절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던 마담 누보다는 나았다. 마담 누는 아예 경솔하다 못 해 기초 상식도 없는 수준의 망언들로 정권 몰락에 기여할 정도로 어리석었으니.[6] 응우옌반티에우가 총통이 될 때까지 5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그 또한 응오딘지엠 사살을 목적으로 했던 즈엉반민이 주도한 쿠데타에 참가했었다. 니랑이란 인물은 나중에 이걸 두고 '어이구, 지엠을 배신할 때는 언제고 나중엔 마누라를 명예 회복식에 참석시키네?' 같은 어투로 냉소하기도 했다.[7] 베트콩의 방해와 부정 선거 논란이 있었으나 베트콩은 미군이 막아냈고 부정 선거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8] 당시 남베트남 인구가 1937만 명 정도였다.[9] 웃기게도 상술한 것처럼 응우옌반티에우는 마약을 밀매한 민간인들은 사형에 처하라고 했다.[10] 프랑스 식민군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군부 실세로 있으면서 수상공군사령을 겸하며 숙군 작업을 단행하고 중부 불교도들의 봉기를 유혈진압했다. 수송기 조종사 출신이나 공식 석상에도 비행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등 전투기 조종사 흉내를 내서 말이 좀 많아 부총통에 그쳤지만, 군사 정권 말부터 티에우 정권 때까지 실시된 개혁 정책의 큰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 패망 뒤에는 처형 대상 2순위로 찍혀 미국으로 망명해 사업을 하다가 재미월교들과 공산당과의 화해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공산화된 조국을 방문하는 것을 허락받기도 했다.[11] 문자 그대로 반토막이 나버렸다. 덕분에 남베트남군의 탄약과 연료 사정이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12] 대륙붕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개발을 추진했었는데 문제는 월맹에서 이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석유가 개발되면 미국이 다시 개입하게 될까봐 무리를 하면서까지 공세를 대폭 앞당겼다. 거기다가 1974년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이 이때다 하고 남베트남 해군에 선빵을 때려 승리해 파라셀 군도를 장악하는 바람에 남베트남의 희망은 다시 없어져버렸다. 1973년 12월, 사이공 인근의 대형 석유 저장고에 대한 북베트남의 테러가 성공해 그나마 남아있던 석유도 날라가버렸다.[13]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 군벌들은 어디까지나 군벌화된 정규군이지, 베트남국 시절의 진짜배기 군벌들 같은 조직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 같은 진짜 군벌이었다면 지역 주민들과의 밀착도가 매우 강해서 베트콩이 그렇게 설쳐대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14] 사실 이건 응우옌반티에우 본인 탓도 있다. 중부고원의 육군 2군단을 재배치(사실상 철수)시켜야 했는데 너무 늦게 결정을 내려서 재배치가 아닌 사실상의 패주가 되어버렸고 2군단은 붕괴, 여기서부터 남베트남의 붕괴가 시작되었다.[15] 북베트남군의 공세로 후퇴하던 남베트남군 병사들은 반티에우 아버지의 무덤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이 때 남베트남 중앙은행에 보관되어있는 남은 금 16톤도 함께 옮기려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통일된 베트남 공산정권이 이를 고스란히 손에 넣게 된다.[16] 그러나 2015년에 캐나다 출신 미국 CBS 기자 셰이퍼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2톤이 아닌 16톤이나 됐다. 남베트남이 패망하던 시점에 미국 CIA는 무거운 금속이 들어있는 티우의 여행 가방을 C-118 수송기와 항공화물로 운반하는데 관여했는데, 그 금속은 16톤 무게의 순금이었다고 한다.[17] 1995년 미국과 베트남은 결국 수교하였다.[18] 우습게도, 남베트남의 마약 밀매 권력자는 나중으로 갈수록 지위가 높다. 첫번째 바이비엔은 사이공을 지배하긴 했어도 공식적인 정부 인사는 아니었고, 응오딘뉴는 정부의 실세였으며, 응우옌반티에우에 이르면 아예 총통이 직접 마약 밀매를 하기에 이른다.[19]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사에서 5위로 선정된 크메르 공화국론 놀도 1975년 4월에 쫓겨났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폴 포트.[20] 일부 반공 서적에서 이렇게 소개된 바 있다.[21] 어떤 책자에는 이 대목을 "당신들은 전쟁포로일 뿐이고, 포로와는 논의가 필요없다"고 말했다고 묘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