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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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現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이종범, 홍현우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의 후기 전성기에 기여한 대표적인 90년대 데뷔 선수로 조계현, 이강철과 함께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강철, 이종범, 장성호와 함께 해태 타이거즈와 KIA 타이거즈를 잇는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특히 역대 타이거즈 투수진에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한 선수이다.[7] 특히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기록한 10타자 연속탈삼진 기록은 지금까지도 그의 투수 시절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된다.
2. 선수 경력[편집]
3. 피칭 스타일[편집]
전성기 시절 강속구와 커브를 앞세워 리그 최상위권 투수로 명성을 떨쳤으나, 치명적인 부상을 겪으며 과거의 기량을 보이지 못하게 되자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여 롱런한 유형의 투수.
특히 그의 파워커브는 전성기 시절에는 엄청난 위력과 낙차을 선보였으며, 그를 ACE of ACE로 만들어 준 특급 변화구였다.
4. 지도자 경력[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대진/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1.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대진/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수상[편집]
6. 연도별 성적[편집]
7. 여담[편집]
- 2013년 11월 30일, 문학 야구장에서 개최된 2013 한일 레전드 슈퍼게임에서 중간 계투에 등판하여 2이닝을 깔끔하게 틀어막으며 아직도 살아있는 기량을 과시했다. 특히 중간중간 섞어서 던지는 폭포수 커브는 정말 이 사람이 은퇴한 선수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 실제로 2011년에 LG 트윈스가 이대진을 영입한 이유가 아직도 2군에서는 타자들을 갖고 논다는 정보 때문이었다고. 실제로 2군에서는 가히 날아다녔던 걸 감안하면 왕년의 짬밥이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던 모양.
- 어렸을 때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고, 어깨 부상으로 인해 한창 재활하던 시절 미국을 여러 번 오가면서 영어를 꽤 익혔는지, 통역없이 외국인 선수와 직접 대화할 정도로 영어 회화에 능통한 편이다.[8] 여담으로 통역을 거치게 되면 서로의 생각을 100% 완벽하게 소통하기 어려운데 직접 대화하는 게 팀 분위기를 좋게 만든다. 한화 수석코치로 영입된 이유도 "능숙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어 수베로 감독을 충분히 보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라고. 다만 2016-17년은 그야말로 KIA 불펜진이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 점으로 인해 가진 게 영어툴 뿐이라는 비아냥이 거셌다. 심지어 "중국어를 배워볼까 한다"고 했다가 팬들로부터 제발 중국어 배워 중국이나 대만 가서 코치하라는 욕만 먹었다.
- Love Together Shift를 고안한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투수 쪽만 알고 있다보니 수비 시프트에 대한 무지에서 빚어진 해프닝이 되었는데, 문제라면 이걸 여과없이 받아들여서 써먹은 사람은 김기태 감독이라는 것.
- 묘하게 염종석과 비슷한 점이 여럿 있다. 혹사로 여러 번 수술을 했던 점, 루키시즌에 10승 이상을 해서 우승에 공헌한 점, 그리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한 것이 있다만, 둘 다 지도자로서는 영 꽝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염종석은 끝내 2008 시즌까지 93승을 달성하고 방출, 눈물을 흘리면서 부탁을 했지만 롯데에게 그러한 아량은 없어 100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면 이대진은 끝끝내 구단이 여러 번 기회를 받아 마침내 류현진과의 대결에서 100승을 이루게 되는 점을 차이다.
- 원더리그스타에 이대짐이란 가명으로 등장한다. 게임이 발매될 당시인 94년에는 신인이었다.
- 2020년 10월 박명환야구TV에 출연했다. 진흥고는 당시 팀 전력이 약해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와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했으며 무등기에서는 박명환이 임창용과 김병현에게 안타를 뽑아낸 적이 있다고 한다.
- 비슷한 시기 박명환과 같이 프로동네야구 PDB에도 출연했는데 120km대의 속구를 던졌다.
- 한용덕 前 한화 감독과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 이 이야기는 본인들도 알고 있는데 이대진의 어머니가 TV에서 한용덕을 보고 '내 아들이 왜 저기서 한화 유니폼을 입고 있나?' 라고 말하시고, 한용덕도 이대진을 볼 때마다 '내 친동생이랑 너랑 정말 닮았다.'라고 닮은꼴을 인정했다.
- 상안검 수술을 하면서 김상경|이 사람과 닮아졌다.
8. 관련 문서[편집]
[1] 2002년에 잠깐 타자로 전향했다가 2003년부터 다시 투수로 전향했다. 전향 당시 포지션은 3루수와 외야수였다.[2] ~6월 9일[3] 2014년 6월 10일~2018년 6월 7일[4] 6월 8일~7월 16일[5] 2018년 7월 17일~2019년 5월 16일[6] 5월 17일~5월 20일[7] 93년 데뷔해서 곧바로 1군 전력으로 쓰였고 95년부터 98년까지 강속구와 커브를 앞세워 리그 최상위권 투수로 자리하며 전성기를 맞았지만, 이후론 부상으로 신음하며 과거의 기량을 보이지 못한다. 팀도 왕년의 스타를 그냥 내치진 않고 타자 전향도 시도하는 등 방법을 찾았지만 존재감은 서서히 옅어졌고 경기도 거의 나오지 못한다. 07년 약간의 반등을 보이기도 하고, 09년엔 조범현 감독의 신임 아래 6선발로 기용되며 고대하던 통산 100승을 거두고 12년만의 팀의 우승도 함께하게 되지만 부상으로 구위와 구속을 잃고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한편으론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가장 가슴 아팠을 선수 본인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과 결과적으론 말년에 임팩트 있는 장면까지 만들었기에 역경 끝에 좋은 귀감으로 남았다.[8] 다만 포수는 못 알아듣기 때문에 투수코치로써 마운드에 방문할 때는 통역을 데리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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