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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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손자
의령군
義寧君

작호
원윤(元尹)
→ 의령후(義寧侯)
→ 의령군(義寧君)
본관
전주
이름
맹종(孟宗)[1]

망우당(忘牛堂)
생부
회안대군
생모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2]
부인
청주 한씨[3]
자녀
1남
묘소
경기도 여주시 (현재 실전)
생몰
기간

음력
1385년 2월 15일 ~ 1423년 7월 11일
양력
1385년 3월 26일 ~ 1423년 8월 25일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초의 왕족으로,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자 회안대군 이방간의 아들. 1400년(정종 2년) 2차 왕자의 난 당시 아버지와 함께 숙부 이방원에게 맞섰으나 패배하고,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사촌 세종대왕의 강요로 인해 자살했다.


2. 생애[편집]


고려 말인 1385년(우왕 11년)에 이방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92년(태조 원년)에 조선이 건국되고 아버지가 회안군으로 봉해지자 그도 원윤(元尹)에 봉해졌다. 이후 1398년(정종 즉위년) 의령후(義寧侯)를 거쳐 1400년(정종 2년)에 의령군(義寧君)으로 개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이맹종은 아버지의 편에 서서 책사 노릇을 하며 숙부 이방원에게 맞섰다. 불과 16세 밖에 안된 나이임에도 활을 매우 잘 쏘았고, 꾀가 많아 중요한 역할을 맡는 등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결국 패배했고, 아버지와 함께 생포되어 황해도로 유배를 떠났다.

임금이 된 태종은 이방간과 이맹종 부자의 작위와 녹권[4]을 모두 회수했으나, 그들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상소는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세종 제위 시기인 1421년 이방간이 충청도 홍주목에서 사망하자 이맹종은 유배지를 그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1423년부터 이맹종의 탄핵과 사형을 주장하는 의정부육조의 상소가 빗발치자, 세종은 그에게 자진을 명했고, 결국 이맹종은 7월 11일 자진했다. 그의 시신은 외가가 있는 경기도 여주시에 안치되었으나 묘는 후일 실전(失傳)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이맹종은 이방석보다 어린데,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석은 아역 배우가 연기한 반면, 이맹종은 아래와 같이 성인 배우가 맡아 역사적 사실을 알면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맹종은 1차 왕자의 난 이후부터 등장해 둘이 같이 나온 장면은 없다. 항상 활과 화살을 장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며 명궁이라 언급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쏜 화살이 빗나가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특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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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의 의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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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의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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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원록》 등에는 이름이 '맹중(孟衆)'으로 나와 있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에게 자진을 명하는 기사 및 그가 죽은 뒤의 기사들에서도 계속 '맹종'이라고 언급되는 것을 보면 '맹중'은 그냥 오기인 듯하다.[2] 민선(閔璿)의 딸로, 권근의 처이모이기도 하다.[3] 주부(主簿) 한기(韓琦)의 딸.[4] 고려, 조선시대에 공신으로 책봉된 신하에게 지급했던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