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리 류리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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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제3대 대공
이고리 류리코비치 | Igor Rurikovich


이름
이고리 류리코비치
Igor Rurikovich[1]
현대 러시아어 이름
Игорь Рюрикович

고대 노르드어 이름
ᛁᛝᚹᚨᚱᛁ[2]

별명
늙은이[3]

전임자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대공
후임자
키예프의 올가(섭정)
스뱌토슬라프 1세
생몰년도
?[4] ~ 945년
재위
키예프 루스 대공
912년~945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키예프 루스 제 3대 대공. 노브고로드 공국의 계보에도 포함되어 있다. 루스의 초대 군주 류리크의 아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너무 어려서 친척 또는 고위 장군 노브고로드의 올레그에게 권좌를 넘겼다가 후에 즉위했다. 나라를 세운 아버지, 키예프를 처음으로 점령한 전임자, 역사에 남을 복수극과 성녀로 유명한 아내에 묻혀 존재감은 희박하지만 뒤이은 류리크 가문 군주들의 직접적 조상이 되는 중요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이고리는 9세기 후반에 홀름가르드, 지금의 노브고로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류리크로, 그를 낳기 전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바이킹들을 데리고 현지 슬라브인들의 복종을 받아내 홀름가르드를 세웠다. 그의 어머니는 미상이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전설은 게르만계와 슬라브계가 있는데, 게르만계 전설에 의하면 저 유명한 대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딸이 이고리의 어머니이고, 슬라브계 전설에 의하면 일멘 일대의 장로이자 위대한 전사 고스토미슬의 딸이 이고리의 어머니이다. 류리크는 879년 즈음에 죽었다. 류리크가 죽을 때 이고리는 3~4살, 아무리 넉넉잡아도 10살이 채 안되는 어린이였다. 당연히 정상적 통치가 안 되고, 이미 어머니를 잃은 것인지 어머니가 섭정으로 서지 않고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집권하게 되었다. 올레그는 섭정이 아닌 직접 대공에 즉위하는 형태로 통치했다. 올레그가 키이우를 장악하러 갈 때 함께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뒤 그의 기록은 묘연해진다. 912년에 올레그가 죽고 이고리가 대공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이 즈음 이야기는 아내 키예프의 올가에 관한 전설 말고는 도통 남은 것이 없다. 대공으로써의 그에 대한 기록은 그가 즉위한 직후에 올레그 대공 시절 복속되었던 드레블랴인[5]을 재정복해서 더 무거운 공물을 부과했다는 것과 920년에 동로마 제국을 향해 진군하던 페체네그족들의 뒤를 쳤다는 것이 전부이고, 다음 기록은 941년이 돼서야 나온다.

941년, 이고리 대공은 제 9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일으켰다. 류리크와 올레그도 모두 한 번 씩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한 적이 있는 만큼 오래 된 전쟁의 일환이었다. 이고리 대공은 이전에 전쟁을 했었던 페체네그족과 연합해 동로마 제국 수도권을 전면 침공하였다. 그 규모는 전대미문으로,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이탈리아 왕국 대사로 있던 크레모나의 류트프란트는 루스인들의 배가 1000척을 넘는다고 증언했다. 이 때 동로마 제국은 동쪽에서 전쟁 중이라 수도에 있는 함대는 낡은 배 15척 뿐이었다. 로마노스 1세 황제는 침착할 것을 명한 후 낡은 배에 동로마의 비장의 무기 그리스의 불을 장착할 것을 명했다. 보통 그리스의 불은 사용 방법 때문에 선수에 다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선미와 양 옆에도 장착할 것을 특별히 지시했다. 그리고 6월 11일, 낡은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막았다. 이를 본 이고리는 그 함대를 나포할 것을 명했다. 나포를 위해 루스 해군이 접근하는 순간, 배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류트프란트에 의하면 엄청난 기세의 불길에 휩싸인 루스군은 갑옷도 벗지 않고 죄다 바다로 뛰어들어 몰살당했다고 한다. 남은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일대인 비티니아에 상륙했다. 이고리는 비티니아에서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민간인에겐 묶어놓고 활을 쏘고 사제들에게는 머리에 쇠못을 박는 등 잔혹 행위를 하며 군기가 잠시 해이해졌고, 딱 이 때 도착한 동로마 중앙군의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대 바르다스 포카스에게 공격당해 크게 패했다. 살아남은 인원들은 잔존한 함대를 합쳐 탈출하려다 제독 테오파네스에게 걸려 다시 한 번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941년 전쟁은 재물 약간 말고는 피해만 엄청 입은 채 끝났다. 다행히도 동로마 역시 동쪽 이슬람교도들과 전쟁 중이던 상황으로 루스인들과 전쟁을 오래 할 상황은 아니라 944년에 이고리 1세가 페체네그 기병을 이끌고 와서 다시 무력시위를 벌이자 945년에 평화 조약[6]을 맺고 경제적 권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동로마와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은 이고리는 피지배층 슬라브인들에게 세금을 많이 뜯어서 벌충하려 했다. 이고리는 군대를 이끌고 드레블랴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7]으로 진군해 특별 공물을 요구했다. 원래 이 당시 루스 일대에는 폴리우디아라 불리는 정기 공물 수취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고리가 폴리우디아 공물 자체를 올린 것도 모자라 드레블랴인들에게 특별 공물까지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루스의 위세가 높았으니 드레블랴인들은 순순히 공물을 바쳤다. 공물을 챙겨 돌아가던 이고리는 왠지 좀 더 털면 더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약간의 병력을 데리고 다시 드레블랴인들에게 돌아가 더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드레블랴인들은 이고리를 습격해 체포해버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를 구부러진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 사지를 묶어놓고 자작나무를 튕겨 사지를 찢어 죽여버렸다.[8] 그가 죽을 때 그가 그랬듯 그의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는 너무 어려, 아내 키예프의 올가가 섭정에 올라 통치하게 되었다.


3. 여담[편집]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사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 등장한다. 능력치 고정[9]이 없는 그냥저냥한 왕. 문화가 노르드 문화이므로 이고리가 아닌 노르드식 이름 잉바르로 나온다. 이제는 러시아 문화로 이고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내 키예프의 올가는 슬라브인으로 나오고 역시 능력치 고정이 없다. 올가와 수 십년 간 자식이 없다는 걸 게임 제작진들이 이상하게 여겼는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가상 자식들을 달고 나오며,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물려주려면 아이를 새로 낳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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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미권에서는 Igor of Kiev(키예프의 이고르)라고도 한다.[2] 발음은 잉바르[3] 러시아어로는 старый, 발음은 스타릐-[4] 각종 기록에 861년부터 878년까지 다양하게 나오나 현재는 877년 또는 878년으로 추정한다.[5] 동슬라브계 민족들 중 하나.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는 명성이 높지 않는 슬라브 부족들을 묶어 평지에 사는 이들을 폴랴인, 숲에 사는 인들을 드레블랴인들로 불렀다. 키예프 루스처럼 느슨한 부족 연맹 국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유물과 유적도 꽤나 남아있다. 민족 자체는 11세기 쯤에 완전히 사라진다.[6] 동로마와의 무역통상 권리와 드네프르 강 하구 항구의 이용권을 얻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 측도 크림 반도 남부에 대한 불가침조약과 정착촌 건설 금지를 약속해줬다. 이 조약문은 당시 키예프 루스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조약문에 서명한 루스인이 총 76명인데, 왕족이 12명, 왕족 1인당 1명씩을 대표하는 외교관 11명, 수행원 27명, 따라온 상인 26명이다. 왕족과 귀족층인 외교관들은 거의 전원이 스칸디나비아식 이름을 갖고 있다. 오히려 왕족 중엔 현지인들과의 동화를 위해서인지, 슬라브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셋 있다. 귀족층 중 핀란드식 이름이 셋 있으나, 슬라브식 이름은 전혀 없다. 왕가부터가 외국에서 와서 그런지 슬라브인보다 핀란드인계 민족을 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평민 계층일 상인들에는 핀란드식 이름이 셋, 슬라브식 이름이 둘 있다.[7]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코로스텐[8] 동로마 제국 역사서에 남은 기록인데, 현대 학자 일부는 그냥 드레블랴인들에게 잡혀 죽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 신화테세우스와 도적 시니스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양념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9] 제작진이 뽑은 몇 명의 중요한 역사적 인물은 트레잇과 능력치가 고정되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