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콘트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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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콘트라 사건 관련 풍자화.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contra diction을 직역하면 '콘트라 행동'이란 뜻이지만 두 단어를 붙여서 만든 'contradiction'은 모순이란 뜻이다. 즉 레이건 정부의 콘트라 정책은 말이 안 되는 헛짓거리라고 비판한 것.

Iran–Contra affair
ماجرای مک‌فارلین
caso Irán-contras

1. 개요
2. 전개
3. 영향
4. 기타
5. 등장 매체



1. 개요[편집]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인 1986년에 레이건 행정부와 CIA가 적성국이었던 이란에게 무기를 몰래 수출한 대금으로 니카라과우익 성향 반군 콘트라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반군으로부터 마약을 사들인 후 미국에 판매하다가 발각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

2. 전개[편집]


1979년 니카라과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 성향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소모사 우익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중도파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연달아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정권을 이어나갔지만 경제위기 때문에 1990년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야당으로 전락했다가 2006년 선거에서 승리해서 정권을 되찾았고 2011년, 2016년 선거에서도 계속 승리해서 집권여당이다.

산디니스타 혁명 이후 1984년 미국에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들어섰는데 CIA는 산디니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소모사 가문의 잔당인 우익 반군 콘트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사실 콘트라는 하나의 통일된 조직이 아니라 반 산디니스타 정권의 무장단체들을 뭉뚱그려 부른 것에 가깝다. 즉, 최대한 좋게 말해 봤자 군소 군벌들의 연합체고 톡 까놓고 말하면 어중이 떠중이 불법 무장 조직 + 카르텔이었다.

한편 이때 중동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란의 이슬람 정권은 군사장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미제 무기들의 낮은 가동률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고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정부가 이란에 무기 수출 금지 제재를 가하면서 이란 입장에선 미제 무기의 부품 수급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

한편 같은 시기에 미국 정부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무장조직 헤즈볼라에 의해 레바논 미 대사관에 인질로 잡힌 민간인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맞물려 미국은 이란과 탄약, 미사일 및 부품 판매와 인질석방을 맞바꾸는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이때 NSC에서 근무하던 미군 장교인 올리버 노스(Oliver North)[2] 미합중국 해병대 보병 중령"이란에서 받은 돈으로 콘트라 지원하면 어떨까요?"라는 안을 냈는대 이것이 실행되었다. 당시 볼랜드 법안의 통과로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의 지원금을 콘트라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편법을 쓴 것이다. 즉, 불법적으로 돈을 쓰려면 불법적으로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란-콘트라 사건 조사를 위한 타워 워원회[3]
이것이 1986년에 발각되어 의회에서 대통령 탄핵 직전까지 갈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단 이란에 무기를 넘기는 대가로 대략 3배 정도 바가지를 씌웠는데 여기까지는 적성국에 대한 수출이었으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때 CIA는 육군이나 해군 재고를 감가상각비까지 다 계산한 원가로 인수한 후 이를 국제 시장 가격보다 몇 배나 비싸게 팔아먹었다.

문제는 차액을 CIA가 독식해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CIA는 이 돈을 니카라과콘트라 반군에 지원하고 그 대가로 콘트라 반군이 현지의 코카인 재배 농가들로부터 현물세로 걷은 코카인의 처분까지 위탁해서 처리해 줬다. 덕분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코카인이 멕시코를 통해 미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수익은 CIA 중남미 지부들의 운영 예산으로 전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CIA는 의회가 금지한 적성국에 비밀리에 무기를 팔고 그 돈으로 역시 의회가 금지한 불법적인 해외공작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남미 마약을 미국에 밀수하는 마약 장사까지 한 것이다!

참고로 이란-콘트라 사건 당시 대량 유통된 마약은 21세기에도 미국을 속앓이하게 하며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그대로 생지옥으로 만든 마약 관련 범죄들이 다 이 시기에 급증했다. 역설적인 것은 CIA가 이렇게 마약 밀수에 개입하던 와중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60년대 카운터컬쳐 히피 문화에 대한 역풍을 불어넣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4] 이 시기에 퍼진 마약과 이를 막으려는 마약과의 전쟁은 흑인, 히스패닉이 다수였던 미국 내 빈민가들을 뒤엎으면서 대량 체포, 구금을 통해 현대의 학교-감옥 파이프라인(school-to-prison pipeline)의 토대가 쌓이는 데도 기여했다.[5] 이 사실이 폭로되면서 레이건 정권과 미국의 도덕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

다만 CIA가 마약 거래에 직접 개입했는지의 여부는 의견이 엇갈린다. '공식적으로는' CIA가 마약 거래를 주도했다고 수사당국이나 법원이 판결을 내린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CIA와 거래관계에 있는 소규모 민간항공사 및 해운사들이 마약을 운송하다가 적발된 사례가 제법 있다. 이런 회사들이 사실은 CIA 돈으로 만든 일종의 위장계열사라는 주장도 있다. 때문에 CIA 윗선은 몰라도 지부 단위에서 직접 거래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CIA의 중남미 지부의 부정부패상은 CIA 내부에서조차 치를 떨 정도였다. 미국은 결국 이걸 정리하기 위해 파나마를 공격해 중남미 마약 연결선에 있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정리해야 했다. 개입된 민간항공사와 해운사들은 현대 PMC(사설 군사 경비업체)의 원조격인 CIA 출신자들이 만든 비밀 공작 전문 용역회사들이었다.

말하자면 같은 미국 정부 부서인 CIA와 미국 경찰, FBI, ATF, DEA가 서로 전쟁하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국 경찰, FBI, ATF, 법무부, DEA 같은 미국의 준사법기관들은 CIA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마약과의 전쟁으로 엄청나게 고생했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걸었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순직한 경찰들과 요원들까지 있는데 정작 CIA는 마약을 들여와서 팔았다니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할 지경. 드라마 나르코스 시리즈들을 보면 미국의 사법기관인 DEA가 얼마나 마약 조직을 소탕하느라 고생하는지 다 나온다. 이는 다른 준사법기관도 비슷하다.

올리버 노스는 주동자면서도 의회에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했으며 '이 작전은 부도덕하며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지만, 순전히 조국을 위해 실행했다'고 항변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은 크게 갈린다. 어쨌든 미국의 명예를 지킨 영웅으로 불리면서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물론 국민적 영웅급은 아니지만 보수층에 한해서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이런 인기는 그가 무죄 판결을 받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CIA가 의회의 허가와 감독 없이 독단적으로 일으켰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 사건을 통해 레이건 행정부에 위계질서가 없었다는 것도 밝혀지게 되었다. 레이건은 이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조사하던 스카우크로프트는 백악관 관료들이 불법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 한 레이건에게 불법적인 활동을 허가받을 수 있는 막장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당시 국가안보 부보좌관(사건 진행 중 보좌관으로 승진)이었던 존 포인덱스터 해군중장의 발언은 더욱 더 충격적이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이 원하는 걸 알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기 위해 대통령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발언을 했다. 사실상 자신이 대통령의 허가 없이 대통령의 직무를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 포인덱스터의 발언은 백악관에 위계질서가 사실상 없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것이었다.

한편 이 난리통에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정권은 1990년에 선거에서 패할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FSLN은 아직도 니카라과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이며 2006년에는 산디니스타 소속으로 출마한 다니엘 오르테가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어 또다시 집권당이 되었다.[6]

니카라과에서 두 번째 산디니스타 정권은 60% 대에 이르는 압도적인 지지율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니카라과를 포함하여 중앙아메리카 전체를 사실상 파탄국가로 전락시켜 한동안 미국 앞마당으로 만들었으니 콘트라 작전 자체는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중남미의 반미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고 결론적으로 평범했던 니카라과를 반미국 가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게 이 사건이다.

다만 니카라과는 경제/외교적인 이유로 이란이나 북한, 중국, 러시아 급으로 반미하거나 대놓고 적대하진 않고 그냥 미국의 정책에 어느 정도 반대 입장을 내놓는 수준이며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꾸준히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하고 있는 대신 미국에 마약을 파는 마약 카르텔 단속에는 적극적이다. 엘살바도르나 온두라스 같은 주변 중미 국가들이 최악의 범죄율을 보일 정도로 치안이 나쁜 것과 달리 니카라과가 유독 치안이 안정되어 있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만일 니카라과가 완전 강경 반미 국가였다면 니카라과는 중남미에서 가장 안정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니카라과 정부가 마약을 강경하게 단속하는 이유에는 콘트라 반군이 마약을 팔아서 게릴라전을 하던 상황 탓도 있다.

이 사건은 90년대 초에 대한민국 언론에도 보도된 적이 있는데 1991년 중앙일보 기사에는 전직 CIA 간부 앨런 피어스가 양심 선언을 했다고 나와 있다. 링크

3. 영향[편집]


냉전 시대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데 큰 의미를 두던 미국이지만 소련이라는 지정학적 경쟁자의 영향력 제거라는 목표에만 치중한 나머지 친서방이기만 하면 독재는 물론 학살이나 마약 재배를 해도 지원해 주다가 끝내 문제가 드러난 사건이다. 이것 때문에 거의 모든 남미 국가들이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반미 또는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다.

역설적인 성과가 있다면 중남미 국가들이 헬게이트가 되는 바람에 미국에 위협이 될 만한 국가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정부가 너무 약해지는 바람에 마약 카르텔들이 대놓고 미국에 마약을 팔아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 물론 수십만의 군대를 보내서 쓸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그러고 나서는 군소 카르텔이나 반군 등이 계속 난립하는 것까지 막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이라크 전쟁 시즌 2를 남미 대륙 단위로 찍어야 하고 이건 미국 경제를 파탄내는 것밖에 안 된다. 닉슨 시절 본격화된 경제불황의 원인이 베트남 전쟁이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해 10년 이상 이어진 경제불황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테러와의 전쟁이었으니. 그래서 20세기에 아메리카 곳곳에 그렇게 군사개입을 많이 하던 미국도 21세기에는 직접 관여를 꺼린다.

현대에 돌아보자면 이룬 건 전혀 없고 적만 쓸데없이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미국의 민주적 원칙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행정부가 국민이나 의회 등 권력을 견제할 다른 민주적 제동 장치의 제약을 거부하고 떳떳하지 못한 대외 개입을 하다가 큰 해악을 남긴 부정적 사례로 의미가 큰 이유다. 그리고 이때 미국 사회에 헐값에 마구 풀린 마약이 저소득층에 퍼지면서 마약사범이 급증하였고 범죄율 증가와 치안 악화 등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는데 미국 영화에서 묘사되는 70-80년대의 도시의 혼란상이 이 시절의 자화상이다. 이 부작용은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뀐 후에도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남아 있는데 이후 미국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 등으로 마약 유통 근절에 나섰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4. 기타[편집]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올리버 노스는 무죄 방면되었고 1994년 중간선거에서 버지니아주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당시 현역 의원이었고 전 버지니아 주지사였던 민주당 소속 척 롭(Charles Spittal Robb. 린든 존슨의 사위)에 맞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득표율 43%로 아쉽게 낙선했다. 찰스 롭은 45.6%를 득표했으며 표 차이는 938,376표 대 882,213표로 약 56,000여표 차이였다. 이후 폭스 뉴스의 레귤러 보수 정치 평론가로 활약하다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전미총기협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20대 인턴에게 매달 생활비를 몇만 달러씩 준 것이 밝혀지면서 사임했다. 본인은 방학 동안 기숙사에서 나와서 갈 곳 없는 인턴이 불쌍해 지원해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국가안보보좌관 존 포인덱스터는 해군 중장에서 소장으로 불명예 강등당했다.

CIA는 90년대에도 남미로부터 코카인 밀반입을 시도했다. 이 사실은 90년대 초에 대한민국 언론에도 알려졌는데 중앙일보에서 기사를 내보냈다. 링크

콜린 패럴이 노스로 분한 드라마도 제작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꽤 닮았다. 기사

5. 등장 매체[편집]


톰 클랜시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 '긴급명령(Clear and Present Danger)'을 썼고 이후 영화화되었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2라울 메넨데즈는 니카라과에서 태어나서 유년기에 이런 광경을 보며 자랐는데 이는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의 씨앗이 되고… 게임에 올리버 노스도 나오는데 성우는 심지어 올리버 노스 본인이다.

월드 인 컨플릭트제레미 소이어가 1984년 니카라과에서 비밀 작전에 참여했다고 언급했는데 이 사건으로 짐작된다.

아메리칸 대드에는 올리버 노스가 미처 쓰지 못하고 묻어둔 금을 찾는다는 내용의 에피소드와 함께 해당 사건을 설명하는 뮤직 비디오를 담았다.

아메리칸 메이드가 이 시기의 미국과 CIA의 행각, 그리고 중남미 마약왕들의 웅대한 기상(...)을 블랙 코미디스럽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 올리버 노스는 출연하기는 하는데 남미 카르텔 조직을 협박할 증거를 찾는 작전을 입안하는 정도로 나오고 이란-콘트라 사건의 토대가 되는 제안은 에필로그에서 주인공과 친하게 지내다 손절을 때린 CIA 요원이 하는 걸로 나온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에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 유니버셜 로고가 뜰 때 각종 갱단 관련 뉴스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마약 관련 뉴스 하나가 나온 직후 올리버 노스 중령의 청문회 육성이 잠깐 나온다. 이 사건과 미국의 마약 범죄가 관련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멘탈 오메가에서는 이 짓거리를 하다가 현실에서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 브라질과 칠레를 포함해 남미 전체를 소련의 영향력에 놓이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짓거리가 얼마나 부도덕했는지 바닐라판인 유리의 복수에서 유리군에 맞서 싸우던 헐리우드의 대표 마초 보수우파 액션배우들인 새미 스탈리온, 아니 프랑켄퍼르터[7], 플린트 웨스트우드가 멘탈 오메가 시간대에서는 라틴 연방에 투항했을 정도. 진영 이름은 라틴 연방.

드라마 더 보이즈 시즌 3에서 히어로팀 페이백이 1984년 당시 해당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소련군 스페츠나츠의 기습에 의해서 크게 피해를 입는다. 그 중에서 리더인 솔저보이는 스페츠나츠에게 납치당해 소련에서 온갖 인체 실험으로 개조당한다. 솔저보이는 앞서 잠깐 언급된 Just say no 캠페인 영상을 촬영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초능력의 근본이 근본인지라 메이킹 필름에서 "내가 뭔 낯짝으로 이걸 찍는지..." 라며 자조적으로 욕설을 늘어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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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이 상황을 이용해서 한국이 미제 무기 부품 중계 무역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2]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리버 노스는 군을 떠났고 1994년 버지니아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당시 대권주자였던 척 롭 민주당 후보와 대결했으나 45.6% vs 42.9%로 근소하게 패배하였다. 척 롭은 대권 주자였으나 성매매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면서 지지율이 주저앉았는데 올리버 노스의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네거티브 선거전으로 간신히 이겼다. 이후 올리버 노스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으며 척 롭도 성매매 스캔들을 이기지 못하고 2000년 선거에서 낙선했다.[3] 왼쪽부터 존 타워, 로널드 레이건, 에드먼드 머스키[4] 당시 영부인 낸시 레이건이 직접 마약 반대 캠페인 Just Say No를 주도하고 있었다.[5]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예산이 잘 걷히지 않아 학교가 개판이고 주변에 갱단 같은 범죄자들이 설치며 마약만 넘치니 애들이 시궁창만 보고 자라다가 알아서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게 마치 파이프라인에서 액체가 흐르는 것 같다고 하여 나온 시사 용어.[6] 오르데카는 산디니스타 해방전선 소속 첫 대통령으로, 1984년 대선(이게 1979년 이후 첫 자유선거다)에서 67%의 득표율을 얻어 처음 당선되어 199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1990년 대선에서 경제난의 여파로 득표율 40%를 찍는 데 그쳐 낙선했지만 1996년과 2001년 대선에도 연속 출마했다. 결선에서 2위에 그쳤으며 이 시기에 사생활에 관련한 문제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2006년 대선에서 38%의 득표율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2011년 대선에서는 62%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편법적으로 헌법을 개정해 논란이 거세기도 했다. 2015년 대선에도 또다시 승리해서 세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1979년 혁명 이후의 모든 대통령 선거에 나섰고 그것도 2위 안에는 꾸준히 든 터줏대감인 셈이다. 사실 다니엘 오르테가가 상당 기간 대선에서 계속 2등에 그친 것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가 파탄나서 기본적인 생활조차 하기 어려웠던 게 매우 컸다. 즉 니카라과 유권자들 사이에선 오르테가가 다시 집권하면 또다시 미국의 경제제재가 들어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7] 심지어 프랑켄퍼르터는 소련 강점기 오스트리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소련 강점기인 이유는 이 세계관의 소련이 나치 포지션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