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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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역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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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지리학적, 인류학적 접근
3. 고대사(이슬람 도래 이전)
4. 중세사(이슬람 도래 이후)
5. 근세사(시아파 이슬람화)
6. 근현대사
7. 이란 이슬람 공화국 (1980 - 현재)


1. 개요[편집]




오늘날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 문서이다. 팔라비 왕조 이전에는 이란페르시아라는 명칭이 혼용되었으나 1935년 팔라비 왕조에 의해 이란으로 고정되었다.

2. 지리학적, 인류학적 접근[편집]


이란, 이란인 그리고 페르시아와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한국인 입장에서 혼동의 소지가 있다. 이란인 다시 말해서 아리아인은 인도유럽어족 이란어군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인도유럽어족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는 대개 남아시아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캅카스오세트인이나 고대 말 스페인에 정착한 알란족들 역시 아리아인이고 독일인들은 위대한 아리아인종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운 바 있으며, 현재도 인도에서는 아리아라는 단어가 힌두 브라흐민, 크샤트리야 고위 혈통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좀 더 범위가 적은(?) 페르시아, 페르시아인이라는 어휘 역시 한 마디로 쉽게 잘라 말할 수 없다. 고대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 파르시는 사산 왕조의 주민들을 의미하지만[1] 중세에는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이 소그드어, 박트리아어, 호라즘어 등등 토착어 대신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을 계기로)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이란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일대의 이란어군 계열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을 전반적으로 지칭하는 어휘로 확장되기도 했다.[2] 동아시아와 한 번 비교해보자. 이를테면 한족, 중국인 같은 단어는 중국어를 쓰는 특정 민족을 지칭하지만 페르시아인이라는 단어는 정의가 간단하지 않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는 열대우림 정글과 동쪽으로는 황해에 막힌 중국과 다르게 역사상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국경이 건조한 평원 지대로 사실상 열린 마당이나 다름 없었다. 동쪽에서는 맨날 유목민들이 쳐들어왔고 서쪽에서는 마케도니아 제국,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왔다. 문제는 이란 입장에서 중국중원에 해당되는 이란고원 지대는 건조지대에다 고원이라서 생산성이 높지 않았고, 그 때문에 페르시아의 여러 왕국들은 절대 중국처럼 장성 쌓고 방어만 하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이란의 왕국들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지방,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외국과 맨날 싸워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란인, 페르시아인들의 정의 및 거주지역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분류 기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변환되어 왔다.

역사상 이란과 페르시아의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 자세한 내용은 후술되는 목록에 나온 이란을 지배했던 여러 왕조들의 개별 문서들을 참고해 확인해보자.


3. 고대사(이슬람 도래 이전)[편집]


  • 엘람 왕국 (3000 BC? - 550 BC)
  • 메디아 왕국 (728 BC - 550 BC)[3]
  • 아케메네스 왕조 (559 BC - 330 BC)
  •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복 (334 BC - 330 BC, 헬레니즘 제국)
  • 셀레우코스 왕조 (330 BC - 63 BC, 150 BC 이후 페르시아 상실)
  • 아르사케스 왕조(파르티아) (248 BC - 226)
  • 사산 왕조 (226 - 651)[4]

이란 역사 최고의 리즈 시절 중 하나인 아케메네스 왕조는 멸망 직전까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던 국가였다. 아케메네스 왕조를 통해서 당시 아직 생소하던 화폐제도가 중동 각지를 넘어 중앙아시아로 전해졌고 이는 인도의 화폐 제도로 이어졌다.

사산 왕조는 이란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국가이지만, 결코 아케메네스 왕조 수준의 전성기를 구가한 제국은 아니었다. 사산 왕조의 영토 중 중원에 해당하는 이란 고원은 생산성이 낮았고, 이라크 지역은 주민들 상당수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인이 아니라 기독교나 마니교, 만다야교 등을 믿는 아시리아인인 것은 물론 동로마 제국이 정기적으로 침공해왔으며, 인더스 강 유역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남하해온 유목민들이 맨날 쳐들어왔다. 오늘날 이란 민족주의자들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학문이 발달했으며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의 도서관 책을 다 불질러서 남는게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산 왕조는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와 비슷하게 고도로 군사화된 봉건 사회였고 인도나 중국 수준으로 과학 등 각종 학문이 구체적으로 발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페르시아의 학문이 중국이나 인도 부럽지 않은 수준으로 올라간 시대는 바로 후술할 압바스 왕조 시절이다.

4. 중세사(이슬람 도래 이후)[편집]


아랍 이슬람 세력의 정복후, 이슬람 제국하의

압바스 칼리프조 성립부터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까지의 시기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와 함께 이란 역사의 최고 리즈 시절로 꼽을 수 있다. 아랍인들의 정복으로 그동안 이란인들과 맞장떠온 동로마 제국 영토가 크게 축소되고, 중앙아시아 유목제국이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페르시아인들은 본격적으로 학문과 생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이란 문화는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이른바 이슬람 황금기는 어떻게 보면 페르시아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애초에 압바스 칼리프조의 건국 세력부터가 페르시아인들이 많았고, 한동안 아랍인들 지배 밑에서 2등 시민으로 차별받던 페르시아인들은 압바스 칼리파가 들어서고 나서야 이슬람 제국의 학문과 산업을 떠받드는 중추가 되었다.[5] 다른 한편으로 중앙아시아가 이슬람화 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각지에 호라즘인, 박트리아인, 사카족, 소그드인 등등은 현지어 대신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이 "대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묶여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오늘날 이란인들이 반아랍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면서도 이슬람을 부정하지는 않는 이유는 압바스 칼리프조 시대 그중에서도 서기 8~12세기가 바로 페르시아 문화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이다.

5. 근세사(시아파 이슬람화)[편집]



중세까지 이란은 순니파가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는 국가였으나 사파비 제국 시대 시아파 인구가 대다수를 구성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전의 선배 사산 왕조가 이라크와 캅카스 지역을 두고 지중해 동부의 동로마 제국과 끝없이 전쟁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파비 제국은 이라크 지역을 두고 지중해 동부의 오스만 제국과 힘겨운 전쟁을 벌여야 했다. 한편으로는 사산 왕조 시대 제국의 정치와 군사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이 경제는 기독교도들이 책임졌던 경제 구조가 다시 한 번 부활하였다. 사파비 제국의 시아파들은 정치와 군사를 맡았다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인 기독교도 및 오스만 제국의 순니파 무슬림들과 교역하며 제국의 경제를 안정화시켰던 것이다.

전쟁사 하나만 놓고 보면 나디르 샤개인 군벌조직 아프샤르 왕조 역시 이란 역사 최고의 리즈 시절에 해당한다. 나디르 샤는 이란을 정복한 파슈툰족들을 순식간에 몰아낸 것은 물론 서쪽의 오스만 제국을 무찌르고 인도 델리까지 약탈하는 기염을 통했다. 역대 이란 전성기 왕조들 중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한 왕조들은 많았어도 북인도 한복판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이던 델리를 정복한 것은 나디르 샤의 아프샤르 군대가 유일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전쟁만 잘 하던 사람으로 이란의 신민들과 반목하였고, 그의 제국은 장기 지속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6. 근현대사[편집]



1906년 혁명에 성공하여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으나, 의회는 왕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선거가 조작되거나 했다.

그 후 1908년 이란(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 기념비적인 일이 발생하는데, 이란의 사막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영국에서는 국가의 주도하에 이란의 석유산업을 장악해 나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중립을 선언했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6] 당연히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덕분에 10여 년 전 이란의 입헌 혁명의 여파로 불안하던 정국에 더더욱 혼란이 닥쳐오자 레자 한(رضاخان)을 중심으로 한 군부에서 쿠데타를 벌여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리고 레자 한을 레자 샤 팔라비(رضاشاه, 팔라비 1세)로 추대해 팔라비 왕조를 세웠다.[7]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8]하고 국왕(king)으로 변역되던 군주의 칭호인 황제(emperor)로 격상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 참전은 안 했으나, 팔라비 1세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으로 독일과 거래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물자 수송 요구도 거부하게 된다. 1940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독일의 교전이 시작되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이라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반영친독으로 선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만에 면한 송유시설과 중동지역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또한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9]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자 불안해진 영국과 소련이 사전 경고나 선전 포고도 없이 무단으로 침공했다.(페르시아 침공) 영국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동안 소련또한 3개 군을 동원해 북쪽에서 밀고들어왔고, 결국 나라가 두쪽나고 팔라비 1세는 퇴위, 망명하였다. 그 후 팔라비 1세의 아들이자 팔라비 왕조의 최후의 황제인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2세)가 즉위하면서 이란은 완전히 영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다.

팔라비 1세가 물러나면서, 이란인 최초로 유럽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인물로 이란의 민주화를 주도한 모하메드 모사데크와 같은 정치범이 사면되었고, 모사데크는 의회에 출마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 이 시기에 팔라비 1세에게 쫓겨났던 아야톨라 카샤니 같은 종교지도자가 이란으로 돌아오면서 모사데크의 세력과 연합해 황권에 반대하게 된다.

이 즈음 거의 9 대 1의 비율로 이익을 가져가고 있던 영국의 극심한 석유 수탈로 영국에 대한 악감정이 이란에 팽배하면서 파업이 일어나고 반대시위가 발발한다. 이란에서는 석유산업의 이익을 50:50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요구를 내세웠으나 영국에서는 이를 전면 거부하였고, 영국의 사주를 받은 황제와 총리들은 영국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성명만을 발표하여 반대 여론이 팽배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꼭두각시 총리였던 라즈마라가 암살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며, 결국 모사데크가 총리에 오르게 되고, 석유산업을 전면 국유화시킨다. 모사데크는 이 외에도 황가와 귀족들의 땅을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과 황권의 약화와 민주주의 강화를 추구하는 등 개혁정치로 국민들에게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국유화된 석유산업은 이란에 거의 이득을 가져다 주지 못했는데, 첫번째로 영국의 기술자들이 일시에 빠져나가자 석유산업이 제대로 굴러가기 힘들었고, 두 번째로 영국이 강력한 해군을 동원해 다른나라와 해상을 통한 석유 교역을 봉쇄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후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들을 매수해나가며 계속적으로 모사데크에 반대하는 세력을 만들고, 정치불안을 조성했다.

그 즈음, 미국은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공산화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지고 있었는데, 이란의 정치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공산화되면 막대한 석유가 소련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조성되었다. 여기에 이란에 적대중이었던 영국이 이란이 공산주의 아래에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부채질한 끝에(사실상 거의 속여넘겨서) 미국은 CIA를 통한 쿠데타[10]를 일으켜 황제를 복권하고 모사데크를 끌어내리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모사데크 총리가 체포된 후 팔라비 2세는 다시 돌아왔고 황권은 모사데크 전보다 훨씬 더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친미이자 반소련인 팔라비 왕조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미국의 비호하에 팔라비 왕조는 서구화와 근대화, 친서방,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해 이란을 어느 정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73년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 쇼크 때에도 전혀 국력 소모도 없이 그야말로 앉아서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고 다음 해에는 아시안 게임을 개최할 정도로 안정가도를 달리는 듯했다.[11]

하지만 팔라비 2세는 황권 강화를 위한 탈이슬람화 정책과 노골적인 친미주의 성향을 보였고, 비밀경찰 사바크(ساواک, SAVAK)[12]에 의한 철저한 통제를 시도했다. 또 70년대 중반 팔라비 2세가 독일 크루파사의 지분 25%를 소유했을 정도로 황제 개인의 부패 또한 심해졌으며, 오일 쇼크로 얻은 부는 도리어 빈부격차를 확대시켰다. 이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정치적 재기를 노리던 이슬람 세력이 합세하여 규모는 더욱 커졌다. 급격한 전통 붕괴에 당혹해 한 민심의 이탈도 더해졌다. 또한 팔라비 왕조의 친미주의 성향은 반미 감정을 싹트게 했는데, 나중에 모사데크의 축출에 CIA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밝혀지면서 미국에 대한 이란인의 반감이 뿌리깊게 자리하게 된다.

여기에 기회만 노리던 외부 세력이 얼씨구나하고 끼어들었다. 소련은 반정부 학생 운동을 지원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프랑스는 이슬람 세력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지원했다. 한편 미국은 카터 행정부의 도덕 정치와 인권 외교 정책으로 방관했다.

1978년, 학생들의 반황제 시위로 출발한 반정부 운동은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종교 세력과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였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신병을 핑계로 팔라비 2세가 이집트로 도피하면서 팔라비 왕조는 무너지고 이란 혁명이 달성된다. 한 달여의 짧은 임시 내각을 거치며 주도권을 잡은 이슬람 세력이 국민투표를 거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공화정을 수립한다. 이후 79년 11월의 테헤란 미대사관 점령 사건으로 카터 정권을 작살내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퇴위한 팔라비 2세는 이후 이곳저곳 떠돌다가 1980년에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7. 이란 이슬람 공화국 (1980 - 현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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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인물은 현임 라흐바르(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13]

혁명을 성공시킨 호메이니는 혁명에 함께했던 사회주의세속주의 세력을 빠르게 숙청한 후 나라 이름을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꾸었는데, 공화국이 아니라 이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성직자로 구성된 율법 전문가 회의가 종신직인 라흐바르(최고지도자)를 선출하며 주요 국정 전반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한다. #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일으켜 초대 최고지도자가 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란에선 국부급으로 존경을 받지만, 주변 나라들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이스라엘, 터키에선 악의 축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프랑스의 입장에선 기껏 도와줬더니 이권도 챙겨주지 않은 한 배은망덕한 놈, 좀 더 좋게 평가해도 꼴통 이슬람 근본주의자 정도로 대우받는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대한 내용은 해당 항목에서 참고하길 바란다.

이 혁명은 이후에 이스라엘과 함께 양대 중동문제의 시발점이 되었는데 종파는 달라도 '이슬람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본격적으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 혁명에 위기감을 느낀 이라크가 1980년 9월 22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무려 8년이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임이자 초대 최고지도자인 호메이니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1989년 이후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하메네이도 국민 직선으로 선출한 대통령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다. 또한 사실상 라흐바르가 인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에서 대통령, 국회의원 후보들의 자격심사권도 가지기 때문에 라흐바르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자는 대통령 및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할 수가 없다.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라흐바르의 독재국가이다.

90년대에 저유가와 환율현실화 조치 등으로 인해 이란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해 하타미가 대통령이 되면서 하에서 어느 정도 개방정책에 나서며 경제는 90년대 초중반 시절보다 크게 나아졌고 사회통제도 완화되었으며 언론자유도 보장되는 편이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임기 후기에는 조지 W 부시로부터 악의 축 내지 테러지원국이라는 소리를 듣는 수모를 겪었다. 이 상황에서 치러진 2005년 대선에서 라프산자니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으로 보였지만 예상을 깨고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경제는 일단 고유가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후퇴되었으며 사회통제는 강화되어가며 도심부 젊은층들 사이에서 반발여론은 심해져갔다.

2009년 6월 13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국가가 비상상태. 점점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이리저리 시끄럽기 시작하는 가운데, 미국은 미국대로 이란이 민주화돼서 친미정권 세우면 좋다라는 태도인지라 이리저리 개입하려고 하니 안팎으로 시끄러운 상태이다.

단 이란의 민주화=친서방, 이슬람 국가 붕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가진 원한인지라[14] 이란인들의 반미, 반서방 감정은 지금도 매우 강하다. 선거 폭동 당시 시위대가 개혁정책을 추구했지만 CIA의 쿠데타로 쫓겨났던 모사데크 전 총리를 영웅으로 내걸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아마디네자드에게 패하여 선거 폭동을 촉발시킨 미르호세인 무사비 역시 어디까지나 이슬람 국가 체제 안에서 개혁적인 정책을 내건 야당 지도자다. 이 시위대가 친서방 성향을 가졌다는 것은 그들을 탄압하는 수구 세력의 주장인 동시에 서방 국가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15]

선거에서 개혁파들을 걸러냈음에도 개혁파의 득표율이 높은 편이고[16] 2016년 율법 전문가 회의 선거에서 개혁파와 중도파가 다수를 점한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알리 하메네이가 도중에 사망한다면 선전할수 있겠지만 이 선거도 8년에 한 번씩 치러서 민심 반영이 어렵다.

율법 전문가 회의가 이란 군사력의 핵심인 이슬람 혁명 수비대를 거느리고 있기도 한데, 혁명수비대는 석유 등 주요 산업에 진출하여 막대한 이권을 취하고 있으며 정치적 보수파에 힘을 실어 주어 개혁 세력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 #

2011년 아랍권을 뒤흔든 민중 혁명 여파로 이란에서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튀니지와 이집트,리비아와 달리 그 규모는 작은 편이다. 미국은 열심히 이 기회에 엎어버려! 응원하지만 다른 나라와 달리 역사적인 측면에서 반서방 감정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17] 그다지 희망은 없었고, 결국 별다른 영향을 주지못하고 흐지부지되어 미국을 실망시켰다.

2013년 대선에서는 보수파의 후보가 난립한 반면 중도온건파가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서 결국 성직자 출신의 중도온건파 로우하니 후보가 과반 득표로 당선되었다. 강경한 보수파가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면서 제제로 인해 경제난이 가중된 것이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는 분석. 로우하니 당선자는 아마디네자드 치하의 억압을 풀겠다고 밝혔다. 미국도 은근히 핵무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눈치. 드디어 버락 오바마와의 핫라인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최고지도자 밑으로 3권분립이 되어있는 신정국가 이란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과연 미국 기대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2014년 시리아, 이라크를 강타한 다에시에 대하여 반감을 보이며 이라크 정부군을 돕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군과 이란군이 협조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는 상태. 하지만 이스라엘이 결사반대하기에 이뤄지기 어려워 보인다.

이란의 진보적 청년층이 이슬람 정권에 대한 마지막 기대까지 버리게 만든 사건은 역설적으로 2015년 이란 핵협상 타결이었는데, 이 때 서방국에서 받은 석유 수출 등의 자금을 시급한 민생고 해결이 아니라 시리아와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등 시아파 벨트의 세력 확장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6년 이후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란 시위에서는 2009년 시위 때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이슬람 공화국 타도!" "독재자에게 죽음을!" 같은 구호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2017-2018 이란 시위 참조.

2016년부터는 그동안 조용하던 이란 내 쿠르드인들과 발루치스탄 위주의 수니파들이 반시아파의 무장단체를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올랐다.[18] 쿠르드인들과 수니파 무장단체들은 게릴라전으로 이란을 괴롭히고 있어 이란은 이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

2019년에는 또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는데, 1979년 이후 가장 큰 항쟁이었다. 하메네이는 '미 제국주의자의 개들'을 처단할 것을 명령, 유혈진압으로 시위자 수백 명이 사망했는데 일명 피의 11월, 혹은 페르시아력으로 피의 어번[19](آبان خونین)이라 부른다.

2020년 들어서 미국과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미국은 이란이 지원하는 민병대가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을 공격한 것과 2019년 K-1 공군기지 공격으로 미국인이 위험해졌으며, 추가공격이 있을 것이란 첩보를 입수하자 솔레마이니 제거작전을 시행했으나 이란의 장군인 카셈 솔레마이니 장군이 죽자 이란측에서는 핵합의에서 사실상 탈퇴를 결정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주요도시에 보복공격을 감행할것이라 공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만약 보복공격이 있을 시에는 이란의 주요거점 52곳을 폭격할 것임을 공표함으로서 경고를 줬다.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를 공습하면서 긴장강도가 한 층 높아졌다. 그러나 미리 미국 측에 알려줬으며, 미군들이 퇴근한 후 정밀하게 조율된 공격으로 미국의 보복을 피하려 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도 피해가 없었으니 미국의 군사적 보복은 없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2021년 대선에서 보수파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되면서, 8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룩하였다.

2022년 9월 한 이란 여성이 히잡을 제대로 쓰지않았다는 이유로 사설 경찰에게 끌려간 뒤 맞아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전국적인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1 #2

[1] 물론 여기서 아시리아인 기독교인과 아르메니아인, 소그드인 주민 등등을 제외하면 범위는 더 좁혀진다.[2] 오늘날의 이란 고원이 시아파화 되면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순니파 무슬림 페르시아어 사용자들은 따로 타지크인으로 분류되었다.[3] 그외 여러 소국[4] 에란샤 왕조라고도 한다[5] 이전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학문과 산업을 떠받드는 중추는 시리아와 이라크 일대의 아람어 사용자들이었다. 비교하자면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는 오늘날 시리아 수도에 해당하는 다마스쿠스이고 압바스 왕조는 처음에 호라산 일대에서 시작하여 후일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6] 서쪽으로는 동맹국오스만 제국, 북쪽으로는 협상국러시아 제국, 동남쪽으로는 또 다른 협상국인 대영제국의 식민지 인도 제국이 버티고 있었다.[7] 팔라비 왕조의 샤(군주) 레자라는 뜻이다. 그의 아들의 명칭은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팔라비 2세)로, 팔라비 왕조의 군주 모하마드 레자라는 뜻이 된다.[8] 사산 왕조 때부터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다.[9] 당시 대소 랜드리스물자 다수는 대서양에서 출발,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북극해를 거쳐 소련 아르항겔스크로 이어지는 항로로 운반되었으며, 이 지역은 험악한 날씨와 노르웨이에 배치된 U-보트와 폭격기의 위협을 받았다.[10] 작전명 아이아스/아작스Operation Ajax 작전을 추진하게 된다. 별 실적이 없던 CIA가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여 성공으로 이끈 첫 번째 비밀 작전이다. 이를 계기로 CIA가 과테말라를 비롯해 다른 나라의 정치에 계속적으로 개입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작전은 정작 영국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미국의 석유이권 개입으로 이란에서 처음 제시한 50:50에도 못미치는 20%의 이득만을 가져가게 된다.[11] 이런 것 때문인지 이란인들 중에서는 아직도 팔라비 왕조를 그리워 하는 사람이 많다 카더라. 틀린 말은 아닌게 파라 팔라비 이란 황후의 경우를 봐도(...).[12] 사바크의 최대 협력자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모사드였다.[13] 하메네이는 민족상으로는 이란 인구 대부분(5400만)을 차지하는 페르시아인이 아닌 아제르바이잔인이다. 물론 옛 소련이었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출신인 것은 아니다. 아제르바이잔인은 본국(820만)보다 오히려 이란(1700만)에 더 많이 산다. 상대적으로 페르시아민족에 비해 소수인 민족 출신(하지만 이란 인구 20%가 넘기에 소수민족이라고 우습게 볼 정도는 아니다) 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에서도 보다시피, 이란에서는 시아파 무슬림이라는 가정 하에 민족 차별 문제는 크지 않은 편.[14] 이란은 중산층, 유년층 막론하고 반 신정경향이 강해 신정이 무너지고 세속적인 지도자가 들어서면 곧 정상화 된다. 다만 외세의 개입은 필히 이란을 불행하게 만들기에, 이란 망명자들조차 서방이 직접 붕괴시키는 것이나 이를 사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한다.[15] 이란의 70, 80년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르잔 사트라피 원작, 뱅상 파로노드(Vincent Paronnaud) 감독의 페르세폴리스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보도록 하자. 물론 마르잔 사트라피가 만든 원작 만화책도 훌륭한 참고문헌이다.[16] 이것도 지역마다 얘기가 다르다. 물론 테헤란같은 대도시에서야 보수파 VS 진보파 간의 대결이 성사되지만 농어촌 지역으로 가면 얘기가 달라서 보수파와 개혁파를 왔다갔다하는 의원들이 꽤 된다.[17] 물론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도 반미, 반서방 감정이 없진 않지만 이란처럼 격렬하게 미국이나 서방을 증오, 적대하진 않는다.[18] 사실 이란의 신정통치가 워낙에 악랄해서 쿠르드인들과 수니파는 예전부터 불만이 가득했다.[19] 페르시아력의 제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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