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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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자로서의 소양 결여
1.1. 사료 독해의 기초 결여
1.1.1. 묘예(苗裔)를 묘족의 후예로 오독
1.1.2. 영주(營州)를 수성현으로 오독
1.1.3. 이문정(李文靖)을 율곡 이이로 오독
1.1.4. 태묘(太廟)를 건원릉으로 오독
1.2. 기본적 사실검증 결여
1.2.1. 전한이 동한이다?
1.2.2. 조비는 좀비였는가?
2.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결여
2.1. 단기간의 비전공 분야 저술 양산
2.2. 무분별한 언어 폭력의 행사
2.3. 네오 파시즘과 유사 매카시즘
2.3.1. "자국에 불리한 사실은 가르치지 말자"
2.3.2.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주류사학자"
2.3.3. "평양의 낙랑 유물은 북한의 조작"
2.3.4. "간도 영유권 부정은 국가보안법 위반"
3. 고대사 관련 문제점
4. 조선사 관련 문제점
4.2. 과도한 인물 재평가
4.2.1. 연산군 옹호
4.2.3. 윤휴 옹호
4.3.1. 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 백성
4.4.1. 임오화변과 정후겸과 이완용
4.4.2.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로 몰기 위한 왜곡
4.4.3. 영화 사도에 대해 "사도세자를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둔갑"시켰다고 비난
4.5. 간도, 을사조약 이전 조선 영토설
4.6. 고려, 조선 만주 지배설
5. 국어국문학 관련 문제
5.1. "두음법칙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식민국어학"왜곡
5.2. 한국에선 이인직을 선각자로 가르친다?
6. 이덕일을 비판한 학자들


1. 역사학자로서의 소양 결여[편집]



1.1. 사료 독해의 기초 결여[편집]



1.1.1. 묘예(苗裔)를 묘족의 후예로 오독[편집]


『사기』 흉노열전은 "흉노의 선조인 하후씨는 묘족(苗族)의 후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흉노 역시 치우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흉노가 묘족의 후손이고(A=B'), 묘족은 치우의 후손이니(B=c'), 흉노는 치우의 후손(A=c")이라는 삼단논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흉노가 묘족의 후손이라는 말의 근거로서 사마천이 쓴 사기 흉노열전의 첫 구절을 저렇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이덕일이 행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오역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일단 사기에서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匈奴, 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흉노, 그 선조는 하후씨의 묘예(苗裔)인데 순유라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덕일은 밑줄 친 묘예(苗裔)라는 단어를 '묘족의 후예'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이 묘예라는 단어가 단순히 '먼 후손'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라는 것이다. 당장 네이버 국어사전만 보더라도 바로 이 묘예라는 말의 정의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으며, 심지어 이것은 한글을 한자로 변환할 때 자동완성으로까지 입력할 수 있는 단어다. 이덕일은 이 정도로 기본적인 단어를 찾아보지 않아서 오역을 저지른 것이다.[* 묘예2(苗裔) (발음: 묘ː예), (명사) 먼 후대의 자손. 비슷한 말: 묘맥(苗脈), 묘윤(苗胤){{{#!wiki style="text-align: right;"
"묘예", 네이버 국어사전}}}]

더군다나 이덕일의 해석에서는 문장구조도 문제다. 묘예가 나오는 대목의 문장구조는 'A之B也'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어조사 之가 앞 체언을 관형어로 만들어 'A의 B이다'라고 해석된다는 것은 한문 문법에서도 기초 중의 기초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흉노의 선조=하후씨의 묘예"로 해석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덕일은 이런 기초적인 문법을 몰라서 "흉노의 선조=하후씨=묘예"라는 오역을 저질렀다.

설상가상으로 그 어떤 사기 번역본도 이덕일과 같은 오역을 하지는 않았다.[1] 이쯤되면 도대체 이덕일은 어떤 사마천이 쓴 사기를 참조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하후(夏后)는 순임금이 천자가 된 후의 국호이기도 한데, ‘맹자(孟子)’는 순임금을 동이족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을 종합해, ‘사기’의 ‘묘예(苗裔)’라는 말을 단순히 후손으로 해석하지 않고, ‘묘족의 후예’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1] 사마천, 박일봉 역, 『사기(열전Ⅱ)』, 1994, 180쪽, "흉노(匈奴)의 선조는 하후(夏后:禹)씨의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했다."; 사마천, 정범진 외 역, 『사기 6 - 열전 중』, 1995, 795쪽,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렀다.";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열전 · 하』, 2002, 253쪽,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렀다."; 사마천, 노만수 역, 『사기영선』, 2012, 449쪽,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렀다."

이에 용인에 사는 곽종경이라는 독자가 이 문제를 지적하자, 이덕일도 여러 사료를 고려해 해석했다는 면피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여러 사료'라는 것이 고작 하후씨는 순임금(a'=d)이고, 순임금은 동이족(d⊂C)이고, 묘족도 동이족(B⊂C)이니 고로 하후씨는 묘족(a'⊂B)라는 건데... 그런데 척 보기에도 알겠지만, 이거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다.

더군다나 각각의 진술도 하나같이 말이 안 된다. 하후씨는 순임금이 아니라, 우임금을 가리키는 말이고, 동이족이란 개념은 허구라는 것이 확실하며, 그마저도 묘족은 남만에 속하지 동이에 속하는 족속이 아니다. 또한 순임금과 우임금이 묘족의 일원이라면, 오죽 친정과 사이가 안 좋았기에 묘족이 사사건건 반란을 다 일으켰을까?[* "묘민(苗民)이 한 달 동안 명령을 거역하자, 우(禹)가 정벌하러 나섰는데 익(益)이 덕을 펴라고 권하니, 회군하였다. 이에 순임금이 크게 덕을 베풀며 방패와 깃, 일산 등을 가지고 추는 무무(武舞)를 추게 하였더니, 70일 만에 유묘(有苗)가 항복하였다."

] 결국 이덕일의 부연설명은 단순 오역이었던 자신의 실수를 더욱 완벽한 오류로 만들어준 셈이다.

이쯤에서 이덕일이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여러 정황상 이덕일과 마찬가지로 한문을 못 읽는 환빠였던 이중재의 사상을 표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재의 환타스틱한 사료 오독에 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조.


1.1.2. 영주(營州)를 수성현으로 오독[편집]


그럼 현재 갈석산이 있는 창려현이 과연 과거의 수성현인지 살펴보자. …… 먼저 『수서』「지리지」 '상곡군'조를 보자.

수성현 : 옛날에는 무수(武遂)라고 불렀는데, 후위(後衛)에서 남영주(南營州)로 삼았다. 영주(營州)는 5군 11현을 비준했는데 용성 · 광흥 · 정황현은 창려군(昌黎郡)에 속한다. 석성 · 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 · 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永樂)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 · 대방(帶方) · 영안(永安)현은 영구(營丘)군에 속한다.

수성현은 후위 시절 남영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11개 현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용성 · 광흥 · 정황 · 석성 · 광도 · 양평 · 신창 · 부평 · 대방 · 영안 현이다. …… 수성현에 속했던 11개 현이 5군으로 나뉜 것으로 봐서 수성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수성현을 포함했던 상곡군은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009, 92~93쪽}}}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수성현은 과거 남영주였는데(a=B'), 남영주에는 11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으니(B⊃c,d,e…), 수성현에는 11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a⊃c,d,e…)는 집합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군현제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만 있어도 내뱉을 수 없는 정말 완벽하게 멋진 개소리다. 정말 상식적으로 어떻게 현(縣) 아래에 현(縣)이 편제될 수 있다는 것일까?[2]

사실 위에서 녹색으로 쓰인 부분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遂成, 舊曰武遂。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五郡十一縣。

수성, 예전에는 무수라 했다. 후위(後魏)가 남영주를 두었는데[置], 영주를 본따[准] 5군 11현을 두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수서』 지리지 중, 중국어 위키문헌}}}
즉 이덕일은 이 문장을 읽으면서 세 부분에서 오역을 저질렀다. 첫째는 '후위(後魏)'를 음이 같은 '후위(後衛)'로 표기한 것인데, 이는 한글을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잘못 입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흔한 오타라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바로 옆에 한자가 올바르게 표기된 원문이 있다는 것. 또한 후위(後衛)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뒤쪽의 호위나 방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뿐이다.[* 후위1(後衛)(명사)1. 뒤쪽의 호위나 방위. 2. <군사> (같은 말) 후위대(주력 부대의 뒤쪽을 엄호하는 부대). 3. <운동> 축구ㆍ배구 따위에서, 주로 수비(守備)를 맡는 경기자.
"후위", 네이버 국어사전
[2] 다만 현(縣)은 아니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시(市) 아래에 시(市)가 편제되어 있다. 시(행정구역)/중국 문서나 지급시 문서 참고.
]

둘째로 '수성현에 남영주를 두었다'는 말을 '수성현을 남영주로 삼았다'고 오역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비슷한 말처럼 보이지만, 후자의 표현은 수성현을 남영주와 동일한 실체로 보이게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수성현은 남영주에 소속된 일개 현으로서, 남영주의 장관이 머무르는 치소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즉 이는 수원시에 경기도청을 두었다는 말이나 온천동에 아산시청을 두었다는 말과 같은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오역이 가져온 나비효과는 굉장한 수준이어서, 수성현은 졸지에 11개나 되는 현을 거느린, 이덕일의 말에 따르자면 "상당히 넓은 지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수성현을 포함한 상곡군은 당연히 더 넓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기가 막힐 뿐이다. 이 오독을 대한민국에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이 성립된다.

전주부는 조선시대 전라도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55개 군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광주 · 나주 · 능주 · 제주 · 남원 · 담양 · 무주 · 순천 등이다. 전주부에 속했던 55개 현이 5부로 나뉜 것으로 봐서 전주는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전주시를 포함했던 전라북도는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평구는 조선시대 부평도호부로 불리웠는데, 7개 군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강화 · 인천 · 해풍 · 김포 · 양천 · 교동 · 통진이다. 부평구에 속했던 7개 군현이 오늘날에는 3개 시로 나뉜 것으로 봐서 부평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부평을 포함하는 인천광역시는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러한 이덕일의 논리에 놀아난다면 제주도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고, 강화도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다는 말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덕일은 준(准)이란 한자를 '비준하다'란 뜻으로 해석해서 남영주를 영주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그 밑에 5군 11현이 있는 것으로 오역했다. 또 문제는 그 아래에 있는 수서 지리지 유성현조에 거짓말처럼 다시 한번 영주가 다시 한번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영주의 행정구역은 남영주의 행정구역과 겹치기도 하고, 또 겹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영주와 영주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그 해답은 위서 지리지의 남영주 조에서 찾을 수 있다.

南營州: 孝昌中營州陷, 永熙二年置。寄治英雄城。

남영주: 효창 중에 영주가 함락되자, 영희 2년에 두었다. 영웅성을 빌려 다스렸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위서』 지리지 상,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북위의 효창 연간(525~528)에 화북은 육진의 난으로 개판이었고, 이 와중에 영주 일대의 지방통치도 개발살났다. 그러자 육진의 난을 진압한 북위는 일단 영웅성에 남영주를 설치하여 이 지방을 수습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주가 복구되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남영주는 북제 시대에 창려군 하나만으로 근근이 유지되다가, 결국 수나라 때 폐지되었다.

즉 남영주는 530년 이전의 영주에 소속되어 있었던 지방 조직을 본따서(准) 자신들의 휘하 조직을 구성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전후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덕일의 눈에는 이 한자가 그저 승인했다(准)는 뜻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덕일의 논리에서 '영주'와 '남영주'는 완전히 동일한 실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더 나아가 이덕일은 이를 통해 군현의 소재지가 이동하던 당시의 지방 상황을 부정하고, 마치 수성현이 고조선 멸망 이후 70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다시 "낙랑군은 중국에 있었고, 이를 부정하는 너희는 매국노"라는 비국민 논리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그의 오독이 가지는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1.1.3. 이문정(李文靖)을 율곡 이이로 오독[편집]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 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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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한겨레, 2009-07-08}}}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이이가 문성공이란 시호를 받은 것은 1624년이고 류성룡은 1607년에 이미 죽었는데, 송시열의 율곡연보는 '류성룡이 이이를 가리켜 이문성(李文成)이라 했다'고 적었므로, 이 내용은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항복이 1618년 이전에 쓴 이이의 신도비문과 이정구가 1612년에 쓴 이이의 시장이 모두 '류성룡이 이이를 가리켜 이문정(李文靖)이라 했다'고 하고 있다는 점이다.

壬辰之亂, 西厓常語朝堂曰, "當時無事, 吾亦以爲擾民, 今而思之, 李文靖眞聖人也。"

임진난에 서애가 항상 조당에 말하길 '당시는 무사하기에 나도 백성을 소요시키는 일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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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 율곡선생비명, 한국고전종합DB}}}

逮壬辰之後, 西厓於朝堂, 語諸宰曰, "當時吾亦慮其騷擾而非之, 到今見之, 李文靖眞聖人也。"

임진난 이후에 서애가 조당에서 재상들에게 말하길 '당시에는 나도 그 소란을 걱정하여 반대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월사집』 율곡선생시장, 한국고전종합DB}}}
따라서 율곡연보의 내용은 단순히 문정(文靖)이 문성(文成)이라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문정'은 도대체 누구일까? 위에 인용된 백사집의 주석에 따르면 이문정은 중국 북송 때의 재상인 이항(李沆)을 가리킨다. 송나라의 재상이 된 이항은 왕단(王旦)에게 국방이 무사하면 씀씀이가 사치스럽게 된다고 경계했는데, 과연 이항의 사후 송진종이 사치스럽게 되자 왕단이 탄식하며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즉 당시 류성룡이 "이문정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한 말은 이이를 직접적으로 성인이라 칭송한 말이 아니라, 이이가 보인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자세를 중국의 이항에 빗댄 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잘못된 글자가 하나 들어간 것이지, 내용이 완전히 창작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 오자는 율곡연보의 원작자인 송시열 자신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순조 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이 아니라 '이문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 그러나 영조 25년(1749)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문정(李文靖)'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순조 14년판 <율곡전서>의 교정자가 이이의 시호가 '문성'이라는 건 알고, <율곡연보>에서 말한 '이문정'에 대한 고사는 몰랐던 까닭에 '문정'이 틀린 줄 알고는 '문성'으로 덜컥 고쳤던 겁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오항녕, "‘십만양병설 조작’ 주장은 ‘율곡전서’ 판본 무지서 비롯", 한겨레, 2009-07-24}}}
그런데 오항녕 교수에게 이와 같이 비판을 받은 이덕일은 '1차 사료를 제시하지 않고 논점을 흐렸다'며 오항녕에게 반격을 시도했는데, 당장 위에 인용된 백사집과 월사집이 1차 사료이고 정작 이덕일이 인용한 율곡연보는 3차 사료에 해당한다. 애시당초 당사자의 오독이 아닌 판본상의 문제이기에 이를 깔끔하게 인정하면 끝날 일을 그야말로 주객전도로 나온 셈이다.

오항녕 박사는 ‘율곡 이이가 말한 적이 없는 십만양병설은 제자들이 창작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려면 이이가 생전에 이를 주장했다는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한데 서지학자처럼 문정(文靖)이니 문성(文成)이니 하는 판본의 문제를 장황하게 서술해 논점을 흐렸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선조16년 이율곡은 ‘양민양성’ 주장했다", 한겨레, 2009-07-30}}}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장은 '이이의 십만양병론에 대한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하다고 했는데, 저는 이미 서인과 남인이 함께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이정구의 시장(諡狀), 이항복의 신도비문 등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이 소장은 십만양병설을 부정할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오항녕, "‘양몽거 상소’는 숙종때의 일", 한겨레, 2009-08-05}}}


1.1.4. 태묘(太廟)를 건원릉으로 오독[편집]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번도 수가隨駕(어가를 따라가는 것)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 하지만 이 또한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영조 28년(1752) 2월 영조가 태묘太廟(태조의 묘, 곧 건원릉)와 영희전에 나아갈 때, 그리고 그 다음 해인 영조 29년(1753) 7월 태묘에 거둥할 때도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 해 12월 태실太室에 나아갈 때와 다음 해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2007, 181쪽}}}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태묘에다가 '태조의 묘, 곧 건원릉'이라는 용어 풀이까지 달아놓았다. 실제로 이렇게 묘호 앞글자에 묘(廟)를 붙여서 왕을 지칭한 경우가 있기에 이덕일이 착각했을 수도 있다. 예컨대 실록에는 세종을 세묘(世廟), 세조도 세묘(世廟), 효종을 효묘(孝廟), 현종을 현묘(顯廟), 숙종을 숙묘(肅廟) 등으로 칭한 내용이 수도 없이 나타나며, 영·정조 당대에도 문종을 문묘(文廟), 단종을 단묘(端廟)로 칭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왕 본인을 가리키는 말이지 '왕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3]

참 어이없는 오독이다.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 이덕일은 태묘와 태실이 종묘라는 기본적인 역사용어조차 모르고 『한중록』을 비판했다. 그는 태묘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태조의 무덤 곧 건원릉으로 보았고, 사도세자가 거기까지 수가했다고 했다. 사도세자가 사는 동궁은 창덕궁에 있었고, 종묘는 창덕궁과 한 담장 안에 있었다. 지금이야 궁궐이 훼손되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로가 있지만, 원래는 한 울타리 안이었다. 그러니 태묘에 간 것은 능행수가와 같은 큰 외출이 아니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정병설, 「길 잃은 역사대중화」, 2011, 339쪽}}}
중요하니까 다시 말하지만, 태묘는 무덤이 아니다. 잘 보면 여기에서 쓰인 묘(廟)는 위패를 모신 사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시신이 안치된 무덤을 의미하는 묘(墓)와는 한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당 중의 사당인 태묘는 당연히 종묘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도세자가 거처하던 창덕궁 바로 아래,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바로 그 종묘 말이다. 국어사전만 찾아봐도 태묘는 종묘라고 버젓이 나와 있다.[* 태묘2(太廟)(명사)1. <역사> 종묘의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초에는 목조, 익조, 탁조, 환조 등 태조의 사대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에는 당시 재위하던 왕의 사대조와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2. <역사> 임금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 그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시던 일. 비슷한 말: 종묘(宗廟), 태실(太室)
"태묘", 네이버 국어사전
[3] 예를 들어 영묘(英廟)는 영조라는 사람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지 영조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만약 영묘가 무덤을 지칭하는 경우로 쓰였다면, 이는 영조의 능이 아닌 세종의 영릉(英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마저도 영릉이 아닌, 세종을 가리켜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이다. 만약 태묘(太廟)를 가리켜 태조나 태종을 가리켰다고 주장했다면 그나마 이해를 좀 해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태조의 무덤"을 가리켰다고 한다면 이건 뭐.. 그마저도 조선왕조실록에서 태묘라는 단어만큼은 태조나 태종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 적이 없으며, 고려사 등 다른 사료에는 "태묘에 부묘했다."는 등, 태묘는 종묘를 지칭한 기록으로 수도 없이 쓰였다.
]

이덕일이 이와 같은 오역을 저지른 것은 조선시대의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덕일의 전공이 근대사이므로 이러한 오역은 충분히 저지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덕일이 이처럼 잘못된 사료 해석에 기반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기성 역사학자들을 물어뜯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이덕일은 데뷔 초 사도세자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유명세를 얻었기에 대중들이 그를 사도세자 문제의 전문가로 인식하고 있는데, 능묘제도는 사도세자 사후의 추숭 문제와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이덕일이 바로 이러한 능묘제도에 대해서 기초적인 사실을 무시했다는 것은 전공을 떠나 그가 기본적인 공부조차 안 하거나,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이덕일 본인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의 서문에서 이미 『이덕일의 여인열전』(2003)에서 태묘의 뜻을 바로 풀어 썼다며, 사소한 실수.하나로 작가를 매장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실제 정병설 교수가 지적한 그 부분은 그저 실수한 단어 하나를 걸고 넘어진 것이 아니라, 혜경궁 홍씨가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의 근거를 반박한 것이다. 이 문제는 결코 사소하다고 할 수도 없고, 실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따지자면 이덕일은 그 자신이야말로 '태묘'라는 단어 하나고의적으로 조작해 혜경궁 홍씨에게 거짓말쟁이란 누명을 씌운 셈이다.


1.2. 기본적 사실검증 결여[편집]



1.2.1. 전한이 동한이다?[편집]


중국에서는 전한을 주로 동한이라고 표기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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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48쪽}}}
중국사 혹은 삼국지를 정말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을 알 수 있겠지만 전한의 다른 이름은 서한(西漢)이고, 후한의 다른 이름은 동한(東漢)이다. 이는 전한의 수도는 '서도'라 일컬어진 장안이고, 후한의 수도는 '동도'라 일컬어진 낙양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마저도 헷갈린 것인지 아니면 퇴고를 안 하는 것인지 둘을 섞어버렸다.


1.2.2. 조비는 좀비였는가?[편집]


동천왕이 재위 16년(서기 242) 서안평을 습격하자 조조의 아들 조비는 2년 후에 장수 관구검을 보내 반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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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외교관", 중앙일보, 2012.04.25 00:15}}}
조비는 226년에 죽었고, 242년은 조비의 손자뻘 되는 조방이 황제로 있던 시절이다. 사실 위에 인용된 글의 전반적인 흐름도 서희를 통해 외교관의 책무를 말하다가 뜬금없이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는 주제로 넘어가는 등 논지가 우왕좌왕하는 편이다.


2.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결여[편집]



2.1. 단기간의 비전공 분야 저술 양산[편집]


나는 이 글에서 '역사서' 한 권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쓴 『사도세자의 고백』이다. 이 책은 '이덕일'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저작으로, 역사대중화를 선도했다고 평가받았다. 또 이 책은 역사적 사실들을 엮어 소설적 문체로 서술했다고 하여,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친 말인 팩션(faction)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팩션이라고 해서 이 책이 '역사서'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저자나 독자 모두 '역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아쉽게도 『사도세자의 고백』은 사실에 기초한 역사서라고 할 수 없다. 허구의 수준은 거의 소설에 가까우며, 그 소설적 논리는 소설이 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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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설, 「길 잃은 역사대중화」, 2011, 330쪽}}}

이덕일씨가 쓴 책은 무려 100권이 넘는다. 물론 인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계발서를 200권 넘게 낸 작가도 있으니까. 문제는 역사책의 경우 교양서라고 하더라도 1년에 한 권 내기도 사실상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평생에 걸쳐 연구서 1-2권을 내거나 저서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덕일씨는 근대사로 학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사에 관한 책도 많이 발간했다. 자기의 전공시대 혹은 전공주제를 전부 섭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덕일씨는 천재인가? 1년에 5권씩 꼬박 20년을 써야 100권을 저술할 수 있다. 그것도 한국사 전시대와 모든 주제를 종횡무진하면서..

이덕일씨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소화를 하고 배설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먹는 것에 비해 과하게 쏟아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배설물은 냄새가 진동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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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페이스북 페이지, 2015.8.13}}}
역사를 소설적 문체로 서술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대중화를 하는데 소설적 서술방식을 쓴 책들이 필요하다는 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는 것이다.[4] 그러나 이덕일은 단순히 학술적인 문체로 쓰지 않거나, 소설스런 문체로 써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이덕일 책이 문제인 것은 픽션소설이 아니며 엄연히 논픽션 역사책인데 기본조사도 결여됐거나 왜곡된 책이라는 것이다.


2.2. 무분별한 언어 폭력의 행사[편집]



2.2.1. 김현구[편집]


이와 관련해 이덕일은 명예훼손죄로 징역 및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해당 문서 참조.



2.2.2. 정병설[편집]


상식이 통하는 사회 같았으면 정병설 같은 반(反)인문적 존재는 이미 학계에서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대한민국이다. 3백 년 전 노론사관과 1백 년 전 식민사관이 하나뿐인 정설인 나라다. 그래서 정병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객관화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그 논지는 정확하게 '사도세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3백 년 전 노론 당론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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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2011 서문}}}


2.2.3. 박유하[편집]


현재 대한민국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금전을 대가로 몸을 판 매춘부인 것처럼 비하하는 『제국의 위안부』(2013) 같은 책들을 버젓이 출간해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 그 한 대목을 보자.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일본 군인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 머나먼 이국땅으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

이 말을 세종대 일문과 교수이자 여성인 저자 박유하에게 그대로 돌려주면 다음과 같이 된다. 박유하가 어떤 불량배들에게 집단 강간당했다. 그런데 그 강간범들은 조직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이날도 조직의 명령에 의해 강도 행각을 일삼다 내친 김에 강간까지 저지른 것이었다.

'박유하'가 '강제로 끌려온' 피해자였다면 집단 강간범들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직에 의해 강간 장소로 '강제로 끌려온' 존재였다.{{{#!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5, 389~390쪽}}}
설령 박유하의 저서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경솔하게 접근한 감이 있고 실제로 논란이 되고 있긴 하더라도, 이덕일처럼 당사자를 강간당한 여성으로 설정하면서 이러한 언어적 성추행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욱 저질스러운 사람임을 드러내는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박유하의 언설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덕일의 이러한 비유에는 혐오스러움을 표하는 이들이 있다.[5]


2.3. 네오 파시즘과 유사 매카시즘[편집]



2.3.1. "자국에 불리한 사실은 가르치지 말자"[편집]


파헤치고 파헤쳐 봐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어떡합니까? 초등학교 때. 그거 가르치지 말아야죠. 초등학교 때 배울 게 얼마나 많아요? 이순신 장군 배워야 되고, 을지문덕 배워야 되고, 단군 배워야 되고. 배울 게 그렇게 많은데, 우리 역사를 식민지로 시작했다 이것부터 가르쳐야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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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딴지라디오 벙커1 특강", 2014.10.28, 28:10~28:52}}}
비록 이덕일은 고대사에 대한 이론이 윤내현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이덕일은 윤내현보다 훨씬 위험하고 정신나간 주장을 한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든 없었든 간에, 한국사의 시작은 고조선이지 한사군이 아니다. 즉 한사군의 위치를 인정하면 한국사의 시작이 식민지가 된다는 이덕일의 주장은 오히려 고조선의 존재 의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거기다 역사가라는 사람이 부끄러운 역사는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발언은 일본이 구 일본군의 만행을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독일이 제3제국 시절의 홀로코스트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2.3.2.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은 주류사학자"[편집]


이 소장을 만나러 오기 전 인터넷에 관련 글을 검색했다. 그에게 우호적인 글보다는 비판하는 글이 많았다. 이 소장이 자신의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만권당)에서 김현구 교수를 실명 비판한 것을 놓고 적잖은 네티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해온 사람인데, 이덕일 소장이 왜 김현구 교수를 비판하고 나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소장에게 물었다. 이덕일 소장은 "그게 다 우리 사회에 식민사관이 퍼질 대로 퍼져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답했다. "역사 카페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다 그쪽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이 소장이 말하는 '그쪽'이란 주류사학계를 말한다. 그는 주류사학계를 '식민사학계'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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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과 김현구의 '이상한 소송'", 팩트올, 2015-09-16}}}
이덕일이 간주하는 '주류사학계' 내지 '식민사학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이덕일을 가장 거세게 비판 또는 조롱하는 유명 블로거이자 저술가인 초록불은 정작 이종욱 교수 밑에서 수학한 사람이고, 이종욱 교수는 오히려 노태돈으로 대표되는 서울대 계열의 학맥을 '후식민사학'으로 간주하며 거세게 비판하는 사람이다.

더욱 직접적인 예시로는 김상태가 있다. 이 역시 서울대 계열의 학맥을 폐쇄적 식민사학으로 강도 높게 비난하면서, 유사역사학자나 다를 바가 없는 윤내현 교수의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추종하는 등 주장만으로 따지자면 이덕일에 가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상술한 초록불 등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진 이덕일 비판에 대해서는 적극 동조하면서 오히려 "이덕일은 정말로 죽었다"고 자신의 책에서 명시적으로 못을 박아버리고 있다.

이외에도 "역사 카페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일반 대중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국내 유수의 역사 커뮤니티 가운데 회원에게 '주류사학계'라 일컬어질 만한 특정 집단에 몸담고 있음을 인증하도록 요구하는 곳은 적어도 2016년 초를 기준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노골적으로 환빠짓을 하면 까이고 쫓겨나기는 한다.


2.3.3. "평양의 낙랑 유물은 북한의 조작"[편집]


이 북한 학계는 평양 일대를 낙랑군이 아니라고 줄기차게 주장했어요. 남한 학계에서는 안 믿었습니다. 안 믿다가, 낙랑목간 하나 나오니깐 이것은 사실이다라고 막 하고 있는데, 북한에서 낙랑목간을 느닷없이 왜 공개했겠느냐. 하나는 주체사관이고 또 하나는, 또 하나는 뭐냐하면 남한으로, 북한으로서는 남한의 식민사학이 계속 유지되는게 좋은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러면 자기 절대 품목 하나가 없어지는 겁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저희 같은 역사학으로 바뀌게 되면은 북한이 남한에서 우위로 주장할 수 있는 절대 품목 하나가 없어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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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한국상고사 대토론회" 발언, 2015.11.17, 1:17:35~1:18:17}}}
이덕일은 단국대학교 교수인 윤내현의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아 고대 예맥족과 삼한의 영역을 과대 포장시키고 고조선 지역에 설치한 한군현을 요서 지방으로 주장하는데, 정작 북한에서 낙랑 목간을 공개하면서 어떠한 주장을 했는지 살펴보면, 이러한 이덕일의 주장과는 정확히 반대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원4년 락랑군 현별 호구수에 관한 목간이 락랑구역의 한 귀틀무덤에서 나오게 된 것은 락랑군의 아전이었던 피장자가 무슨 죄를 저질렀거나 인민들이 반봉건투쟁으로 하여 제 고장에 배겨있을 수가 없게 되여 락랑국으로 도망왔다가 자기 소지품과 함께 묻힌 것으로 인정된다. 그와 같은 망명객은 그 외에도 더러 있었다. …… 통계표에 보이는 7개 현(후의 대방군지역)의 호구수는 료동반도 남단의 력사지리적 및 경제지리적 환경조건과 대비고찰해보면 잘 대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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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종, 「락랑군 남부지역(후의 대방군지역)의 위치」, 2006, 31~33쪽}}}
즉 손영종으로 대표되는 북한 학계는 당초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군 호구 기록 목간을 공개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낙랑군은 한반도 북부에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 학계의 주체사관에서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낙랑군 재평양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당 목간을 공개한 것이라는 이덕일의 주장은 그 무엇도 사실관계에 맞지 않게 된다.[6]

이에 따라서 그것이 남한 학계를 낙랑군 재평양설로 유도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희석된다. 물론 남한 학계를 간접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역정보'를 흘린 것일 가능성도 어디까지나 배제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그와 같은 음모론을 뒷받침할 만한 최소한의 정황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3.4. "간도 영유권 부정은 국가보안법 위반"[편집]


동북아역사재단의 역사인식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간도 문제'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을 중국측에서는 두만강으로, 조선측에서는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음(78쪽). 그러나 백두산정계비 건립 당시 청측과 조선측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이라고 인식하였으며,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이라는 인식은 18세기 후반에 제기됨, 따라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한·중 영토 문제를 제기하는 자료집의 간도 문제 서술은 전반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장하는 것은 동북과정을 수행하는 중국의 관변학자들의 주장보다 더 친중국적이고 더 반대한민국적이다. ……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라면 동북아역사재단의 사무총장 및 이 분석서를 만든 담당자는 당장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 대상에 올랐을 것이다. 역사 침략은 반드시 영토 침략으로 이어진다. 역사 주권을 팔아 먹는 것은 영토 주권을 팔아먹는 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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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53~154쪽}}}
이처럼 이덕일은 조선의 간도 영유권을 부정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간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을 국가보안법으로 수사하자고까지 주장한다. 국가보안법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7], 이덕일의 말은 그와 무관하게 그야말로 국가보안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되는 대로 주워섬기며 전문가 행세를 한 것이다.

1991년 일부개정되어 지금까지 유지되는 국가보안법의 제1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1조(목적 등)

① 이 법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②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제2조(정의)

① 이 법에서 "반국가단체"라 함은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의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말한다.

상기의 내용을 요약하면 국가보안법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이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공세적 법률이 아니라, 그 이름처럼 국가의 안전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방어적 법률이다. 그런데 지금 간도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정부가 어디인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이다. 따라서 한국 측의 간도 영유권 주장이란 장차 예견되는 국가의 이권 확보를 목적으로 타국의 실효지배 영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공세적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부정하는 언동은 절대 국가보안법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은 1991년에 개정되면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여 적용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명시하였다. 즉 헌법 제21조와 제22조에 명시된 언론과 학문적 자유의 기본권이 국가보안법보다 상위에 있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이덕일은 김현구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서면서 그것은 자신의 '의견 표명'이므로 언론 자유의 권리로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이덕일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영토 주권을 팔아먹으므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 주장했지만, 국가보안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용 대상으로서 반국가단체는 곧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집단이 국가보안법에 회부되려면 직접적으로 국가 전복을 기도하였는지를 기준으로 따져야지, 국익에 해로운 언동을 하였는가를 기준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기준에 의한다면 정작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을 대상은 바로 이덕일이다. 아래에서 이덕일은 '한국판 뮌헨 폭동 내지 2.26 사건'을 벌여서 정부를 엎어버리자는 선전선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이 문제를 방치한다면 우리 국민들의 '제2의 3.1 운동'에 나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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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69쪽}}}

그리고 이러한 망발에 넘어간 누군가가 간도 회복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그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판례가 등장했다.[8]

우리 헌법에 피청구인 또는 대한민국 정부가 현재 중국의 영토인 간도 지역을 회복하여야 할 작위의무가 특별히 규정되어 있다거나 헌법 해석상 그러한 작위의무가 도출된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 간도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여야 하는 어떠한 법적인 의무가 있다고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설령 피청구인이 중국에 대해 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등 간도 지역을 우리의 영토로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청구인은 피청구인에 대해 그와 같은 적극적인 공권력 행사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사건 심판청구는 헌법소원이 허용될 수 없는 공권력의 불행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부적법하다.

그러므로, 이 사건 심판청구를 각하하기로 하여, 관여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2.3.5. "누가 한국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편집]


동북아역사재단의 '왜놈 주구'식 주장은 계속되어 '압록강-두만강' 북쪽을 조선의 국경으로 표기한 서양 고지도도 다수 존재함'이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대한민국 국고로 호의호식하며 지낸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반국가적 행태는 계속된다. …… 이런 문건을 작성해서 교육부를 통해 압박한 인간들을 과연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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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57~159쪽}}}

동북아역사재단은 무식하게도 "간도를 한국 영토로 삼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 …… 이들은 일왕의 살아있는 신민이자 중국의 흑인(호적이 되어 있지 않은 중국인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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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57~159쪽}}}
더 나아가 이덕일은 '국익에 이로운 주장(어디까지나 그가 생각하기에)'을 거부하면 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논리까지 펼치고 있다. 문제는 이덕일은 근대사 전공으로, 구 일본 제국파시즘에 맞선 동북항일연군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경악스럽게도 정작 그 자신이 일제 파시즘의 일환이었던 비국민 논리를 고스란히 가져다 사용하고 있다!

애당초 이덕일이 어떤 기준을 담보하고 있기에 자기 마음대로 누가 '비국민'이며 누가 그렇지 않은지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이덕일이 그러한 기준을 담보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과 다른 말을 하면 그것만으로 '비국민'이라 몰아서 추방하겠다는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극히 유치한 수준의 언동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님이 좋다고 하면 양구거도 좋다고 하고, 임금님이 싫다고 하면 양구거도 싫다고 합니다. 물에 물만 탄다면 누가 맛 좋다고 할 것이며, 악기의 소리가 하나뿐이면 누가 듣기 좋다고 하겠습니까? 맞장구치는 것(同)이 옳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춘추좌씨전』 소공 20년조
[4] 한국사학사학회, 『21세기 역사학 길잡이』, 제3부 <역사 자료와 역사 쓰기> 참고.[5] 김규항 페이스북 페이지, 2015.10.2 19:57 참고.[6] 2007년 북한 사회과학원이 발간한 『조선력사지도첩』에서도 역시 '락랑군'은 한반도 바깥에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체사상의 역사관에서도 여전히 낙랑군 재평양성이 부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근거다.[7]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레드헌트는 국가보안법에 의거 '이적 표현물'로 판단되었고, 1997년에 이 작품을 상영한 인권영화제의 주최자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이 구속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최고의 간첩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때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을 대기발령시켰다.# 2014년에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어느 반공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은 박원순 변호사였는데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익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했다.#[8] 사건: 간도 영유권 회복에 관한 시정조치 부작위 위헌확인, 사건번호: 2009헌마516
]

게다가 이덕일은 이러한 비국민 논리를 나치 독일에서 선동하던 배후중상설 음모론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식민사관이 해방 후에도 수정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왔을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주류로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 그동안 대한민국 주류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바라보고, 그 관점을 강단에 서서 전파해온 식민사학자, 예를 들어 이병도, 신석호, 서영수, 노태돈, 송호정, 김현구 등을 실명으로 비판하고, 그들의 학문적 태생에서 현재까지의 행적을 낱낱이 벗겨내며 대담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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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책소개 『우리 안의 식민사관』}}}


3. 고대사 관련 문제점[편집]



3.1. 환단고기 진서론[편집]



3.1.1. 치우가 나오니 위서가 아니야[편집]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같은 우리나라의 역사서에도 나오지만. 이 두 책은 사학계에서 위서로 몰리는 책이다. 그러나 치우가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때 전한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쓴 사기나 후한시대 반고가 쓴 한서에도 등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마천이나 반고는 뛰어난 역사가의 대명사기 때문에 그들이 쓴 책의 내용을 무작정 허위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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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215쪽}}}

환단고기가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치우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중국 고대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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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231쪽.}}}
여기에서 이덕일은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 논리를 요약해보면 사기와 한서의 내용은 참인데, 치우는 사기와 한서에 나오므로 치우는 참이다(b⊂TRUE). 그리고 환단고기에도 치우가 등장하니(C⊃b), 환단고기의 내용도 참이다(C⊂TRUE)라는 것이다. 하지만 밴 다이어그램만 그려봐도 알 수 있듯이 이 또한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다.

굳이 논리학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한 집합의 성분 가운데 얼마간이 참이라고 해서 그 이외의 모든 성분들이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각의 사실로부터 보편적 원칙을 도출하는 이러한 귀납논증은 오직 반례가 없다는 전제하에 그 가설이 아직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귀납논리학은 현재의 관찰된 사실로부터 어떤 보편적인 명제를 끌어내는 추리에 관한 연구를 한다. 이 보편적인 명제는 현재 아직 관찰되지 않은 경우도 포함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경우도 포함한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에 특정한 수의 황새가 빨간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근거로 ‘모든 황새는 빨간 다리를 하고 있다’라는 보편적 명제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추리의 정당화에 대해 D.흄이 의문을 제기하였고, J.S.밀, 러셀, J.케인스, R.카르나프가 확률이론(確率理論)을 통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C.S.퍼스, J.듀이, 그리고 K.R.포퍼는 이러한 귀납논리학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그것은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하여 아직 반례(反例)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퍼스는 그 보편명제가 참이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직 거짓이 아니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보편명제는 ‘법칙’이라기보다 ‘가설(假說)’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퍼스의 귀납성은 빨간 다리의 황새들을 열거하는 데서 찾지 않고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한 있을 만한 반례의 경우들을 찾아보면서 아직 반례를 얻지 못하는 데서 설명될 수 있다."

"논리학 [logic, 論理學]", 네이버 두산백과
] 하지만 주지하듯이, 환단고기에는 이미 거짓으로 증명되는 반례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다만 이덕일의 말을 다소 유화적으로 해석하자면 '환단고기에만 등장하는 다른 내용들에도 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제기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환단고기에 치우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그것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덕일 자신이 인정하듯 치우가 등장하는 사기와 한서부터가 과거부터 뛰어난 역사책으로 손꼽히던 것들이고, 조선시대 경연이나 선비들의 저술에서 정말 엄청나게 많이 인용되는 게 사기와 한서의 구절이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치우에 관한 내용은 이것을 조금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게 어떻게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역사적 인물 가지고 소설 쓰는 건 요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주작이 담덕을 도왔다. 담덕은 실존 인물이다.

연개소문은 승천했다. 연개소문은 실존 인물이다.

천추태후는 여전사였다. 천추태후는 실존 인물이다.

충혜왕은 성군이었다. 충혜왕은 실존 인물이다.

세종은 밀본과 싸웠다. 세종은 실존 인물이다.

김승유는 세조의 사위였다. 김승유는 실존 인물이다.

류성룡은 몽진을 반대했다. 류성룡은 실존 인물이다.

고구려는 안택선을 탔다. 고구려는 실존 국가다.

조선은 하이힐을 발명했다. 조선은 실존 국가다.

게다가 사기와 한서에 치우가 나온다고 해서 치우가 참이라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는다. 사마천 자신부터가 오제본기의 후기에서 "많은 이들이 황제를 말했지만, 그 글은 쓸만하지 못하다"고 해서 황제의 실존 여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도 당장 요순시대 이래의 하나라만 해도 실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전까지 올라가면 중국에서도 실제 역사였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사기나 한서 등에 실린 치우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와 같이 당대인들의 상상이 반영된 일종의 신화로 해석되어야 한다.


3.1.2. 환단고기 진서론자 인증[편집]


환단고기 완역을 축하합니다. 환단고기 완역은 현재 주류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식민사학 타파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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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콘서트에 보낸 이덕일·김병기의 축전}}}
자신이 환단고기를 진서로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직접 인증했다. 다른 단체도 아닌 종교단체가 자신들의 경전으로서 발간한 책인데도 말이다.

단군은 천자나 황제처럼 통치자를 뜻하는 용어이고, 왕검은 초대 단군의 이름이 된다. 『삼국유사』는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만을 밝히고 있는데, 아직 진위 논쟁은 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 '한단고기'로도 읽음)』 같은 책들은 시조 단군 왕검 외에 2세 단군 부루(扶婁) 등 47임금의 계보를 밝혀 놓기도 했다.

『환단고기』는 대종교의 계연수(桂宴壽)가 1911년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라는 네 종류의 책을 묶어 편찬한 책인데 아직껏 위서 논쟁이 치열하다. 위 책들에 기록된 단군의 세계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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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교양 한국사 1』, 2005, 52~53쪽}}}
심지어 이덕일은 자신이 낸 교양서에서 단군을 다루면서 "단군은 왕칭이고, 환단고기에는 단군 47대의 계보가 있다"는 말까지 적어놓았다. 일단 위서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는 있지만, 위의 주석을 살펴보면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나 환단고기가 1911년에 편찬되었다는 주장을 비판 없이 그대로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환단고기에 있는 단군 47명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놓았다!

2016년에 이덕일은 심지어 무려 '세계환단학회지'라는 학술지라고 쓰고 불쏘시개라고 읽는 것의 3권 2호에 '환단고기의 역사성과 사학사적 의의'라는 논문을 게시했다. 환단고기가 진서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으니 빼도박도 못하게 환빠인 것을 인증한 것이다.


3.2.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편집]


해당 항목 참조.


3.3.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설[편집]


해당 항목 참조.


3.4.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편집]


파일:external/pds26.egloos.com/d0112467_561406807eaee.jpg
분리된 해당 문서 참조.

그런데 사실 이 지도만 봐도 상당히 맛이 갔는데


  • 숙신, 동예, 동부여를 헷갈렸다.
    • 동예와 숙신이 나란히 나와 있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8년조의 정벌 대상을 식신(息愼)으로 보면 숙신이 되고, 백신(帛愼)으로 보면 동예가 되는데 이덕일은 그냥 둘 다 했다.
  • 동예를 410년에 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마저도 동예와 동부여를 헷갈린 것인지 동예의 복속 연대를 410년이라고 표시했다. 그래놓고 그 위에 동부여도 410년에 복속되었다고 표시했다.
  • 동예가 옥저 자리에 있다.
애당초 '백신'을 동예로 본 것이 그들의 복속을 신라로 가는 루트를 확보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인데, 동예가 저기 있으면 '백신'이 동예인 이유가 없다.
  • 거란, 비려를 헷갈렸다.
    • 거란과 비려가 나란히 나와 있다.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5년조의 정벌 대상은 비려(碑麗)인데, 대개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거란과 동일시된다. 그런데 이덕일은 그냥 둘 다 했다.
  • 거란을 395년에 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마저도 거란과 비려를 헷갈린 것인지 거란의 정벌 연대를 395년이라고 표시했다. 그래놓고 그 위에 비려도 395년에 복속되었다고 표시했다.
  • 비려가 북부여 자리에 있다.
애당초 '비려'를 거란과 분리시켜 보는 것이 그것을 숙신 서북의 비리국(裨離國)으로 보기 때문인데, 비려가 저기 있으면 '비려'가 비리인 이유가 없다.
독도는 고사하고 울릉도도 없고, 울릉도는 고사하고 신라도 없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중원고구려비 위치도 잘 못 되었다.
    • 지도에 표기된 위치는 중원고구려비가 있는 충주가 아니다.
중원고구려비가 표기된 위치를 중심으로 십자선을 그어보면, 서쪽으로 아산만, 북쪽으로 강원도 고성에 이어진다. 이 위치는 현 지도로 하면 충북 제천과 강원도 영월의 경계에 해당하며, 충주는 좀더 서쪽으로 들어가 지도의 '위례성' 중 '성'의 아래쪽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건 뭐 그냥 답이 없다.


3.5. 신라만주 지배설[편집]


최근에는 통일신라가 만주까지 지배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


4. 조선사 관련 문제점[편집]



4.1. 조선왕 독살설[편집]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과도한 음모론으로 점철돼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4.2. 과도한 인물 재평가[편집]



4.2.1. 연산군 옹호[편집]




4.2.2. 원균 옹호론[편집]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1999)란 책을 악질적 원균 추종자인 이희근과 공저하면서, 이 사람의 영 좋지 않은 궤변에 부분적으로 침식된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이희근의 논지를 전부 받아들인 것은 아니고, 이희근이 주장하는 "원균이 일등공신이 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공이 있었다"거나 "원균은 북인으로 간주되어 서인에게 폄훼당했다"는 인과를 역행하는 궤변과는 일정하게 선을 긋는 모습을 보인다.

애당초 원균옹호론은 80년대의 일시적인 트렌드였기에 얼마간 참작의 여지가 있고 이후 거듭 논파되면서 지금은 그 입지가 많이 줄었지만, 문제는 이덕일이 아직까지도 종종 원균의 무능함을 물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칠천량해전 때 토벌 불가를 외치는 원균을 윽박질러 전투에 나서게 한 원수가 바로 권율이라는 사실이다. 선조 32년(1599) 7월 19일 이조에서 도원수 권율의 추증을 건의하자 사관은 권율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정유년 주사의 전투[칠천량해전]에서 아무리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진실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왜적과 대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즉시 보고했어야 했다. …… 권율은 이런 계책은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경거망동하면서 통제사 원균을 형장하면서 급하게 독전하였다. 그리하여 6년 동안 어렵게 모은 주사를 하나도 남김 없이 없앴으며, 그 많은 산책 역시 한 곳도 보존하지 못함으로써 적군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호남·호서를 침입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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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1999, 199~200쪽}}}

요시라를 통해 이순신을 무력화시킨 고니시는 같은 전술을 원균에게도 사용했다. 원균 역시 "고니시와 요시라가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선조와 원수 권율의 압박에 못 이겨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선조 30년(1597년) 7월 15일 원균은 조선 수군 전부를 이끌고 절영도 전투에 나섰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그는 거제도 칠천량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전사했고, 전라좌수사 이억기도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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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1. '이순신의 후예'라 자처하다니 부끄럽다", 시사저널, 2015.04.02}}}
여기에서 이덕일은 선조와 권율을 끌어들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있다. 그런데 애당초 요시라의 첩보에 회의적인 조정[* "왜적의 말은 교활하여 믿기가 어렵고 청정이 이미 대마도에 나와 있으니, 비록 계책을 행하려 해도 미치지 못할까 싶습니다. 신들이 뒷탈이 있을까 염려되고 또 기회가 이미 늦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원수로 하여금 적의 정세와 시기가 어떠한가를 보아 편의에 따라 수응(酬應)하여 그 일을 성취시키게 하고 불가하거든 그만두게 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1월 21일
]에 "수군을 이끌고 무력시위만 해도 가토가 겁먹고 못 넘어올 것"이라 주장하면서 요시라가 던진 떡밥을 되살리고, 선조가 생떼를 부리며 이순신을 파직하도록 부추긴 게 바로 원균이다. 작전개념을 제시하고 여론도 뒤집었는데 원균의 책임이 아니다?[*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오오 짝지어 절영도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00~200씩 대해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은 평소 수전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1월 22일
]

더군다나 이 장계를 올릴 당시 원균은 전라좌병사로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중장급(종2품) 육군 군단장이 대장급(정2품) 해군참모총장의 작전계획에 참견을 놓은 셈이니, 하극상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명백히 지휘계통을 무시한 발언이다. 그것도 당사자에게 직접 제언한 것도 아니고 대통령에게 직통 라인으로 징징거렸다는 점에서 그 발언이 다분히 정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이순신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발언을 했지만 원균의 책임은 아니다?[*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안중홍)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고 하였다.

『은봉전서』
]

결정적으로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친 것은 그의 무능함[9]을 문책한 것이지 재출전을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의외로 당시 조선 조정의 작전계획은 함대를 나누어 파상적으로 해상을 교란하라는 것이었지, 죄다 이끌고 가서 한큐에 건곤일척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6일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8일
[9] 칠천량 해전 이전에 이미 부산포에서 성과 없이 판옥선만 30여 척을 까먹고 돌아오는 사실상의 패전을 겪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7월 10일
] 그런데 곤장을 맞고 분을 이기지 못한 원균이 독단적으로 전군을 이끌고 출정해서는 술만 퍼마시다 튀었던 것이다. 상부의 작전계획을 사사로이 변경하고 달아났지만 원균의 책임은 아니다?

임란 초기에 왜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던 경상좌우수영이 거의 궤멸되자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해 이순신과 함께 옥포·당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만 해도 원균과 이순신은 서로 의기가 투합하는 명콤비였다. 『선조실록』 25년 6월 21일자는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와 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대체로 이순신을 주역으로 기술하였지만 원균에 대해서도 공동작전의 한 축으로 적어놓았지 폄하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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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 201쪽}}}

임란 발발 당시 조선 수군은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이끌고 있었다. 이 중 최초의 왜군의 상륙 지역이었던 경상좌·우수사 소속의 전선은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지원 요청으로 출전해 옥포와 당포 등지에서 승전을 거둠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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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3』, 2003, 85쪽}}}
원균은 개전 초기 삼도수군 가운데 가장 우월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던 경상우수영을 혼자서 자폭시키고 달아난 위인이다. 하지만 이덕일은 이를 박홍의 경상좌수영과 한데 묶어서 마치 경상우수영도 왜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었고, 원균은 어쩔 수 없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서술 트릭을 쓰고 있다.


4.2.3. 윤휴 옹호[편집]


윤휴는 나름 유능한 인재이긴 했으나 독륜거 등의 삽질[10]을 굉장히 많이 했음에도 이덕일은 자신의 책에서 그를 천하의 개쌍놈 송시열과 그 똘마니인 노론에 대항한 만고의 영웅으로 추켜세운다.


4.3. 조선까[편집]



4.3.1. 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 백성[편집]


선조는 왜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을까. 물론 용렬한 국왕인 탓도 있지만 개인적인 성향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5월 4일 선조는 개성에서 다시 평양으로 도주하려고 하면서 윤두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 선조가 조선을 버리고 도주하려 했던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조선 백성들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숫자도 선조가 듣기에는 일본군의 절반이나 된다고 할 정도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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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5. 임란 때 왜군 절반이 조선 백성이었다", 시사저널, 2014.09.25}}}
이덕일이 사료를 어떻게 조작하는지 보여주는 기사다.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동조한 조선 백성(순왜)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이는 조선이 얼마나 특권층 위주의 나라였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순왜들의 수가 많았다는 근거로 선조가 물어본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라는 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대화는 그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번 제기된 뜬소문에 대한 내용일 뿐이다. 선조가 한 질문에 윤두수는 '그 말의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대화는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가버린다. 그 외 순왜의 객관적인 규모를 알아보려는 다른 연구조차 없다. 이덕일처럼 당시의 뜬소문을 사실의 근거로 받아들인다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명을 침공하기 위해 일본과 연합한 것이 되고, 풍신수길은 1596년 4월에 이미 죽은 것이 된다.[* "수길(秀吉)이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선조실록』 29년 4월 23일
[10] 그 외에도 대사헌의 자리에 있을 때는 사치를 금한답시고 남의 관을 열어보기도 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 현대사에서도 이리역 폭발사고는 북한이 이리에 폭격을 한 것이 되고, 9.11 때에는 이스라엘이 핵을 맞은 게 된다. 정보전달 및 수집이 매우 빨라진 현대 사회에서도 큰 사건이 터지면 사건정리 전에는 온갖 가짜뉴스와 루머가 나도는 것이 실상인데, 이덕일은 통신이 지극히 빈약했던 전근대 시대에 있었던 뜬소문을 마치 사실인 것 처럼 근거로 삼은 것이다.


4.4. 노론 음모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론 음모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4.1. 임오화변과 정후겸과 이완용[편집]


거대 수구집권세력의 개혁세력 제거작전의 희생양이 사도세자였다. …… 대한제국을 팔아 넘긴 마지막 노론 당수 이완용이 고종에게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한 정후겸의 신원을 여러 차례 요청한 데서도 이 사건의 본질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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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이덕일의 천고사설]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 한국일보, 2015.09.24}}}
위 인용문에서 이덕일의 논리를 정리해보면 임오화변은 노론의 소행인데(A'⊂B'), 정후겸은 노론이니(c⊂B), 정후겸은 임오화변에 가담하였다(c⊂A'). 그런데 정후겸의 신원을 요청한 이완용은 매국적 인물이니(d⊂E), 정후겸은 매국적 인물이고(c⊂E),[덩달아 이완용은 노론이고(d⊂B)] 따라서 임오화변은 매국적 사건(A'⊂E')이라는 기적의 논리가 되겠다.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발생적 오류의 복합체다.

정후겸은 이덕일의 주장과 다르게 노론이 아니라 소론인 데다가[11] 1749년에 태어났으므로 임오화변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이다. 이덕일은 1학년 중학생이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임오화변 당시 정후겸은 인천에서 가난한 생선장수의 아들로 살고 있었다. 그가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임오화변이 일어나고도 다시 2년이 지난 1764년의 일이다. 참고로 화완옹주의 죽은 남편 정치달과 정후겸은 무려 11촌 관계.

정후겸이 훗날 정조에게 숙청당하긴 했지만, 이는 정조가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할 때 화완옹주의 총애를 바탕으로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게 원인이었다. 즉 정후겸은 그저 임오화변에 조력한 홍봉한과 함께 정조 본인을 압박한 것이었지,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다. 이러한 점은 이덕일이 제시하는 정조실록의 다음 기록으로도 방증된다.

지난번 헌장(憲長)이 차자를 올려 정후겸의 죄상을 극력 논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바로 지금 그만둘 수 없는 정론(正論)입니다마는, 죄가 이보다도 크고 악이 이보다도 극도하여 전하께서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이면서 온 나라가 반드시 주토(誅討)해야 할 역적이 있습니다. 오직 홍봉한은 천만 가지 죄악을 다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크고 가장 극악한 것을 말한다면 곧 임오년에 범한 죄인데, 전 참판 김귀주의 상소에서 말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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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 즉위년(1776) 3월 27일}}}
동부승지 정이환이 올린 위 상소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정후겸의 죄도 악독하지만, 홍봉한은 임오화변까지 책임이 있으니 더욱 극악하다'는 것인데, 이 문구가 이덕일의 손에서 어떻게 놀아나는지 볼 수 있다.

정조 즉위 직후 홍봉한 탄핵 상소가 쏟아졌다. 동부승지 정이환은, 세자 살해에 가담한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보다도 홍봉한이 반드시 죽여야 할 더 큰 역적이라고 지목했다. 정이환은 "홍봉한의 천만 가지 죄악 중에서 가장 크고 극악한 죄가 바로 임오년에 범한 죄"라면서, 일물(一物), 즉 뒤주를 홍봉한이 올렸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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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이덕일의 천고사설] 사도세자 사건의 진실", 한국일보, 2015.09.24}}}
하지만 정작 상소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본문에서 '세자 살해에 가담한'이란 문구가 들어갈 위치가 잘못되었다. 즉 "세자 살해에 가담한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보다도 홍봉한이 반드시 죽여야 할 더 큰 역적"이 아니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보다도 세자 살해에 가담한 홍봉한이 반드시 죽여야 할 더 큰 역적"이 되어야 맞다.

참고로 이 상소를 쓴 정이환은 이덕일이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으로 미워해 마지않는 김귀주의 측근으로 노론벽파이며 이들은 정적인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뒤주썰을 들고 나왔는데 이는 정조나 영조, 그리고 소론계에서도 부정하고 있다. 정이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홍봉한을 공격하다가 김귀주의 사인을 써서 뭐하겠냐는 정조의 말과 함께 파직당한다.

게다가 이완용이 신원을 요청한 건 정후겸만이 아니다. 대북 정인홍, 탁남 민암, 청남 윤휴, 소론 이광좌, 노론 김하재까지 그야말로 위 아 더 월드며 이징옥의 난을 일으킨 이징옥, 이인좌의 난에서 추대된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이재선 역모사건을 주동한 안기영도 있으며 심지어 그 유명한 윤원형도 보인다.

무엇보다도 윤휴가 올라가 있다는 게 좀 큰데, 이덕일이 누구나 알아주는 윤휴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덕일의 평가는 진정한 북벌 주창자, 수구 기득권 세력에 맞선 개혁가라는 것인데,[12] 이완용의 요청으로 신원되었으니 정후겸이 매국적 인물이라면 마찬가지로 윤휴도 매국적 인물이라는 논리가 되어버린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이 융희 원년 11월 18일에 받은 조칙에 따라 이름이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자들의 죄명을 벗겨주고 다시 작위와 시호를 회복시킬 것에 대한 안건을 내각 관제 제7조 제7항에 의하여 논의를 거쳐 상주하였다. 제칙을 내리길 "재가한다"고 하였다. 한효순(韓孝純), 정인홍(鄭仁弘), 목내선(睦來善), 이현일(李玄逸),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耉), 조태억(趙泰億), 최석항(崔錫恒),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김도응(金道應), 김중기(金重器), 정후겸(鄭厚謙), 김하재(金夏材), 안기영(安驥泳), 권정호(權鼎鎬), 조중호(趙中鎬), 이연응(李然應), 이종해(李鍾海), 이병치(李炳埴), 이종학(李鍾學), 이두영(李斗榮), 강달선(姜達善), 이철구(李哲九), 정건섭(丁建燮), 채동술(蔡東述), 갑오년에 신원되었으나 아직 관작을 회복하지 못한 김익순(金益淳), 이병훈(李炳勛), 홍재학(洪在鶴), 백낙관(白樂寬), 이희화(李喜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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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 1년(1908) 1월 30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이 11월 18일의 조칙을 받들고 죄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의 죄를 벗겨주는 안건에 대하여, 논의를 거친 후 개록(開錄)하여 민암(閔黯), 신치운(申致雲), 김홍진(金鴻鎭), 김건순(金建淳), 이주회(李周會), 서종하(徐宗廈), 이명의(李明誼), 윤취상(尹就商), 권익관(權益寬), 이하징(李夏徵), 박찬신(朴纘新), 이명조(李明祚), 김형집(金亨集), 이의징(李義徵), 이징옥(李澄玉), 권호선(權浩善), 원용성(元用星), 이진유(李眞儒), 윤성시(尹聖時), 이사상(李師尙), 이명언(李明彦), 윤상백(尹尙白), 유수원(柳壽垣), 이거원(李巨源), 권형진(權瀅鎭), 윤휴(尹鑴), 한세량(韓世良), 조택현(趙宅顯), 장호익(張浩翼), 허욱(許煜), 정해(鄭楷), 박필몽(朴弼夢), 윤연(尹?), 김중희(金重熙), 윤지(尹志), 심악(沈?), 조동정(趙東鼎), 오성모(吳聖模), 윤원형(尹元衡) 이상 모두 39명이다. 상주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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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 1년(1908) 3월 21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아뢰었다.

"삼가 지난해 11월 18일의 조칙을 받들고 죄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의 죄명을 탕척(蕩滌)하는 사안에 대해 여러 번 주하(奏下)를 거쳤습니다. 그 중에서 관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 벼슬을 회복시켜 주는 은전을 베풀어야 하는데, 사안이 오래되다 보니 한꺼번에 모조리 조사할 수 없습니다. 우선 고 좌의정 한효순 외 77인의 관작을 회복시킬 데 대해서만 상의를 거친 뒤에 개록하여 좌의정 서흥부원군 한효순(韓孝純), 영의정 정인홍(鄭仁弘),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이조판서 문경공 이현일(李玄逸), 영의정 문충공 이광좌(李光佐), 영의정 문정공 조태구(趙泰耉), 좌의정 문충공 조태억(趙泰億), 좌의정 충간공 최석항(崔錫恒), 좌의정 충정공 유봉휘(柳鳳輝), 대사헌 김일경(金一鏡), 병조참판 김중기(金重器), 회인현감 김도응(金道應), 예조참판 정후겸(鄭厚謙), 이조참판 김하재(金夏材), 좌승지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 권정호(權鼎鎬), 부호군 조중호(趙中鎬),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 홍문관시독 이희화(李喜和), 우의정 민암(閔黯), 형조 판서 이의징(李義徵), 대사헌 한세량(韓世良), 승지 신치운(申致雲), 절도사 이징옥(李澄玉), 사옹원판관 원용성(元用星), 감역 허욱(許煜),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이조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참의 서종하(徐宗廈), 이조참의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대사간 이명의(李明誼), 형조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참의 윤연(尹?), 훈련대장 윤취상(尹就商), 부제학 이명언(李明彦), 보덕 김중희(金重熙), 함경감사 권익관(權益寬), 교리 윤상백(尹尙白), 지평 윤지(尹志), 목사 이하징(李夏徵), 동부승지 유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沈?), 판윤 박찬신(朴讚新), 포도대장 조동정(趙東鼎), 교리 이거원(李巨源), 정언 이명조(李明祚), 경무사 권형진(權瀅鎭), 이조판서 윤휴(尹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 이범제(李範濟), 현감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병사 박태신(朴泰新), 감역 정권(鄭權), 부수 조현빈(趙顯彬), 부사 심유현(沈維賢), 감사 권첨(權詹), 이조참판 이사로(李師魯), 밀풍군 이원(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 권숭(權崇), 이조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정언 권집(權䌖), 부사 김주태(金柱泰), 통제사 김윤(金潤), 좌부승지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이다. 상주(上奏)합니다."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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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실록』 1년(1908) 4월 30일}}}
참고로 이완용이 이런 행위를 저지른 의도는 단순히 대한제국이 무너지기 전에 그 동안 간신이나 역신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신원해 준 '정리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작업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경술국치가 일어나기 직전인 1910년에는 6~8월 동안 수십명의 인물에게 추증 및 시호를 뿌리다시피 행했다. 이 중에는 김홍집, 김옥균, 어윤중과 같은 옛 개화파 인사와 박지원, 정약용 등도 있다.

4.4.2.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로 몰기 위한 왜곡[편집]


{{{#c80000 이런경우 세자가 의지할 곳은 처가 홍봉한 가 밖에 없었다. 하지만 홍봉한은 물론 홍씨도 소론으로 기울어진 세자 편은 아니었다.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그의 딸 정순왕후 김씨에 대한 한중록의 기록을 보자.


"오흥부원군이 갑자기 국구가 되어 모든 게 서먹서먹한데 부친이 편안함과 근심을 함께할 마음으로 지도해 범사에 탈이나지 않게 해주어 처음엔 그도 감격스레 여겼다. 나도 대비전을 우러러보아 내가 먼저 궁중에 들어왔고 내 나이 많은 걸 생각 않고 일심으로 공경하니 대비전도 나를 극진히 대접하므로 백년을 양가가 서로 사랑할까 하였다. 그러나 형세가 커지고 알고 지냄이 오래되자 먼저 된사람을 꺼리고 지도하는 뜻을 버리게 되었다."

김한구와 정순왕후는 세자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세력과 백년을 양가가 서로 사랑할까 한 것이 홍봉한 가의 방침이었다. 즉 홍봉한과 혜경궁 홍씨는 세자를 버리고 정순왕후가와 결탁한 것이다. 형세가 커지고, 지도하는 뜻을 버리게 되었다는 말은 순조가 즉위한 후 대비로서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가 홍봉한 가를 공격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고백 }}}

사도세자의 고백에는 마치 김귀주와 홍봉한이 잘 지내다가 정순왕후 수렴청정기에 느닷없이 자신의 가문을 공격한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한중록을 보면 세자 생전부터 사이가 안좋았음을 충분히 묘사하고 있고 실록에서도 두 가문이 극렬하게 사이가 안좋았던 건 영조 대부터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한중록에 김귀주가 밀봉 봉서를 영조에게 올려 홍봉한과 정휘량이 사도세자의 평양행을 말리지도 않고 영조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이는 실록에서도 정조가 김귀주의 밀봉서를 언급한 것을 볼 때 사실이며, 홍봉한이 영조 때 은언군과 은신군을 보살핀 혐의로 역모 혐의를 받은 건 김귀주의 사주였음이 정조실록의 정조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김귀주의 남몰래 배포(排布)한 정상을 중외(中外)의 사람이 어떻게 알겠는가? 대저 김귀주가 처음에 정후겸(鄭厚謙)과 더불어 주무(綢繆)하고 배포(排布)해서 사생 동고(死生同苦)의 친구로 맺어 힘을 합해서 봉조하(홍봉한)를 공격하였다.

신묘년 2월 5일에 어가(御駕)가 구저(舊邸)로 나아가니, 김한기(귀주의 삼촌으로 당시 김귀주는 상중이라 직접 참여하기가 어려웠음) 와 정후겸이 내가 수가(隨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밤을 틈타 사사로이 뵙고 천청(天聽)을 현혹시켰고, 이에 궁성(宮城)을 호위하는 일이 있었는데, 내가 행여나 성덕(聖德)에 결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대비전에 나아가 재삼(再三) 우러러 아뢰어 겨우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무릇 환궁[回鑾]하는 날에 미쳐서는 선대왕께서 소자에게 하교하기를, ‘양편의 척리(戚里)가 서로 공격하니 국가의 근심이 적지 않다.’고 하시므로 내가 마땅히 이 무리에게 기만을 당하지 않는 방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 신묘년 봄에 봉조하를 죽이지 못하게 되니, 그 해 가을에 이르러 안팎으로 선동하여 그 분운(紛紜)함을 견딜 수 없었고 또 망극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써 공동(恐動)하였다.


{{{#c80000 혜경궁은 한중록에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 번도 수가 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봄 가을마다 기다렸으나 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아 이 또한 세자가 울화병에 걸린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혜경궁은 세자가 영조 32년에 처음 능행에 따라갔으며 이때 명릉에 수가하게 된 것이 기뻐 세자가 목욕재계하며 정성을 다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자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이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 혜경궁이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전인 영조 28년 2월 영조가 태묘(태조의 묘, 곧 건원릉)와 영희전에 나갈 때, 그리고 그다음 해인 영조 29년 7월 태묘에 거동할 때도 수가했으며 또한 같은해 12월 태실에 나갈 때와 다음해 첫날 태묘에 나 갈때도 따라갔다
-사도세자의 고백}}}

태묘는 이성계의 능이 아니라 종묘를 말하는데 태조의 능으로 오독하며 혜경궁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있다.

설사 이덕일이 태묘를 이성계의 능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록에 분명히 세자의 능행이 영조 32년 명릉행이 최초였음이 적혀 있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따라간 명릉 원행이 있은지 7일 후의 실록기사인데 세자가 처음으로 경기지역에 출행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8월 7일(계묘)

설서 이휘중(李徽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저하께서 원릉(園陵)의 어가를 수행하신 것은 진실로 정례(情禮)를 한번 펴는 데서 나온 것이나, 이는 곧 저하께서 처음으로 기전(畿甸-경기)에 출행(出行)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c80000 소론 영의정 이천보가 영조에게 말했다.


"신 등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성궁을 보호하는 것뿐입니다. 동궁의 자질은 천고에 빼어나므로 전하께서 진실로 관대하게 포용하신다면 덕성을 이룰 것이며 털끝만한 잘못도 없을 것입니다.

이천보가 밤낮 바라는 바는 성궁을 보호하는 것뿐"이라고 말한 까닭은 세자를 견제하는 영조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고백

영조와 세자 사이를 중재하려던 이천보의 말은 거꾸로 둘 사이에 긴장감을 조성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지금 대신들 중에 자신을 도와줄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소론 영의정 이천보가 세자를 지지하다 쫓겨난 후 유척기, 김상로, 신만 모두가 노론이었다. -사도세자의 고백
}}}

노론 이천보를 소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3]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세자의 온궁행이 이루어진 배경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신병자인 세자가 칼로 화완옹주를 위협해 영조를 조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조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고 있듯이 세자의 온양행은 약원제조와 의관들의 진단에 따른 처방이다 - 사도세자의 고백


한중록에 적혀있는 건 사도세자가 화완옹주에게 자신의 다리에 종기가 있으니 이를 빌미로 온천행이 이루어지게 주선하라고 위협했다는 말이지 무턱대고 화완옹주를 위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록에도 영조가 세자의 온천행을 불가하다고 했다가 하루만에 이를 번복했다.

혜경궁은 이때도 세자의 정신병이 심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세자의 병은 정신병이 아니라 습장, 곧 종기였다 - 사도세자의 고백

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던 건 실록 외에도 기록이 넘치는데 온천행 당시 종기가 있다고 정신병을 부정해버리는 논리이다.

당시 세자를 둘러싼 궁중의 정치 상황은 여자 사냥에나 신경 쓸만큼 한가롭지는 않았다. 세자는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음모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세자를 지지해주던 소론 대신들이 잇달아 사망하고 그 자리를 노론이 메우는 상황은 세자에게 본능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37년 1월 5일 이 책에서 소론으로 주장하는(실제는 노론인) 영의정 이천보가 사망했다. 그리고 2월 15일 홍봉한과 친구였던 우의정 민백상이 사망했다. 3월 4일엔 좌의정 이후가 사망했는데 이후도 노론이다.

이 셋이 거의 동시에 사망해서 사도세자의 평양 서행의 책임을 지고 음독자살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는데 사도세자의 평양 서행은 이후 4월의 일이니 와전된 소문이다. 그런데 소론계 대신들이 잇달아 사망하고 노론이 메우는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자는 관서지방으로 미행을 가기 전에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을 만난 것이 분명하다. 그사람은 바로 우의정을 역임한 소론 영수 조재호였다. 위기를 느낀 세자가 도움을 요청한 인물이 자신의 처남인 홍낙임이 아니라 형수의 오빠인 조재호라는 점에서 세자의 비극은 극대화된다. 세자의 미행 때 그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조재호는 이를 선뜻 수락했다. -사도세자의 고백

밑도끝도 없는 추측을 사실인양 적고 있고 그 추측을 바탕으로 다른 논지를 전개한다.

세자가 믿고 간 정휘량은 시세에 민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나주 벽서 사건 당시 다른 소론들이 침묵을 지키며 불안해 할 때 이창수와 함께 앞장서서 조태구와 유봉휘의 가족까지 연좌하고 재산을 몰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또한 소론 온건파이자 탕평파인 최석항과 이광좌의 관작을 추탈하자고 주장한 것도 바로 그였다. 영조는 그때 노론이 아닌 소론이 최석항과 이광좌의 관직을 추탈하자고 주장하자 곧 허락했었다. 그럼에도 세자는 정휘량이 소론인데다 매제의 숙부이므로 그를 찾아가 장래를 논의했을 것이다.


을해옥사 당시 정휘량뿐 아니라 온건 소론 쪽에선 대부분 앞장서 탄핵했었다.

정휘량과 같이 같은 소론을 탄핵한 인물 중 하나인 조재홍은 바로 조재호의 동생이다. 정휘량만 시세에 민감한 게 아닌 옥사가 온 건 소론들에게까지 확대될까봐 앞장서 탄핵해 충성심을 보여준 거다.

{{{#c80000 그러나 세자가 믿었던 정휘량은 세자를 버리고 시세를 따랐다. 정휘량은 세자가 관서에서 한 말과 행위를 홍봉한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런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인지는 몰라도 정휘량은 영조 37년 8월 좌의정으로 승진한 홍봉한의 전 관직인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혜경궁도 한중록에 홍봉한이 정휘량에게 정보원을 보내 세자의 관서행을 알고있었다고 적고 있다.

- 사도세자의 고백}}}

당시 김귀주는 정휘량과 홍봉한이 세자의 평양행을 말리지도 않고, 영조에게 알리지도 않는다는 밀봉 상소를 영조에게 올려 비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세자의 평양행은 다섯 달이나 영조가 모르고 있었고 영조가 알게 되자 정휘량은 정승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정조 16년 실록을 보면 정조도 그때 정휘량이 사도세자 보호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평가했다.
"휘량은 신사년 가을에 공로를 세운 곳이 있으니, 역적 나경언(羅景彦)이 급서(急書)를 올리던 때를 당하여 조정 신하 중 한 사람도 곤장 한 대 치자고 청하는 자가 없었으나 이 사람이 유독 면대를 요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이 밖에도 또한 주선한 것이 많았다. 정휘량은 역적 나경언(羅景彦)을 국문하자고 청한 차자에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하였으니,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사년 가을(영조 37년)에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관서(關西)로 행차할 때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통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혹시 나를 모를 것이라고 여겼었다.”

이는 세자가 관서행을 반성하는 말인데 워낙 떠들썩하게 행차해 백성들도 알아볼 정도였는데 비밀이나 되는듯이 정휘량과 홍봉한이 비밀을 주고받고 이를 빌미로 정휘량에게 정승직을 줄 필요도 없다.

{{{#c80000 부친이 초조 황망하여 넌지시 감사에게 알아와서 소식을 들으시고, 항상 대궐에 오시다가 혹 집에 돌아오셔도 마루에 앉아 밤을 새워 사시니 당신의 심사가 어떠하리오.


홍봉한은 정휘량을 통해 세자의 관서행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혜경궁의 다음 말은 중요하다.

(세자에게) 간하고자 않으신 건 아니로되 전혀 병환 대문이시니 일심으로 세손이나 보전하려는 고심이더라.

홍봉한이 세자의 관서행을 듣고 사위인 세자를 버리게 되었음을 실토하는 말이다.
}}}

여기서도 이상한 해석을 하고 있는데 홍봉한은 세자의 비행을 말리지 않고 이를 영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노론벽파계에서 비판받았는데 세자의 비행은 정신병 때문이라 세자에게 아무리 간쟁해봤자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간하고자 앞에 "설사 간하여도 들으실리 없고 연좌는 내 몸 보전치 못할 것이오. 자녀들까지 어찌 될지 모르니" 라는 어구를 빼먹었다.

또한 바로 다음 한중록에선 이런 구절이 나온다.

"허나 모르는 이는 보도를 잘못한다고 책망하니 누구에게 이런 고충을 말하리오. 그때 윤재겸의 상서가 있었는데 간하는 것이 신분에 당연하나 소조께서 하실 지경이 못 되시고, 대조께서 하시면 무슨 변이 날지 알리요. 간할 터가 없이 되어 있었다."

윤재겸의 상서에도 홍봉한이 세자의 비행을 은폐한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병 때문에 세자에게 간쟁해서 말려봤자 먹히지도 않고, 영조에게 알리자니 자신의 딸이나 손자까지 연좌될 일이라 함부로 영조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변명이다.

훗날 노론쪽에서 천리 길을 달리는 몸으로 진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상서를 올릴 정도로 세자의 신속한 대응은 노론을 경악시켰으며


천리길을 달리는 몸으로 진현하지 않았다고 상서를 올린 사람은 서명응으로 소론계 인물이다.

사도세자에게 온정적인 인물은 노론도 소론으로 둔갑시키고, 세자를 비판한 사람은 소론도 노론으로 둔갑시킨다.


4.4.3. 영화 사도에 대해 "사도세자를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둔갑"시켰다고 비난[편집]


영화 사도에선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을 순화해서 다루고 있는데 이것조차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했다. 사도 문서 참고.


4.4.4. 세월호 참사 노론기원설[편집]


세월호 참사 뿌리는 노론에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민낯의 시작은 친일파이며 그 뿌리는 '이미 망한 명나라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에 닿아 있고, 사도세자를 죽이고 정조를 독살한 세력에 닿아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 민낯의 근원은 인조반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하였다. 처음 부터 끝까지 노론 음모론으로 점철된 내용으로, 심지어 노론 이전의 서인까지 만악의 근원으로 몰고 있다.


4.5. 간도, 을사조약 이전 조선 영토설[편집]


이덕일은 말을 돌리지도 않고 간도는 원래 조선땅이었다는 주장을 한다.그 일부를 발췌해보면...

간도는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이전까지는 한국인들의 땅이었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2014, 165쪽


이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시절 간도에서 세금을 걷었으니 조선 영토라는 주장도 하였다.

이건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숙종시기 청나라의 요구로 조선, 청나라간 국경선을 정할 때 이미 양측에서 압록강두만강국경으로 여기고 있었다. 논란이 되는 백두산 정계비의 "토문강"은 그저 두만강의 근원으로 엉뚱한 강을 짚어서 기록한 것이다. 초반에는 조선에선 토문강이 경계라는 주장하였으나 토문강은 송화강의 지류였기에 잘못된 주장이 돼서 이후 논란은 두만강의 어느 지류를 경계로 삼느냐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말이 많은 간도 협약에서 다룬 것도 경계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었지 간도의 영유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북간도와 서간도 모두 발해 멸망 이후로는 우리 민족의 영토였던 적도 없고, 실효지배한 적도 없다. 청나라가 약해진 뒤로 조선에서 간도로 넘어간 조선인에 대한 관리를 시도했으나, 그들은 이미 청나라 관리들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을사조약 전까진 간도는 조선 땅이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는데 이걸 근거로 유사 파시즘을 전파하는 것이다. 아래 유사 파시즘 부분 참고.


4.6. 고려, 조선 만주 지배설[편집]


서울신문의 연재 지면에서 새로운 밥벌이 영역을 개척하는 중이다.


5. 국어국문학 관련 문제[편집]


이덕일은 국어학계와 국문학계도 건드렸다. 이덕일이 왜 여기까지 건드렸는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국문학 박사 정병설교수가 논문과 책을 내자 이덕일의 여러 내용이 왜곡됐거나 잘못됐다는 게 밝혀진 적이 있다. 초록불은 이 때의 경험이 동기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5.1. "두음법칙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식민국어학"왜곡[편집]


두음법칙과 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설 문서 참고


5.2. 한국에선 이인직을 선각자로 가르친다?[편집]


이덕일은 한국 학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동안 식민사관 논쟁은 자신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식민국어학을 그대로 유지시켜온 국어학계에도 이제 역사의 돋보기를 들이대야 한다. 한국 국어학계의 식민지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이인직이다. 필자도 중 고교 시절 이인직을 신소설 "혈의 루"를 쓴 선각자로 배웠다. - 이덕일, 우리 안의 식민사관, 37쪽


주장이야 개인의 자유다. 문제는 이번에도 인용왜곡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두산백과를 인용한다.

이 소설 이전에도 유명무명의 신소설이 있었으나 문학적인 수준이나 가치로 보아 근대소설의 효시로서의 신소설은 이것이 최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상편은 《만세보》 연재로 끝나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牡丹峰)》은 1913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1894년 청일전쟁이 평양 일대를 휩쓸었을 때 일곱살 난 여주인공 옥련(玉蓮)은 피난길에서 부모를 잃고 부상을 당하나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어 이노우에[井上] 군의관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혈의 누 [血─淚]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인용한다.

이 작품은 청일전쟁 때 평양 모란봉의 참상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 뒤 10년간의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일본 및 미국을 무대로 옥련 일가의 기구한 운명의 전변(轉變)에 얽힌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린 것으로, 자주독립·신교육사상·자유결혼관 등이 그 주제로 다루어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혈의누 [血─淚]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이는 일본 극우파의 시각이지 한국인의 시각은 아니다. - 이덕일, 같은 책, 39쪽


그럼에도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사 및 국어 교과서는 이인직을 여전히 선각자로, "혈의 루"를 '자주 독립, 신교육 사상'이 담긴 신소설의 효시로 가르치고 있다.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놓쳐선 안 되는 것이 있다. 누가 이런 교과서를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인직이 친일 매국노인줄 몰라서 이런 내용을 실었을까? - 이덕일, 같은 책, 44쪽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쓰여 있다.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과 자유결혼을 주제로 하여 새 시대의 모랄을 제시하려 한 작자의 의도가 엿보이나 작품 전반적으로 친일적 사상과 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혈의 누 [血─淚]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도 이인직을 이렇게 서술한다.

경술국치 이전에는 이완용(李完用)의 비서로서 그의 정치적 노선에 동조하여 일본 관원 고마쓰(小松綠)와 내통, 일본 강점에 협력하였다. 국치 이후에는 경학원사성(經學院司成)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는 <혈(血)의 누(淚)>(1906)를 비롯하여 <귀(鬼)의 성(聲)>·<치악산 雉岳山>(1908) 상편과 <은세계>·<모란봉 牡丹峰>(1913)·<빈선랑(貧鮮郎)의 일미인(日美人)>(1912) 등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직 [李人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물론, 계몽주의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 제국주의적 국가관을 암암리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많지만, 문장에서 입말체와 묘사체 시도의 효시를 보이며, 객관묘사와 심리묘사의 뛰어난 기량 등, 신소설 최고의 작가로 평가된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인직 [李人稙]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각자로 가르치긴 커녕 분명 친일파라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이덕일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진 모르지만 정작 이덕일이 인용한 두산백과나 민족문화백과대사전의 서술과는 경우가 다르다. 해방 이후 처음엔 이인직을 선각자로 해석했다가 학계에서 연구를 하면서 그의 친일 행적 등이 드러나고 이 때문에 평가가 바뀌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덕일의 주장처럼 아직도 이인직을 선각자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허수아비 치기식 주장과 같다.


6. 이덕일을 비판한 학자들[편집]


  • 조종업
  • 오수창
  • 정병설
  • 오항녕
  • 이상훈 #
  • 초록불(이문영)[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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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소론쪽 인물인 구윤옥과 서명선등이 정조에게 정후겸과 친하게 지냈다며 사죄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존재한다.[12] 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역사의아침, 2010, 97~110쪽.[13] 그런데 정작 이덕일의 다른 책 《조선 왕을 말하다》에서는 이천보를 노론으로 적시한 후 그를 신랄하게 깐다. 즉 분명 《사도세자의 고백》때만 해도 <억울한 세자를 옹호해주는 소론 대신>으로 나오던 이천보가 다른 책에서는 <다른 당파를 배제한 독재정치를 시도하는 노론 대신>으로 둔갑한 상황인 것. 그때그때 자신의 주장에 맞춰 특정개인의 당파를 설정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모든 학문에서 이런식의 끼워맞추기식 주장은 금기시된다.[14] 최근에 나온 유사역사학 비판이라는 책 저자다. 이덕일을 비롯한 유사역사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그쪽 세력에게 식민사학자 혹은 친일파라 욕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