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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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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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파일:daejongfilmawards_log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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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제18회
(1979년)


제19회
(1980년)


제20회
(1981년)

최불암
(달려라 만석아)

이대근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남궁원
(피막)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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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제15회
(1979년)


제16회
(1980년)


제17회
(1981년)

박근형
(망명의 늪)

이대근
(심봤다)


신영일
(매일 죽는 남자)





파일:external/thumb.mtstarnews.com/2006082909165522213_1.jpg

성명
이대근(李大根)
출생
1940년[1] 7월 1일 (83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학력
배명고등학교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 / 전문학사)
가족

첫째딸('71)[2]
둘째딸('75)[3]
셋째딸('80)[4]
동생 이용이,매제 김일우
종교
무종교개신교, 장로
거주
미국 워싱턴 D.C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주요 출연작
4.1. 영화
4.2. 드라마/시트콤



1. 개요[편집]


대한민국배우. 대종상 남우주연상 수상자.


2. 생애[편집]


1940년 7월 1일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먹 생활을 하던 이상돌 씨로 이대근이 운동을 시작한 건 아버지 영향이 크다고. 어릴 때부터 복싱이나 레슬링 등을 하고 체격도 건장한 편이라, 데뷔 전엔 운동 쪽으로 진로를 잡았었다. 혈기가 앞서 싸움을 많이 하다보니 고등학교 전학만 7번을 다녔다고 한다. 서라벌예대를 다녔고 졸업 후엔 연극 무대를 전전했다.

1967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으나 오랫동안 무명으로 지냈다. 결혼도 무명 생활 도중 했다. 득녀를 한 후인 1974년 당시 대표 액션 영화 감독이었던 김효천실록 김두한에서 주연 김두한으로 대성공해, 박노식, 장동휘의 계보를 잇는 7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가 됐다. 김효천은 원래 신인 배우를 파격적으로 기용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대근이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신인이면서도 이대근은 당당히 높은 몸값을 요구해 관철했다. 당시는 스턴트맨없이 액션신을 찍어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고 한다.# 시즌 끝까지 김두한 역을 소화했다.

그러나 70년대는 한국 영화사의 암흑기로 흥행작들이 빠르게 잊혀져 갔으며, 이대근의 액션 커리어 역시 빠르게 잊혀져 버렸다. 80년대가 되자 비디오 테이프가 보급돼 B급 영화 시장의 판도가 빠르게 바뀌는 과정 속에서, 이대근은 , 변강쇠 등의 에로영화가 대히트를 쳤다. 이대근은 미묘한 쪽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이미지가 바뀌어 버렸다. 건장한 근육질 몸에[5] 골격이 두드러지는 남성적인 마스크와 우격다짐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코믹한 데가 있는 연기로 색마 캐릭터를 해학적으로 소화해내는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게다가 이름마저도 大根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배우 협회 이사, 영화인 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남기남감독이나 정윤희와 공연했고 신상옥 감독과 부인인 배우 최은희와도 깊은 교유를 나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청소년들에게는 정력남의 상징으로 이대근 특유의 말투는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도 개그맨 성대모사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90년대 에로물의 열기가 식자 이대근의 커리어 역시 침체기에 빠지며 그 때 커리어는 한물 간 B급 에로물이나 성인멜로물에 국한된다. 21세기에야 한국 영화 역사에서 중요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많은 영화계 후배들의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2006년에 이대근에게 바치는 영화 <이대근, 이댁은>이 개봉됐다. 이후는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으면서 연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쪽의 커리어는 정극 연기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이 배역들은 기존 에로 배우, 액션 배우 이미지와는 매우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대표적인 배역은 공화국 시리즈차지철 역과 서울의 달의 영감님 역. 이것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1982년 <무역왕 최봉준>이라는 사극 전기물에서 주연을 맡은 적도 있다.


3. 여담[편집]


  • 그의 대표작인 <> 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감독안기부에 끌려갔다고. 마지막 장면에 삼돌이가 장승을 도끼로 패는데 장승에 사또를 오버랩시킨 장면에 이거 정부에 대한 저항아니냐고 트집을 잡혔다고 한다. 결국 그 장면을 들어냈다고. 베테랑 배우로서 자신이 볼 때 감독의 연출력에 실망해 '이것도 작품이냐'고 화를 내고 따졌지만 결국 대흥행을 해 미안했다고 한다. 원래 나도향의 작품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시나리오야 탄탄한 편이고 결국 <뽕>으로 영화평론협회상을 수상했다.
  • 1970년대 중반 이장현[6]이란 예명으로 활동했지만 몇 년 안 가 다시 본명인 이대근으로 돌아왔다고.[7]
  • MBC 시대극 공화국 시리즈의 고정 멤버이기도 했는데 이영후 = 백범 김구, 박규채 = 이기붕, 김무생 = 장면, 노주현 = 장도영, 이창환 = 박정희, 이정길 = 김종필, 박용식 =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이대근 = 차지철 전담이었다.
  • 연예계 활동을 접다시피 해서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연남동의 선민교회란 곳에서 장로를 지냈다고. 보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좌파는 괜찮지만 극좌는 안되며 그 극좌들이 영화진흥기금을 멋대로 하고 나같은 사람은 영화도 못만들게 했다고 분노를 보였다. 개신교 관련 연기 아카데미[8]에서 연기 지도를 하기도 했다.
  • 처가의 반대에도 아내와 어렵게 결혼해 딸 셋을 뒀다.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서 살던 친구의 동생이라고. 처가도 학자들 집안에 아내도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 좋아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처가에서 무명의 배우인 자신을 반대해 식 날 몇 명 오지도 않았었다고. 아내는 물론 딸들도 공부를 잘해 첫째와 둘째는 약학박사로 미국 FDA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부부와 딸 셋 가정 모두 워싱턴 D.C에 거주중이다.
  • 90년 대 중반 MBC 시대극인 소위 공화국 시리즈에서 이대근은 차지철 전문 배우였다. 단순 무식 이미지도 잘 맞았지만 딸 셋인 것도 같았고 셋 다 미국으로 가서 산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차지철의 처자들은 81년에, 이대근의 처자들은 그 이듬해인 82년에 미국 이민을 간 것도 소름돋는다.
  • 첫째딸과 셋째딸이 청각장애를 갖고 있어 미국으로 일찍 보냈다고 한다. 그가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바로 미국 뉴욕으로 연수를 갔는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고 '미국이 한국보다 백 년은 앞섰구나'란 생각이 들어 딸들을 보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대근은 기러기 아빠로 미국과 한국을 280번 이상 왕복했으며, 2022년 현재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세 딸 모두 결혼해 손주가 모두 7명이라고.
  • 미국에 정착하려고 보니 돈이 너무 부족해 그의 출연작인 <뻐꾸기는 밤에도 우는가>, <시라소니>의 비디오 테잎을 내밀고 미국의 은행에서 대출을 5만불[9]이나 받았다고 한다. 교포들도 이건 말이 안된다 진짜 그게 가능하냐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실화라고 한다.
  • 그는 계약에 관해 승부사 기질이 있었는데, 처음 그가 인기를 얻은 실록 김두한 시리즈를 찍을 때 감독에게 딜을 걸어 40만원 이상 안주면 안하겠다고 버텼다 한다. 그 큰 돈을 시리즈로 받다보니 살림살이가 많이 나아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미국에 가서도 은행에서 5만 불을 달랑 출연작 두 편 테이프를 들고가 빌려왔다. 그 길로 바로 미국 현지의 YMCA 회관에 직접 찾아가 매점 자리를 10년 임대로 따냈다고 한다. 가족들의 미국 생활 수단을 만들어놓고 단신으로 다시 귀국해 본격적으로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다.
  • 1970년대와 80년대는 그의 시대였다. 70년대는 액션 배우로 80년대는 에로 배우로 전성기를 달렸는데, 1년에 백 편도 넘는 시나리오가 들어와 회사에서 30개 정도 뽑으면 마지막으로 이대근 본인이 17~18편 정도를 확정해 말그대로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했다고 한다. 80년대 연예계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이 본인, 2등이 무려 이주일이었다고.
  • 대부분의 커리어가 액션 영화와 에로물이지만 문예영화나 멜로물, 정극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TV도 시대극을 많이 했다. 실생활은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대중의 이미지와 실제의 이대근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 신상옥 감독이 부인 최은희북한에 납치돼 선전 영화를 찍던 당시, 김정일이 남한의 최고 배우로 이대근을 지목했다고 나중에 생환하고 나서 직접 말해줬다고 한다.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나까지 납치되면 곤란한데'라며 빅웃음을 줬다고.
  • 83세의 나이였던 2022년 코로나 시국에 오랜만에 부부가 귀국해 한국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고. 기자들도 만나고 국내 여행도 다니고 바쁘게 보냈다고 한다. 80대가 훌쩍 넘은 거 같지 않은 혈색과 건강이었다.
  • 18살 터울의 여동생 이용이 역시 배우이다.[10] 매부, 즉 이용이의 남편이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활동했던 배우 김일우[11]이다. 그리고 이 배우의 정확한 필모그래피는 사실상 정리가 불가능하므로 참고만 하자. 본인도 다 기억 못할 정도로 상당히 많은 영화 및 비디오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4. 주요 출연작[편집]



4.1. 영화[편집]


  • 흑점(속 제3지대) 1969년[12]
최무룡의 영화로, 최무룡은 여기서 감독 겸 주연으로 나온다. 그외에도 박노식이나 오지명도 나온다. 내용은 반공영화... 이대근은 조연이다.

하녀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로 유명한 김기영감독의 영화로, 71년작인 화녀(하녀의 리메이크)의 속편이다. 여기서도 조연이다(...)

김효천 감독의 영화. 이대근의 출세작.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창작물에서 볼 것. 이대근은 여기에서 스타로 발돋움했으며 이후 70년대 <김두한 시리즈> 전편에서 김두한 역으로 출연한다. 1970년대는 스크린 쿼터 제도 덕분에 제작비가 저렴한 B급 영화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지던 시절로 당시 이 영화와 비슷한 유형의 액션 영화들이 속출하였다. 실록 김두한의 성공 덕분에 이대근은 이후 개봉된 김두한 시리즈를 비롯, 이런저런 수많은 액션영화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70년대의 사람들에겐 "김두한 = 이대근"이었던 셈. 김효천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던 이대근을 발굴한 까닭은 덩치와 외모가 김두한을 연상시켜서라고 알려져 있다. 덧붙여서, 이대근은 몇년 뒤 시라소니 영화에서 시라소니 역까지 맡았다. Q: 김두한이랑 시라소니랑 싸우면 누가 이겨요? A: 그냥 둘 다 이대근이야!
파일:external/37e73d8f807d78e8b30127bb532084525673a37a0992a9dcc09494e9b80c2650.jpg

오발탄의 유현목 감독의 영화. 윤흥길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13]을 원작으로 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잘 다루었다. 이대근은 주인공인 나(동만)의 빨치산 삼촌 역할을 맡아 출연했다. 조연이었지만, 그의 커리어 중 몇 편 안되는 그럴듯한 정극 중 하나이므로 이 항목에 실리게 되었다(...).


정진우 감독의 영화로 정비석성황당이 원작이다.[14] 조선시대 말기,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로 원작과는 달리 여주인공 순이가 죽는 베드 엔딩이다. 정윤희가 여주인공 순이 역으로 나온다. 연출, 노출,구도 모두 수준급이지만, 19세라서 청소년들은 극장에서만 못보았지만 어둠의 루트로 본 사람들이 많다(...) 포스터 # # 장면 # 장면2


파일:external/image.cine21.com/M0020302_1.jpg
  • 평양 박치기 1982년 작
남기남의 영화로, 백일섭과 함께 나온다.



여기서부터 그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영화 ‘돌아이’ 와 앞서 말한 최후의 증인으로 유명한 이두용 감독의 영화. 이대근은 여기서 삼돌이로 출연한다.

파일:external/www.luv-vera.net/_copy.png
변강쇠 역. 1985년작 과 더불어 2연타를 찍었고 이후 이대근은 영원한 변강쇠 옵빠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실존주의를 연구... 할리는 없고, 에로 코미디 영화.



연산군 역을 맡았다. 상대 장녹수 역은 강수연.

조갑제의 코리안 커넥션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신성일[15]이 형사로 나온다. 놀랍게도 형사가 UZI 기관단총을 들고나온다(...) 당시 영웅본색 류 영화를 따라잡는다며 홍보했지만 그야말로 7~80년대 유치한 총기음을 비롯하여 엉터리 고증에 원작자답게 결국은 반공 수준 줄거리로 흥행은 참패했다.

장선우 감독의 90년대 대표작이자 흥행작. 이대근은 여기서 조연으로 출연. 그리고 이대근의 커리어 중 몇 안 되는 정상적인 영화인 까닭에 이 목록에 등재(..).

전태식 감독의 드라마 멜로 영화. 역시 19금 영화이다. 준호의 선배인 짜리 역으로 출연한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만연했던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로 출연하였다. 백백교의 만행을 폭로하는 내용이 줄거리이지만 상당부분의 장면이 검열삭제. 그래도 이 영화는 신흥종교문제 연구소장이었던 고 탁명환의 자료제공 및 자문을 통해 만들어졌다.

감독: 김동원, 주연: 이정진, 양동근, 임창정, 한채영, 조폭 큰형님역: 이대근

이대근은 여기서 독거노인으로 나오는데, 아내의 제사날이 되자 자식들이 돌아오고 소동이 일어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배우 이대근에게 사실상 오마주를 바치며, 이대근 세대의 현재를 조명하는 영화. 그러나 코미디영화로 마케팅되었으며 딱히 흥행은 하지 못했다.


4.2. 드라마/시트콤[편집]




  • 사미인곡 1976년 작

  • 거상 임상옥 - 임상옥 1976년 작


고산자 김정호 역으로 열연을 보였다.

MBC 조선왕조 5백년 시리즈의 제 3부이다. 여기서 이대근은 홍윤성 역을 맡아 정진이 맡은 한명회와 콤비를 이뤄 연기했다.

박민호 역을 맡았다.

방영 이후 20년이 지난 후까지도 걸작으로 회자되는 드라마. 이대근은 여기서 달동네 하숙집의 주인 영감 역으로 출연하였으며, 이대근의 연기는 많은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파일:external/focus.history.chosun.com/5679_11.jpg

한진희 초록시장의 아버지인 한대통 역을 맡았다.



하충식 역을 맡았다.


  • 발효가족 2011년[16]
설노인 역을 맡았다.

[1] 프로필 상으로는 1943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2022년 우먼타임스 유진상 대기자와 인터뷰에서 실제 나이는 그 보다 3살 많다고 밝혔다. 사실 67년 KBS데뷔는 43년 생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43년생이 67년에는 우리나이로 스물다섯인데 뭐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군대 문제와 연극 무대 커리어를 생각하면 40년 출생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2] 미국 FDA 고급 공무원, 남편 목사.[3] 약학박사, FDA 근무, 둘째 사위도 박사.[4] 미국에서 교사로 재직, 남편은 사업가.[5] 전성기에는 몸이 거의 비시즌기 보디빌더 수준이었다. 강인한 남성미를 선호하던 당시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섹스 심벌 그 자체.[6] 李章玄[7]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이대근과 같이 예명으로 바꾼 연기자가 변인철이었다. 이대근과 달리 변인철은 변희봉으로 예명을 바꾸어 50년 넘도록 활동했다.[8] 피플 지 아카데미[9] 당시 강남의 고급 아파트 값은 된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20~30억에 달하는 거금이 될 듯 하다.[10] 하나뿐인 내편에서 금옥 역할을 맡은 그 배우 맞다.[11] 1953년 생. 10살 연하의 후배 배우 김일우와는 동명이인인 배우로, 투캅스 시리즈, 엽기적인 그녀아가씨가 떡이 됐네 등 여러 한국 영화들에서 감초 조연을 맡았고, 1996년 학생부군신위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2004년, 위암으로 신부수업을 유작으로 세상을 떠났다.[12] 대부분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3지대" (1968년)를 이대근의 영화 데뷔작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속 제3지대"가 그의 영화 데뷔작이다.[13]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원작 소설 일부가 실려 있다. 7차 교육과정 국어 교과서(상)에도 결말부가 수록되었다.[14] 원작에서는 남주인공이 풀려 나오고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친구와 떠나다가 되돌아 오는 걸로 끝난다. 즉, 해피엔딩.[15] 강이 성이고,이름이 신성일[16] 이 드라마가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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