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카이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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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29대 내각총리대신
이누카이 쓰요시
犬養毅 | Inukai Tsuyoshi


파일:Inukai_Tsuyoshi.jpg

출생
1855년 6월 4일
빗추국 카야군 가와이리촌
(現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키타구)
사망
1932년 5월 15일 (향년 76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수상관저
(現 도쿄도 치요다구 수상관저)
재임기간
제29대 내각총리대신
1931년 12월 13일 ~ 1932년 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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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이누카이 치요코
자녀
요시자와 미사오 (장녀)
이누카이 스기 (장남)
이누카이 타케루 (삼남)
학력
게이오기주쿠[1] (중퇴)
정당

지역구
오카야마 2구
의원 선수
18 (중)
의원 대수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약력
우편호치신문 기자[2]
도카이경제신보 창간인
통계원 권소서기관
도쿄전문학교 제1회 의원
중의원 의원
제15·35대 문부대신
제27·29대 체신대신
제45대 외무대신
제50대 내무대신
제6대 입헌정우회 총재
제29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2.1. 총리 이전
2.2. 총리 시절
2.3. 만주사변과 암살
3.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각료, 내각총리대신.

총리로 재직한 세월은 고작 5개월에 불과하지만, 오랜 세월 정치거물이었고 총리직은 그의 인생의 정점이었다. 무엇보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장교들에게 피습당해 총리 재직 중 사망했다(5.15 사건).


2. 생애[편집]



2.1. 총리 이전[편집]


파일:external/dictionary.goo.ne.jp/102650.jpg
문부대신 시절
이누카이 쓰요시는 1855년 6월 4일, 에도 막부 빗추국(현재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모쿠도(목당/木堂)이서 모쿠도 선생이라고 많이 불렸다고 한다.

게이오기주쿠[1] 입학 후 신문 견습기자로 취직하면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게이오 중퇴 후에는 신문사를 창간해(!) 보호무역론을 옹호했다. 견습기자 시절 알던 선배의 인연으로 통계청에 근무하기도 했었지만 곧 퇴직했다.

이때 오자키 유키오를 처음 만났는데 이후 두 사람은 거의 같이 붙어다니게 된다. 신문사, 정당, 잡지사 등등 같은 회사에 입사와 퇴사 시기가 비슷하다. 그리고 오자키가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문부대신으로 입각한 뒤 얼마 안 있어 소위 '공화연설 사건'으로[2]로 사임하자 임시로 문부대신을 맡기도 했다.

2.2. 총리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29.jpg
29대 총리 취임 후
민정당와카쓰키 레이지로 총리가 모이지 않는 내각 의견에 화나서 사임하자 입헌정우회로 다시 정권이 돌아왔고, 드디어 후임 총리로 결정되었다. 원래는 의원들과 원로들이 당시 슬슬 폭주해가던 군부를 억누를 요량으로 이누카이를 후임 총리로 선출한 것인데, 결과적으론 악수가 되어버렸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21일째)에서 이봉창 의사가 쇼와 덴노를 처단하려다 실패하게 된다(사쿠라다몬 의거). 이에 따라 사임하려 했으나 덴노의 반려와 사이온지 긴모치 전 총리의 중재로 유임했다.[3] 훗날 이누카이의 운명을 생각하면 오히려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안전했으리라는 의견도 있어 돌이켜보면 씁쓸한 대목이다.

2월 20일에 벌어진 제18대 총선에서는 301:146으로 민정당을 크게 따돌리며 거대 여당이 되었다. 이에 힘입은 이누카이는 원로의원들의 바람대로 군부를 혹독하게 지배하려 들었고, 외교 면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온건주의 노선을 지향하려 노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 일본 제국 기준으로의 온건주의라 한반도 식민지배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전 내각들과 다르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물론 정우회는 민정당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참전여론이 강했다. 하지만 이누카이 개인은 국제연맹 등의 여론이 좋지 않음을 인지하고 만주국 설립을 막고 일본과 중화민국이 모두 합의하는 선에서 만주에 자치정부를 두어 양국이 함께 관리하고 일본은 경제권만을 취하는 방식의 합의를 보려는 주장을 했다고.

여하간 이 시점은 일본이 전쟁에 휩쓸리냐 마냐를 결정하는 마지막 분기가 되었고, 결국 헌정 최후의 보루였던 이누카이의 죽음과 함께 일본은 그대로 군국주의의 나락으로 들어가고 만다.

2.3. 만주사변과 암살[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y_15_Incident.jpg
파일:이누카이데스마스크.jpg
이누카이의 사망을 알리는 신문 기사
이누카이의 데스마스크

만주사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누카이 내각은 당시 국제연맹 주도의 리튼 조사단에서 내놓은 합의안, 즉 만주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되 일본에 의해 조종되는 지방정부를 성립시키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권익을 보장하는 방안으로 출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폭주하던 군부는 정우회 내의 실력자인 모리 쓰토무[4]와 결탁하여 당내 분열을 조장하면서 정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 결과는 5.15 사건이었으니, 우유부단한 총리에게 정권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젊은 해군 장교(와 육군 사관생도)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총을 쏜 이는 구로이와 이사무).

당시 이누카이 쓰요시는 휴일이기에 관저에서 쉬고 있었고 아내는 외출중이었다. 총리 관저로 온 해군 군인들은 해군 소위 2명과 생도 3명인 5명이었는데 수상 관저의 정문과 후문으로 나눠 들어왔는데, 경비원이 이를 보고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알고는 쓰요시한테 와서는 빨리 피신하라고 했다. 하지만 쓰요시는 거절하며 그들을 만나겠다고 했다. 결국 정문으로 들어온 장교가 먼저 총리를 발견하고 권총을 쐈지만 불발이었다. 식사 직전이었던 총리는 "기다려, 총은 언제든지 쏠 수 있네. 말로 하면 알아듣네!"라고 하면서 응접실로 이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후문으로 들어온 군인 4명이 응접실에서 총리를 발견하자마자 "문답무용, 발사!"라고 명령을 내렸고, 이번엔 불행하게도 불발이 아니어서 이누카이 쓰요시는 총알 3발을 맞으면서 그대로 사망했다. 군인들은 그가 죽을것임을 알고는 내버려두고 떠났으며 하녀가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누카이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이후 주모자 11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는 살해 당일 일본을 방문한 찰리 채플린을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를 살해한 장교들은 찰리 채플린 역시 죽이려 했으나 찰리 채플린은 살아 남았다. 찰리 채플린은 이누카이 쓰요시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했다. 5.15 사건 문서의 여담 참조


3. 여담[편집]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는 소설가였다가 그가 총리가 되기 직전에 정계에 입문해 태평양 전쟁 이후 전후 일본민주당 총재와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법무대신을 지냈다[5]. 전후 일본민주당이 정우회와는 대립각을 세우던 일본 민정당의 후예격이라는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고[6], 과연 민주당은 다케루 시기 자유당에 합당되고 만다.[7] 이 사건 때문에 아들 다케루가 채플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란 가정이 떡밥거리처럼 다뤄진다고 한다. 부자가 둘다 끔살…/ 혹은 운 좋게 쓰요시가 살아난다든가 여러 가정이 가능하다.

손녀(다케루의 장녀) 이누카이 미치코(犬養道子)는 일본 가톨릭계의 유명 인물로 여러 종교서적을 저술한 평론가로 유명하다. 다른 손녀 안도 카즈는 안도 사쿠라의 어머니다. [8] 즉 이누카이는 안도 사쿠라에게 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1896년 4월에 간행된 『일본인』 제19호에 기고한 바가 있는데 제목이 「어떻게 하여 조선을 개화시킬까(如何(いかにして朝鮮を開化すべきか)」다. 내용을 보면 제목부터 한반도에 우에까라메센(上から目線, 깔보는 내려다보는 눈길)을 드러내는데 본문은 더 가관이다.

吾輩(わがはい (つね(ふ 日本人は 性質 高尙にして 各個 獨立の 氣象を 有し 人の 奴僕(やつこたるを (あまんぜざるが (ゆゑに 勞力者たるに 適せずして 勞力者を 指揮するに 適せり (…) (たとへば 朝鮮人は アングロサ 種族の 豪弜なる 精神 なくして 其の 健康なる 身體(からだ(そなえたる ものの (ことく 實に 勞力者として 世界 無比の 人民なり.

내가 늘 말하건대 일본인은 성질 고상하여 각개 독립의 기상을 지녀 남의 종살이를 아니 달갑게 여기니 때문에 노역자를 하기에 아니 알맞고 노역자를 지휘하기에 알맞으니 (중략) 비유하건데 조선인은 앵글로 색슨 종족의 호강한 정신은 없지만 그 튼튼한 몸을 갖춘 것과 같아 실로 노역자로써 세계에 비교할 바가 없는 인민이로다.[9]

[10]


2022년 7월 8일에 90대, 96~98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아베 신조사망하였는데, 조슈 기반 총리가 해군(해상 자위대)출신으로부터 저격당한 점이 유사한 사건이다.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5.15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게임 시작시인 1936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15일 좌익적인 해군 장교들이 가타야마 센을 암살하는 백색테러의 복수로 그를 암살하며 4년 늦게 5.15 사건이 터지고 흔들리던 일본의 민주주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7:45:20에 나무위키 이누카이 쓰요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에는 대학 인가 전이었다. 게이오기주쿠가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승격된 것은 1920년이었다. 이때 도쿄전문학교도 와세다대학으로 동시 승격되었다. 고로 소케이가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이다.[2] 금권 정치를 비판하기 위한 오자키 유키오의 연설을 정당 내각을 혐오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측에서 천황제를 부정하는 공화주의 연설이라고 매도해 실각시킨 사건이다.[3] 만약 이렇게 됐으면 그야말로 한 달도 안 되는 역대 최단 임기 내각이 되었을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1월 8일에 있었고, 이누카이는 이 의거 당일인 1월 8일에 사임을 주청했으나 덴노가 다음 날 반려했다. 진짜 일본사 최단 재임 총리는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다. 그러나 최단임 총리인 히가시쿠니가 명줄로는 오히려 최장수(= 102세) 총리였다. 두 번째로 장수(= 101세)한 총리는 2019년 타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나카소네는 히가시쿠니와 달리 총리를 3 연임 하여 재임 기간도 길었다.[4] 모리 가쿠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5] 다만 자유당과의 합당 추진과정에서 탈당파들이 발생하고 요시다 수상이 강화협상 이후 전범들의 정치활동 금지를 전면 해제하면서 실세했다. 법무대신은 소수당이나마 연립내각의 총재가 받기엔 그렇게 실권있는 자리는 아니었다고.[6] 근데 그렇게 따지면 또 일본 민정당은 일본 정우회에서 와카자키 레이지로 등의 탈당파들이 외부의 호헌회와 연합하여 세운 정당이다. [7] 다만 합당에 동의하지 않은 잔류파들이 1955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이들이 자유당과 자유민주당을 결성하며 55년 체제가 이루어졌다.[8] 안도 카즈는 다케루가 게이샤 오기노 마사코에게서 얻은 사생아고 나중에 입적된터라, 나이차가 아버지와 딸이라기보단 할아버지와 손녀에 가까웠다.[9]모지항의 조선인 항만 노무자(門司港の 朝鮮人 港灣 勞務者), 오노 토시히코(小野俊彦(をのとしひこ), 130p.[10] 이것이 현대 일본의 한국관으로 유지된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