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진/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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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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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시절.

1. 선수 시절
1.1. 전성기
1.2. 시련 그리고 극복
1.3. 2009 시즌
1.4. 2010 시즌
1.5. 2011 시즌
1.6. 2012 시즌



1. 선수 시절[편집]


이대진 전 기아 투수코치의 현역시절을 담은 문서이다.


1.1. 전성기[편집]


전성기의 이대진은 정통파 강속구 투수로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150km/h에 육박하는 무거운 돌직구에 파워 커브, 그리고 간간히 포크볼을 섞어 던졌는데, 두산 김민재 코치에 따르면 선발인데도 오승환보다 묵직한 돌직구를 던졌다고 한다.[1] 1993년 고졸 투수로 10승 5패 2세이브를 얻으며 화려하게 데뷔, 이듬해에는 소포모어 징크스였는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95년 14승 6패, 96년 16승 8패, 97년 17승 6패를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으로 조계현에 이어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 계보를 이어받기에 이른다. 97년에는 정민철김현욱을 제치고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2] 이대진은 투수왕국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로 군림하면서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들과 자주 맞대결을 벌였고, 그럼에도 승리를 따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에이스 오브 에이스.

물론 특급 투수가 특급 투수와 주로 맞붙는건 너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에이스 오브 에이스라는 별명에 대해 더욱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시의 해태 타이거즈는 조계현이강철이라는 역대급 투수들로 원투펀치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이대진의 보직은 저 쟁쟁한 투수들 뒤를 받치는 3선발로 정해졌는데 문제는 조계현, 이강철이 너무 강력하다보니 상대팀이 자신들의 에이스로 맞불을 놓기가 심히 껄끄러웠던 것. 그래서 상대적으로 만만한 이대진을 상대로 자신들의 에이스를 붙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진은 등판 시 마다 승리를 따냈다. 3선발의 젊은 투수가 상대팀 에이스들과 맞붙어서 승리를 따내다보니 에이스를 능가하는 에이스라는 의미에서 에이스 오브 에이스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고 96시즌 부터는 투수왕국 해태 타이거즈의 1선발 자리를 당당히 꿰차며 에이스로 우뚝 선다.

이러한 임팩트로 인해 다른 선수들보다 투수 이대진과 타자 이종범은 해태 왕조의 황혼기를 상징하는 선수들로 인식되고 있다. 둘 다 93년 데뷔하여 전성기 시절 3회의 우승을 합작시켜내는 등 강렬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과, 두 선수가 이탈한 후 타이거즈가 암흑기로 접어든 점이 크게 작용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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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의 전매 특허인 파워커브.

특히 1998년 5월 14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10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3]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것도 11번째 타자인 4번타자 김경기에게 어정쩡한 체크 스윙에 공이 맞아 땅볼 아웃이 된 거다. 어떤 사람들은 김재박이 번트를 대라고 해서 기록이 중단된 걸로 알고 있기도 한데, 이대진 본인이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밝혔다 카더라.

여담으로 양준혁의 프로 1호 홈런을 허용한 허용투수도 그다.

1.2. 시련 그리고 극복[편집]


하지만 앞날이 창창해보이던 이대진에게도 큰 시련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대진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어깨가 망가져 가고 있었던 것. 98년 후반기부터 서서히 구위가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였고,[4][5] 어깨 수술을 받은 뒤 1999년 시즌을 쉬고[6] 2000년에 재활이 덜 된 상황에서 8승을 거두었는데[7] 사실은 해태 구단 쪽에서 연봉을 깎아놓고 승이나 세이브를 올리면 연봉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김응용이 해태 마지막 감독시절에 비참한 모습을 당하지 않으려고 과하게 굴려진 탓도 있다.[8][9] 결국 더 이상 예전의 구위를 되찾지 못했고 2001년 조브 클리닉으로부터 충돌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 부상에 대한 치료법이 매우 간단한 것인데도 90년대 한국 야구계는 그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부상을 입은 채로 무리한 투구를 하던 이대진은 어깨뿐만 아니라 팔 전체가 손상된 상태로 길고 지리한 재활에 돌입하게 된다.

한때 타자로 전향한 적도 있지만 썩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다. 중고교 시절에는 4번 타자를 맡았을 정도로 거포였지만, 역시 프로의 벽은 높았다. 오랫동안 투수로만 뛰었으니 더더욱 방망이가 익숙치 못했을 것이다. 다만 2002년 7월 27일 LG의 이상훈을 상대로 날린 역전 3타점 3루타의 활약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10] 크게 좌중간으로 뻗어가는 타구였으며 당시 펜스가 짧았던 광주에서 그타구를 쳤으면 만루홈런이 될 타구였다. 본인도 투수로 뛰는 걸 원해 2004년부터 다시 투수로 전향했지만 워낙 심각한 부상으로 제대로 경기를 뛸 수 없었다.[11]

팬들도 안타까워했지만 누구보다도 이대진의 심적 부담이 컸다. 이대진은 2000년 고(故) 김상진 선수를 기리기 위해 11번 배번을 달았지만, 계속되는 부진에 후배에게 누가 되기 싫다며 번호를 자진 반납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진은 피나는 재활 끝에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 동안 KIA 구단은지난 시즌에 미안했는지 훈훈하게도, 그를 방출하지않고 기다려주었다. 최고 구속은 130km/h 후반. 하지만 커브, 포크, 체인지업 등을 다양하게 섞어 던지는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였다.
2007년 4월 7일, 지상파 중계로 생중계된 이 경기에서 이대진은 이날 LG를 상대로, 6이닝 무실점을 기록, 2000년 이후 근 7년 만에 선발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타자로 전향하고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재활하는 등 고생한 이대진이 사실상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첫 경기였다. 그의 선발승 요건이 갖춰지고 내려올 때 3루 관중석 쪽에서 축포가 터졌다.그 경기[12][13]
그 이후에도 꾸준한 성적을 기록하여 2007년 7승 6패로 팀 내 다승 2위 [14] 부활의 기대감을 품게 했다. 이듬해인 2008년에는 5승 10패.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들쑥날쑥했던 당시 기아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탈꼴찌에 기여했다.


1.3. 2009 시즌[편집]


하지만 2009년 초반에는 심각한 부진을 보였다. 조범현 감독도 더 이상 이대진에게 선발 투수를 맡기는데 회의감을 보였을 정도였고, 팬들도 안타까워했지만 기대를 품을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특히 2009년 KIA 선발진은 윤석민, 구톰슨, 로페즈, 양현종, 서재응이란 막강한 라인업을 자랑했고, 6선발로도 곽정철이 포텐셜을 터트리고 있었기에 더 이상 이대진의 자리는 없어보였고, 불펜 투수로서도 별 메리트가 없어보여 선수생활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대진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서재응의 부상에 이은 난조 및 손영민의 과부하 우려로 곽정철이 불펜으로 이동하면서 이대진은 땜빵 선발을 맡게 되었고, 6월 29일 히어로즈전에서 선발로 등판, 5이닝 무실점으로 팀의 2연패를 끊으며 통산 98승을 거뒀고, 7월 4일 한화전에서 류현진과 맞대결을 펼쳐 5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그날 한기주이도형에게..... 8월 5일 LG전에서는 5⅔이닝 동안 3자책으로 승리! 이것으로 통산 99승. 100승까지 1승을 남겨 두고 있었다. 이날 이종범은 무리한 펜스 플레이를 펼치면서까지 이대진의 100승을 지켜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등, KIA 타이거즈의 결속력이 이전 시즌들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15] 조범현 감독이 시즌도중 서재응을 불펜으로 돌린데에는 5선발을 맡아줄 이대진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다고 봐야한다.

8월 동안 KIA가 기록한 20승 4패에서 3패의 선발패를 기록하고, 끝내 2군으로 내려 가게 되었다. 수많은 KIA 팬들이 지긋지긋한 아홉수에 눈물을 흘렸다. 일부 무개념한 팬들은 이대진선수의 싸이에 악플을 달아, 이에 상심한 이대진선수의 부인이 직접 눈물로쓴 글을 올려 많은 기아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2009년 9월 11일, 1군에 복귀해 감격적인 통산 100승에 성공한다. 상대가 한화 선발 류현진이라 불안했지만 3회까지 퍼팩트로 한화 타선을 막은후 4회와 5회에 각각 만루 위기가 있었지만 5이닝 2실점으로 잘 막아냈다. 타선에서도 이종범과 최희섭, 장성호가 홈런을 치며 지원사격 해주었고 계투조 손영민의 3이닝 퍼펙트 투구와 유동훈의 마무리로 4-2 승리. 3전 4기만에, 또한 해태 시절의 동지인 이종범과 장성호가 이끌어준 100승이기에 더욱 더 감격적인 승리였다.[16]
관련기사#

그리고, 2009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투수 11명 명단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확실한 선발 투수들이 많은 만큼 선발 투수 이대진의 합류가 불투명했지만, 이대진의 경험을 믿고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대진은 KIA의 투수진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17]

그리고 한국시리즈 3차전과 6차전에 등판해서, 각각 1⅔이닝과 1이닝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내려왔다.

2009년 우승 이후 열린 우승기념 행사(과거에는 '호랑이 한마당')에서 G드래곤의 '하트 브레이커'를 열창했다. 춤까지 췄다…. 그의 나이 36세. 동영상

기아 팬들로서는 이대진의 강렬한 강속구와 삼진 행진을 볼 순 없지만, KIA 타이거즈의 팬들은 롯데 자이언츠 팬들이 손민한의 100승을 바랐던 것 못지 않게 이대진의 100승을 열망했다. 이종범과 함께 타이거즈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상징이며 박철순처럼 끊임없이 부활하는 영원한 에이스 오브 에이스이기 때문이다.

그의 미니홈피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당신이 수없이 상처입고 방황하고 실패한 저를 언제나 응원할 것을 알고 있어서 저는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1.4. 2010 시즌[편집]


전지훈련에서 기량이 회복되어 선발 후보까지 올랐지만 이번에는 기흉[18]이 생겨 수술을 했다. 일단 수술은 잘 끝났다지만 회복기간과 재활을 해야 하다 보니 전반기 출장이 불투명해졌다.
다행히 2010년 5월 14일 1군에 복귀하였다. 기아팬들은 조범현 감독이 운영하는 6선발 체제의 한 축을 맡아 주길 기대하고 있었으나, 5월 26일 LG전에서 빈볼성 투구로 퇴장당한 박경태 대신 급히 올라와서 9실점(4자책이 잉여 수비들). 결국 도로 2군으로 내려갔다. 그 뒤 다시 1군으로 복귀했다. 8월 7일 두산전에서 선발로 나와 5이닝 3피안타 4볼넷 무실점으로 호투 했으나 火펜들불펜들의 불질 속에 승리가 날아갔다. 8회 말 돌아온 김상사김상현의 만루홈런으로 손영민이 승리를 챙겼기에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8월 15일에도 선발로 등판했으나. 김주찬과의 피말리는 접전으로 투구수가 늘어난 데다 4사구를 6개를 허용해서 3이닝만에 교체되었다.

8월 21일 이후로는 선발로 등판하지 않았으며, 최종 기록은 14경기 출장하여 22이닝 동안 ERA 6.55, WHIP 2.27의 성적을 거두었다.

8월 7일의 경우처럼 5이닝 동안 선발로서 무실점으로 틀어막고도 승을 못 챙긴 경기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구원투수로서 주로 등판한 편이다. 게다가 성적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9월 첫 등판에서 4실점이나 한 것이 ERA 폭등의 원인.


1.5. 2011 시즌[편집]


5월 3일 넥센전에서 박경태의 뒤를 이어 구원 투수로 등판했는데, 2개의 폭투로 1점을 내주고 삼진 하나를 잡을 동안(상대 타자는 허준) 2볼넷을 내주는 등 부진한 피칭을 했다. 아무래도 큰 부상을 겪었던 데다 나이도 있으니 크게 선전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보는 KIA 팬들의 속은 타들어갔다.

이후 자신의 트위터에 은퇴나 다른 팀 이적을 암시하는 글을 남겼으며, 2011년 7월 23일 웨이버 공시되었다. KIA 구단과 조범현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현역 생활에 강한 의지를 존중하여 내려진 결정이었다. 한 마디로 기회를 더 얻을 수 있는 팀으로 이적하기 위해 스스로 웨이버 공시를 신청한 것. 1주일 이내에 다른 팀에서 영입하지 않는다면 잔여 시즌을 뛰는 건 불가능해진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불펜에 어려움이 있는 LG를 선두로 4개 팀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 특별히 부상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1,2이닝 정도를 소화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것. 하지만 많은 이닝을 던지면 2, 3일의 휴식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대진의 특수한 상황 탓에 4강 싸움이 치열한 LG가 과연 모험을 할지 미지수였다. 그 외에 베테랑 선수를 잘 활용하는 김성근 감독의 특성상 SK가 영입할거라는 분석도 나왔다.

결국 7월 29일까지 이대진에 대한 영입 의향서(계약 양도)를 제출한 구단은 LG 트윈스밖에 없어, 이대진은 LG 입단이 거의 확정되었다. KIA에 이적료 300만 원을 지불하면 이대진은 후반기부터 LG맨이 되는 것이다. 이대진의 보직은 선발과 릴리프를 오가는 스윙맨이 유력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7월 30일, 결국 LG 트윈스에 이적하였다. 본인은 6~7이닝을 책임지는 선발을 맡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렇게 되면 LG 트윈스의 불펜 운용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박종훈 감독은 월요일부터 2군 경기에 등판시킨 뒤 상태를 보고 보직을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8월 9일, 광주 KIA 전에 구원 등판해 한 타자를 범타로 처리했다. KIA팬들은 18년 동안 희노애락을 함께한 이대진에 대한 예우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로 다시 2군행. 게다가 LG가 4강 승부수로 넥센 히어로즈에서 송신영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이대진의 쓰임새는 갈수록 없어져갔다. 당초 본인이 원했던 선발은 물론이고 롱릴리프마저도 못하게 된 상황. 4강 싸움이 치열함에도 잊혀질 정도면... 일각에선 시즌이 끝난 후 방출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최고구속이 134km/h 정도라고 하는데 아무리 변화구&제구력이 좋아도 이 정도 구속으로는 1군에서 타자를 상대하기 힘든 게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LG에서는 그를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에게 2012년 한 해 더 기회가 주어졌다. 게다가 승부조작 사건이 일어나면서 선발 2명에 공백이 생긴만큼 선발 기회가 갈 것으로 보였다.


1.6. 2012 시즌[편집]


2012년 4월 14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였다. 하지만 매 이닝 실점하며 무너졌다. 만 38세의 이대진의 구속이 130km/h 중반에 머무는 것을 감안하면 제구력을 앞세워야 했지만 제구마저 난조를 보였다. 최종 결과는 3⅓이닝 75투구수 5피안타 5사사구 6실점 5자책점. 이날 팀이 추격쥐 모드를 발동했지만 결국 9:7로 패하면서 이대진은 패전 투수가 되었는데, 구속은 물론 제구까지 1군에서 통하기 어려워 보였다. LG 입단 이후 첫 선발 등판이 하필이면 19년간 몸담은 친정팀이기에 긴장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제구력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1군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경기는 그의 1군 마지막 등판이 되고 만다.

5월경 2군으로 내려간 이후 간간이 2군 등판을 하였으나, 7월 이후로는 아예 잊혀져 버렸다.

9월 26일경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듯하다. 아예 기회가 없다는 걸 알고 웨이트만 했다고. 본인은 KIA에서 은퇴식을 치루지 못하더라도 섭섭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올드 타이거즈 팬들은 그가 KIA로 돌아와서 은퇴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 그리고 예상대로 LG의 보류명단에서 제외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 물론 립서비스로 보는 게 맞다.[2] 그러나 이 해 정민철과 김현욱의 기록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대진의 골든글러브 시상은 논란이 되기도 한다. 김현욱은 선발없이 계투로만 157⅔이닝 방어율 1.88에 20승이라는 성적을 올렸고, 김성근 당시 쌍방울 감독이 몰아주기라고 해서 그렇다 쳐도 선발투수 중 특히 정민철은 승수/패수를 제외하면 모든 성적이 이대진보다 훨씬 우위에 서 있었다. 위대한 우승 프리미엄[3] 메이저리그에서도 10타자 연속 삼진 기록은 어메이징한뉴욕 메츠톰 시버가 가지고 있으며 메이저리그 에서도 10타자 연속 삼진은 최고기록이다.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4]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 통증이 있었는데 이를 참고 계속 던져왔다고 했다. 사실 98년까진 문제가 별로 없었다. 17승에서 12승으로 승수는 하락했지만 종범이가 없었던 탓도 있고 방어율은 여전히 3점대 초반이었다.[5] 이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이대진을 영입하려 시도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8 시즌 하반기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부상 조짐이 보인다고 생각, 그를 거르고 임창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간다.[6] 그 말고도 이강철마저 무릎 부상으로 나가떨어지고 김상진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나는 등 해태의 선발진은 붕괴되었다. 이강철과 이대진을 대신해서 나선 최상덕, 곽현희, 곽채진 같은 선발들은 그저그런 성적을 냈다. 쌍방울에서 넘어온 오봉옥이 힘을 보탰지만 소용 없었다. 그나마 그 해 입단한 대졸신인 유동훈이 7승을 거둬준 것이 위안이었다. 다만 타자진은 좋은 편이여서, 홍현우, 샌더스, 양준혁, 이호준, 장성호를 내세워서 한 시즌 팀 홈런 200개를 넘기기도 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다.[7] 2008년의 배영수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이대진의 원래 00시즌 보직은 마무리 투수였다. 김응용 특유의 혹사가 겹쳐서 중무리 투수가 되어 8승을 거둔 것....[8] 위에서 언급한것처럼 1999년~2000년 당시 해태의 투수진은 처참했다. 이 시기 선발인 최상덕, 곽현희, 곽채진, 유동훈은 언급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성적이 처참했고, 이강철은 FA가 되어 삼성으로 이적, 보상선수로 한때 삼성의 에이스였던 박충식을 데려왔으나 경기를 뛸 수 없을 정도로 재활병동을 오가던 신세였다. 양준혁을 주고 데려온 손혁은 해태에서 뛰기 싫다는 이유로 은퇴드립을 치면서 임의탈퇴로 묶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직전년도에 좋은 모습을 보였던 장타자 유망주였던 이호준을 내주고 데려온 성영재 역시 부진했다. 연고지 팜 광주일고의 최고 투수였던 서재응김병현은 스카웃 머니가 딸렸던지라 대학을 거쳐 메이저리그 구단에 입단했고, 23세 나이에 군 문제까지 해결된 등 기껏 키워놓은 마무리 임창용은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갔고, 이 외에도 선발 유망주 김상진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유망주 농사도 망쳤고, A급 유망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만한 선수는 이대진밖에 없었던 것. 이렇다보니 혹사당할 수밖에 없었다.[9] 결정적으로 2000년 10월 6일 광주 롯데전(더블헤더 1차전)에서 선발로 나와 어깨상태도 안좋은데 무려 173구를 던지는 정신나간 경기가 결정타였다. 분명 힘든기색이 보였는데 벤치에서는 감독, 코칭스태프 꿈쩍도 안하고 있었고 그걸 보는사람들도 하나같이 분통이 터질 경기. 더 이상한건 그 경기의 스코어는 3:10으로 해태의 일방적인 패배. 그 경기를 방관하면서 완투시킨건 김응용이 사실상 해태를 떠나 삼성 감독으로 가는 분위기였기에 경쟁 팀이 될 해태-KIA 타이거즈 전력에 타격을 주기 위한 꼼수였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이대진은 회복이 덜 되었던 어깨가 아예 망가져버려 기나긴 재활에 들어갔고 다시는 전성기 때의 구위를 되찾지 못한다.[10] 잡지 DUGOUT 2011년 4월호의 인터뷰에서, 김성한 당시 감독은 이것이 잠실 LG전, 이상훈을 상대로 날린 3루타였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11] 이 당시 이대진은 1년 126-133경기중 5경기남짓 출전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재활에 투자하는 신세였다.[12] 11년 전에 올라온 영상으로, 네이버스포츠가 VOD 영상을 지원한지(2006년 포스트시즌부터)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라 화질이 매우 좋지 않음은 유의해야 한다.[13] 이 경기는 또한 송인득 아나운서의 마지막 야구 중계였다.[14] 이 시즌은 윤석민이 18패를 기록한 그 시즌이다. 그 당시 최하위였고, 시즌 최다승 투수는 10승은 커녕 겨우 8승이었다.[15] 작년 이대진 등판시에는 선수들이 대충 플레이하는 바람에 오히려 조범현감독이 열받아 미팅을 열고 선수들을 꾸짖었을 정도였다.[16] 특히 이날 류현진이 못던진 것이 아니었다. 7이닝 10삼진으로 위력투를 보였으나 타선 지원을 받지 못하며 12패째. 이종범은 2009시즌 때린 6개 홈런 중 2개를 류현진에게 뽑아내었다. 2개 모두 결승타점. 장성호는 9회 초 대타 홈런을 기록했다.[17] 1996년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 1997년 LG와의 한국시리즈에서 2승, 평균자책점 1.38. 통산 3승 1패 1세이브.[18] 폐에 구멍이 생겨 공기가 차는 증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