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적 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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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000,#fff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편''']]




1. 개요
2. 줄거리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19년에 김도산(1891 ~ 1921)이 극본·연출하여 한국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공개되었다. 이 의리적 구토의 개봉일인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기념하고 있으며, 2019년을 한국 영화 100주년으로 기념하였다.

의리적 구토에서 '구토'는 먹은 것을 게워낸다는 뜻이 아니라 '원수 갚음'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 '아다우치'((あだ(ち)의 한자 표기를 한국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제목이 '의리적 구투(仇)'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1] 상영 당시 제목은 구토가 맞으며 구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성사의 초일(初日)

관객이 물밀듯이 들어와

신파 신극좌 김도산 일행의 경성에서 촬영된 신파 활동사진이 조선에 처음으로 지난 27일부터 단성사 무대에 상장(上場)된다 함에 초저녁부터 조수같이 밀리는 관객 남녀는 삽시간에 아래 위층을 물론하고 빽빽히 차서 만원의 패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한 대성황이었더라.

그런데 제일 번화한 것은 각 권반[2]

기생 온 것이 무려 200여명이나 되어 더욱 이채를 내었더라.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우선 실사남대문에서 경성 전시의 모양[3]을 비춤에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 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 보는 조선 활동사진이므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더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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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1919년 10월 29일


당시 기사를 보면 만원사례를 이룬 개봉 당일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영화표 가격은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이었다. 서민음식 취급을 받던 설렁탕 한 그릇이나 담배 한 갑이 당시 10전이었다고 하니 아주 못 볼 가격은 아니었지만, 1등석 가격은 부담스러워하는 서민들이 많았다.[5]

다만 이 영화는 온전한 극영화가 아니라, 기차나 서울역 등 극장 무대에 올릴 수 없는 장면을 촬영해 연극 공연 중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연쇄극'의 형태였기 때문에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월하의 맹서를 한국영화의 효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의리적 구토보다 2년 4개월 빠른 1917년 6월 개봉한 '과거의 죄'가 한국 최초의 영화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과거의 죄'는 당시 일본의 인기배우 무라다 마사오가 주연을 맡고 텐카츠에서 제작한 일본 영화인 것으로 밝혀졌다.#


2. 줄거리[편집]


주인공 송산은 본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직이 모친을 잃고 계모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라난 몸이었다. 집안이 워낙 부유하고 보니, 재산을 탐내는 계모의 간계로 말미암아 가정엔 항상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우심했다. 이리하여 송산은 이 추잡한 가정을 떠나 좀더 참된 일을 하다가 죽으려는 결심을 하는데, 우연히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다.

한편 계모의 흉계는 날로 극심해 가서 드디어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송산의 신변이 위태로워짐을 알게 된 의동생 죽산과 매초가 격분해서 정의의 칼을 들지만 송산은 이를 말린다. 그는 오직 가문과 부친의 위신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디자니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워 맹리 술타령으로 보낸다.

이러한 송산의 은인자중도 보람없이 드디어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 계모 일당의 발악이 극도에 올라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송산은 눈물을 머금고 정의의 칼을 든다.[6]


3. 관련 문서[편집]


  • 천국의 문[7]
  • 홍길동[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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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영화사 연구 초창기에 영화인들의 기억과 증언을 기록하였고 이것이 재인용되면서 확산된 것이다.[2] 券班. 일제강점기 기생들의 조합[3] 의리적 구토의 서막으로 상영된 '경성 전시(全市)의 경(景)'을 가리킨다. 이것과 같이 촬영된 '경성 교외 전경'은 1919년 11월 3일 역시 단성사에서 김도산의 두번째 연쇄극인 '시우정(是友情)'에 삽입되어 상영되었다.[4] 맞춤법을 현대어에 맞게 수정함.[5] 그도 그럴 것이, 오늘날의 담배값이나 설렁탕 값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1원은 2020년대 기준으로 2만원 중반~3만원 초반대에 해당하는 값이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인력거를 타려던 학생이 '일 원 오십 전은 너무 과한데'라고 불평하던 대목을 떠올려 보자.[6] 출처: 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춘추각, 1962[7] 한국 최초의 드라마이다.[8]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