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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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二等遞降

1. 개요[편집]


책봉체제에서 중국이 타국을 어느정도로 대우하는지 구분하던 방법.


2. 내용[편집]


전통적으로 중국의 주변국 중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들은 중국 다음 순위의 국가들로 분류되곤 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중원에서 거리가 가깝다는 점이나, 간혹 분쟁이 있었지만[1]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과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역사가 깊고 학문이 중국에 버금가게 발달한 문명화된 나라라는 점[2] 등이 있다.

# "옛 현도(玄菟 : 고려국)의 땅을 그대에게 모두 주나니 영광은 옛날 일자왕(一字王)보다 높고, 조칙에 의해 부여받은 높은 직위는 삼공(三公)을 겸했다" 고려 정종 5년(1039) 기묘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문화사)

위의 기록에서도 보듯이 고려를 중요하게 평가하였고 고려국 사신을 국신사라 하여 서하보다 위에 두고 사실상 요나라에 준하여 취급한 것을 보면 송나라에서도 예우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원나라 시기 고려 국왕은 고려 국왕이라는 작제적 지위를 받았다. 원나라 당시에는 친왕, 번왕 이런 식으로 안 나누고 모두 왕으로 통일했다. 왕급 직위 중에서는 최고 직위였다. 또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 승상이라는 관료적 지위였다.

조선 국왕은 친왕급이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군왕급이었다는 잘못된 지식이 있는데 예법상 이등체강(二等遞降) 원칙에 따라 황제에서 이등(이품)을 낮추면 황태자 - 친왕 순이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의 관료의 위치를 일일이 정해주기보다는 조선 국왕의 위치를 정해 관료들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정해주는 방식을 펴서였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에는 친왕 대우였다. 이는 조선 국왕 뿐만 아니라 조선의 벼슬아치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의정부대신(삼정승)이나 좌우찬성은 조선에서 1품이지만 명나라 의전예우로는 3품대우이다. 양녕대군이 조선의 세자로 명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정강왕(광서성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의 예에 따라 대했다고 한다. 다만 초대 정강왕은 왕작을 군왕에서 시작해 친왕으로 올라갔다고 적었다.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2년 2월 기사에 명 건문제가 태종에게 면복을 주는데 칙서에

조선왕은 군왕의 벼슬이니 오장(五章)이나 칠장복(七章服)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이제 특명으로 친왕(親王)의 구장복(九章服)을 내려 주며...

라는 구절과 태종 9년 4월 기사에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라고 나온다. 그러므로 대우가 친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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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류수 전투, 고구려-수 전쟁, 나당전쟁[2] 그 예시로 옛 한국과 중국에서 자주 언급된 것이 '기자가 교화한 군자국'이란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 사학계에선 기자조선은 부정하고 있지만, 현대적 사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 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 등 한반도 왕조들도 기자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믿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중국사에서도 초창기 상나라현자로, 이런 중국사 기준으로도 근본 중의 근본인 사람이 가르쳤다는 기록이 엄연히 존재하니까 옛날 중국인들도 한국을 문화적으로 우습게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이런 명분뿐 아니라 신라최치원이 중국 당나라의 유명인사들과 문장으로 대등하게 교류했던 것처럼 실제 학문적 실력도 받쳐줬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