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선수 경력/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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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계약 과정
3. 시즌 전
4. 페넌트레이스
4.1. 4월
4.2. 5월
4.3. 6월
4.4. 7월
4.5. 8월
4.6. 9월~10월
5. 총평



1. 개요[편집]



파일:20120308.99001141735058101.jpg

이대호의 해외진출 첫 시즌인 2012시즌 활약상을 담은 문서이다.

2. 계약 과정[편집]


9경기 연속 홈런을 계기로 메이저리그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2011년 시즌을 소화할 경우 FA 신청이 가능했으며, 즉 2012시즌에 해외 진출이 가능했다. 해외 진출에 대해 체력과 수비 문제 때문에 미국보다는 일본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솔직히 전반적으로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명타자 제도가 있는 퍼시픽리그 쪽은 기대치가 높았던 김태균의 거한 삽질로 학을 떼고 있었고, 센트럴 리그 쪽 큰 손들은 수비가 결점인 용병타자를 영입할 여력이 안 되었다. 또 추신수와의 인터뷰를 보면 본인 역시 해외진출을 내켜하지는 않는 듯 했다. 다르빗슈와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국내에 남을 경우 롯데 잔류와 이적 여부는 2011년 연봉협상 이후로 결정나게 될 만큼 미묘해졌다. 그전까지는 롯데의 아이콘적인 존재이므로 어디 가면 큰일나며 롯데 구단 역시 확실한 대우로 잡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으나 연봉협상에서 보여준 태도 때문에 상황은 급변했다. 이대호가 의리로 남을 명분 자체가 없어졌다 라는게 중론이었다. 그리고 이대호가 2007년에 역대 최고 대우를 받을 때와 비견되어 이상구단장이 칭송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11년 7월, 한신 타이거스에서 이대호의 영입을 노리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 또 2011년 포스트시즌 종료 이후 일본의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2년간 5억엔(당시 한화로 약 75억 원 정도)의 조건으로 영입준비 중이라는 기사도 뜬 상황이었다. 오릭스는 금액 부분은 부인했지만 팀내에서 타격을 보강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이 많았고 따라서 이대호가 FA 신청시 그를 영입하겠다는 방침이 정해진 듯했다.#물론 롯데는 무조건 잡는다고 말했지만 자금력이나 연봉협상의 문제 등의 문제가 있고 이대호가 롯데 우승 빼고[1] 한국에서 타자로서 이룰 것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더 큰 무대인 일본에 진출하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많았다. 단 변수라면 이승엽이나 김태균 같은 뛰어난 타자들이 대지진, 원자력 사고 이후 한국으로 복귀하고 있다는 점. 이대호 입장에서는 2012년에 아이를 얻기 때문에 이점이 변수가 될 수도 있었다.1,2

결국 2011시즌 종료 후 이대호는 FA를 선언하였고 소속팀 우선협상기간인 11월 19일까지도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해외 진출이 유력해졌다."100억원도 NO" 이대호, 롯데와 FA 협상 결렬

우선협상 기간 동안에 이대호가 사인하지 않고 해외진출에 무게를 둔 것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한 쪽은 "100억도 안 되면 어쩌라는 거냐"고 말하는 롯데 잔류 지지파, 그리고 다른 한 쪽은 "롯데 구단 믿지 말고 해외로 나갈 수 있을 때 나갔다 와라"고 말하는 해외 진출 지지파. 잔류를 지지했던 팬들은 원래 예상했던 4년에 60억+알파를 크게 넘어선 4년간 연봉 80억에 옵션 20억이 통 큰 베팅임을 강조한다.[2] 또한 롯데라는 팀에 대한 자부심이나 팀을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강조했던 이대호이기에 팬들이 잔류를 기대했다는 점 또한 강했다. 이게 반대로 해외진출로 무게가 실리자 배신감을 느낌 팬들이 지금까지의 인터뷰 등이 거짓이며 언플이라고 비난을 했던 것.

반대로 해외 진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팬들은 위에서 설명되었던 2011시즌 연봉 협상을 기억하는 쪽이었다. 타자로서 그야말로 따라올 자가 없을 압도적인 기록을 세운 그를 7000만 원 아끼자고 연봉조정신청까지 가게 한 팀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 야구팀을 그저 돈 벌이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구단에 끌려다닐 필요 없이 야구선수로서 더 넓은 무대로 도전해보라는 입장이었다. 당시의 이대호가 그야말로 전성기라는 점 때문에 일본에서 제대로 성공한 타자를 보고 싶어하는 열망도 이에 포함되었다. 또한 이러한 팬들은 "60억+알파를 크게 넘어섰다"는 수식어에 비교적 덤덤한데, 이는 저 60억이라는 액수 자체가 2004년 심정수가 가진 기록이며 다시 말해 7년 전의 액수이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률과 커져가는 야구판을 생각했을 때, 80억+20억이 7년 전의 FA 최고 대우였던 60억 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2004년 심정수의 60억중 옵션과 계약금을 제외한 금액은 40억 원이다. 옵션이 20억이었다는 말이다. 순수 연봉이 7억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이대호에게 제안한 연봉 10억원은 롯데가 꺼낼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였을 것이다.

물론 물가 상승률이 6년간 50%씩, 100%씩 뛰진 않는다. [3] 당시 심정수의 60억은 돈성이라 불리는 삼성이 어마어마하게 거품을 뿌린 금액이었다. 생활물가지수 상승폭인 28%로 심정수의 연봉을 기준으로 FA 이대호의 소위 '적정가'를 환산한다면 약 77억 가량이 된다. 때문에 한해 1개 야구단의 운영비가 300억 정도로 추산되는 한국프로야구의 규모상 연봉 10억, 총액 100억이라는 액수는 구단 입장에선 충분히 무리한 수준이며, 롯데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라고 봐야 했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 팬 커뮤니티에서는 대체 얼마를 더 주어야 자존심을 세워 줄 수 있느냐고 이대호를 깠다. 해도 너무했다는 것. 사실 돈과 더 큰 꿈을 위해서 해외진출을 하겠다고 이대호가 공언한 상태였다면 100억이든 뭐든 롯데팬들은 배웅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대호는 당시까지 어느 인터뷰든 소위 말하는 '성골' 부산 토박이 경남고 출신 롯데맨임을 강조했다. 그렇게 협상 최종일까지 모든 롯데 팬들은 대충 롯데는 65억 + @를 내놓을 것이고 이대호의 요구선은 80억이라고 생각했다. 80억 초과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결국 롯데는 지를 FA는 지른다는 전례대로 100억의 그야말로 더 이상 해줄 수가 없는 최고의 대우를 했다. 허나 이대호는 도장을 찍지 않았다. 팬들에게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당시 겨울 SK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깔끔하게 메이저리그 진출을 발표했던 정대현이 이대호와 비교되면서 롯데가 이대호의 FA에 신경쓰느냐고 다른 선수들을 신경쓰지 못했다는 얘기도 나왔던 상태라 비난이 거세졌다.

물론 그동안의 롯데가 보여줬던 행보 때문에, 롯데는 처음부터 이대호를 잡을 생각도 없었고, 저 80억+20억이란 제시금액도 실제로 줄려는 돈이 아니라 욕먹지 않기 위해 언론에 공개하기 위한 언플용 수치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대호의 인터뷰 기사에서 100억을 제시했다는것이 확인되는 것으로 종결. 그것도 첫 만남에선 식사만, 둘째 만남에서 바로 100억을 제시했다. 일각에서 제시하는 음모론이 헛소리라는걸 말해주는 것. 이대호와 짜고 치는거 아니냐는 말도 나왔는데 이대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에게 불리해질 언플에 협조해주는게 말이 되는가? 100억 찼다고 욕을 먹고 있는 마당에 본인 입장에선 사실대로(사실은 아니지만)70억 제시했다고 하는게 여론에도 좋았을 것이다.

이대호의 인터뷰 : 맨 밑에서 2번째 질문

일본 스포츠호치에서 오릭스가 이대호에게 최대 3년간 8억 5천만 엔, 우리돈으로 129억 정도 되는 액수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이것은 롯데가 제시한 최고대우를 넘어서는 수치였다.[4]

어쨌든, 언론에서는 롯데도 이대호도 딱히 욕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롯데로서는 할 만큼 제안을 했다고 보고, 이대호도 역시 일본 제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본인도 외국 진출하고 싶다고 했으니 그 의사를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 이대호 본인도 FA협상 과정에서 구단이 보여준 성의에 감사한다고 직접 언론에 밝혔으니 만큼 롯데의 제안 자체에는 별 불만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파일:이대호일본.jpg


결국 오릭스 버팔로즈와 2년간 총액 7억엔(105억 원)에 계약을 매듭지었다.[5]


3. 시즌 전[편집]



3월 8일 세이부와의 연습경기에서 오이시에게 홈런을 쳤다.

4. 페넌트레이스[편집]



4.1. 4월[편집]


4월 19일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열린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경기에서 5타수 3안타 4타점의 활약을 펼치며 처음으로 오늘의 히어로로 선정됐다. 이날 친 2루타 2개 역시 일본에 가서 처음으로 친 장타였다.


4월 21일 홋토못토 필드에서 열린 닛폰햄 파이터즈와 경기에서 다케다 마사루를 상대로 17경기, 69타석째만에 시즌 첫 홈런을 쳤다.

4월 29일 교세라 돔에서 열린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 6회초 1사후 상대 타자 에스테반 헤르만의 땅볼 타구를 잡은 오릭스 투수 니시 유키가 너무 여유를 부리다 그만 원바운드로 악송구를 했다. 1루수로 출장한 이대호가 엉거주춤하면서 미트를 댔으나 볼이 튕겨나가면서 가벼운 접촉이 있었다. 그러자 이대호가 헤르만에게 다가가 불만을 표시했고 두 선수 사이에 언쟁이 일어났다. 서로 말을 나누는 상황에서 갑자기 세이부 벤치에서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대치하는 상황으로 확대됐으며 양팀 감독들의 언쟁으로 확산됐다. 오카다 아키노부 오릭스 감독과 와타나베 히사노부 세이부 감독이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말싸움을 벌였다. 도이 세이부 수석코치까지 가세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결국 심판의 중재로 서로 악수하고 헤어졌고 8분동안 경기가 중단되었다.


4월 30일 열린 세이부와 경기에서 7회말 선두타자로 나와 투수 후지타를 상대로 시즌 2호 홈런을 쳤다. 상대는 후지타 다이요 투수고 4:3으로 뒤진 상황에서 동점을 만든 홈런이었다. 이날 경기는 5번 타자 아롬 발디리스의 끝내기 홈런으로 오릭스가 승리했다.

4.2. 5월[편집]



5월 6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닛폰햄과 경기에서 요시카와 미쓰오를 상대로 동점을 만드는 시즌 3호 2점 홈런을 쳤다.


5월 11일 라쿠텐 골든이글즈와의 경기에서 1홈런 포함 4타수 3안타를 때려냈다. 본인의 일본야구 시즌 4호 홈런(하우저).


5월 13일 라쿠텐 골든이글즈와의 경기에서 미마를 상대로 친 1홈런 포함 4타수 1안타를 때려냈다. 일본야구 시즌 5호 홈런. 퍼시픽리그 홈런순위 2위로 올라갔다.

5월 19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교류전 경기에서 1:2로 뒤진 9회 2사 1루 상황에서 당시 평균자책점 0을 찍고 있던 토니 바넷을 상대로 역전 투런포를 때려냈다.


일본야구 시즌 6호 홈런. 팀은 연장 승부 끝에 승리.


5월 20일 야쿠르트 스왈로즈 상대로 9회 쐐기 시즌 7호 2점 홈런을 쳤다. 홈런 리그 2위, 타점 리그 5위.

5월 22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경기에서는 시즌 8호 투(2)런 홈런 포함 2타수 2안타 2타점 2득점 2볼넷을 기록했다. 22일 현재 타율/출루율/장타율은 .264/.359/.459, 8홈런 23타점.

5월 25일 히로시마와의 홈경기에서 10회말 1사 1, 2루에서 끝내기 안타를 쳤다. 이날 기록은 4타수 2안타 1볼넷.


5월 27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2-1로 앞선 5회 초 2사 1루에서 미우라를 상대로 시즌 9호 투런 홈런을 터뜨렸다.


5월 28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원정경기에서 4회 초 팀이 0-2로 뒤진 상황에서 투수 후지이를 상대로 시즌 10호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어느새 두자릿 수 홈런. 이로써 이대호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윌리 모 페냐(9홈런)을 제치고 퍼시픽리그 홈런 부문 단독 선두가 되었다. 이대호는 이 경기에서 3타수 2안타(1홈런) 1볼넷 1득점 1타점을 기록하였다.

5월 MVP 수상. 5월 24경기 출장, 20시합에서 안타를 기록. 홈런(8), 총루타수(55), 장타율(.632)에서 리그 1위. 25일 히로시마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걸 포함해 수훈 안타(선제2, 동점2, 앞서기1, 역전1, 끝내기1) 7개를 쳤다.

4.3. 6월[편집]


6월 2일 요미우리와 경기에서 4타수 4안타 3타점 1득점을 올리며 오늘의 수훈 선수로 뽑혔다.

이날 시구는 한큐 브레이브스 시절 타격삼관왕을 했던 부머 웰즈가 했는데, 중계석에선 '한국의 3관왕인 이대호가 부머 웰즈와 같이 좋은 활약을 해주길 기대한다'는 말을 했다. 타/출/장은 .294/.384/.503으로 장타율이 처음으로 5할대를 넘었다. 타/출/장 부문에서 팀내 1위이며, 퍼시픽 리그 내에서는 타율 13위, 출루율 5위, 장타율 3위다.


6월 14일 요코하마전에서 왕이젠을 상대로 시즌 11호 3점 홈런을 쳤다. 이전 히로시마전에서 병살타, 폭삼 등 오카다 감독도 '거, 이상하네. 타이밍이 저렇게 안 맞은 적이 없었는데.' 할 정도로 타격 부진을 보인 걸 어느 정도 씻어냈다.

6월 24일 세이부전에서 펜스를 때리는 적시 2루타 포함 3안타를 쳤다. 그러나 9회초 1사 주자 1, 2루, 1점 뒤진 상황에서 6-4-3 병살을 쳐 빛이 바랬다.

4.4. 7월[편집]



7월 5일 니폰햄전에서 6회말 모리우치 토시하루를 상대로 시즌 12호 2점 홈런을 쳤다. 또 2안타를 기록하며 4월 4일 이후 처음으로 3할 타율에 도달했다. 타/출/장은 .300/.393/.500. 이날 경기는 4-3으로 석패. 7회말 T-오카다가 출루한 후, 다케하라가 우중간으로 좋은 타구를 날렸으나 요 다이칸의 호수비에 막힌 게 아쉬웠다.


7월 6일 지바롯데전에서 5타수 3안타(1홈런, 시즌 13호 홈런(오기노)) 3타점을 기록하며 나카무라 타케야를 따라잡아 홈런 1위로 다시 올랐다. 일본 중계진 쪽에서도 타격 3관왕 가능성을 언급할 정도로 호조를 보였다.


7월 8일 지바롯데전에서 요시미 유우지 투수를 상대로 선제 시즌 14호 2점 홈런을 쳤다. 홈런 부문 단독 1위이며 리그에서 유일하게 OPS .900+를 기록 중이다.


7월 10일 라쿠텐 전에서 가와이로부터 시즌 15호 솔로 홈런을 쳤다. 아쉬운 점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주자가 없던 적이 허다한 것. 1루 좀 나가란 말이다. 야막 시발들아


7월 20일,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의 식전 행사인 홈런 레이스에서 우승을 했다. 준결승전에서 5개, 결승전에서 6개를 쳤고 결승전 상대는 올스타전까지 센트럴 리그에서 24개의 홈런을 쳤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었는데, 결승전에서 홈런 한 개도 치지 못했다(…). 이대호는 우승 상금으로 50만 엔을 보너스로 얻었다.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4번 타자로 출장했으나 3타수 무안타를 기록, 교류전 때의 포스로 센트럴리그를 누르지는 못했다. 2차전에서는 대타로 무안타를 기록했다.


3차전에서는 2루타 2개를 기록했다.


7월 29일 닛폰햄 사이토유키에게 시즌 16호 투런 홈런을 쳤다.


7월 30일 세이부 오사다에게 시즌 17호 솔로 홈런을 쳤다.


7월 31일 세이부 이시이 가즈히사에게 시즌 18호 홈런을 쳤다.

7월 MVP를 수상. 21경기를 출장하여 홈런(7), 타점(18), 총루타(51), 출루율(.398), 장타율(.662)에서 리그 1위. 수훈 안타 6개(선제4, 앞서기1, 동점1)를 기록했다. 5월에 이어 2번째 월간MVP를 수상. 같은년도 복수 수상은 20명째(22번째), 입단 첫해 선수로 제하면 1995년 7, 8월(2개월 연속) 수상한 덕 제닝스 이래, 2번째.

4.5. 8월[편집]


8월 2일 세이부 전에서는 4번 1루수로 선발 출장해 9회 마지막 타석에서 좌전 안타를 날리며 일본 데뷔 시즌 100안타를 돌파했다. 4타수 1안타로 경기를 마쳤고, 326타수 100안타로 시즌 타율 0.307을 유지했다.


8월 4일 지바롯데 전에서는 팀이 0-2로 끌려가던 4회 1사 1루 상황에서 상대 선발투수 우에노 히로키의 초구 직구를 공략해 좌측 펜스를 넘기는 비거리 110m 투런포로 연결시켰다. 시즌 19호 홈런.


8월 9일 라쿠텐 미마에게 시즌 20호 홈런을 쳤다.

8월 10일 지바 롯데전에서 4타수 1안타로 타율이 2할대(0.299)로 떨어졌다.

8월 11일 지바 롯데전에서 일본프로야구 데뷔전을 가진 덕 매티스 상대로 2안타 포함 3안타를 치며 다시 타율이 3할대로 올랐다.

8월 12일 지바롯데 전에서 2루타 2개, 4사구 3개를 기록하며 100% 출루를 기록했다. 최근 5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벌이는 등 8월 10경기에서 36타수11안타 타율 0.306 2홈런 6타점으로 활약하고 있다. 시즌 타율은 다시 0.307로 치솟았다. 이는 나카지마 히로유키(0.321)에 이어 퍼시픽리그 2위에 해당하는 기록. 올 시즌 개막 후 처음 타율 2위에 진입한 것이다. 센트럴리그 타격 1위 아베 신노스케(요미우리·0.305)보다 더 높은 타율이므로, 절정의 투고타저 시대에 양대리그 통틀어 전체 2위 타율이다. 물론 1위 나카지마의 따라잡는 건 쉽지 않다. 3~4월 타율 0.321로 시작한 나카지마는 5월에 0.226로 주춤했지만 6월에만 0.405의 맹타를 휘둘렀다. 7월에도 0.363로 고타율을 이어간 그는 8월 10경기에서 타율 0.294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나카지마의 포지션은 유격수로 수비에서 확실히 체력적인 부담이 있는 위치다.

이대호는 홈런·타점·장타율에서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홈런으로 이 부문 2위 나카무라 다케야(16개)에 앞서있는 이대호는 타점도 68점으로 부상 때문에 시즌 아웃된 2위 마쓰다 노부히로(56타점)를 멀찍이 따돌렸다. 장타율도 무려 0.534로 2위 마쓰다 노부히로(0.503)를 크게 앞선다.[6] 그리고 출루율까지 1위로 올라섰다. 12일 지바 롯데전에서 안타 2개에 볼넷 2개와 몸에 맞는 볼 하나까지 5타석 모두 출루하며 출루율을 정확히 4할로 끌어올렸다. 이 부문 2위 나카지마(0.392)를 여유있게 앞선다. 홈런·타점·장타율뿐만 아니라 출루율까지 4개 부문에서 1위에 오르며 다관왕 가능성을 더 높여가고 있다.


8월 26일 세이부 오카모토에게 시즌 21호 홈런을 쳤다.

4.6. 9월~10월[편집]


그러나 누적된 피로와 발목, 허리 등의 이상으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며 타율은 다시 2할대로 떨어졌고 홈런에서 나카무라 타케야에 추월당하며, 한때 기대의 대상이 됐던 타격 3관왕은 사실상 어렵게 됐다.


9월 18일 닛폰햄 다케다 마사루에게 시즌 22호 홈런을 쳤다.


9월 26일 소프트뱅크 아라카키에게 시즌 23호 홈런을 쳤다.


10월 5일 소프트뱅크 오토나리에게 친 시즌 24호 홈런이 시즌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

NPB 선수일람 - 이대호
경기별 기록
7월 기준 팀 전체의 각 경기 기록

심지어는 2ch에서도 칭찬하였다(…).

5. 총평[편집]


NPB 무대 데뷔 시즌부터 완벽히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전 경기 출장에 리그 OPS 1위를 달성했다.

시즌 개막 후 4월이 지날 무렵까지 한국산 먹튀의 계보를 잇는다는 말이 나왔으나, 5월부터 페이스가 오른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오릭스 타선을 거의 혼자 이끌었다. 전반기 마감 시점에서 오릭스 타자들의 기록을 보면 그야말로 8888577시절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의 재림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07 롯데. 팀내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득점과 도루를 제외한 전부문 1위를 달렸으며, T-오카다의 부상 복귀 이후로는 일곱 난장이라는 구실을 갖추었지만 처참한 리드오프-사람 같기는 한 클린업-다시 처참한 하위타선이라는 어디서 많이 본 타선을 구축하였고, 이렇게 주자가 나가기도 힘든 상황에서 퍼시픽리그에서 압도적인 타점왕[7]을 달성하였다.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은 전반기를 총괄하여 말할 때, 이대호에 대해 "공격 면에선 이대호가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좀 더 일본 투수에 대해 고전할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한국에서 2번 삼관왕을 한 만큼의 실력이 있다."평했다. 그리고 짤렸다 KBS 다큐멘터리 "오사카 거인 이대호"편에서 이대호 인터뷰에서 오카다 감독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이러한 활약있다고 하였고 오카다 감독이 경질이 되자 이대호는 오카다 감독에게 일본어로 죄송하다고 하자 오카다 감독은 "네가 있기에 내가 감독직에 버팀목"이라고 하였다.[8]

2012년 최종 성적은 다음과 같다.
525타수 150안타(5위), 타율 0.286(10위), 24홈런(공동 2위), 91타점(1위)[9], 볼넷 64개(3위), 출루율 0.368(4위), 병살타 18개(3위) 장타율 0.478(2위), OPS 0.846(1위). [10] 그것도 일본야구 교류전을 포함한 144경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 뛰고 거둔 성적이다. 수비는 1루수와 지명타자로 번갈아 가면서 했지만 이대호 다큐멘터리를 한 "오사카의 거인 이대호"에서 144경기를 다 뛰는게 어렵다고 할 정도 였다.

그리고 퍼시픽리그 베스트9 1루수부문에 선정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골든글러브와 베스트9가 구분되어있는데, 골든글러브는 순전히 수비력만 따져서 투표하는것이고 베스트9은 모든 기량을 종합해서 투표를 하는것이다. 우리나라 골든글러브가 베스트9의 느낌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편할 듯.[11] 일본 야구 첫 해에서 한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는점에서 자신도 자랑스러울듯. 다만 선수회 베스트9에는 선정되지 못했는데 선정선수는 2할 9푼에 10홈런을 때린 이나바 아츠노리[12]이다. 이 이나바 아쓰노리는 올스타전에서도 이대호를 밀고 팬 투표로 선발된 바 있으며, 일본야구를 대표하는 베테랑이고 일본내에서도 인기가 좋은 선수다. 우리나라도 이 선발에 대해 욕할 처지는 못 되는 것이, 98년 타이론 우즈, 2012년 브랜든 나이트 등 외국인이 수상에 대해 차별받은 케이스가 많다.

2012년 이대호의 홈런 중 인상적인 것들 모음.
[1] 실제로 그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고민도 "개인적으로 상은 많이 탔는데 팀이 우승을 못 한다"였다.[2] 그러나 이 금액은 훗날 최형우KIA 타이거즈로 이적하면서 받게 된다.[3] 애초에 물가 상승률만 가지고 선수 연봉의 인상폭을 계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약 3%였지만 생활물가지수는 2004년 대비 28% 상승, 주택매매가는 동기간에 40%가 상승했다.[4] 이대호는 돈보다 롯데가 제시한 4년이라는 계약기간이 부담됐다고 한다. 2009년쯤 인터뷰와 달리 이때 이대호는 해외진출에 대한 열망이 몹시 컸던 것 같다.[5] 하지만 아베의 아베노믹스 때문에 환율이 급락해버려 졸지에 연봉이 깎인 셈이 되었다.[6] 여기에 마쓰다의 비율 기록은 시즌 말미 규정타석 미달로 순위권에서 사라지게 된다.[7] 2위와 12타점 차이.[8] 이후 오카다는 2023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9] KBO 출신 선수로는 첫 번째 NPB 개인 타이틀 획득. 한국인 NPB 선수로는 1975년 백인천의 타격왕에 이어 34년만의 타이틀 획득. 여기서도 백골프냐 이 시즌에 꼴지를 차지한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유일하게 타이틀을 가져간 선수가 되었다.[10] 수치만 놓고 보면 대단한 수치가 아닌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통일구 도입으로 전례없는 극심한 투고타저를 겪었다. NPB 전체 평균 자책점이 2.95, 퍼시픽 리그 기준으로 3.03이었는데 심한 투고타저라고 불리었던 2012 KBO리그의 전체 평균 자책점이 3.82였다.[11] 사실 예전 KBO도 골든글러브와 베스트 텐을 구분했었다. 이 쪽은 지명타자 포함이었지만 고작 5년만에 사라졌다.[12] 나중에 고쿠보 히로키의 뒤를 이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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