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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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야구 및 스포츠 관련 여담
2.1. 팬 서비스
3. 그 외 여담
4. 별명
5. 논란 및 사건사고
5.1. 선수협 판공비 셀프 인상 관련


1. 개요[편집]


이대호의 여담 문단이 방대해짐에 따라 별도로 생성된 문서.


2. 야구 및 스포츠 관련 여담[편집]


  • 아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등학생 때부터 체격이 남달랐다. 추신수가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밝힌 바에 의하면, 야구를 위해 수영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교실에 갔더니 웬 고등학생이 뒷줄에 앉아 있어 야구부 감독한테 말했더니, 꼭 데려오라고 구박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이대호에게 야구를 권유했다고 한다. 한편 이대호 본인은 불우한 가정 형편 때문에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정태를 외삼촌으로 둔 추신수가 무척 부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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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초등학교 야구부 시절[1]


  • 2010 프로야구 미디어데이에서 어떤 초등학생이 "도루는 왜 못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더니 100m를 15초 대에 달려서 도루를 못한다고 친절하게 답변했다.[2] 그리고 홈런을 많이 쳐서 나가면 된다고 답했다. 해당 영상 참고로 이대호의 선수 생활 통산 도루는 11개이다.[3]

  • 사직 야구장에서 장외 홈런을 2차례 기록한 유일한 선수다.[4] 2007,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기록했는데, 날아가기는 2010년의 홈런이 더 멀리 날아갔으나 시즌 40호 홈런이라는 사실과 9경기 연속 홈런에 묻혀 버렸다고. 사직 야구장 바깥에 가면 당시 1호 홈런의 낙하지점에 이를 기념하는 동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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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외 홈런 기념동판 제막식에서의 이대호

  • 2011년 1월 12일 《무릎팍도사》 이대호 편이 방송되었다. 고민은 "이 우승을 못 해요.". 강호동과 쿵쿵따를 하거나[5] "좀 알고 질문을 하셔야죠~"라고[6] 하는 등 예능감을 적절히 뽐냈다. 이대호의 술회에 따르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소속 팀이 우승했을 때는 후보 선수라 우승컵 잠깐 만지고 끝났고,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때[7]는 우승하자마자 도핑 테스트에 랜덤으로 걸려 환호도 못 지르고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대호의 고민은 결국 《무릎팍도사》도 발을 뺌으로 인해서 사상 최초로 《무릎팍도사》가 해결해 주지 못한 고민이 되었다. 일본에서도 똑같은 고민을 계속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보였으나, 2014년에 소속 팀이 퍼시픽리그 우승과 2014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고, 그 다음해에는 2015년 일본시리즈 MVP도 차지하면서 그의 고민이 해결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KBO 리그 친정팀은 우승은 커녕 20년 넘게 한국시리즈조차 가지 못하고 있다.

  • 류현진메이저리그 진출을 놓고 한참 갑론을박이 많았을 때, FA 자격을 얻고 가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냈다. 반면 이대호와 함께 롯데 자이언츠에서 클린업을 이루던 홍성흔은 팀과 상의하되 1살이라도 젊을 때 갈 수 있으면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외에 이대호처럼 FA를 얻어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고 한 다른 야구 관계자나 선수로는 이종범이 있고, 홍성흔과 비슷한 의견을 낸 건 김병현, 박찬호, 봉중근메이저리그에서 몸을 담은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최종적으로 류현진은 후자 쪽 주장을 한 인물들의 의견처럼 포스팅을 통해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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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호와 정훈

  • 2017년 6월 23일 두산 베어스전에서 8회 초 볼넷으로 출루했으나, 2아웃에서 이우민의 2루 땅볼 이후 오재원에게 태그아웃을 당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경기 종료 후 오재원에게 좋지 않은 분위기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꼰대호'라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멸칭이 붙어버렸다. 무슨 일에 오재원만 관련되면 오재원이 잘못했네라는 말이 나오는 그 오재원과 싸웠음에도 댓글 창 분위기가 썩 좋지 못했다.[8] 다음 날 이대호가 이에 대해 해명을 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 2006년 재능이 만개한 이후로 어지간한 국가대항전엔 꼬박꼬박 불려나갔고 나가는 대회마다 좋은 성적을 올린, 역대 국가대표 선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성적의 보유자다.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까지 41경기 133타수 43안타 7홈런 41타점 타율 .323의 성적을 기록했다. 나가는 대회마다 최소한 평균 이상은 했는데 꼭 나가는 대회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파묻힌 케이스[9]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지 않으며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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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대첩에서 역전 적시타를 친 후

  • 베이징 올림픽 출전 전에 일본 대표팀 감독이었던 호시노 감독이 한국은 오스모상(스모선수)이 야구를 한다며 비웃는 어조로 이야기했다.[1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표팀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는데 당시 치바롯데 에이스 중 한 명이었던 잠수함 와타나베 슌스케는 오로지 이대호 저격용으로 데려간 선수였다. 이대호가 같은 느린 잠수함 타입인 정대현에게 극도로 약했다는 것을 안 일본에서 맞춤 저격수로 데려간 것으로 실제 연습에서 와타나베 슌스케는 모든 타자를 '이대호'로 상정하고 공을 던지는 모습이 일본 방송에서 소개되었다.[11] 실제 시합에서도 이대호 타석에 구원투수로 등판하는데 볼 넷으로 승부를 못하고 만다. 또한, 일본 대표가 예선당시 아라이 타카히로의 선제 투런으로 앞서다가 와다 츠요시가 이대호에게 동점 투런을 맞는데 와다는 이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나중에 회상했다. 또, 일본 대표 4번 타자로 선제 투런을 쳤던 아라이 타카히로는 인터뷰에서 (이대호의 홈런을 두고)"힘의 차이, 레벨의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4번 타자는 저런 위압감을 보이지 않으면 안되는데 나의 홈런은 어린이의 것과 같았다. 앞으로는 다른 마음으로 야구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라고 했을 정도.[13]그 이후에 이대호가 일본리그에 진출하고 일본에서 부침없이 대활약을 하면서 일본야구계에서 모두 이대호를 인정하게 되었다.

  • 2018년 1월, 《집사부일체》에 출연하여 600kg에 달하는 레그 프레스를 했다. 당시 이대호는 이미 선수생활의 황혼기인 35세로, 무릎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경악스러울 정도의 근력을 보여주었다. 스쿼트로 환산하면 180~200kg라고 한다.



▲ 이대호의 레그 프레스

  • 2018년 1월, 《집사부일체》에 출연하여 매년 겨울 훈련 기간인 11월~12월 두 달간은 고기 두 점에 샐러드, 견과류로만 이루어진 간소한 식단을 짜서 체중관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시즌 중에는 두 달간 못 먹은 것까지 다 합쳐 먹어서 다시 살이 찐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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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호의 식단


  • 양의지와 함께 FA 계약 선수 중 계약 기간 동안 2년 연속 3할-30홈런-100타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 이대호는 타고난 재능 때문에 지도자는 하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많다. 이른바 '이대호 3대 타격 조언'이라든지[14], 이대호가 감독될 시 일어날 일이라든지... 그런데 의외로 투수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서 차라리 투수 코치를 하라는 얘기도 있다.[15] 물론 드립은 드립일 뿐 추재현이나 한동희, 정보근 등 후배들에게 본인의 수 싸움과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장면이 중계에 자주 나온다. 다만 이대호 타격 이론의 핵심인 공보고 공치라는 여전하다. 타팀이지만 고등학교 후배인 노시환에게도 공보고 공치라고 조언해줬으며, 이를 이해(?)한 노시환은 2023년 완전히 각성하여 8월 홈런 선두를 달리고 있다.

  • 많은 돈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까는 악성 인터넷 문화와 좋지 못한 팬 서비스가 합쳐져서 잘해도 '느린 돼지'라고 욕먹고, 못하면 '돈만 먹는 돼지'라고 욕먹는 대표적인 고연봉 베테랑 거포 선수이다. 그나마 김태균보다 욕을 덜먹는 건 대표팀에서 성적이 이승엽보다도 좋고, 김태균과는 다르게 일본프로야구에서 성공하여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홈런이 부각되는 야구 특성상 이대호와 이승엽은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형성된 좋은 이미지도 있다.

  • 많은 사람들, 특히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까지 자주 간과되는 점이 바로 그의 직업윤리이다. 사실 이대호의 직업윤리은 굉장히 뛰어나다. 롯데 자이언츠에서 말년을 보낸 정수근에 따르면 당시 김주찬이나 박기혁은 클럽에 가서 노는데, 이대호는 꿋꿋이 클럽에 가지 않고 양 곱창과 소주만 먹었다고 한다. 정수근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 "대호 되게 착해요~ 그리고 클럽 되게 싫어해요. 얘 진짜 술 세지만 그냥 곱창에 소주 먹는 거 좋아해요."라고 언급했다. 현장토크쇼에서 김태균정근우의 증언에 따르면 이대호가 자기들과는 클럽에 간 적이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나이가 든 지금까지 항상 일찍 야구장에 나와 열심히 뛴다고 한다.

  • 비대한 체격 때문에 부상을 달고 사는 거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사지만, 대표적인 금강불괴 선수 중 하나다. 일본프로야구 4시즌 포함 규정타석을 채운 시즌은 총 16시즌인데 2020년 기준으로 이승엽[16],양준혁과 함께 타이다.[17]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운 2004년 이후로는 메이저리그 시절인 2016년을 제외하고 매 시즌 큰 부상 없이 규정타석을 채웠다.

  • SK에서 뛰었던 정대현과는 야구계의 대표적인 천적 관계다. 통산 맞대결 전적이 54타석에서 49타수 5안타 6삼진 4볼넷 1사구 1희생플라이 상대 타율은 0.102로 매우 약했으며, 본인도 인터뷰를 통해 "대현이 형만 없으면 4할에 50홈런은 칠 수 있었다" 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선수 중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 중 한 명에 속한다. 우승은 물론 한국시리즈 무대 자체를 올라가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은퇴 후 유튜브 채널 개설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다른 야구선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면서 "한국시리즈 분위기는 어때~~??" 하고 묻곤 한다.

  • 2022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그 안에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선수 생활이 잘 되면 야구를 좀 더 하겠다고 했지만,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2022시즌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 은퇴를 선언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논란이 이대호 헹가래 가능 여부였다. 이대호 은퇴에 앞서 은퇴식을 미뤄왔던 박용택이 은퇴식에서 헹가래를 받자 네티즌의 반응은 “이대호는 저거 어떻게 함?” 이 논란은 올스타전과 이대호의 은퇴식에서 등장음악처럼 진짜 이대호를 오리처럼 날려 버리면서 종식되었다. 이대호는 괜히 후배들이 시즌 막판에 자신을 들어올리다 다칠 까 봐 고사했지만 김현수지시완이 아래에서 확실히 받아줬다고 한다.

  • 2023년 5월 28일에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 창단 85주년과 구장 개장 30주년을 기념하는 시구를 했다.#

2.1. 팬 서비스[편집]


애석하게도 팬 서비스가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많은 대표적인 선수이다. 특히 여기에 있어서는 이승엽 못지 않게 싸인 꽤나 잘 안 해주는 선수로 이름나있다. 17년에 어린이들의 싸인을 거절하다 아주머니가 화를 내서 해준 사례도 있고, 19년 야구의 날 짬처리나 박동희 기자의 저격,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 등 팬사이트의 반응을 보아 단순한 루머일 가능성은 낮다. 확실히 젊은 시절에는 별로였던 듯.

다만 어린 팬이 사인을 요청하자 무시한 채 앞만보고 걸어가는 듯한 사진이 발굴되어 넷상에 많이 퍼뜨려지기도 했으나 사실은 뒤에 있던 문규현에게 싸인을 요청한 것이고 이대호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다고 사진상의 사인을 요청한 당사자가 페이스북에 밝혔다. 참고글 1 참고글 2 커뮤니티 반응은 '전국구 스타인 이대호도 아니고 당시 백업 선수였던 문규현에게 사인을 요청한 팬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정도.

그나마 느낀 게 있어서 은퇴 시즌인 2022년에는 싸인회를 주최할 때 팬들에게 친절한 태도로 성실하게 싸인을 해주고 있다. 은퇴 투어 사인회때 본인의 사비로 준비한 모자나 마스크를 나누어주며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정리하면 "이대호는 박용택처럼 팬서비스를 꾸준히 잘 해준 선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팬 서비스는 서서히 좋은 편으로 바뀌었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은퇴 후에는 정황상 팬 서비스를 선수 시절보다 할 여유가 많아져서 더욱 좋아질 전망이다.

3. 그 외 여담[편집]


  • 큰 덩치만 보면 누가 봐도 잘 사는 집안에서 잘 먹고 큰 듯하나, 어린 시절이 꽤 불우했다. 주변 야구인 선배들이 이대호의 이야기를 할 때 입을 모아 "정말 어렵게 자라온 선수" 라고 언급할 정도.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집을 떠났을 때 할머니가 홀로 키워줬다고 한다. 추신수의 권유로 이대호가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자 삼촌들이 모여서 가족회의를 했고, 그 끝에 "야구 선수가 되도록 한 번 밀어 줘 보자."로 결론, 이후 삼촌들이 사직 야구장에 많이 데려갔다고 한다. 학창 시절 이대호는 야구 선수로 대성해서 할머니를 호강시켜드릴 생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경남고등학교 2학년 시절 돌아가셨다. 1년 뒤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어 2억 원이 조금 넘는 거금을 계약금으로 받고도 할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대호가 프로에 입단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친어머니가 다시 같이 살자고 전화도 왔다고 하는데, 거절했다고 한다.[18] 고교 재학 중 부모님 같았던 할머니를 여읜 후에는 형인 이차호 씨가 이대호의 뒷바라지를 했다. 3살 터울의 형은 할머니를 덜 고생시켜드리고 싶어, 우수한 학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빨리 취업을 하기 위해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고, 이대호가 프로 지명을 받은 뒤에야 뒤늦게 군대에 입대했다. 군 전역 후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이대호가 속한 스포츠 매니지먼트 그룹인 O2 S&M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여담이지만 이대호의 형 이름이 '이차호'로, 원래 뜻으로 따지면 이차호가 첫째이니 차호가 '대호'라는 이름을 갖고, 이대호가 둘째이니 '차호'라는 이름을 받아야 하는데, 할머니가 호적 등록 과정에서 한자를 헷갈려 이 둘의 이름을 뒤바꿔 버리면서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 마지막 주먹다짐이 수영초등학교 5학년 시절 다른 야구부원이 6학년에게 맞고 오자, 찾아가서 코피가 터지도록 두들겨 팼던 것이었다고 한다. 워낙 큰 덩치 탓에 중학생 이후로는 감히 싸움을 걸어오는 또래가 없었다고 한다.

  • 공식 프로필에는 194cm, 100kg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2001년 입단 당시이고 지금 현재는 어느 누가 봐도 120kg을 너끈히 넘는다. 만약 192cm, 100kg라면 알렉스 로드리게스 혹은 마해영과 같다. 같은 팀의 선수들과 비교를 하면 이재곤김원중이 각각 191cm/96kg, 192cm/96kg으로 공식 프로필상 4kg 차이지만 누가 봐도 절대 믿을 수 없는 차이다. 2009년 올스타전 하루 전 부산에서 있었던 슬러거 이벤트에서 팬들의 질문에 127kg라고 밝힌 바 있으며, 스포츠조선 2009년 7월 27일 10 대 1 인터뷰 기사에서 몸무게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총 20개의 질문 중 3개가 몸무게 및 살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그중 "맞을 각오를 하고 물어보는데 왜 살 안 뺌?"이라는 질문도 있었다.[19] 2012년에는 125kg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듯. 의외로 의식하고 있는지 KBS 다큐멘터리 촬영 때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낸 기사에 130kg라고 적혀있자 "저 125kg임. 확실히 체크해 주세요 OK?"라고 일어로 구단 직원에게 항변하기도 했다. 정말 많이 나갔을 때는 150kg까지 나갔다고 한다. 2022년 10월 26일엔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여 128kg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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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호의 체중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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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호와 최준석

  • 2009년 여름에 개봉한 영화 《해운대》에 특별 출연했는데, 특별 출연한 야구 선수들 중 유일하게 대사가 있다. 다른 선수들은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여러분'이라고 뭉뚱그려 나오는데 이대호 혼자 따로 배역으로 나온다. 배역은 이대호 선수 역. 4번 타자 주제에 병살타나 치고 있다며 욕을 하는 설경구를 향해 "마, 딱 봐놨어 니... 딱 거 있어라 니능... 딱 거 있어!!"라는 대사를 친다. 이 대사 뒤에 '니는 가도 죽고 안 가도 죽어!!!'도 있었다는데, 이대호의 이미지를 생각해 편집되었다고 한다.[20] 장원준은 이 장면을 찍을 때 달려 나오다 넘어져 유일하게 NG를 낸 사람이 됐다고 한다. 후에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해운대》 출연에 대해 다뤘는데, 당시 이대호는 '아 연기 어떻게 해야 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막상 슛 들어가 보니 설경구가 정말로 사직구장에서 술 마시고 욕하는 아재들처럼 리얼한 연기로 순간 이대호의 뚜껑을 열어버렸고[21], 열이 확 받아 진심으로 대사를 치며 한 번에 OK 사인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촬영이 끝난 뒤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는 설경구를 볼 때까지도 분이 안 풀렸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캐스팅 롤에 올라가면서 출연료로 천만 원을 받았다고 밝혔고, 설경구에 대해 평가하길 '상대 배우의 감정까지 끌어올려 주는 명배우'라고 평가했다.



▲ 영화 《해운대》 출연 장면

  • 2009년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하여 "천만 관객 동원 배우다"라는 드립을 치기도 했다. 말하고 나서 멋쩍은 듯 한숨을 쉰 걸 보면 자신이 생각한 건 아니고 대본에 있었던 듯하지만, 절친한 개그맨 이동엽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에도 종종 저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 2009년 12월 26일, 신혜정 씨와 결혼하였다. 시즌 중에 사직 야구장 전광판을 이용해서 영상 메시지를 전달하고 뒤이어 3만 관중 앞에서 프러포즈를 했다. 이대호가 무명인 시절 부상으로 신음할 때 정성껏 간호해 주고 심리적 안정을 찾게 해 준 여자친구로, 2001년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이 임수혁 선수 돕기 일일 호프를 했을 때 만났다고 한다. 2001년 무릎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할 때 보호자가 필요했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당시 여자친구이던 와이프에게 부탁을 했는데, 신혜정 씨는 당시 대학생이었고 시험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22] 뒷바라지를 해주었으며, 7시간의 장시간 수술 뒤 이대호가 1L 소변통을 가득 채웠는데 아무 내색 없이 받아서 치워줬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대호가 너무 크다'며 싫어했으나 적극적인 구애에 곧 사귀기 시작,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였다. 2010년 이대호의 포스를 보면 신혜정 씨의 공헌이 큰 듯하다. 이대호 본인도 그렇게 느끼는 듯 인터뷰에서 "결혼하고 용됐다고 해 달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 넉넉지 못한 가정 환경에서 어렵게 자라서인지, 아내와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며 꿈도 가족끼리 외식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소박했다. 그래서인지 아내와 딸이 야구장을 찾으면 꼭 홈런이나 타점이 나오는 활약을 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자신을 키워주다시피 한 형 이차호 씨가 야구장을 찾으면 지는 징크스가 있어 아예 보러 가지 않는다고 한다.

  • 다른 특출난 야구선수들에 비해 문신이 없는 편이다.

  •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선행 활동을 많이 한다. 단순한 기부가 아니라, 오프 시즌마다 자비로 구입한 연탄을 팬클럽, 동료들과 함께 달동네 독거노인들에 직접 방문하여 배달하고, 독거노인들을 직접 목욕시키거나 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못다 한 효도를 대신하려고 봉사 활동을 한다고 밝혔다. 특히 연탄 배달은 2006년부터 시작해서 매년 이어져 오고 있다. 2020년에도 연탄 봉사에 나서며 15년째 매년 겨울 연탄 봉사를 하고 있다. 원오사에서 하는 장학 불사도 이와 관련이 있다.

  • 1박 2일》의 6대 광역시 특집에 부산을 소개하기 위해 출연했다. 갑작스러운 섭외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촬영에 임했다. 친화력이 높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쉽게 남들에게 다가서기 힘들어하는 이대호와 이승기 모두 쉽게 친해져 거의 의형제급의 친한 사이가 되어 헤어졌다. 이 와중에 이대호는 복불복에 강한 집착을 보이기도 했으며, 황금 배트를 노리고 오는 도둑이 있을까 봐 불안해하는 아내를 위해 "집에는 복불복으로 짝퉁 방망이 갖다 놨습니다. 그거는 가져가도 돈이 안 됩니다. 진짜 방망이는 은행에 있습니다." "부산에 은행이 한 100개 있으니까 한군데 골라 보십시오."라고 드립을 치는 등 예능감을 터트렸다.

  • 어지간한 경우 외에는 얼굴에서 싱글거림이 떠나지 않는 선수라 귀여운 짤방이 많다.



▲ 찜질 중인 이대호


▲ 애교 다리 이대호

  • 2010년의 몬스터 시즌을 바탕으로, 마구마구 2010년 KBO 리그 카드 업데이트를 통해 첫 출시부터 엘리트 카드로 나온 최초의 현역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마구마구는 2006년부터 매년 해당 시즌 성적을 반영한 새 선수들을 내놓는데, 2007년의 다니엘 리오스를 제외한 2006~2013년에 나온 모든 선수들은 처음 나올 땐 레어 카드였다. 그러나 2014년에 지속적인 엘리트 카드 추가 패치를 통해서 현재는 엘리트 카드가 있는 현역 선수들이 적지 않고, 첫 출시부터 엘리트인 경우도 많아졌다.[23]

  • 이대호의 경제효과16조 원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관련 뉴스 이것은 잘못된 경제효과 계산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당연히 16조 원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위험한 상견례》에서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야구단 유니폼을 입은 '이대호 어린이'가 등장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말인데, 실제 모습과 아역 배우의 싱크로율이 상당하다.

  • 2011년 7월 18일, 대한불교조계종의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본래 2006년부터 불교 신도였다고 한다. 출석 사찰은 부산 반송동에 있는 원오사[24]로, 은사스님도 그 곳에 계신다. 수시로 이곳에서 장학 불사에 동참하고 있다.


  • 2012년에 방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8화에 '경남고 투수 이대호'가 등장한다. 스카우팅을 위해 경남고등학교를 방문한 성동일이 이대호에게 좋은 투수의 자질이 보인다며 경남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에게 이대호를 투수로 키울 것을 추천하는 에피소드가 짧게 지나간다.

  • 2012년 9월, 이대호의 사촌동생 이병호 씨가 《슈퍼스타K4》 지역 예선에 출전했는데, 만만치 않은 가창력을 보이며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받았고 슈퍼위크에 출전했다.

  • 라커룸 본인 자리에 본인 이름이 적힌 나이트 명함을 꽂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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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호의 이름이 적힌 나이트 명함

  • 2012년 10월 31일, 모든 야구 게임에서 이대호의 이름이 '이태산'으로 바뀌었다. 단 '나는 야구감독이다'라는 게임에서는 '장거포'로 이름이 바뀌는 등 예외도 있긴 했지만, 이쪽은 매우 일찍 이름이 바뀌었다. 2013년 초에는 이대호로 다시 이름이 돌아왔다.

  • 2012년 11월 4일, 이대호의 일본프로야구 진출 첫 시즌을 되돌아보는 《KBS 스페셜 - 오사카의 거인 이대호》가 방영되었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의 반응은 1시간짜리 이대호 먹방. 또한 방송에서 이대호의 딸 이예서 양의 얼굴이 공개되었는데, "이대호 판박이네.", "부산 내에서 길을 잃으면 누가 봐도 사직 야구장으로 데려갈 정도로 닮았다." 등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참고로 이예서 양은 2022년 기준 초등학생으로, 성장할수록 더더욱 이대호를 닮아가고 있다. 덩치 말고 얼굴이. 출아법으로 낳으셨나요. 물론 이예서양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아빠를 닮았다는 말은 싫어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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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 공개된 이대호의 가족



  • 믿기지 않겠지만 머리 크기가 한국 남성 평균보다 작다. 55호 사이즈의 헬멧을 사용한다. 이게 군모로 치면 56호 사이즈와 얼추 들어맞는데, 군모를 기준으로 58~59호가 한국 남성 평균 사이즈와 대비되는 걸 생각하면 확실한 소두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급 소두는 아니지만[25] 이대호의 무지막지한 덩치를 생각해보자. 덩치에 비하면 정말 작은 머리 크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호의 덩치와 골격이라면 군모 61호 사이즈도 소두 소리 듣는다. 그 때문인지, 데뷔 초창기 살이 찌지 않았을 때는 신체 비율이 상당히 좋아보였다.

  • 이대호가 메이저 리그에 뛰는 사이 아들 이예승 군이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해외야구 갤러리 등 일부 커뮤니티에선 이를 놓고 노리고 원정출산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대호와 아내의 집안 사정이 익히 알려져 있는 데다 원정출산 관련 법은 진즉 개정되어 조금만 찾아보면 아니란 게 드러났던지라 금방 수그러들었다.

  • 2018년 1월 21일 《집사부일체》에 사부로 출연하여 현역 선수답게 출연진들을 신나게 굴리는 모습이 나왔다. 등장부터 출연진들을 양산시의 백운암[26]으로 불러 강제 등산을 하게 했고, 하산해서는 양산 시내의 헬스장에서 또 체력 훈련을 시켰다. 이 때문에 출연진들은 기진맥진 상태가 되었다. 이후 2018시즌이 개막하고 이대호가 부진하자 '자기나 열심히 해라', '보여주기 식이었다', '연예인병 걸렸다', '연예인들 괴롭히지 말고 야구나 잘해라'며 비난을 받았다. 또한 개막 이후 팀의 연패가 지속되며 최하위에 머물자 3월 31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 종료 후, 홈구장 퇴근길에서 어떤 팬이 이대호를 향해 치킨 박스를 던져 이대호의 등에 맞는 사건도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이대호는 부진에서 깨어났고, 2018시즌 타율 0.333, 37홈런, 125타점을 때리며 롯데 자이언츠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주었다. 이후로 이대호가 부진할 때면 치킨 박스를 던지면 깨어난다는 농담이 나오고 있다.

  • 이대호 본인과 정훈 둘 중에서 누가 더 잘생겼냐는 질문에 본인이라 답하며, 정훈은 솔직히 못생겼다고 말했다. 영상 여담으로 이 질문은 이대호의 딸인 이예서 양이 낸 것이다.

  • 평생 안 먹어도 되는 음식으로 복숭아를 선택했다.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은퇴를 앞두고 야구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이승엽에게 《최강야구》 입단 섭외를 받았다. 은퇴 이후 이대호는 《최강야구》에 합류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승엽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취임하며 프로그램을 하차했고, 결국 아쉽게도 한 팀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2022년 11월 20일 잠실야구장에서 두산베어스와 맞대결을 펼쳤다. 최강야구의 2022년 시즌에서는 현역 은퇴 후 합류하느라 시즌 막판에 합류하여 몇 경기 못 뛰고 시즌이 끝나버렸지만, 2023년에도 최강야구 팀에서 활동할 예정이라 본격적인 활약은 2023년 부터 일 것으로 보인다.

  • 은퇴식 날이던 2022년 10월 8일이 공교롭게도 1984년 작고한 부친의 기일이었다. 그 날 이대호는 모두의 환대 속에 22년 간의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2023년 슛포러브에 출연했다.# 배트로 친 축구공이 흔히 말하는 빨랫줄 중거리 슛마냥 골대 구석에 꽂히게 하는 파워가 압권이다.

  • 가상 전투 관련 떡밥에서 '방망이를 든 이대호'를 여기저기에 갖다붙여 호적수를 만드는 전투력 측정기 밈이 존재한다. 김동현, 카렐린, 프란시스 은가누, 풀무장한 군단병, 심지어 아프리카코끼리[27]까지 방망이를 든 이대호의 상대로 설정하는 밈으로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이대호는 상대방이 전재산을 훔쳐 간 것으로 착각해 몹시 화가 난 상황이라는 사전설정이 따라오는, 어이 없는 밈.

  • 2023년 10월 11일 유튜버 활동을 시작했다.#


4. 별명[편집]


  • 빅보이, 돼호
통통뚱뚱한 체격으로 인해 언론에서 흔히 쓰는 별명은 빅보이이지만[28], 비슷한 별명을 사용하는 선수가 있는 것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이름을 살짝 바꾼 돼호, 혹은 거기서 조금 더 바꾼 돼랑이(돼지+호랑이. 이대호의 호를 虎라고 봐서) 등등으로 불린다. 간혹 이대호가 부진하면 바로 돼지로 격하. 밑에 나올 부산우유 CF 때문에 우유돼지 추가. 반면 성적이 잘 나올 때는 조선의 4번 타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롯데 선수들끼리만 사용하던 "백설공주"라는 별명이 MBC ESPN 중계를 통하여 알려졌다. 저 뜻이 뭔가 하면, 만인을 설 기게 하는 포의 둥이... 2007년도에 이대호를 제외한 롯데 타선이 부진할 때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라고 부른 것이 '공주'의 원조인듯.# 또 가끔씩 나오는 호수비에 대한 경탄의 의미로 수비요정이라고 불릴 때도 있다. 어디까지나 가끔. 일본에서는 규격 외의 그 몸이라는 표현으로 응원가에까지 나왔다.

  • 조선의 4번타자
이대호의 여러 별명 중 언론에서도 자주 쓰일 정도로 공식화된 별명. 물론 실제 응원에서 자주 쓰이는 문구이며, 최훈의 베이징 올림픽 야구 카툰 정리 편에서 대중화했다.
'조선의 xxx' 라는 표현은 뮤지컬 명성황후드라마 명성황후 등에서 등장했고[29] 이대호 신인 시절에 유행어였던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30] 2006년 도하 참사 당시 이대호가 홀로 대표팀에서 분투했고 네티즌들이 별명을 붙여는 줘야 겠는데 '대한민국 4번타자', '국민타자' 라는 별명은 이승엽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붙이지 못하고, 드라마 명성황후의 흥행 등으로 이 조선의 국모 드립이 당시 유행어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따와 조선의 4번타자로 붙인 것으로 보인다.[31] 한편 도쿄 대첩에서 역전타를 치면서 조선의 4번타자라는 별명이 평소 야구를 안보던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북한이나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명칭(조선/조센)과 연관이 되다보니 이들 중 몇몇은 '대한민국의 4번타자'라고 수정하라며 반감을 표하기도 했다. 유행어란 게 원래 금방 새 것이 유행하고 잊혀지고 하는데 원본으로 추정되는 조선의 국모 드립도 너무 오래되어 잊혀진 지 꽤 됐기 때문에 맥락을 잘 모르는 경우 왜 하필 조선이냐고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별명은 확실히 북한이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인터뷰에서 이대호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으로 꼽았는데 이런 논란거리가 된 이후로는 저 별명을 거북해하는 듯 하다. 다만 별명이 사장될 정도로 논란이 크진 않았고, 하도 오래 쓰인 별명이다보니 논란이라 할 만한 여론은 대부분 사라졌고 2020년 기준으로도 흔히 쓰인다.
그 외에도 영화 YMCA 야구단에서 비롯된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해당 영화의 주인공인 송강호의 풍채(...)가 이대호와 비슷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한편 야갤 유행어로는 "이게 사람이야 이대호야"가 있다. 일본에 간 이후 오릭스 팬으로부터 이대포라고 불리는듯.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이자 이데온으로도 불리고 있다. 오릭스가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여서 한국처럼 많이 이야기되고 있진 않지만 나름 이대호의 덩치에 관한 드립이 나오기도 한다. 일례로 일본방송 "우치무라사마즈" 에서 풋살을 할때 덩치 큰 AD가 도와주러 나왔는데 그걸 본 오오타케 카즈키가 "너 이대호냐? 오릭스의 거포."라는 드립을 쳤고 빵 터트렸다. 그리고 그 AD는 끝날 때까지 이대호 AD로 불린건 덤.

  • 비득점권의 악마
소프트뱅크 첫 시즌에 비득점권에서 홈런을 자주 때려 2ch에서 붙여준 별명.[32] 거액으로 사왔는데 영양가 없다고 비꼬는 별명이다.

  • 이대호 도루하는 소리
네이버에서 '이대호'를 치면 "이대호 도루하는 소리"가 연관 검색어로 뜬다. 심지어 본인도 저 말을 알고 있었다. 양승호 감독이 롯데 감독 시절, 롯데 프런트에서 라인업에 간섭하려고 하자 "이런 식이라면 나 내일 경기에 1번 이대호 2번 홍성흔 3번 강민호 4번 문규현 쓴다고."라고 일갈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시대를 한참 앞선 혜안[33]

  • 돼덕스
2011년 11월 13일 열린 부산고 VS 경남고 라이벌 매치 투수로 나와서 투심 패스트볼을 선보이자 돼덕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대호가 던지는 패스트볼은 등심패스트볼[34]이라고 명명했다. 또 그의 공에 걸리는 테일링은 돼일링, 공이 떨어지면 PORK[35]이라고 불린다.
파일:이대호/등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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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던진 구속이 130km/h가 나오는 위엄을 보이기도. 중계하던 한명재 캐스터가 이를 보고는 "앞으로 130km/h 밑으로 던지는 투수들은 이대호 선수에게 '나 투수다'라고 얘기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유희관 의문의 1패[36] 그리고 2022년 10월 8일 은퇴식날, 8회초에 공식적으로 투수로 등판해 LG의 고우석과 투타 맞대결을 펼쳐 좋은 수비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자신의 투수 커리어 첫 홀드이자 마지막 홀드를 신고하며 은퇴했다.

파일:external/www.gasengi.com/22826744e0a8c8ddf1473c36c401f71e_kVAeiPYIA9p.jpg
2016년에 메이저 데뷔 이후로 얻게 된 별명. 별명의 유래는 이름의 두문자어[37]가 DHL과 일치한 것. 홈런을 배달해준다는 의미가 있다보니 꽤 센스있는 별명이다.

  • Holy 드립
그 외에 Ho-Lee가 영어 holy와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응용한 별명들이 주류였다. 적시타를 치면 Ho-lee grail(성배), 삼진을 먹거나 병살타를 치면 Ho-lee shit(...).

  • 치타호
파일:치타호.png
2018년 초 이대호와 롯데의 성적이 좋지 않자 한 어그로가 꼴갤문학으로 인간 이대호 시리즈를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꼴갤에서 인기를 모았는데, 그 중 "이대호는 다른 경주견들이 먼저 달려가는 것을 바라보는 치타"로 비유하며 비꼰 글이 역으로 이대호가 성적 반전을 이루면서 성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치타호라는 별명이 붙은 이대호를 비롯해 슬로우 스타터 기질이 있는 선수들에게 이 치타 드립이 성행하게 되었다.

  • 야구주머니
파일:야구주머니.png
꼴갤발 별명. 2018년 4월 중반 이후 완벽하게 살아나자, 야구주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혹부리 영감의 노래주머니에 빗댄 별명.

KBO 복귀 후 주장을 맡고 타선을 멱살캐리하기 시작한 이후에 불리기 시작한 별명. 주장직에서 내려온 후에도 쭉 불리고 있다.

  • 꼰대호
이대호가 꼰대라고 비꼬는 별명. 후배 오재원이나 김재호와의 마찰, 한 살 아래인 문규현의 뺨을 치며 훈계한다던가, TV에서 본인이 직접 담배 피우는 불량 여고생들을 발견하자 뺨을 때리는 등 폭행을 하고 훈계했다는 내용을 미담처럼 자랑스럽게 얘기한다던지 하는 구시대적 위계질서, 좋게 말하면 예의범절이고 나쁘게 말하면 권위주의 문화를 강조하는 꼰대스런 일화가 유독 많아서 붙은 별명이다.

  • 버스터 돼지
버스터 포지의 별명을 변형한 별명. 2021시즌 이대호의 첫 포수 데뷔때 생겼다. 그이후 투수처럼 관련 용어를 변형한 드립이 나왔는데 meat(미트)질이 대표적.
  • 천만 배우
영화 해운대에 본인 역으로 특별 출연해서 붙었다.

  • 롯대호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를 줄임말로 롯대호라고 불린다는 뜻이다.

  • 이대호날두


5.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5.1. 선수협 판공비 셀프 인상 관련[편집]




2020년 12월 1일 SBS의 단독 뉴스로, 이대호가 선수협 회장에 취임한 후[38] 협회장 판공비(업무 추진비)가 2400만원에서 6000만원으로 2.5배 인상되었고, 게다가 이 돈이 이대호의 개인 계좌에 현금으로 입금되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이에 이대호 측은 "공익을 위해서 썼다." 라고만 밝히고 말을 아끼는 상황. 하지만 세간에는 도대체 어느 단체에서 판공비를 개인의 계좌로 받느냐는 것이 쟁점이 되고 있다.

이후 이대호의 에이전트를 맡고 있던 친형 이차호씨가 자신의 인스타에 해명글을 올리면서, 판공비 두배 인상은 '셀프 인상'이 아니라 공석이었던 협회장을 뽑기 위해 일종의 메리트로 함께 의결한 것이며, 법인카드의 형태가 아닌 개인 계좌로 판공비를 지급한 것은 선수의 입장에서 법인카드 지출 사유를 매번 체크하는 것은 어려우니 편의상 협회장의 상여로 소득처분및 세금공제 후 현금으로 지급한 것이고 이 역시 이사회에서 의결된 사항이라고 반박했다.

논란이 일자 이대호 측은 다음날인 12월 2일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밝혔다. #


12월 2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호텔리베라에서 이대호의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먼저 이대호는 3분 29초간 낭독한 입장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가 마다하는 회장직을 선임하기 위해서는 판공비를 증액하고자 하자는 건의가 나왔고, 과반 이상의 구단의 찬성으로 기존 연 판공비 2,400만 원에서 연 6,000만 원으로 증액하는 것이 가결되었습니다. 운동만 하던 선수들이다 보니 회장직을 맡는 것을 모두 꺼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회장이라는 자리에 앉는 사람을 배려하고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모였던 선수들이 제안하여 가결된 일입니다. 만약 2019년 3월 19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 회장 선거에서 제가 아닌 다른 선수가 당선되었더라면 그 선수가 회장으로 선출되어 판공비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상 당시 선수협회 회장으로 누가 당선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제가 저의 이익만을 위해 판공비를 스스로 인상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 반드시 어제 보도된 기사내용을 정정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너무 많은 금액을 지급받은 것이 아니냐는 질타에 대해서는 당시 이사회 결의 과정에서 좀 더 깊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고 입장을 밝혔다. # # # #

이어 이대호는 자신의 법률대리인 주민 변호사와 함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SBS 이성훈 기자[39][40]의 '판공비 인상을 발의한 사람이 이대호 선수 본인이 맞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대호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 또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다른 선수들도 다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답변하며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는데 나중에 다른 답변을 하던 도중에 판공비 인상 이야기를 본인이 꺼냈다고 말하고 말았다. 또한 이대호는 "회장에 대한 생각도 없었고,", "당선이 될 줄 알았으면 저는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때 당시에는 제가 고사하던 자리였기 때문에 전혀 생각도 안했습니다." 등의 반박을 했다.

그러나 이대호는 이사회 회의록 요구에 대해선 응하지 않으며 법률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물러섰다. 또 회계 상으로 임원 월급으로 처리되는 만큼 증빙 내용을 하나 하나 기록할 이유 또한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박재홍 회장때까지 판공비는 법인카드로 처리되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대호 회장 및 김태현 사무총장시기 현금 지급으로 바뀌었는지는 의문.[41]

하지만 해당 기자회견 내용과 정면 반대되는, 12월 2일 새벽 4시에 보도된 스포츠경향의 기사가 있다. 이에 따르면, 이대호가 이사회에서 선수협 회장으로 사실상 확정되자 판공비로 1억을 달라고 했고, 옆에서 같이 박자를 맞춰주는 다른 구단 고참 선수가 한 명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대호가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이사회 멤버들이 선수협 사무국에 "최대한 책정할 수 있는 회장 판공비가 얼마인가?”라고 물었고, “5, 6000만 원이 최대.”라고 답하자 이들이 판공비를 곧바로 6천만 원을 책정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반박 기사를 작성한 김은진 기자는 선수협 회장의 판공비 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2019년 여름에 들었지만, 선수협의 존재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기사화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2020년 연말인 현 시점에서는 이미 상당수의 야구 관계자들과 스포츠 기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12월 2일 저녁 SBS의 후속 보도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이사회에 참석했던 선수들의 이야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미 사실상 이대호를 추대하는 분위기였고, 이대호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너희들이 나 회장시키려는 거 안다"고 발언한 내용도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호가 판공비를 1억원으로 인상할 것을 제안했으나 수도권 구단 일부 선수들과 선수협 사무국이 반대해 6천만원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

한편 SBS의 취재에 응한 박재홍 전 선수협 회장은 '제가 회장이었을 때는 판공비를 사용할 때 증빙자료를 남겼다.'고 답했다. 즉, 어느 순간부터 보수로 변질된 판공비가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대호 본인이 회장이 될걸 뻔히 알지만 정식 선출만 안된 상황에서 '셀프 인상'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박동희 기자도 강하게 비판하였다.#

12월 7일 체육시민단체 '사람과 운동'이 이대호, 김태현 전 사무총장, 선수협 이사들을 업무상 배임죄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12월 10일 이대호 측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가 “이대호가 선수협에 1억 원을 기부했다”고 전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 구체적인 기부 내용이나 후속보도는 아직까지 없는 상태다.

12월 15일 체육시민단체 사람과 운동은 이대호 선수협 전 회장과 김태현 전 사무총장, 오동현 고문변호사를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형사고발을 했다고 밝혔다. #

3월 31일, 서울서초경찰서는 이대호 선수협 전 회장에 대한 업무상 배임 등 형사고발에 대해 불송치를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

그리고 무혐의 처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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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09:12:13에 나무위키 이대호/여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첫 번째 사진의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초등학생 이대호다. 두 번째 사진의 가장 왼쪽이 추신수, 왼쪽에서 4번째에 얼굴만 보이는 사람이 이대호, 가장 오른쪽이 이우민이다.[2] 순경 공채에 지원한 대한민국 남성의 100m 달리기 평균 기록이 15초 중반대인 걸 감안하면 이대호의 주력은 일반인 기준으로 평균 이상이다. 오히려 그 덩치에 이 정도 주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프로 선수들의 운동 능력은 상상 이상이라는 걸 알 수 있다.[3] 이 때문에 이대호와는 반대로 도루는 매우 좋았던데 반해 홈런이 극히 적었던 이대형과 이대호 10도루 vs 이대형 10홈런 떡밥이 있었는데 이대형은 9홈런으로 커리어를 끝내면서 결국 이 떡밥은 이대호의 승리(?)로 끝났다.[4] 1차례 이상 기록한 선수는 2011시즌에 당시 LG 트윈스 소속이었던 조인성과 2014시즌의 황재균, 2015시즌의 최준석, 댄 블랙, 이승엽이 있다.[5] 부상으로 걷지도 못하던 동안 《공포의 쿵쿵따》를 많이 봤다고 하며, 강호동이 먼저 시작하여 이대호-호랑이-이상해-해질녘으로 이대호가 이겼다.[6] 여기서는 진지하게 보면 그럴 만도 했던 게 강호동의 질문이 "본인이 1할 타율을 쳐서라도 우승하면 좋겠냐"고 물었고 이대호는 "내가 1할을 치면 당연히 우승을 못한다"고 앞서 답했다.[7] 추신수, 정근우, 김태균 등과 함께 활약했다.[8] 1년 전 메이저리그에 있었을 때는 상대 내야수와 갑작스럽게 부딪치고서도 쿨하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고, 국내 복귀 후 미디어데이 인터뷰에서도 예전보다는 부드러운 선배가 되겠다는 발언을 누군가 캐내어 올리면서 더욱 비난을 받았다.[9]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4할을 넘기는 타율과 2홈런 10타점을 기록했지만 도하 참사에 묻혔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360의 타율과 3홈런을 기록했지만 준결승과 결승의 이승엽에 조금 묻혔다. 다만 와다 츠요시 상대로 대형 동점 투런 홈런을 쳐내고 바로 다음 타석에 번트를 대는 임책트도 보여줘서 묻혔다고 그렇기 묻히지도 않았다.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출루율 4할대를 찍고도 .278의 타율 때문에, 김태균과 이범호의 대활약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으며,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는 .368의 타율과 1홈런을 기록했지만 추신수와 결승전에서 미친 활약을 한 강정호에 거의 묻혔고(초대형 홈런의 임팩트는 나름 컸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455의 타율을 찍고도 대회 탈락으로 묻혔다. 다만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는 .222의 타율과 1홈런으로 부진했지만 준결승전의 결정적인 역전타로 주목받았고,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2013년 처럼 팀이 멸망해서 묻혔다.[10] 사실 체격만 보면 누가 보더라도 야구보다는 스모선수 쪽이다.[11] 타자 이대호, 갑니다! 라고 소리치며 공을 던졌음.[12] 힘이 티렉스같다고 해서 별명이 티오카다였다.[13] 사실 이 부분은 이대호의 비쥬얼적인 모습에서 나오는 위압감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타구속도나 비거리보다는 압도적 체격에서 나오는 비쥬얼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게 만드는 것, 오릭스 시절 동료인 T오카다[12]도 이대호 옆에선 어린아이처럼 굴며 존경심을 표현했고, 시애틀 시절 코리 시거의 큰 형인 카일 시거도 이대호의 홈런을 보고 "소리부터 아예 다르다, 본 적 없는 수준의 파워"라며 아라이와 비슷한 인터뷰를 했는데 이대호의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홈런에 위압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14] 이대호가 후배들에게 해준 조언으로, 정훈에게는 '공보고 공치라', 황재균에게는 '매일 안타 하나씩 치고 볼넷 골라 나가다가 가끔 몰아치면 3할', 한동희에게는 '그냥 휘두르면 공이 와서 맞을 것'이라고 조언했다.[15] 2020년 리그 연기로 인해 페이스가 꼬이며 부진하는 박세웅에게 구종 추가를 조언했는데 박세웅은 이후 kt wiz 시절에만 던졌던 투심과 체인지업을 다시 사용하며 후반기 반등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선발에서 헤매다가 불펜으로 전향한 김진욱에게 적극적인 패스트볼 승부를 조언했는데 그 결과 7월 4일 SSG 랜더스전에서 1사 만루 추신수-최정을 연속 삼진을 잡아내며 이후 국가대표에 승선했고, 후반기엔 불펜에서 철벽투를 보여주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번외로 이대호는 수 싸움에 능하고 투수 출신이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는 이론은 아니긴 하다.[16] 일본프로야구 2시즌 포함[17] KBO 리그의 공식 기록은 양준혁의 16시즌이다.[18] 여담이지만 남성의 체격은 어머니의 신장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대호의 경우는 어머니의 키가 169cm였다. 이대호의 나이, 즉 어머니의 연령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체격이라고 볼 수 있다.[19] 그리고 이 질문을 한 장원삼은 술과 삼적화로 인해 역변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20] 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저 대사 이후에 마 니는... 이후에 목소리가 안 나옴을 알 수 있다.[21] 경기 도중 클리닝 타이밍에 양 구단에 허가를 받고 서정환을 허구연으로 빠르게 갈아치운 다음 장면을 찍었는데, 아무리 촬영이라 해도 경기 도중이었기 때문에 설경구의 꼴리건 연기가 이대호에게 제대로 와닿은 듯 하다.[22] 이때 택시 기사가 뺑뺑이를 시전해서 당시 택시비로 김포공항~일원동(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추정)이 5만 원(...)이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2022년 10월 현재 택시비로도 3만 원 초중반이면 오는 거리다.[23] 박병호, 강정호, 유한준, 강민호 등.[24] 통도사의 말사이다.[25] 소두로 유명한 배우 강동원은 군모 사이즈가 54호였다.[26] 이대호가 훈련을 한 곳이라고 한다.[27] 여기서는 무려 방망이를 든 화가 난 이대호 100명이 나온다(...). 이대호 본인 피셜 한 50:1 까진 가능할 것 같다고 한다.[28] 결혼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인데도 여전히 '보이'이다(...).[29] 드라마와 뮤지컬에서 처음 시작된 건 아니고, 1994년 이수광이 지은 소설의 제목이었기도 하다.[30] 이대호 외에도, 체인점이 전국에 수십군데가 있는 내가 조선의 국밥이다나, 울산에 있는 내가 조선의 돼지다 같이 이 유행어에서 파생된 게 은근히 많이 남아있다.[31] 윤학길이 현역시절 '고독한 황제'가 아닌 '고독한 황태자'란 별명이 붙은 것도 '황제'인 최동원이 건재했기에 롯데 팬들이 자기 팀 에이스임에도 차마 1인자와 연관된 별명을 붙일 수 없어 황'태자'를 붙였는 데 같은 맥락인 듯.[32] 실제로 입단 첫해, 득점권에서 영 좋지않았다. 그해 일본시리즈이후로 득점권에서도 나름 개선됐다.[33] 실제로 선수경력 통산 22년동안 도루를 11개 했다. 2년에 1번꼴로 도루를 했다는것[34] 은퇴 경기에서 투수로 등판하자 캐스터가 육즙이 흐르듯 부드러운 등심 패스트볼이라고 언급했다.(...)[35] 식기도구 포크(Fork)가 돼지고기(Pork)와 발음이 비슷한 것에서 유래된 포크볼(Forkball)의 언어유희.[36] 유희관은 종종 120후반대 직구를 던지기도 한다. 물론 전력으로 던지면 130 중후반대의 구속을 유지한다.[37] 이대호의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Lee Dae Ho가 되는데, 미국에서는 Dae Ho Lee로 읽는다.[38] 2019년 3월부터 선수협회장을 맡고 2020년 시즌 후 사임 의사를 표했다.[39] 이번 사건을 단독으로 보도한 기자로, SBS 스포츠 유튜브 라이브인 '야구에 산다'에 정우영 캐스터와 함께 출연하고 있다. 꽤나 많은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했고 미디어 출연으로 인지도도 어느정도 있지만, 작년 고양 히어로즈 처우 논란처럼 헛다리를 짚은 적도 있다.[40] 해당 기자회견에서 기자는 사실관계에 착오가 있었음을 이대호에게 사과하며, 판공비가 사실상 보수처럼 지급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했다.[41] 물론 그 사이에 전임 이호준 회장도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