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승
인조 ~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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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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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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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세종의 서5남
밀성군의 8대손이다.
1684년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정유독대
[1] 이건명의 종형인 이이명이 숙종을 단독으로 독대한 사건
이후 우의정이 되었으며
연잉군의 보호를 부탁받았다. 이후 늙은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했다. 이때 이건명은 총호사로 숙종의 장례식을 총괄했다.
경종의 치세때는 좌의정에 올라 노론의 영수가 되었는데 조태채 등과 연잉군을 세제로 올리자고 제안
이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하면서
김일경 등의 소론 강경파에게 미움을 샀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위기에 놓이고 다행히 사형을 피했지만 전라도 흥양의 뱀섬에 유배를 가며 위리안치당하고 만다. 하지만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서 한 말이 문제가 됐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강희제와 청나라의 여러 대신들이 경종의 연잉군 세제 인정 요구에 의아해하며 '너희들의 임금은 아직 젊으니 얼마든지 아들을 낳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세제는 무슨 세제냐.'라고 태클을 걸자
[2] 사실 이게 당연한 반응이다. 강희제의 말대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당시의 경종은 30대 초반이였고, 그의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아예 20세도 되지않은 매우 젊은 나이였다. 즉, 경종 부부가 합방을 하면 얼마든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였던 것. 게다가 강희제는 60대의 나이에도 증손주뻘의 어린 자식들을 후궁에게서 계속 보던 황제였으니 더욱 의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멀쩡히 아들 낳을 수 있는 국왕이 있음에도 그의 동생을 세제로 책봉하겠다고 하니,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황당함을 넘어 조선에서 왕자의 난이라도 벌어진 건 아닌가하는 우려를 할 법도 했다.
, 이를 둘러댄답시고
"임금이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무엄한 망발을 내뱉었던 것. 이게 빌미가 되어 소론의 탄핵을 받았고 경종마저 격노하여 다른 노론 4대신들은 사약을 마셔 곱게 사사당한 것에 비해, 이건명은
목이 잘려서 시신조차 온전히 보존 못하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3] 사실 이건명의 발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대의 입헌군주제에서도 명예훼손죄 내지 모욕죄로 고소당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의 망발이다. 하물며 국왕이 신적 존재로 군림하는 전제군주제의 왕을 이런 식으로 능멸했으니 하단의 업적과 별개로, 목이 잘려도 할말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확실하며 오히려 목은 물론 사지 전체가 잘려나가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다.
영조가 즉위했을 때 노론의 주청으로 복권되어 충민이라는 시호를 얻는다.
정승으로 있을 때부터 백성들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백성들을 위한 많은 정책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때 군포를 낮추자고 제안한 것이 이후에 영조가
균역법을 제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시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에 「한포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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