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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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초대 황제
太祖|태조


파일:리꽁우언.jpg

묘호
태조(太祖)
시호
신무황제(神武皇帝)
연호
투언티엔(順天, 1010년 ~ 1028년)
성씨
리(Lý, 李/이)

꽁 우언(Công Uẩn, 公蘊/공온)

조연(兆衍)
부왕
현경왕(顯慶王)
모후
명덕황후(明德皇后)
황후
입교황후(立教皇后)
생몰기간
974년 3월 8일 ~ 1028년 3월 31일
재위기간
1009년 ~ 1028년 3월 31일

1. 개요
2. 생애
3. 화교출신?
4. 출처



1. 개요[편집]


베트남 리 왕조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Thái Tổ, 타이또). 시호는 신무황제(神武皇帝). 휘는 리꽁우언(Lý Công Uẩn, 李公蘊). 자는 조연(兆衍). 능호는 수릉(壽陵)이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여러 강대국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국력을 높인 군주이다.

존호는 봉천지리응운자재성명용견예문영무숭인광효천하태평흠명광택장명만방현응부감위진번만예모신공성치칙천도정황제(奉天至理應運自在聖明龍見睿文英武崇仁廣孝天下太平欽明光宅章明萬邦顯應符感威震藩蠻睿謀神功聖治則天道政皇帝)이다.


2. 생애[편집]


974년, 박장(Bắc Giang) 꼬팝(Cổ Pháp, 古法) 주[1]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팜씨(Phạm Thị, 范氏)가 초산사(焦山寺)에서 노닐다가 신인을 만나 그를 임신했다고 한다. 3세때부터 어머니에 의해 리카인반(Lý Khánh Vân, 李慶文, 이경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의 소년 시절에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반하인선사(萬行禪師, Thiền sư Vạn Hạnh, 만행선사)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러한 후원 때문에 반하인선사가 리꽁우언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응티엔(Ứng Thiên, 應天, 994~1107) 연간에 크게 출세하여 중종을 섬기다가, 폭군 와조 때 호위대장직인 좌친위전전지휘사(左親衛殿前指揮使)까지 올랐다.

994년, 전 레 왕조의 황제로 즉위한 여와조[2]의 계속되는 폭정으로 인해서 민심이 추락했다.

1009년 11월 19일, 와조가 불과 24세의 나이로 침전에서 붕어하자, 전 레 왕조의 황족들이 서로 제위를 노리는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서 리꽁우언이 추대받는 형식으로 새로운 왕조의 황제로 등극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리꽁우언은 국호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호아르(Hoa Lư, 華閭, 화려)에서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수도를 하노이로 옮겼다. 하노이의 당시 명칭은 다이라성(Thành Đại La, 大羅城, 대라성)이었는데, 리꽁우언이 천도를 하기 위해 다이라성 아래에 정박했을 때, 그의 배에서 황룡이 나타났다고 하여 탕롱성(Thành Thăng Long, 昇龍城, 승룡성)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리꽁우언이 하노이, 즉 탕롱으로 천도한 이유는 호아르가 좁고 협소한 계곡지대에 위치해 외적의 침입 방어에는 용이하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경제 중심지인 홍하 델타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호아르가 토착세력의 텃세가 강했기 때문에, 전국을 수월하게 통치하려면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델타 중심부의 집단과 결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탕롱성의 축조 과정이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에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황제가 정무를 보는 건원전(乾元殿)을 지었고, 그 왼쪽에 집현전(集賢殿), 오른쪽에 강무전(講武殿)을 세웠다. 또 영춘궁(迎春宫)으로 통하는 비룡문(飛龍門), 위원문(威遠門)으로 통하는 단봉문(丹鳳門)을 만들었다. 또 정남쪽에는 고명전(高明殿)을 만들고, 이것을 모두 용지(龍墀)라고 했다. 고명전 주위로는 4면으로 회랑을 둘렀다고 한다. 건원전 뒤쪽에는 황제의 침전인 용안전(龍安殿)과 용서전(龍瑞殿)을 세웠고, 그 두 전각 왼쪽에 일광전(日光殿), 오른쪽에 월명전(月明殿)을 세웠다. 또 그 뒤쪽에는 궁녀가 거주하는 취화궁(翠華宮)과 용서궁(龍瑞宮)을 세웠다고 한다. 또 창고를 짓고, 성에 해자를 둘렀다고 한다. 성에는 4개의 문을 만들었는데, 동문을 상부문(祥符門), 서문을 광복문(廣福門), 남문을 대흥문(大興門), 북문을 요덕문(耀德門)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안에 흥천어사(興天御寺)를 짓고, 밖에는 승엄사(勝嚴寺)를 지었다. 그리고 오봉성루(五鳳星樓)를 만들었다고 한다.

1010년에는 북송으로 사절을 보냈는데, 송 진종이 그를 교지군왕(交阯郡王) 겸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로 임명했다. 당시 북송의 광동 지방관이 리꽁우언이 불의하게 권력을 찬탈했으니 적절한 조치를 내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진종은 비록 리꽁우언의 행동이 불의하긴 하나 만이(蠻夷)의 일이라 신경쓸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송 진종이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당시 송나라가 요나라 성종전연의 맹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베트남보다는 북방에 더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리꽁우언은 천도 문제와 대외문제가 해결되자 불교 후원에 힘썼는데, 1010년 전국 각지의 사찰과 도관(道觀)을 조사하여 수리하게 하고, 수도인 탕롱과 자신의 고향이었던 꼬팝 마을에 10개가 넘는 절을 신축하도록 했으며, 큰 종을 주조해 기존의 유명 사찰에 기증했다. 이러한 불교후원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황권 강화 목적도 있었겠지만, 당시 불교가 베트남에서 융성했고, 리꽁우언 본인이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이었다.

리꽁우언은 또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델타 주민들이 숭배하는 과거의 영웅들을 적극 추모했는데, 예를 들어, 1016년에 리비의 부장이었던 리푹만(Lý Phục Man, 李服蠻, 이복만)의 고향을 방문하는 길에 리푹만의 사당을 짓고,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던 사례가 있다.

리꽁우언은 1013년에 조세법도 제정했는데 그 과세 대상은 ①연못과 경작지 ②뽕나무 및 돈과 곡식 ③산간지방 번진(藩鎭)의 산물 ④요충지에서 관리되는 소금 ⑤만료(蠻獠)[3]의 땅에서 생산되는 무소의 뿔, 상아, 향료 ⑥수원지에서 나는 목재, 과일 등 모두 6가지였다.

리꽁우언은 지방행정구역도 개편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유인선 교수에 의하면 전국을 24로(路)로 나누고, 그 밑에 부(府)와 주(州)를 두었으며, 다시 그 밑에는 현(縣)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행정구역이 완전히 일원적으로 정리되지는 않았는데, 딘보린이 설치한 도(道)와, 현에 대응하는 군(郡)이 남아있었음이 이를 방증한다. 또한 주(州)라는 행정구역이 산간 지방에 두어졌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하지 못했다. 이는 리 왕조의 행정력이 전국에 미치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1011년과 1012년에 타인호아(Thanh Hóa, 淸化, 청화)와 응애안(Nghệ An, 乂安, 예안)의 산간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군을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 촌락을 불태우고 주동자들을 생포해 돌아왔다. 그가 직접 친정에 나선 이유는 그의 무공을 내세워 '용맹한 자'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리꽁우언은 신생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남방에도 관심을 가져 1020년, 태자였던 리펏마(Lý Phật Mã, 李佛瑪, 이불마)에게 남쪽 변경을 공격하는 참파를 치게 했다. 리펏마는 오늘날 꽝빈성 북부에서 참파군과 대결하여 그 장군을 참수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1028년, 태조 리꽁우언은 55세의 나이로 탕롱의 용안전(龍安殿)에서 붕어했다. 태조의 아들들이 제위를 둘러싸고 3왕의 반란을 일으켰고, 황태자인 아들 리펏마가 반란을 진압하며 황제로 즉위했다. 왜 리펏마가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났냐면, 태조 리꽁우언이 다른 황자들에게도 똑같은 권한을 줘서 권력이 황태자에게 집중이 안됐기 때문이었다.


3. 화교출신?[편집]


한편 리 태조가 화교 출신이란 설도 있다. 북송의 학자 심괄(沈括, 1031~1095)이 저술한 《몽계필담》(夢溪筆談)의 기록[4]푸젠성에서 발견된 족보 《이장추내이씨방보》(李莊𤆬內李氏房譜)에 근거한 것인데, 쩐 왕조 시기 레 딱(Lê Tắc, 黎崱, 1263~1342)이 저술한 지리지인 《안남지략》(安南志略)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5] 일단 《이장추내이씨방보》(李莊𤆬內李氏房譜)에서는 리꽁우언의 아버지가 푸젠성 상인 이순안(李淳安)이며, 어릴적에 리꽁우언이 아버지와 같이 베트남으로 가서 장사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해당 족보에 기록된 리꽁우언의 출생년도가 《대월사기전서》보다 10년 정도 늦기 때문에[6] 신빙성 문제가 있으므로 알아서 판단하자.


4. 출처[편집]



[1] 현재의 박닌 성 뜨선 현이다.[2] 치질이 있어 드러누운 채로 정사를 맡아서 와조(臥朝, Ngọa Triều)라는 시호를 얻었다.[3] 중국 서남부 계곡지대에 살던 소수민족들을 일컫는 말[4] 여환이 죽자 안남이 매우 어지러워졌는데, 오랫동안 국주가 없었다. 나중에 국인들이 함께 민지역 사람인 이공온을 국주로 삼았다. (桓死,安南大亂,久無酋長。其後國人共立閩人李公蘊為主。)[5] 이공온은 교주 사람으로 (어떤 이는 민지역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니다), 병법에 밝았다. 李公蘊,交州人 (或謂閩人,非也),有韜略。[6] 북송(北宋) 옹희 원년(雍熙 元年, 984년) 1월 14일생이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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