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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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義湘


파일:의상대사2.jpg

성씨
김(金)
본명
일지(日之)
법명
의상(義湘)
시호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
(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골품
진골
출생
625년(진평왕 46)
사망
702년(성덕왕 1)
아버지
한신(韓信)
어머니
선나부인

1. 소개
2. 생애
2.1. 출신
2.2. 당나라 유학
2.3. 귀국 이후
3. 사상



1. 소개[편집]


신라승려. 속명은 김일지. 동시대에 활동한 고승인 원효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고대 한국 불교계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으로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이다. 시호고려 숙종이 내린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원효대사와는 같은 시기 사람이고 유명한 해골물 신화부터 시작해 오랜 세월이 지난 조선시대에는 형제라고 잘못 알려질 정도로 엮이는 부분이 많지만 두 사람의 성향은 너무도 달랐다.

상단의 초상화일본 교토 고잔지(高山寺)가 소장한 그림인데, 후대에 상상해 그린 것이 아니라 무로마치 시대 일본의 승려 묘에(明恵)가 불교계의 선각자인 의상대사를 존경해 신라시대의 원본 초상화를 보고 이모한 것으로 전한다. 화풍이 일본이 아닌 한국의 초상화 양식을 따르기에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다고 추정한다. 정작 묘에가 보고 그렸을 원본이 한국에 남지 않았으므로 당대의 의상 진영에 가장 근접한 초상화인 듯하다. #


2. 생애[편집]



2.1. 출신[편집]


아버지는 신라의 진골 귀족 김한신(金韓信)으로 19세 때[1] 황복사(皇福寺)[2]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출가하기 전에는 촉망받는 화랑으로 가문의 기대를 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가문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원효와 마찬가지로 출가하게 된 계기에 대해 다양한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중 대표적인게 화랑으로 전투에 참여할 때 전장에서 살육을 한 후 죄책감과 회의감, 그로 인한 삶과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점 때문에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랑 시절 화랑 동지들과 사냥 훈련을 하러 나갔는데 혼자 사냥을 포기하고 하산해버렸다. 아버지는 그냥 집에 돌아온 일지에게 "너는 훈련을 포기했으니 나라를 배신한 것이요, 부모의 뜻을 어겼으니 불효를 저질렀다. 또한 함께하는 벗을 두고 혼자 도망쳐 신의까지 저버렸으니 세속오계 중 4개(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를 어긴 것이다."라며 종아리를 때렸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화가 풀린 그날 밤, 일지가 "아버지, 저는 세속오계의 단 하나를 지키고자 나머지를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생유택입니다. 죄 없는 짐승을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죽여댈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평소 생명을 중시하던 아들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던 아버지는 "내 아들이 이름 높은 사람이 되길 바랐는데 이름을 날리기는 커녕 스님처럼 살려 하다니..."라고 한탄을 했다. 결국 의상은 스님이 되는 허락을 받은 대신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 어디서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조건을 받았다고 한다.

2.2. 당나라 유학[편집]


650년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가서 유학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해받아 수십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살아돌아온다. 661년 2번째로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는데 원효는 도중에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은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혼자 중국으로 건너갔다. 원효는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아 불법 자체를 마음 속에서 구하려 했고 의상은 보편적인 불법을 구하려는 생각이었기에 여기서 다른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의상은 당나라에 가서 처음에는 양주(揚州, 지금의 장쑤성 양저우)에 머무르면서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배려로 양주 관아에서 머물렀고 아름다운 여인 선묘와의 일화도 이때 생겨났다. 중국에서 이동 중 묵게 된 신도의 집의 딸 선묘는 의상에게 반해 유혹했지만 의상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선묘는 이런 모습에 감동해 스승제자로서 연을 맺을 것을 맹세했다는 얘기다. 이후 선묘는 불법을 구하는 동안 여러가지로 도움을 줬고 귀국 직전 선묘의 집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사례품을 가득 가지고 찾아가기도 했지만 길이 엇갈려 결국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선묘는 간절히 기도해 이 되어 의상을 수호했고 부석사 창건에도 도움이 됐다는 전설이 전한다. 민담에는 선묘가 의상이 배를 타는 부두까지 따라갔으나 한 발 늦어 의상이 탄 배가 수평선으로 멀어지는 것을 보고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으며 선묘의 혼이 용이 되어 풍랑에 휩쓸리던 배를 호위해 무사히 돌아갔으며, 부석사를 지으려고 보니 그 부지가 웬 사이비 종교의 소굴이 되어 있어 의상이 고민을 하던 중에 선묘가 자신의 몸을 바위로 바꾸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붕 뜨는 장면을 연출해 사이비들을 놀래켜 쫓아내고, 의상이 '돌이 떴다'라는 의미를 담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후 종남산 지상사로 가서 중국 화엄종 2대조인 지엄(知嚴)대사의 밑에서 화엄종(華嚴宗)을 공부했다.[3]

10여 년간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중인 670년 신라와 당나라 사이가 악화되고 나당전쟁이 터진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군과 신라 사이에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됐고 신라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면서 당나라군을 공격하자 당고종이 "우리 군사 빌려서 고구려를 멸망시켜놓고 이제 와서 우리한테 배신을 때려?"라며 김흠순김양도를 억류하고 감옥에 가둬버렸다. 이에 김흠순이 의상에게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들 것임을 신라에 알리도록 의상을 귀국시켰다. 김흠순은 나중에 간신히 풀려났지만 김양도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당나라에서 죽었다.

2.3. 귀국 이후[편집]


신라로 돌아와서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화엄종을 널리 펼쳤다. 의상이 동해 바다 절벽에 있는 관음굴에서 기도한 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수정염주 한 벌을 받았으며[4] 절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바로 낙산사라는 설화가 있다. 낙산사 이외에도 영주 부석사[5], 부산 범어사, 공주 갑사, 울진 불영사 등의 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가야산 해인사비슬산 옥천사도 의상이 머물렀다고 전한다.

6두품 출신인 원효와 달리 의상은 진골이었는데 의상은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중앙귀족 세력과 결탁하기를 피하려 하였다.[6] 실제로 화엄종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로다.'라는 입장에서 우주 만물을 하나로 아울러서 국왕 중심의 체계를 잡는 데 사상적 바탕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왕실 종파로 자리잡았다.[7]

수도 서라벌의 나성(羅城)을 쌓으려고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계획한 문무왕이 의상에게 공사에 대해 자문하자 "왕의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고 있다면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넘지 말라고 해도 사람들은 넘지 않을 것이고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도 않는데 으리으리하게 을 짓고 을 지어봤자 쓸데없는 짓입니다."라고 간언해 문무왕이 공사를 중지하기도 했다.

원효가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퍼트렸듯이 의상은 현세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관음 신앙과 아미타 신앙을 함께 전파하는 데 힘썼다. 의상이 관음 신앙만 이끌었다고 아는 사람이 많으나 사실이 아니다.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관음 신앙을 화엄 종단의 중심 교리로 받아들였다.

702년 78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저서로는 화엄 사상의 요지를 210자로 축약해 로 표현한 '화엄일승법계도(華巖一乘法界圖)' 등이 있다.


3. 사상[편집]


화엄종의 독특한 교설로는 사법계(四法界)설이 있는데, 이는 1. 사법계(事法界) 2. 이법계(理法界) 3.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4.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의 구도를 갖고 있다. 의상은 여기에 더해 이이상즉설(理理相卽說)을 제시하였다. 이이상즉(理理相卽)은 리(理)와 리(理)[8]의 하나됨(상즉相卽)으로서 세계를 인식(觀)하는 것을 말한다.

[1] 29세라는 설도 있다.[2] 기존에는 경주 낭산 동쪽, 구황동에 소재한 절 터에 황복사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황복사지'란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2010년대 중후반에 실시된 여러 발굴에서 전혀 다른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장이 여럿 발견되었거니와, '황복사지'라고 알려진 자리는 '황복(皇福)'이란 명칭을 사용하기에는 걸맞지 않는다는 등 여러 근거와 반론이 제기되었다. 학계에서는 절 터의 명칭을 지나치게 성급하게 '황복사지'라고 지은 탓에 명칭의 혼란이 생겼다고 아쉬워하는 판.[3] 삼국유사에 보면 의상이 지엄대사를 찾아오기 하루 전날 지엄대사가 꿈을 꾸었는데 바다 동쪽에서부터 뻗어나온 나뭇가지 하나가 절까지 드리웠고 나뭇가지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었으며 마니보주(여의주)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4] 동해의 용이 여의주 1개를 주었다고 한다.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조선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하면서 석탑에 안치했다고 하니 조선 시대까지 남아있었던 듯 보이나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5] 의상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선묘가 의상을 만나러 왔지만 벌써 배가 떠나버려 만나지 못하자 세세토록 용이 되어 의상을 지키겠다고 발원하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용이 된 선묘가 의상의 뱃길을 무사히 지켜주었으며 영주에 부석사를 지을 때도 선묘가 방해하는 자들을 물리쳐 주었다고 한다.[6] 의상의 제자 중 지통평민이었고 스승 의상의 가르침을 정리한 추동기를 짓기도 했다.[7] 반면에 귀족들은 만물에는 영원히 성불할 수 없는 사람과 성불할 수 있는 사람이 원래부터 정해져 있다는 종파, 조금 과격하게 말해 딱 나향욱 같은 생각을 하는 법상종을 선호하였다.[8] 원래 사법계에서 리(理)는 보편적 리(理)를 말한다. 그러나 이이상즉은 '보편적 리(理)'와 '사(事)와 일체로서의 개체적 리(理)'의 상즉(相卽)을 말한다. 이는 '사(事)와 일체로서의 개체적 리(理)'를 인정하기에 가능한 교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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