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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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 전투
夷陵之戰


파일:Battle of Xiaoting.jpg

기간
221년 7월 ~ 222년 8월
장소
형주 이릉, 효정[1], 자귀, 백제에 이르는 범위[2]
원인
촉·오 외교관계 파탄에 따른 유비의 친정(親征), 유비의 형주 탈환 시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촉한
* 오반
* 상총
* 진식
* 보광
* 조융
* 요화
* 이조
* 장남
* 정기
* 마량
* 왕보
* 부융
* 사마가
* 두로
* 유녕
* 황권
* 사합
* 방림
* 습진
* 번주
동오
* 반장
* 주연
* 한당
* 서성
* 손환
* 낙통
* 송겸
* 선우단
* 이이
* 유아
* 장일
* 보즐
* 반준
군주
촉황제 유비
오왕 손권
지휘관
촉황제 유비
대도독 풍습
대도독 육손
병력[3]
40,000명[4] ~ 80,000명이상[5], 10만 명[6]
50,000명[7] ~ 60,000명[8]
결과
동오의 승리
영향
* 촉·오 외교관계 복원 및 국경선 최종 확정
* 유비 백제성에서 병사(病死)
피해규모
* 사망자 수만[9], 8만명[10]
* 투항자 수만 명[11]
불명

1. 개요
2. 원인
2.1. 예방 전쟁?
2.2. 북벌 필요론?
3. 배경
3.1. 개전 준비
3.2. 위나라에 칭신하는 손권
4. 전개
4.1. 촉군의 자귀 공격
4.2. 촉군의 형주방면 진출
4.3. 전선 고착
4.4. 효정 전투: 육손의 화공, 촉군의 혼란
4.5. 마안산 전투: 촉군의 파멸, 오군의 추격
4.6. 종언과 후속 조치
5. 결과
5.1. 촉
5.2. 오
5.3. 위
6.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이릉지전, 서릉대전(西陵大戰), 혹은 서릉지전(西陵之戰)이라고도 일컬는 중국 삼국시대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자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대전으로 평가받는 전투이다. 또한 촉한손오가 벌인 마지막 분쟁이다.

220년 촉은 오의 공격으로 형주방면의 책임자인 관우를 잃고 형주 또한 상실하였는데, 이에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복수를 하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하였다. 222년 오나라가 막아내고 승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양국간 국경선이 확정되었으며, 두 나라는 다시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2. 원인[편집]


관우의 죽음에 대한 유비의 분노가 가장 큰 이유다.

삼국지를 대표하는 큰 전투가 일어난 이유가 군주의 개인 감정이라니 맥빠진다거나 허망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는데, 촉이 현대 민주제 국가라면 맞는 말이지만 이 나라는 고대 전제군주제 국가다. 전제군주정에서 군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건 전쟁을 일으키기에 아주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다. [12] 형주공방전이 촉의 형주 상실과 관우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자, 여건이 불리하였음에도 유비는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많은 세력을 거치며 속내를 숨기고 실리를 잘 챙겼던 유비는 오랜 전우이자 동업자였던 관우의 죽음만큼은 끝내 참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다른 객관적 사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으로 드러난다.

물론 동맹 측의 배신으로 넓은 영토와 세력의 2인자를 모두 잃었기에 유비 입장에서도 어떠한 군사적 액션 없이 참고만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릉대전은 시기적으로나 투입된 전력의 규모로나 무력 시위가 아닌 총력전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상술했듯이 촉은 전쟁을 일으키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동맹의 배신으로 군주의 측근이자 세력의 2인자인 관우가 목숨을 잃었고, 관우가 맡았던 형주를 잃으며 국토의 상당수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촉서에는 이 원정을 반대한 수많은 신료의 여론이 기록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 조운전의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 법정전, 화양국지에서는 다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음을 명확히 서술하였으며, 군주인 유비가 이를 무시하였다고 적었다. 촉의 역량과 유비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던 조운과 제갈량 또한 이 원정을 반대하였다.

타국 또한 촉의 어수선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많았다. 황제로 즉위한 조비는 조칙으로 모든 신하들에게 유비가 오나라에 보복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는지 의견을 구했는데, 당시 위의 신료는 촉의 국력과 형주상실로 인한 타격, 패배를 겪은 국가의 분위기 등 상당히 객관적인 요인을 들어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 예측하였다. 허나 유엽만은 두 가지의 논조로 유비의 원정을 예측하였다. 첫째는 촉이 비록 국토도 좁고 세력도 약하지만 유비는 강인한 인물이므로 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부자 사이나 다름없으므로, 복수를 위해 출병하리라는 것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가장 총애하고 가깝게 대하는 측근인 조운제갈량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원정을 끝까지 강행하는 유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정사 삼국지의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과 화양국지, 정사삼국지 촉서 법정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촉 외부의 기록이 원 출처인 유엽전 등에서도 원정의 주요 목표는 촉의 위신과 함께 관우 개인에 대한 복수로 제시되어, 당대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1. 예방 전쟁?[편집]


오가 형주를 차지한 뒤 적극적으로 익주의 후방을 흔들어 촉 본국까지 차지하려 했으므로, 촉의 이릉대전은 예방전쟁 측면에서 불가피했다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삼국지의 저자 진수, 각주를 단 배송지, 이후 청대의 사가들조차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대에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릉대전이 예방 전쟁이었다는 관점에 따르면, 오는 촉의 영역이던 익주 및 한중 후방의 세력을 포섭함으로써 형주, 나아가 촉을 멸망시켜 점령하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는 교주의 사섭을 통해 옹개를 친오파로 포섭하고 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는 한편, 형주를 장악한 이후 공안에 머물던 유장과 그 일가가 오에 항복하자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아 남군 자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유장이 죽자 아들인 유천을 익주자사로 삼아서 교주와 남중의 경계에 머물게 했다. 또한 유수독으로 있던 주태를 한중 태수 분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능양후로 봉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두 가지 이유로 무리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촉 또한 꾸준히 오나라 영토에 관리를 임명하고 파견했다는 점이다. 촉은 교주가 오의 영역이었음에도 이회교주 자사로 파견하였으며,[13] 오일(오의)를 오가 점유한 형주자사로 임명하기도 했다.[14] 이러한 임명 행위는 제갈량이 국교를 정상화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또한 촉에서는 내부적으로 노왕과 양왕을 두었는데, 이 역시도 모두 과거 위국 영토 분할안에서 오나라가 차지하기로 했던 영토로서 분봉은 앞선 양국의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었다.[15]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오는 국교정상화 후에도 이러한 촉의 행위를 침공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됐듯이 촉은 223년 제갈량의 국교 정상화 이후로도 229년까지 양왕과 노왕, 이회의 교주자사 직함을 유지하였으며 최소한 이엄 탄핵 시점까지 오일의 형주자사직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제갈량이 오를 배신하고 교주나 형주를 통째로 정복하려 든 근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대에도 현대에도 없었다. 고증학 발달 이후인 청대 집해의 저자들 역시 이 사건을 그런 식으로 확대해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적지(?)로의 관리 임명은 침공 위협이 아니라, 임자 없는 땅의 정치체를 조금이라도 더 자국의 영향력 하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 교주 북부와 형주에서 무릉의 서부, 익주에서 남만의 동부는 후대 남조(이민족 왕조)의 토대가 된 땅으로서, 형식적으로는 3개 주에 걸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떤 주의 행정망에도 제대로 포섭되지 않은 이민족의 공간이었다. 이 소유권이 희미한 이민족 접경 지역에서는 자원이 나왔기에, 오나 촉과 같은 한족 정치체들은 이 지역에서 조금이라도 더 자원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다.

즉 촉과 오는 서로의 전복을 노린 것이 아니라 임자 없는 자원을 노린 것이었고, 이는 229년 손권의 황제 즉위에 맞춘 양국의 행위에서도 드러난다. 오는 제갈량의 남방 정벌 이후(225년 이후) 유천을 익주자사직에서 해임하였고, 229년에는 주연연주 직위 역시 삭제하였다. 촉 또한 229, 230년에 이회를 교주자사에서 해임하였으며, 노왕 및 양왕 분봉 취소를 마무리하였다. 이는 동맹이었던 양국이 타국 영토에 대한 소유권 주장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직책을 정리한 것이다.[16][17]

자사 임명이 적의를 드러낸다는 해석에서 벗어난다면 오의 촉 원정이 현실적으로 논의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낮으며, 이는 촉의 지리적 요건을 고려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오가 파촉으로 들어가려면 장강삼협을 끼고 있는 백제성을 공격해야 한다. 수송을 위해서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번거로움이 크며, 합비에서 조위가 버티고 있는 이상 손권의 행동은 유비가 형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 된다. 실제로 여몽과 형주정복에 나선 육손은 형주의 행정구역에 속하는 무 현까지를 차지하고 이릉으로 돌아가 방어를 굳히고 더 나아가지 않았다.

오나라의 대전략 역시 형주 정복에 이은 익주 정복과는 거리가 멀다. 형주 정복은 여몽의 대전략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여몽은 관우가 차지한 형주의 정복을 제 1 목표로, 양양의 확보를 제 2 목표로 삼아 형주 장강 물길의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장강을 오롯이 오의 방패로 삼아야 독립된 안정화를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몽의 전략에 따라 움직인 오는 당연히 촉의 정복을 계획하지 않았으며, 혹여나 촉 입장에서 오가 '익주로 처들어올 것'이라는 오판이 존재했다는 근거조차 삼국의 기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실제로도 진서 선제기, 위서 조인전에 위군이 퇴각한 양양을 오가 잠시 장악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므로, 방어를 굳힌 육손의 행동과 함께 놓고 보면 오군은 이릉 발발 직전까지도 여몽의 대전략을 충실히 따랐음이 분명하다.


2.2. 북벌 필요론?[편집]


이릉대전은 유비의 복수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며 필연적인 전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촉이 북벌을 하기 위해서는 형주를 가지고 있었어야만 했다. 형주는 촉한의 국가전략이기도 했던 제갈량의 융중대에서 익주와 함께 동시 북벌로 위를 혼란스럽게 할 요충지였다. 형주 없이 파촉 지역에서 관중 평야로 나가려면 험난한 진령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잔도를 이용해 관중 평야를 점령할 만큼 막대한 양의 군사, 식량, 냉병기 등을 수송하는 데 따를 제약은 매우 크며, 설령 양주방면으로 군을 돌린다 한들 관중평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소관을 넘거나 진령산맥의 우측을 타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북벌을 하기 위해서는 형주에서 군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주와 예주를 지척에 두고 위의 주력군을 묶어두면서, 관중평야로 진격을 해야만 했었다. 유비는 바로 이러한 구도를 회복하기 위해 이릉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비용을 고려치 않고 일단은 공격로가 늘어나니 좋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미 있는 요충지는 도움이 되지만, 그 요충지를 탈환해야 할 상황이라면 탈환 후의 이득이 손해를 상회하는지를 계산해야 한다. 실제로 발생했던 판도를 따져보면, 이릉대전으로 거둘 이득이 손해보다 컸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현실적으로 비용 문제를 계산해보면 진령 산맥이 험난한 만큼이나 익주에서 형주방면으로의 분출 역시 마찬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익주에서 형주평야까지는 수백KM에 달하는 보급로를 필요로 하며, 결과적으로 유비가 준비해 간 군조차 형주로 직접 나간 군은 전체 중 4만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공세에 나선 촉군은 되려 방어에 나선 오군보다 적은 수밖에 투입될 수 없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촉군 전체의 진군속도 둔화와 장기간에 걸친 수세적인 움직임을 야기하였다.

긴 원정동안 유비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효정에서 남군조차 100km가 넘게 떨어져 있었고, 유비군에는 수군과 기병 역시 의미있는 규모로 관측되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만약 형주에서 대규모 회전이 발생하여도 유비가 육손이 이끄는 오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리라는 가정은 어렵다. 고대전쟁사에서 대다수 병력의 사상은 패퇴 이후 전과확대 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수로를 낀 오군은 기동성면에서 촉군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연히 실제 역사에서 육손은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여 촉군이 지형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의 대규모 회전 자체를 회피하였다. 따라서 상기 논의에서 촉군이 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남군까지 진출할 수 있으리라는 숨겨진 가정 자체도 이미 비현실적이지만, 그보다 앞서 오군이 촉군과 순순히 싸워줄 가능성, 설사 오군이 촉군과 싸워주더라도 촉군이 오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가정부터가 실제 역사에서 발생하지 않았던, 대단히 비현실적인 가정임을 짚고 넘어갈 수 있다.

만약에 이 모든 가정이 희박한 확률로 촉에 유리한 방향으로 실현되어 육손의 오군이 상한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다종다양한 공격을 받아낸 요충인 남군이 공세종말점에 달한 촉군에 떨어진다는 가정 역시도 어렵다. 촉군은 남군에 비해 훨씬 작은 거점인 이도마저 수 개월간 함락시키지 못했고 이 상태에서 보급로가 400KM를 넘는 원정은 이미 1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 수만 단위 군이 진을 치고 있을 남군을 다시 몇 개월간 공성하며 얻어낼 수 있다는 가정은 실제 역사에서 반복되는 공성전의 높은 난이도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이릉대전 바로 직후 남군에서 주연은 전염병으로 싸울 여력이 되는 병사가 고작 5천인 상황에서 위군의 중핵인 장합과 하후상, 조진의 수만단위 공격을 6개월간 수비해냈는데, 수백킬로미터가 되는 보급선을 이미 일년 가까이 감당해와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촉군이 이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가정은 더이상 현실적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불가능한 가정을 기적적으로 극복하여 남군을 얻어내더라도, 이번에는 위군의 개입가능성이 문제가 된다. 외교적으로 조비를 설득하여 불간섭을 얻어낸 손권과 다르게 유비는 이 원정 내내 위군의 개입을 방지할 어떠한 의미있는 방법도 제시하지 못했다. 손권은 자신이 유비를 홀로 격파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여 명목상 상국에 해당하는 위군의 간섭을 배제하려 들었는데, 형주방면에서 오군이 크게 패퇴하고 자연스레 번국을 구원하기 위한 위국 개입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위군이 보급로인 자귀를 공격하는 경우 촉군으로선 보급이 끊긴 채 상한 군을 들고 본국과 유리된 형주에서 위군을 상대해야만 한다.

위와 같은 문제를 볼 때, 유비가 융중대 실현을 위해 이릉대전을 벌였다고 가정한들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평가는 어렵다. 또한 유비가 융중대의 실현을 위해서 이릉대전을 벌였다는 가설 자체에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 융중대의 착안자인 제갈량 본인이 반대로 행동한다는 점 역시 이 가설을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현재로서는 근거와 설득력이 모두 부재하여 고려할 가치가 없는 가설이다.


3. 배경[편집]



3.1. 개전 준비[편집]


파일:acf9fe89a072e63a536d97247c7703b1.png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형주 공방전 중에 오군의 공격에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고 형주를 잃게 되자, 분노한 유비는 수년 후에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많은 신하들은 "위나라를 쳐도 모자랄 판에 오나라랑 전쟁을 하자고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유비의 안건에 이례적으로 간언하며 반대하였다.[18] 진밀은 천시로 보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운은 위를 쳐야 한다며 말렸다. 호삼성은 이런 조운의 말에 대해 일에 있어서 앞에 할 일과 뒤에 할 일을 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유비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라 신하들의 조언을 묵살하고, 조운을 강주로 보내고 진밀은 하옥했다.

또한 초청한 도인 이의기에게 길흉을 묻자 이의기는 답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구하고서 병마, 병기와 의장을 수십 장을 그린 다음 하나하나 손으로 찢고는, 다시 대인(大人) 한 명을 그려, 땅을 파 이를 묻고는, 곧바로 떠나며 불행을 예견한다. 유비 역시 이에 대해서 마뜩치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출전을 강행한다.

거기다가 그 와중에 221년 또 다른 의형제인 장비범강장달의 손에 죽는 것도 모자라 오로 달아나 버리는 등 출전 이전부터 불길한 조짐이 보였으나 유비는 자신의 부재를 메워줄 제갈량을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둔 뒤 오로 진군한다.[19] 제갈량은 조운과 달리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 제갈근도 유비에게 사자로 갔을 때 제갈량 때문에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았으므로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7월 대군을 이끌고 온 유비군이 백제에 도착하니 오나라는 당연히 관우와의 일전으로 아직 병력이 회복되지 않아, 상대하기 버거운 상황에다가 당시 위오동맹이었기에 위나라에도 파발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나 위나라는 당연히 말로만 알았다하고 보낼 기색을 안 한다. 이 와중에 오의 중신 제갈근이 편지를 보내 같은 원수라면 더 큰 원수인 조비를 치라는 조운과 같은 이론을 앞세워 화해를 청하지만 당연히 유비는 이를 거절하고 오나라를 공격한다. 이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이에 대해서 배송지는 '글자가 아깝다'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로 상당히 격렬한 어조로 제갈근의 화친 건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호삼성 혹은 삼국지집해의 주석가들은 제갈근의 편지가 가진 이론적 설득력에 강한 동의를 표하며 유비의 섣부른 원정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3.2. 위나라에 칭신하는 손권[편집]


221년 8월 손권은 스스로 번국을 청해오며 관우를 물리치며 얻은 우금을 돌려보낸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지만 이번에도 이때 유엽과 조비와의 대화는 자치통감에 길게 소개되어 있다.

그동안 형정은 오나라에 도착한다. 오나라 사람들은 왕이라는 직책 따위 받지 말고 상장군이나 구주백[20]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지만 손권은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형정의 무례에 장소가 일갈하고 서성은 주위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분해하니 형정은 오나라가 오래 밑에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쨌든 손권은 조자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한다. 거기서 조자는 끝내주게 손권을 띄워주는데 말을 너무 잘하니 조비가 조자에게 자신에게 귀순할 걸 권하고 조자는 그동안 오를 치켜세운 건 다 어디갔는지 덥썩 수락해 위의 조정에 임관한다.

그리고 조비는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작두향과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 공작, 비취, 싸움 오리, 장명계 등을 오에 요구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치품의 요구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기겁하며 사치품의 요구양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였으나, 손권은 조비를 두고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라 예의를 가지고 따져도 의미 없다는 말과 함께 조비가 요구한 모든 공물을 갖추어서 보내준다.

그 후 조비는 손권의 아들 손등을 만호후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며 편지를 올려 받지를 않고 단지 심형을 파견해서 감사의 뜻을 밝히며 방물을 바친다. 심형을 만나본 조비는 그가 훌륭하다고 여기고 일단은 이 문제를 덮어둔다는 심형전의 서술이 있다.


4. 전개[편집]



4.1. 촉군의 자귀 공격[편집]


221년 7월. 촉군이 공격을 시작한다. 이 당시 오군은 이이, 유아를 무현과 자귀현에 주둔시켰고 육손은 상대적으로 후방인 이릉에서 이들을 감독하며 촉군의 침공에 대비하는 상태였다. 촉군의 선봉인 오반풍습은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하고 자귀에 주둔한다. 오주전의 묘사에 의하면 육손이 형주로 물러난 시점에서 오군의 형주방면 군이 보강되므로, 촉군의 전과는 오군의 형주방면 군이 본격적으로 보강되기 이전에 일어났다고 보인다.

손권은 육손에게 가절을 주고 대도독으로 임명하였고, 주연과 반장, 송겸과 한당, 서성과 선우단, 손환 등을 포함한 5만 군을 그에게 배속시켜 형주 방어전을 일임했다.[21] 한편 자귀에 도착한 촉군은 마량을 무릉 오계만이에게 내려보내 협력을 구하며 관직을 뿌려 '호응'을 얻어내지만, 이들이 이후 전쟁에서 유비 본대에 합류했다는 여타의 근거는 보이지 않으며, 남부의 오계만이는 보즐에게 틀어막혀 전선에 합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장기적으로 붕괴되었다.

영릉과 계양에서 습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따로 보즐을 파견한다. 보즐은 습진을 반준과 함께 격파하고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였으므로, 결국 남방에서 군사적 동맹을 얻으려는 유비의 시도는 대체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222년 1월이 될 때까지, 촉군은 형주와 익주를 나누는 지형적 분기점인 자귀에서 형주방면으로의 진출을 준비한다.


4.2. 촉군의 형주방면 진출[편집]


222년 1월. 촉군이 자귀에서 형주로 나오려 시도한다. 이에 육손의 부장 송겸이 촉의 진채 다섯 곳을 함락시켰으며 촉군의 장수들을 참수한다.[22] 패퇴한 유비의 군은 다시 자귀로 돌아온다.[23] 주연전에 촉의 선봉을 물리쳤다는 기록은 이 당시의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유비는 오반과 진식이 이끄는 수군을 통해 형주의 입구인 이릉까지 진출에 성공하며 강 동안과 서안을 차지했다.[24]

222년 2월. 자귀로 돌아갔던 촉 본대가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고, 산을 따라 행군하여 이도까지 나아간다. 오군의 손환은 공을 세우기 위해 단독으로 이도에서 유비의 선봉대와 맞서다가 포위당한다.[25] 오군 내부에서는 손환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서지만 육손은 관망을 선택한다.

한편 유비는 출정 직전 황권이 했던 간언을 무시하고 직접 최전선에 위치한다. 황권은 본래 물의 방향 때문에 퇴각이 힘들고 오군이 사납다는 이유로 유비가 직접 전선에 나서는 일을 반대하였으나, 유비는 황권을 후방인 이릉에 배치해 위군을 감시하도록 시키고, 자신은 최전선인 효정[26]에 도독 풍습과 함께 본대를 이끌고 주둔한다.[27] 이 선택은 이후 육손의 화공이 시작되자 치명적인 실책으로 드러났다.


4.3. 전선 고착[편집]


이후 222년 6월까지, 육손은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간다. 이에 손책 시절부터 섬겨왔던 노장들과 손권의 친척들도 합세하여 육손에게 싸우기를 청하나 육손은 칼을 빼들고 그들을 복종하게 만들었다. 육손은 이릉에서 포위당한 손환의 구조 요청을 거부하였으며, 왜 손권의 동족을 구원하지 않느냐는 장수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촉군을 관찰하며 신중한 태도로 일관한다.[28] 육손의 관측대로 이도는 함락되지 않았다.

전황이 고착되자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육손을 유인하려 시도하였으나, 다른 오나라 장수들과는 달리 육손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둔 복병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오고 전황은 고착된다.[29] 이 5~6개월간의 대치 동안 유비군은 형주평야의 입구인 자귀에서 불과 40km 진군한 상황이었고, 본국에서의 보급로는 400km를 상회하고 있었다.[30]


4.4. 효정 전투: 육손의 화공, 촉군의 혼란[편집]


222년 6월.[31] 육손은 효정의 촉군 진지를 상대로 비로소 공격을 시작한다.

이 무렵 자귀에서 나온 촉군은 이릉, 효정, 이도의 약 40km 범위에 걸쳐 넓게 주둔하는 상태였다. 이중 이도는 최전선의 손환 포위망이었고, 효정은 강건너에 주둔한 본대이며, 후방인 이릉은 황권이 주둔하여 익주로 연결되는 통로인 자귀와 이어지는 후방 연결통로의 역할을 맡았다. 촉군은 육손의 전략대로 오의 영토내로 5, 6백리를 들어와 장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리나 되는 긴 진영을 형성했다.[32] 이렇게 긴 진지는 상황을 전해들은 조비가 "유비는 병법을 모르니 손권이 곧 이길거란 소식이 들릴 것이다." 라고 평할 정도로 병법에서 금기시하는 일이었다.[33][34]

육손전과 다른 오서 기전에 파편적으로 남은 기록들을 보면, 촉군은 배를 버리고 진격 속도가 대단히 둔화된 상태였다. 형주 상실 당시 관우가 이끌던 병력은 모두 형주를 장악한 오군에게 넘어갔고, 따라서 촉군은 장강이 길게 뻗은 형주를 공략하기 위해서 익주에서 키운 수군만을 활용해야 했다. 수군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묘사를 볼 때,[35] 유비는 익주에서 불과 수년 간 억지로 만들어낸 수군만으로 오의 형주 수군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긴 보급거점 전체를 산지에 배치하는 식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요새화의 대가는 아주 느려진 진군속도와 비대화된 보급소요,[36] 초반 기세의 상실이었다.

육손은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촉의 진지들을 화공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최초의 효정 타격 당시 도독 풍습, 선봉인 장남이 사망하였고 유비는 격파당해 퇴각한다.[37] 이때 풍습을 벤 것은 반장이 이끄는 군사였다.[38] 이로서 촉군은 오군의 전면적인 공격에 맞서 상황을 수습할 지휘부를 잃게 되었고, 각 진지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풍습과 장남은 지위를 볼 때 효정 본대에 주둔하며 이도의 손환 포위망을 관리감독하던 상태로 보인다. 당시 촉군의 선봉은 강 건너 반대편인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손환이 이후 추격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 또한 '포위가 자연스레 풀릴 것'이라는 육손전의 묘사를 볼 때,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한 촉군은 육손의 최초 타격 대상은 아니었고, 효정이 타격당하고 지도부가 궤멸하자 자연스레 포위를 풀고 퇴각을 택했다고 보인다. 앞서 논했던 촉군의 선봉을 격파했다는 주연전의 기록은 퇴각하는 이 포위망 군에 대한 공격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4.5. 마안산 전투: 촉군의 파멸, 오군의 추격[편집]


오군이 화공으로 이도를 회피하고 촉군 본대인 효정을 성공적으로 타격함으로서 각 거점들은 통합적인 지휘를 상실하고 개별적으로 육손의 공격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손환과 합류한 육손은 이릉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촉군의 진지들을 타격하였다.[39] 이 과정에서 서성이 여러 둔영을 공격해 취하였다.[40]

지휘부가 통제력을 잃고 퇴각하는 상황에서 촉군의 개별 진지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파괴되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유녕은 항복하였다.[41] 종사좨주 정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퇴하였는데, 뒤에서 추격자가 곧 온다며 배를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도주하라고 권한 가삼들의 말을 무시하였다가 사망하였다.[42]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강을 통해 북진하며 40여곳의 진지를 격파하였고 이 과정에서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이 사망한다.[43]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라[44] 육손은 기후를 살펴 마침 건조한 날씨를 기다려 화공을 했을 공산이 있다.

이릉보다 더 후방이자 형주 평야에서 익주 산맥으로 넘어가는 입구인 자귀 근처의 마안산까지 후퇴한 유비는 산 위에 올라 대파한 군대를 수습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북상하며 유비를 추격하던 육손은 마안산을 사방에서 포위하였고, 육손이 이끄는 오군이 사방에서 육박해오자 유비군의 진영은 붕괴하여 오군에 대패하였다. 육손은 효정의 기습적 타격에 이어 수습을 시도하던 유비를 이 전투에서 격멸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전투의 승전으로 인해 형주방면으로 나간 촉의 4만여 군은 최종적으로 격멸된 것으로 보인다. 촉군 중 상당수는 항전을 포기하고 오군에게 투항하였다.[45]

마안산에서 대패한 유비는 다시 퇴각을 시도하며 후진[46]으로 부융을 남겼고, 부융은 전사한다. 기록에 따르면 사망할 당시에도 기세가 사그러들지 않았고 오나라 사람이 타이르며 항복을 권해도 '한의 신하는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치 않는다'며 욕하다가 전사하였다고 한다.[47]

오군은 마안산에서 촉군의 형주방면 군을 최종적으로 격파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오군은 마안산으로부터 다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촉군의 진지들을 격파하며 유비를 추격하였고, 선봉은 유비에게 포위당했던 손환이 맡았다. 유비는 마안산에서 도주하여 자귀에 간신히 도달하였으나, 손환이 유비보다 '앞서서' 길과 탈출로 곳곳을 '먼저' 끊어 뒀기에 자귀에서 백제로 가는 가장 빠른 수단인 배를 포기해야 했다. 유비는 결국 험한 산길을 택해 탈출을 시도한다.

유비를 뒤쫓던 오군은 자귀 수복에 성공한다. 자귀의 촉군 중 진지를 보전한 군은 아문장인 상총의 군 뿐이었다[48]는 기록, 그리고 왕보가 자귀에서 사망했다는 기록[49], 마지막으로 대전 이후 오가 자귀 수복에 성공한 상태임이 확인되는 점을 보면, 마안산보다 후방에 있던 거점인 자귀 역시 유비를 추격해오는 오군에게 별도의 전투를 거쳐 격파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넓게 보면 마안산 - 자귀 패퇴는 개별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자귀에서 마안산까지 이어져 있던 진영에서 연이어 벌어진 패퇴의 흔적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안산 전투와 자귀 전투가 얼마나 별도로 구분되는 전투인지를 확정짓기는 어렵다.


4.6. 종언과 후속 조치[편집]


이렇게 촉군을 추격하며 후방의 모든 진지들을 지워나가던 오군을 피해서 산길을 택한 유비는 간신히 백제성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일부 역참의 관료가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후에야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50][51]

222년 6월 이후, 8월 이전. 패퇴한 유비는 오군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영안에 도달하였다. 본래 영안의 명칭은 어복이었는데, 이때 유비가 영안으로 명칭을 고침으로써 영안이라는 지명이 되었다.[52] 이 당시 유비를 추격한 이이, 유아의 군은 영안의 바로 근처 남산에 이르렀다.[53] 조운이 위기에 처한 유비를 구하기 위해 군을 끌고 백제성으로 향했을 만큼 유비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시간이었다.[54] 오군의 내부에서는 백제성에 몰린 유비를 공격할지에 대해 논의가 벌어진다. 서성, 반장, 송겸은 유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육손과 주연, 낙통은 조비의 남하를 예견하며 거절하였다.[55]

222년 8월. 오군이 촉군을 격파하자 북부에 주둔하다 퇴로가 끊긴 황권사합(史郃)은 결국 위나라에 항복한다.[56] 한편, 무릉만에 가있던 마량 또한 오계만에서 사망한다.[57] 책임을 돌린 무릉만에게 죽었는지 이릉 이후 유비에게 동조하려 하던 무릉만을 정리하던 보즐군에게 죽었는지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며, 정확한 사망 시점 역시 알 길이 없다. 역사학자 Rafe는 이릉대전에서 촉군이 패하는 모습을 본 무릉만이들이 마량을 처형했다고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오나라의 기전에서 마량을 죽인 공과에 대한 서술이 전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58]

222년 10월.[59]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다시 화친을 제의하고,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화친이 이뤄지고 이릉대전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신 교환은 12월까지 이뤄졌다.[60] 이후 조비가 육손의 예상대로 오나라로 밀고 들어오면서, 오나라 독립의 마지막 분기점인 남정 방어전이 시작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비가 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가 육손에게 보낸 편지와 육손의 답신이 육손전에 남아 있다. 대강의 내용은 적이 강릉에 있다며 지원군이 필요하냐고 묻는 유비의 질문과, 당신의 군대는 이미 상했으니 목숨을 보전하고 싶거든 상처를 추스르리라는 육손의 화답으로 구성된다.


5. 결과[편집]


오는 독립국으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떼었고, 촉의 영토는 익주 일부로 국한되며 삼국 정립이 마무리되었다.


5.1. 촉[편집]


형주 상실로 영토에 큰 타격을 받은 촉은 이 이릉대전으로 많은 병사는 물론 한중공략 등 잔뼈 굵은 베테랑 장수들을 대거 전사하면서 인적 손실까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됐으며, 결국 형주는 물론 후일 공명의 북벌에서 인재부족의 원인이 되어 옛 한나라 영토마저 되찾을 여력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형주 상실과 더불어, 신생 국가였던 촉이 이후의 삼국간 세력 경쟁에서 주도권이 약화되는 결정적 타격이 된 전쟁이다.

인적손실은 매우 커서 오나라 쪽 상장은 패퇴하거나 위태로운 상황을 당했을지언정 한 명도 전사했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촉한은 촉오전쟁 이전에 황충과 장비등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주요 장수와 참모들은 사망하거나 투항하였다. 유비군의 전체 규모는 자귀에서 형주로 나온 병력만 4만에[61] 전체 원정군의 규모는 8만으로 잡는데, 이 규모의 군이 비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단일 전투로 이렇게 양측의 손실이 차이나는 전투는 드물다. 적벽에서도 패배 측이 한번에 이렇게 많은 중책이 죽거나 잡히진 않았다. 삼국시대의 삼대 대전 중 패자 측의 손실만을 따져 보면 적벽은 이릉과 차마 비할 수 없고, 오직 관도만이 비할 수 있다.

유비는 에 비해 빈약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릉은 장강을 낀 지역인데, 기록상 유비는 강가에 마주한 산지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유비가 군을 강가에 배치한 정황은 육손이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을 놓았다는 구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으며, 문제기에서 조비의 발언 역시 강에 길게 이어진 영채들을 언급함으로서 강 전체의 요새화와 주둔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익주에서 자귀까지 나가는 길은 외길이며, 장강의 흐름 때문에 형성된 골짜기다. 여기서 다시 자귀에서 이릉까지 나가는 길 역시 장강의 흐름을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이 거점들은 본질적으로 장강의 흐름을 따라 형성된 거점이니 이는 당연하다. 형주상실 당시 수군을 상실한 촉군의 입장에서는 만약 오군이 자귀 북쪽이나 장강 남변으로 돌아서 어복에서 자귀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끊기라도 하면 대응할 여력이 없고, 유비는 일단 보급선에 병력을 뿌려서 보급로 차단을 방지하고, 뿌려둔 병력이 압도당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이들을 산지에 주둔시킨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무릉만이들을 이도 쪽으로 동원하여 장강 남변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도록 하고, 본군은 효정에 놓고, 황권의 분대는 위나라와 맞닿는 임저쪽에 놓아 위군을 방어하는 것이 유비군의 계획으로 확인가능한 형태다.

이러한 유비의 최초 계획은 기본적으로 수세적이라는 한계가 명확했다. 유비는 장강을 따라 형성된 거점들에서 수군을 활용할 수 없었으며 이는 육손전에서 언급되듯이 유비의 군 운용 전체를 아주 둔중하게 만들었다. 익주 산맥의 연장선상인 자귀까지 비교적 빨랐던 진군은 형주로 나오자마자 아주 느리고 둔중해지며 유비군은 형주로 나온 직후 초전의 패배가 입증하듯 오군의 보강된 병력에 대해 좀처럼 확실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비는 황권의 건의를 무시하고 자신의 본대를 전선 그 자체인 효정에 주둔시켰으며, 이는 초기 패전으로 인한 혼란이 지휘부의 통합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이어지는 패전을 더 심화시키게 만드는 크나큰 패착이 된다.

오군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오군은 이 지역에서 얼마든지 수만 단위의 수군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이는 물론 육군과 수군간 전환이 유기적이라는 전제이지, 육군과는 별도로 수만의 수군을 동원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언제나 강을 거슬러올라가는 방식으로 상대 진지를 직접 타격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오군의 전략전술적 우위는 대전 초기에 불필요한 모험주의를 야기했던 것 같다. 육손전과 건강실록에서는 육손을 제외한 여러 숙장들의 공격 건의와 이를 제지하며 주도권을 쥐려는 육손의 노력이 실려 있다. 오군의 선제 공격이야말로 칠백 리에 달하는 전체 전선을 요새화한 유비가 간절하게 바랐던 것임을 생각해보면 오군 장수들의 지나친 공격성은 자칫 위험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오는 육손이 휘하 제장들의 공격성을 통제하고 신중한 방향으로 이들을 이끄는데 성공하였으며, 이는 이미 유리한 켐페인에서 혹시모를 리스크를 확실히 배제하고 승리의 과실을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일단 오군이 효정을 타격하는데 성공한 시점에서 이 전역의 흐름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후로 각 진지는 통합적 대응 없이 개별적으로 오군의 공격에 대응해야 했으며 확인되는 반응은 도주부터 투항, 저항까지 다양하다. 위와 같은 개별적이고 혼란스러운 대응은 자귀에서부터 효정까지 길게 뻗은 진지 중 오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속한 효정에[62] 유비를 포함한 지도부가 밀집하였으므로 초기의 혼란이 그대로 각 진지들이 각자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을 낳았던 것 같다. 유비는 남은 군을 추스려 자귀에서 다시 재정비를 시도하였으나, 육손이 이끄는 오군은 네 방향에서 자귀를 포위하고 들이쳐 상총의 진지를 제외하곤 모든 유비의 진지를 붕괴시켰다. 이 시점에서 최초 형주로 나온 촉군 4만여는 군사적으로 거의 격멸되었다고 보인다.

유비는 이 시점에서 배를 버리고 육로, 즉 산지로 비참한 퇴각전을 벌여야 했는데, 유비보다 앞서나가며 유비의 퇴로를 끊었다는 손환전의 묘사와 굳이 유비가 수로가 아닌 산길을 택한 점, 또한 선박이 상했다는 묘사 등을 볼 때 오군이 물길을 이미 틀어막았던 상황으로 보인다. 이릉경계까지 수십 개의 영채가 세워졌다는 묘사나 700리에 걸쳤다는 표현을 볼 때 익주에서 형주입구까지 이어지는 후방 영역에도 (전방인 자귀~이릉과 마찬가지로) 영채가 세워졌음이 확인되는데, 손환이 앞서나가는 과정에서 이들 후방 영채의 운명은 불분명하다. 이들이 영안으로의 퇴각에 성공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전방 진지들과 마찬가지로 오군의 진격과 수뇌부의 혼란 속에서 개별적으로 격파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백제성에 퇴각한 유비가 상당히 무방비한 상태였음을 고려해보면 현실은 후자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유비의 원정이 낳은 결과는 대단히 선명했다. 처참하게 실패한 원정으로 초대 군주의 명망은 크나큰 타격을 입었으며, 군사적 여력과 인재풀에 미친 손해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친위 군사집단의 주축이었던 관우장비가 이릉대전 전에 이미 사망하고 군주 본인도 이 원정 직후 사망에 이르렀으므로, 신생국가인 촉의 후계자 유선은 상당히 위험한 정국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 인재풀 박살이 삼국지 연의는 물론 정사에서도 제갈량의 북벌을 매번 물먹인 요소가 인재부족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사망에 이른 유비가 형주계인 이엄과 제갈량에게 탁고하고 전권을 위임함으로서, 이후 촉의 국정운영을 형주계 인물들이 주도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한편으로는 이릉대전에서 형주계 인물들이 소진되어 비어있는 실무진에 익주계 호족들이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이 당시 집권한 제갈량과 그 후임들은 촉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권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촉군 손실의 규모는 형주로 나간 40,000명 가량의 군과, 이와 별도로 선봉으로 나선 오반과 진식의 수군, 북쪽에서 위를 견제하며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할 황권의 부대에 육손이 80,000명을 죽였다는 유엽전 기록까지 감안하면 대략 80,000~100,000명 가량으로 추산할 수 있다. 유비군의 총 전력이 40,000명이었다는 설은 위서에 기록된 유비군 본대에 대한 기록만 참조하면서 생긴 오류로서, 정확히는 '자귀에서 나간 병력이 4만'에 해당한다. 자귀에서 나간 병력만 추려도 대군임이 확실한 데다가, 자귀를 넘어 백제 코앞까지 타격당한 실제 전개를 살펴보면 대단히 규모가 큰 패배이다.

종종 1세대 명장들과 한중공방전에서 활약했던 법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촉의 전력을 2선급 전력으로 평가하는데, 당시 촉한은 황충법정이 전쟁 1년 전에 사망하고 전쟁 직전에 하필 관우와 쌍벽을 이루는 중진인 장비까지 갑자기 죽어버렸다. 여기에 마초도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사망했다. 현대에 비교하자면 군대에 대장이 4명 있는데 그들이 1년 주기로 전부 죽었다는 뜻이다.

차라리 조운을 데려갔어야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운의 커리어는 일군을 이끄는 도독이나 장군과는 거리가 꽤 멀고, 전쟁에 숙장을 모두 투입하는 선택은 여러모로 무리가 크다. 이릉에서의 패배 이후 조운은 백제성으로 신속히 군을 이동시켜 후퇴하는 유비를 맞이한다.

일단 전력상으로 유비는 약 8만 명 정도의 병력에 조운, 위연[63][64], 오의, 진도 등 중진 장군들은 방비를 위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대개 경험을 쌓아야 하거나 인재 유망주들이라 볼 수 있는 신예들이 대다수 투입되었다.

구성을 보면 각각 도독과 선봉을 맡은 풍습장남은 모두 유비가 형주에서 얻은 인물이다. 이외에도 형주계 인물들의 면면이 상당한데 입촉 전에 형주에서 얻은 인적자원이 주로 기용되었다고 보인다. 좀 이례적으로 광한군 출신 인물인 왕보가 있고, 유비가 유장에게 처음 받았던 군의 지휘관 중 하나로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65] 확정지을 근거는 없다. 왕보 역시 계한보신찬에서 촉이 형주를 가지고 있었던 짧은 기간 동안 형주의 의조종사를 맡은 기록이 남아있다. 즉 원정군의 주된 인물 구성은 형주와 연관이 있는 인물진로 선택되었음이 확실하다. 촉한 휘하의 형주계 인물들은 그 근원을 유비가 유표 휘하에 머무르면서 호걸들을 불러모으던 시기서부터 형성되었는데, 이릉대전의 실패는 형주의 상실로 인해 안 그래도 큰 데미지를 입었던 형주계 인적자원을 다시 한번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패배로 인하여 마량, 황권 등의 핵심 참모들이 죽거나 투항하고 풍습, 장남, 정기, 부융, 두로, 유녕 등 군부를 이끌어가야 할 2세대 장수진들이 거의 붕괴되었다. 황권과 함께 위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 무려 318명인데 그중에 열후로 봉해진 사람만 해도 42명이고 장군 낭장으로 봉해진 이가 100명이니 말 그대로 촉의 당시 인재가 통째로 날아간 형태였다.

촉을 도와 참전했던 무릉만이 역시 보즐의 뒷정리로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나 그 규모는 확실하지 않다. 무릉만이의 반오감정은 이후로도 쭉 유지되어 몇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고, 오나라가 5만 명이나 동원한 대규모 정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복속에는 실패했다. 이후에 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하고 위가 진으로 바뀐 뒤 오로 쳐들어가자 무릉만이는 바로 진나라 편을 들었다. 이 시기 이민족의 완전복속은 삼국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반란은 일상적인 것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이민족의 반란이 유지된 점 자체는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것은 조비와 손권이 반목하여 서로 알아서 치고박으며 싸우기 시작했다는 점. 제갈량은 이 절호의 찬스를 노려서 나라의 혼란과 국력을 상당부분 회복하고 위 나라를 향해 출사표를 던지게 된다.

5.2. 오[편집]


손권과 육손이 보여준 외교적, 군사적 에너지와 기술은 확실히 찬양할만 한 것이다. 약 1년 남짓한 기간에, 손권은 황제 다음 자리(오왕)를(을) 얻어 냈으며, 맞선 적을 패배시켰으며, 자신을 독립군주로 선포했다. 그리고 최소한 그는 촉의 중립을 확인받고 더 발전할 수 있을 정도까지 촉오 방어동맹을 복구시켰다. 여러 측면에서 손권은 전임 조언자 노숙이 조언했던 정책적 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중간 시기에 손권은 형주 전체를 장악했고, 유비에게 모욕을 주고, 조조, 조비 둘을 노련하게 압도했다. 정직함과 선의는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거칠고, 부도덕적인 상대들(유비, 조조, 조비)에게 거둔 눈부신 전적이었다.[66]

Rafe de crespigny, Generals of the South

사실상 직후 벌어진 조비의 남정 저지와 함께 손오 건국신화의 핵심이라 해도 무방하다. 손권은 남형주를 장악해 영토를 배로 늘렸으며, 이릉대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촉의 보복시도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강동 하나를 쥔 군벌무리의 연합 수준에 불과했던 손오는 일련의 사건을 거쳐 국가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의 실질적인 손해를 검토해보면, 육손의 화계 이전까지 가급적 교전을 회피함으로써 직접적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촉의 대규모 원정 자체가 자칫 잘못하면 위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었기에 오 입장에서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따라서 대전 초기 손권은 위에 신종을 서약하여 협공을 피하는 한편, 상당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영토나 볼모 등 큰 대가 지불을 회피하는 상태에서 위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촉을 1 vs 1로 상대할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하였다.[67]

결과적으로 오나라는 이 전역을 통하여 오가 촉에 맞서 형주를 습득하고 방어해낼 능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오랜 양자간의 분쟁에서 비로소 오군이 최종 승리자로 우뚝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오와 촉은 그간 형주와 익주에서 딱히 우호적이지 않은 관계를 쌓아 왔고, 서로간의 신뢰 관계는 바스라져 동맹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릉대전에서 오가 거둔 승리는 촉으로 하여금 더이상 형주방면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위험부담이 기대이득을 압도하여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릉대전에서 오가 거둔 승리는 촉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억제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오-촉 동맹을 확고하게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육손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몽의 죽음 이후 뒤를 이은 육손은 손책 시절의 노신들과 손권의 친척들에게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전역의 승리를 통해 비로소 제장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육손이 손권의 든든한 오른팔로 활약할 수 있게 만든 시작점이 되는 전역이다.

다소 비굴해보이기까지 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외교를 통해 이릉대전 당시 위의 관망을 훌륭하게 이끌어낸 손권은 결국 촉의 형주 입성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냄으로서 이미 확보한 형주의 주도권을 명확히 하였으며[68] , 뒤이어 벌어진 조비의 남정을 다시 한번 이겨내고 비로소 오를 독립국가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즉 이릉대전은 오의 독립국화에 벌어진 중대 사건 중 하나이며, 삼국정립기 손권의 현실주의적 외교가 얼마나 잘 작동하였는지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다. 이렇게 확보한 남형주(형남)는 이후 오의 북벌루트로 활용되었으며[69] 촉의 멸망 이전까지 장강방어선이 작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손오가 국체의 보전에 성공한 것은 남중국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새로 점령한 형주에서 손권은 적극적인 형주 산월 식민화와 개척을 벌였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남중국 개발의 시초로 간주하며 적극적인 식민화와 개척을 삼국 중 오에서 벌어진 독자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70][71] 오의 산월 식민화와 개척사업은 사서에서 별다른 찬미의 말을 찾기 어려워 팬덤에서는 대체로 무시당하는 주제였으나, 현대 역사 연구에서는 강남의 손오 정권이 대단히 큰 성장을 거뒀음을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다.[72][73]

별개지만 이릉대전 종전 후 250년에 위나라가 오나라의 강릉을 침공할 때 왕기[74]는 이릉에서 보협이 이끄는 군대과 싸웠는데, 보협은 농성을 해서 이릉을 지켰지만 왕기는 이릉성 주변의 식량창고를 공격하여 식량을 얻고 이릉의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왕기에게 투항하여 또 하나의 이릉성을 세웠다. 혹자들은 오가 이때 이릉성을 지키는 데에 성공하지만 이릉 그 자체를 빼앗긴 꼴이었다는 주장을 한다. 허나, 오나라의 이릉, 즉 서릉은 촉한이 멸망한 육항 시대에도 서진의 공격을 막는 최전선이었고 오멸망전 시점에서도 오나라 대 서진방어의 최전선으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적절한 예시는 아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대개 반오적인 시각에서 오나라의 이릉방어에 대한 폄하를 목적으로 억지로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하간 이후 조비가 손권의 반항에 분노하여 몇번이고 침공을 했으나, 모두 막아냄으로서 오 나라는 그 위상을 한껏 드높이며 촉과 위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다만 계속된 전쟁으로 오 나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기는 했다.

5.3. 위[편집]


이릉대전에는 참여하지 않았기에 단기적으로 손실은 없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손실을 입었다. 1강 2약의 구도에서 2약이 알아서 힘을 소진한 덕에 세력이 안정되었고, 이는 위가 압도적인 세력을 얻고 진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 계기이기는 했다. 허나 오 또는 촉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더 큰 이득을 볼 기회를 상실케 했고, 나아가 위가 삼국을 통일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끌릴대로 끌려버린 관계로 조위 정권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되고 끝내 사마염이 진을 세워 천하를 통일하는 등 위나라의 건국자인 조조나 후대 황제 조비 입장에선 이가 갈릴만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6. 창작물에서[편집]



6.1. 삼국지연의[편집]


삼국연의 1부 완결이자, 도원결의로 시작된 1세대가 사라지는 도원종언의 마지막 이야기.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사망 플래그대로 70만에서 75만[75]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나가서 쫄딱 망하는 정도로 설명된다. 손권은 주적이자 메인 악역인 조조의 들러리이고, 조조의 충동질로 관우를 죽인 것으로 묘사되는지라 이릉대전은 유비가 분노에 휩싸여 무리하게 일으킨 전쟁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손권은 실제 이상으로 유비에게 벌벌 기며 제발 쳐들어오지 말아주십사하고 범강과 장달 등을 촉으로 압송하는가 하면, 미방과 사인이 촉으로 또다시 투항했다 처형당하기도 하고, 반장이나 주연이 이릉대전 중에 전사하는 등 유비의 원한을 조금이나마 갚아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곳곳에서 보이게 묘사되었다. 이미 이릉대전 전에 사망한 황충이 참전했다가 전사하며, 참전한 적도 없던 장포와 관흥이 장비, 관우를 대신해 활약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반드시 이겨야 할 이 전쟁에서 촉나라 최고의 카드인 제갈량은 왠지 모르게 쏙 빠져 패배할 당위성을 부여했다. 물론 조운이 후방에 남아있다가 백제성으로 후퇴하는 유비를 맞이하는 장면이나 마초를 양주, 위연을 한중에 배치해 혹시 모를 침입에 대비하게 한 것은 사실 그대로 적었다.[76]

유비는 오군을 압도하며 손권을 벌벌 떨게 만들지만, 육손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전장이 장기화된다. 유비는 일부러 오반에게 기강이 흐트러진 군사들을 보내 도발하게 하고 여기에 낚인 동오의 장수들이 출전하려 하지만 유비의 계책임을 간파한 육손은 출전을 금지시키고, 결국 답답해진 유비가 산속에서 복병을 철수하자 육손은 승기가 다가왔다고 예언한다. 한편 유비는 숲이 우거진 강가에 700리의 장사진을 치는 실책을 범하는데, 이것이 마량을 통해[77] 제갈량에게 알려지자 제갈량이 화가 잔뜩 나서 '이 진을 치라고 명한 자를 당장 처형해라' 라고 했지만 그 진을 치라고 명한 자가 자신의 주공임을 전해듣자 이제 한나라는 끝이라며 탄식하고는 빨리 영채를 옮기도록 하라, 만약 시기가 늦어서 패배했다면 백제성으로 철수하라는 조언을 전하도록 한다.

한편 유비군은 육손이 보낸 순우단이라는 장수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사실 이는 육손이 유비군의 허실을 알아보기 위한 조치였고, 곧바로 화계를 시전한다. 유비는 관흥과 장포, 그리고 지원군으로 온 조운의 도움에 힘입어 가까스로 백제성에 철수하고, 부융, 풍습, 장남, 사마가 등이 전사한다. 이 사태에서 유비가 사망했다는 오보를 듣고 손부인은 서쪽을 향해 통곡한 뒤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한다.

유비를 추격하던 육손은 어복포에 당도한다. 앞서 마량이 제갈량을 찾아갔을 때 '너무 늦어서 아군이 패배했다면 폐하를 백제성으로 피신시키시오. 인근의 어복포에 10만대군을 매복시켰으니 능히 적을 막을 수 있소.'라고 했는데 그 매복의 정체가 바로 팔진도였던 것. 육손은 팔진도에서 살기 비스무레한 것을 감지하지만 병사가 없는 것을 보고 단순한 눈속임이라고 판단해서 진입했다가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이 나타나는데, 동오의 장수가 갇히면 구해주지말라는 제갈량의 당부가 있었지만 자비심 때문에 결국 구해준다. 육손은 황승언에게 팔진도를 배울 수 없냐고 묻지만 변화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배울 수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 그제서야 육손은 제갈량의 능력에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위나라의 침공이 예상되기도 해서 군사를 물린다.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삼국지연의를 번안하는 작가들에겐 지옥 같은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가 위/오/촉 어디에 비중을 두든 간에 이 이릉대전을 전후로 명장들이 극히 일부만 남고 죽어버리기 때문에 이 이후로는 제갈량을 따라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촉나라는 유관장 삼형제는 기본에 황충, 마초 등이 사망하며, 위나라 또한 조조, 하후돈, 장료, 우금, 조인 등도 다 죽어버리고, 오나라도 감녕, 여몽, 장흠 등이 죽어버린다. 그나마 이릉대전 이후로도 살아남은 허저, 서황, 주태, 한당, 서성 등이 있긴 하지만 이들도 이 이후 별다른 활약이 없거나 227년 제갈량의 북벌을 전후로 다 죽어버린다. 즉 스타급 주연은 거의 다 몰살당하고 독자들이 처음부터 봐왔던 얼굴들 다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로지 위와 촉에 중심을 둬야 되고, 오나라는 이 이릉대전에서 조운을 통해 주연을 죽인 탓에 조중정벌 쪽이 다 날아가버려 합비에서 꼴아박기만 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만들기가 힘들다. 이릉대전 이후 제갈량의 북벌 시기까지 활약한 1세대 인물로는 조운, 제갈량, 위연, 사마의, 장합, 육손 정도가 고작이며[78], 이들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제갈량도 삼국지가 다 끝나기 전에 죽어버린다(…). 2부 완결.

또한 제갈량 사후의 에피소드[79]는 위오촉의 1강 2약 체제가 유지되는데다 삼국이 정립되어 전쟁이 없는 대치기간이 이어지는데, 그에 따라 극 진행이 매우 지루해지며 주연으로 띄워줄 만한 인물조차도 드물어져 자세히 묘사되지도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80] 제갈량 사후의 주요 사건이라 해도 공손연의 난, 고평릉 사변, 제갈탄의 난, 관구검/문흠의 난, 이궁지쟁 등 세력 내 다툼이 주가 되지 무용담과는 어딘가 거리가 있는 이야기 정도가 고작이며, 그나마 주요 전투로 꼽을 수 있는 흥세 전투는 나관중이 연의에서 누락시켜 버린 데다가 249년부터 262년까지 이어진 강유의 북벌 역시 옹양주를 얻고 관중을 흡수한다는 대전략이 실패했고 제갈량 시대보다 규모도 작아서 더더욱 재밌게 그려내기가 힘들다.[81] 그리고 263년 촉 멸망, 265년 위 멸망/서진 건국, 280년 오 멸망/서진 천하 통일로 삼국연의 완결.[82]


6.2. 삼국지 영걸전[편집]



영걸전 시리즈의 스토리 분기점


[ 펼치기 / 접기 ]
영걸전
공명전
모리 모토나리
맥성 전투
이릉 전투
추풍오장원
없음
오다 노부나가
조조전
혼노지의 변
마초 요격전
※ : 주인공가 사망하고 다른 주인공으로 교체되므로 분기점이 없음.
● : 주인공이 중도에 사망하는 분기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가상 분기만 존재함.



파일:육손(삼국지)__기타 창작물__chance.png

지금이야말로 승리의 찬스다!

육손

3장 - 촉한건국에서 관우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끝까지 오와 화친을 맺지 않았다면, 3장의 마지막 전투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유비군이 원작에서 촉이 패배한 전투라서 상당히 어렵다. 초반에서 화공으로 인해 아군의 병력이 1/4만 남고 사기가 절반이 된다. 여기에 플러스로 가운데의 강이 아군 부대를 둘로 갈라 놓아서 어느정도 진군해서 다리에 도달하기 전까진 위쪽 장수들과 아래쪽 장수들이 서로 만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오와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는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제갈량, 조운, 마초가 아예 참가하지 않는다.[83]

하지만 난리난 것 같은 임팩트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다. 안 그래도 좁은 지형인데다가 곳곳의 불길이 또한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장판파만큼의 접촉면적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튼튼한 병과로 입구를 막고 수송대나 주술사로 치료받고 발석차로 오나라 군을 퇴각시키다가 보면 육손이 오게 되는데 이 때 육손을 퇴각시키면 전투가 끝난다. 기병이 부실한 오나라답게 네임드 중에서는 친위대는 별로 없고 대다수가 전차대[84]이기 때문에 조조군만큼 무섭지 않으며, 길목이 좁고 느려터진 적의 발석차가 오는 것에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 지루한 전투가 많은 3장에서 그나마 오랜만에 약간 각 잡고 할만한 난이도가 나온 것일 뿐, 이미 장판파를 헤쳐나온 플레이어가 이릉을 못 깰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 1599나 그에 준하는 레벨업 플레이를 하고 있는 고수들이라면 화공으로 병력과 사기가 갉아먹힌 덕분(?)에 시작부터 바로 노가다가 가능하다며 쌍수들고 환영할 지경(…)

유의할 점이 있다면 원작과 마찬가지로 사마가주태가 붙을 시에 일기토로 사마가가 죽으니 이릉대전 출진 시 사마가를 쓴다면 주태랑 붙이지 말 것. 이것이 삼국지 영걸전 게임 내에서 유일하게 일기토 패배로 인한 아군 사망이다.[85][86] 하지만 연의와는 달리 사마가와 감녕의 일기토는 없다.

육손을 퇴각시키면 결국 육손은 갑작스런 조비의 침공에 의해, 유비육손을 우습게 본 게 실수였다고 하면서 와 동맹이 성사되어 4장으로 계속된다. 하지만 유비가 퇴각하면 관우의 생존 여부와 상관없이 유비가 백제성에서 사망하고 사마염천하를 통일하는 엔딩이 나온다.

이 전투를 보면 손자병법서나 오자병법서는 얻을 수 없고 4장에서 감녕과 능통도 아군으로 합류하지 않는 대신 서성과 정봉은 더 높은 레벨인 50으로 합류한다. 상술한 게임 내 육손의 명대사(...)가 나오는 곳이 바로 이릉대전.

4장의 마지막 전투에서는 이 전투의 전말이 밝혀진다.[87]


6.3. 삼국지 공명전[편집]


1장의 마지막 전투로 나온다. 제갈량이 촉군의 700리 진형도를 보고 위급하다고 판단하여 조운을 비롯한 촉 원군을 보냈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며, 시작과 동시에 촉 진영에 불길이 번지고 강 건너에서 오군이 밀려온다. 아무래도 초반이라 그런지, 영걸전과는 다르게 공명전에서는 불이 나도 아군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유비가 직접 지휘하는 부대는 우군 판정으로 유비까지 포함해도 달랑 5개 부대가 나와 있다. 유비를 제외하면 오군의 진격을 잠시 늦추다 썰리는 역할. 추격하는 육손 쪽 군세는 아군보다야 훨씬 많지만 아직 초반이라 어려울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조운, 위연, 마대 등 아군 엘리트들의 좋은 밥이 되어준다. 우군으로 튀어나오는 관흥, 장포의 일기토 이벤트까지 있기 때문에 난이도는 낮다. 다만 장포 쪽 일기토는 장포가 궁기병이기 때문에 운이 좀 따라야 볼 수 있다.

PS/SS/GBA판에서는 2회차에서 프롤로그를 건너뛰지 않고 진행하여 방통을 생존시키고, 방통이 관우를 구출하는 데 성공하면 이릉대전을 진행하지 않는다.


6.4. 삼국지 시리즈[편집]


삼국지 10에서 PK 추가 시나리오인 이릉전투를 시작하면 일어나게 되며, 촉이나 오의 장수로 게임을 플레이하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 촉군의 경우, 제갈량, 조운을 선택할 경우 자동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게 되며, 장비로 시작하는 경우엔 장비가 죽지 않아 이벤트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그 외의 경우는 대개 전투 참가여부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릉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장비는 암살당해 죽는다.

  • 촉의 입장에서
유비가 성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이릉에서 맞서는데, 사마가의 만족병이 원군으로 등장한다.[88] 아군무장은 관흥, 장포, 황충, 통솔력 높은 아군 장수[89]으로 편성되며 이벤트가 일어나기 전에 착실히 군사를 늘리고 훈련을 완료했다면 이릉전투에서 이길 수도 있다.[90] 초기 배치된 해상의 아군을 모두 육상으로 빼내고[91], 육손 하나를 일점사하여 이기면 황충과 유비의 사망 플래그가 분쇄되며 강릉과 형남 4군 전체가 촉의 영토로 바뀐다.[92] 플레이어가 유비를 선택하지 않은 경우, 이릉전투에서 패배 후 황충은 전사하고 유비는 백제성(영안)에 틀어박히고 곧 사망하는 등 역사대로 이벤트가 흘러간다.

  • 오의 입장에서
게임 개시 후 한 달쯤 되고 건업으로 가면 이벤트가 발생한다. 육손이 도독이 되어 강릉태수가 된다.[93] 강릉으로 입성하면 곧바로 이벤트가 진행되어 전투가 벌어진다. 어차피 유비군은 사기도 떨어지고 병력도 줄어든 탓에 전투를 자동으로 맡겨도 이긴다.[94] 승리 시 이벤트 무비가 발생하여 육손은 어복포에 갇혀 위기에 빠지지만 황승언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온다. 이후엔 역사대로 이벤트가 진행된다. 유비가 죽고 유선 즉위 후에 건업으로 가면 촉오동맹을 맺는다.

참고로 전투 결과에 상관없이 황권은 촉에 남게 된다.

삼국지 11에서는 PK에서 추가된 결전제패의 2티어 미션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오나라 시점에서 유비의 군대를 막는 것이 목표이며, 유비군은 황충을 선두로 관흥, 장포, 사마가, 관색, 부동, 장익, 유비, 요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나라 군대는 주연, 손환, 이이 단 세명인 빈약한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당연하지만 유비군을 정면 승부로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95] 화구와 궁노 수리를 통해 시간을 벌면 이후 한당, 능통, 주태, 감녕으로 구성된 1차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러나 강진항을 거쳐서 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므로 왔다고 방심하지 말고 똑같이 시간을 끄는 식으로 기다릴 것. 이후 육손의 2차 지원군이 도착하면 육손의 부대가 적을 공격할 때 화공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 때부터는 이동 범위 제한이 없는 유비 정도만 주의하면 큰 문제 없이 클리어 가능.

주의할 점이라면 질주를 가진 관색과는 최대한 교전을 피하고 지력이 높은 육손 등으로 계략을 걸어 무력화시키는 식으로 처리하고, 감녕과 사마가가 인접하면 일기토 이벤트가 나오는데 감녕이 부상상태라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안정적인 클리어를 원한다면 최대한 피하도록 하자. 만약 감녕이 패배하면 그대로 전사하고, 이후 주태와 인접할 시 주태가 복수전을 위해 사마가와 일기토를 벌인다.


6.5. 진삼국무쌍 시리즈[편집]


관우의 죽음을 보고 받고 분노한 유비가 다른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촉 세력 시나리오에서는 관우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관우의 복수를 위한 중요 전투중 하나이고, 오 세력 시나리오에서는 육손을 띄워줄 수 있는 최고의 전투이기 때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투가 끝나면 보통 촉은 관우의 복수는 했지만 관우의 빈자리는 채울 수 없다는 식으로 끝나고, 오는 촉을 털어버렸으니 이제 조조만 털어버리면 된다는 식으로 마무리된다.[96]

진삼국무쌍 2에서는 촉군 입장은 진삼국무쌍 2 최고 난이도 전투로, 후대 시나리오인 오장원, 가정은 따위로 보일 정도. 실제와는 달리 전투를 시작한 시점부터 왕창 불리한 상태로 아군고전 메시지가 계속 뜨면서 아군 부대가 족족 패퇴해 나가며, 만약 주연의 화계를 저지하지 못했다면 본진을 제외한 맵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어있는 광경을 어렵잖게 보게 될 것이다.[97] 더구나 적 본진에는 궁병이 꾸준히 증원되어서 총대장 암살도 버겁다. 정말 플레이어가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녀야 하는 시나리오. 더 심각한건 고난이도에선 화계 저지를 하면 안된다. 아군 전군이 5분 내로 쓸려나가 화계를 저지해도 아군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고,[98] 화계를 저지할 경우 유비가 석병팔진을 넘어 퇴각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사실상 혼자 맵 중앙의 유비를 지켜가며 적을 다 때려잡아야 하는 진삼국무쌍 2 최악의 상황이 나온다. 오군 맵도 상황은 나빠서 미칠 듯한 촉군의 맹공에 아군 부대가 털려나가는 건 비슷하지만 그래도 촉 입장보다 밀리는게 느리기도 하고, 주연만 원호해서 화계 위치까지 데려다주면 화계로 아군 사기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촉군보단 상황이 좀 낫다. 그런데 관우전을 한번 하고나면 이후에 마초 대신 관우가 아군 출전무장이 된다. 게다가 남만전투전 동영상엔 떡하니 장비가 있다… 누구의 복수를 위한 이릉전투인가?

이릉전 석병팔진 이벤트

진삼국무쌍 3에서의 촉군 맵은 반대로 매우 쉬운데, 육손의 화공이벤트가 일어나도 아군이 크게 열세가 되지 않으며 유비는 순식간에 본진으로 물러나 죽을 일도 없고 제갈량이 원군으로 등장하며 배로 적 본진 뒷쪽으로 다리를 놓아 기습할 수 있게 되므로 오히려 전황이 유리해진다(…). 그런데 만약 플레이어가 오군의 화계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 말 그대로 화계 방지되고 화계가 발생했을 때 튀어나오는 적의 원군이 사기 수치도 별8개의 최대치 상태로 나와버리는 바람에 화계 방지로 인해서 퇴각하지 않는, 초기 위치에 있는 총대장(유비)이 위험해진다. 무쌍시리즈 전체를 통틀어도 2, 3의 이릉전투만이 플레이어가 개입해서 막아내면 손해보는 이벤트다. 특이하게도 전투 순서 자체가 뒤섞이다보니까 관우와 장비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이릉전투를 하는지라 3편에서의 이릉전은 복수전이 아닌 1편처럼 그냥 한번 제대로 촉과 오가 전력전 해보자는 개요로 펼쳐진다.

진삼국무쌍 4에서는 육손이 계곡 사이에 다리를 설치한 뒤 기습적으로 주연과 호위의 감녕, 능통을 보내서 화공을 시도한다. 그런데 주연이 전혀 주위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계 장소로 일직선으로 달려가는데다가 감녕, 능통은 안 그래도 날쌘 놈들이 강화된 채로 방해하므로 화계를 막기가 무척 힘들다. 화계 이벤트를 굳이 막지 않아도 크게 불리해지지는 않으므로 그냥 무시하고 감녕과 능통만 잡는 것도 한 방책. 주변에서 화살을 구해와 (100개 정도) 가교차 작동 전에 능통 부대와 친위대가 가교차 근처에 오는 순간 쏴서 잡는 방법도 있다. 능통만 잡고나면 감녕, 주연만 막으면 되니 쉬워진다. 화계 발동 후 3분 뒤에 촉에서는 제갈량과 마속이 원군으로 합류한다.

화계 이벤트가 일어났다면 아군 무장들의 사기가 꺾여 금방 전멸하고, 육손은 전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고 본진에 있던 유비는 제갈량이 준비해놓은 석병팔진을 통해 뒷쪽에 있는 장소로 후퇴한다. 촉 세력 캐릭터라면 감녕과 능통만 주의한다면 큰 무리 없이 끝낼 수 있는 전투지만, 오 세력 캐릭터라면 꼬여있는 석병팔진에 들어간 순간 맵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헤매는 경우가 있어 좀 번거로울 수 있다. 다만 CPU들은 길을 헤매지 않기 때문에 CPU를 잘 따라가면 헤맬 일 없이 도착 할 수 있다. 이 화계 이벤트가 바로 진행되고 나면 촉/오 두 나라의 BGM이 바로 바뀐다.

진삼국무쌍 5에서도 초반 공방 이후 육손의 지시로 화계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번 작은 전작보다 길이 더 심하게 꼬여있다. 입구가 4개에 지형의 고저차도 적용되어 있어서 처음 접하게 되면 헤맬 수 밖에 없다. 이번 작에서도 CPU들이 석병팔진에서 헤매는 일은 없지만, 부활해서 밖으로 나오는 무장과 가는 길에 만나 싸우는 일이 있기 때문에 CPU만 따라 가면 진행이 더디게 되니 길을 외우는 편이 좋다.

5편부터 촉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화계가 벌어지면서 동쪽 아군의 사기가 대폭 하락하고 데미지를 입는데, 때마침 감녕을 위시한 오군 기습부대까지 출몰하여 이들을 공격하므로 기습부대를 격퇴시킨 후, 석병팔진을 노리는 남쪽의 육손[99] 부대 및 다른 부대들을 잡고, 서쪽에서 공격해오는 능통 일행을 격파하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은 남은 적 부대들을 소탕하면 되는 것.

오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화계 이벤트가 벌어진 뒤, 유비 역시 후퇴하기 시작하고 제갈량은 석병팔진을 발동 시키는데 석병팔진 중앙에 체력 회복 장치가 있어서 무장을 잡았더라도 그 무장이 중앙에서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온다. 장치를 전부 파괴[100]하기 전까지 부활이 계속 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있다가는 계속 부활하는 무장들 때문에 거점이 털리고 사기가 떨어진다. 석병팔진을 와해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

몇 몇 스토리 모드 존재 캐릭터의 이릉전투 전개 개요가 다른데, 주유에 경우 적벽에서 조조를 아예 불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위가 망하고 유비랑 손책만 남았으니 이참에 그냥 결판내자는 1편과 3편과 비슷한 개념이며, 손상향은 유비를 따라 종군하여 자기 손으로 고향 사람들을 작살내서 촉에 흡수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5편의 손상향은 인게임 성능이 논외급 사기 캐릭터인지라 혼자 오나라를 갈아버리는 모습이 가히 압권이다.

진삼국무쌍 6에서도 화계 이벤트가 있다. 촉 스토리 모드로 진행하면 두 파트로 나눠지는데, 화계 전에는 조운으로 유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유비를 무사히 후퇴시키는 것이고, 이후에는 제갈량으로 잔여 아군의 후퇴를 돕는 것이다. 조운으로 유비를 발견하고 전편을 클리어하면 유비는 도망가자는 조운의 진언을 쌩까고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는데, 조운이 어쩔 수 없이 유비의 명치를 쳐서(…) 기절시키고 병사들을 시켜서 강제로 퇴각하게 만드는 당황스러운 이벤트 무비를 감상할 수 있다.[101]

오 스토리 모드로 진행하면 전반 후반 모두 육손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역사상으로 오군이 대승리하는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촉 스토리 모드에 비교해서 오 스토리 모드의 이릉전투가 훨씬 어렵다(…). 화계 성공이 목표인 전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후편에서는 육손으로 석병팔진을 뚫고 유비를 잡아야 하는데, 석병팔진에 노포 함정과 환영병이 세팅되어 있는 데다가 중간쯤 가면 본작에서 가장 짜증나는(…) 대규모의 연노를 동반한 월영이 진군을 가로막는다.

거기다가 월영을 상대하다 보면 석병팔진에 쓸데없이 진입한 손권이 석병팔진에 갇혀서 마량과 환영병들에게 개털려 SOS를 보내는데 한시라도 지체했다간 바로 게임오버. 문제는 2처럼 화살공격이 매우 치명적인 6에서 노포 함정 앞에 있는 마량을 그대로 상대했다가는 손권보다 플레이어가 먼저 눕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권이 SOS 신호를 보내면 석병팔진의 동쪽에 있는 마속을 먼저 잡아서 석병팔진을 정지시킨 이후에 또 뛰어가서 마량을 잡고 손권을 구출해야 한다.[102]

석병팔진을 정지시키고 나면 백제성 쪽으로 전진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조운을 비롯한 대규모 촉군이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를 가로막는다. 역시 여기도 짜증나는 궁병이 쫙 깔려 있다. 천신만고 끝에 유비 앞에 가면 유비는 버프를 쓴다(…). 그리고 유비마저 잡으면 전투는 끝나고, 이후 이벤트에서 손상향을 생각하여 유비를 살려 주는 손권의 이벤트 무비를 감상할 수 있다. 여러모로 진삼 6의 손권은 대인배.

진삼국무쌍 7에서는 촉과 오 모두 사실모드일 경우 나온다. 오는 전작들과 실제 역사에서처럼 화공을 통해 촉을 격파. 촉은 장포가 플레이어 캐릭터로서 사실모드에 첫 등장하는 데뷔전.[103] 번성 전투에 첫 등장한 관흥도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로 나온다. 전작에서 관색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안달났다면 이번에는 관흥이 그것을 이어간다. 장포는 실전경험이 부족한 관흥을 걱정하다가 발끈한 관흥과 한바탕 겨룬다. 그 모습을 본 조운이 대선배로서 둘에게 한마디 해준 뒤 본격적으로 이릉 전투 시작. 전투가 시작하면 유비는 이성을 잃고 닥돌하며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조운은 관흥과 장포는 남쪽으로 진군하라 해놓고 유비 수색에 돌입. 수색 중 한당이 갑툭튀해서 방화를 시도하고, 한편 동쪽 거점에서 유비가 육손과 맞붙고 있는 것이 나온다. 실력이 된다면 재빨리 한당을 잡고 유비에게 가서 화계를 막고 이길 수 있지만, 한당을 막으려다 총대장 패배가 뜰 수 있으니 웬만하면 그냥 유비를 구하자. 이후 한당이 불지르면 아군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짐과 동시에 오군이 돌격해오고, 아군 무장들이 속속히 패주해간다. 유비를 호위하며 맵 서쪽 끝까지 가면 전투 종료. 전투가 끝난 뒤 전작처럼 유비는 뒷일을 부탁하며 병들어 사망. 화계를 막아 손권을 패배시키거나 유비가 행방불명 된 상태에서 손권을 패배시켜도 결과는 같다.

한편 오 쪽은 그냥 평범하게 버티다 불지르고 석병팔진 뚫고 유비를 잡으면 끝난다.

진삼국무쌍 7 맹장전에서도 이름은 달라도 이릉대전을 무대로 한 전투가 촉과 오 시나리오에 등장. 오는 주연이 클론무장에서 정식무장으로 승격되면서 주연이 활약하는 '이릉 추격전'이 생겼다. 본가의 이릉대전과 딱히 다를 건 없다. 단지 정식무장이 된 주연이 한당 대신 불지른다는 것 정도.

한편 촉은 법정이 이릉대전까지 살아서 오의 화공을 역으로 노린 복병 책략으로 오를 이기는 '이릉 복수전'. 심지어 전투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략이 더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법정의 말이 일품.

시작하면 병력을 분산시켜놓은 것을 본 법정이 한탄하며 시작. 왠지는 모르지만(…) 오군이 점령하고 있는 석병팔진을 뚫으면 육손이 화계를 시도하려한다. 이때 오의 본진에서 Y자 모양에 길에서 공작병이 둘로 갈라지는데, 육손이 화계대사를 말하면 플레이어는 하던 짓을 그만두고 재빨리 말타고 달려 Y자 길에 가서 공작병이 둘로 갈라지기 전에 격파해야 한다. 1인 플레이라면 공작병이 갈라질 경우 화계를 막는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화계를 막으면 법정의 계략에 따라 맵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장포, 관은병과 조운, 관흥을 매복시킨다. 문제는 여기인데, 장포와 관은병은 알아서 잘 가는데 조운과 관흥은 적병 하나하나 신경써가며(…) 가서 매복시키기 참 힘들다. 이 맵에서 법정,마대 등의 비장무기를 얻을 수 있는데, 조건이 제한시간 내에 법정의 계략 발동인지라 조운과 관흥이 안 가서 실패하면 속 터질 지경. 무쌍난무를 쓰던 각성난무를 쓰던 최대한 빨리 남서쪽을 쓸어버리자. 매복에 성공했으면 주연과 육손이 한번 더 화계를 시도하려하는데, 이때 둘 중 한 명을 촉 진영까지 유인시켜 불지르게 하면 된다.[104] 둘 중 한명이 불을 지르면 촉병이 국어책 읽기로(…) 유비님이 돌아가셨다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들은 오는 닥돌. 이후 매복시켰던 병력과 후퇴시켰던 병력이 힘을 합쳐 닥돌해오는 오군을 역으로 털어주면 마무리.

진삼국무쌍 8은 6편처럼 결과가 정해져있게 끝난다. 유비는 자기 스토리에서는 살아있는 상태로 엔딩이 나오나 이릉전 이후까지 스토리가 있는 다른 캐릭터들 루트에서는 공통으로 사망 이벤트가 뜬다.

촉군 시나리오는 이릉 진격과 백제성 도피행이라는 두 개의 편으로 구성되며, 전자의 총대장은 이릉에 위치한 손권, 후자의 총대장은 석병팔진 출구에 자리한 육손이다. 오군 시나리오는 이릉 요격과 백제성 도피행으로 구성되며, 두 편 모두 유비가 총대장이다. 양측 세력 공통 애니메이션으로 육손의 지시에 의한 주연의 화계가 그려지며, 촉군의 경우 시나리오 개시 직전 장비의 죽음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시리즈 최초로 삽입되었다.

이릉대전은 6편을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전용 BGM이 배정되며 이는 적벽대전, 관도대전, 호로관 전투, 오장원 전투, 합비 전투, 황건의 난 등과 함께 공통적이다. 특히 이릉대전 BGM들은 명곡들이 많고,[105] 시리즈마다 음악은 달라도 의형제들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유비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이릉대전 전후 직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촉의 비극에 대한 복선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6.6. 삼국(드라마)[편집]


전 95편 가운데 78~81편이 이릉대전에 할애되었다.

유비가 관흥, 장포, 황충을 장군으로, 마량을 군사로 대동한 상황.
이에 손권이 손환에게 10만군을 주고 유비군을 이길 필요도 없고 2달만 버티라고 하지만, 고작 2시진 만에 성을 내주며 유비는 형주로 들어가게 된다. 유비가 이 곳은 이제 촉의 땅이니 절대 약탈을 하지말고, 관료들을 보내서 정보를 수집하자 손권이 " 이 자식이 동생들의 복수는 핑계고 동오를 정복해서 천하를 얻으려고 한다! " 면서 분개한다

손휴가 패퇴하자 손권은 한당, 정보와 같은 노장에게 10만군을 다시 내주어 유비군을 영격하게 한다. 이 소식을 듣자 육손이 동오의 젊은이를 싹다 사지에 내몰 생각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가택 연금 당한다.

유비가 한당과 정보는 백전노장이라며 손휴와 달리 쉽지 않을 거라고 하자 황충이 유인 후 매복으로 역습을 제안하지만, 여기 까지 쉽게 올만한 녀석들이 아니라고 하자 황충이 대어를 낚으려면 미끼가 좋아야 한다며 자신이 유인 부대로 자청하지만 유비는 황충의 나이가 많아서 거절하려 한다. 이에 황충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은 예순이 넘어서야 겨우 폐하같은 명군을 만났으며, 전쟁에 나설 수 없다면 장수로서의 삶이 무슨 소용이냐며 설득하자 이에 유비가 허락한다.

황충이 군을 이끌고 출정하자 과연 주태가 오호장군은 뭔 오호장군이냐며 투지가 불타는 상황. 그래도 한당은 냉철한 판단력을 보이면서 상황을 지켜본다. 황충이 몇 번이나 정보군에 맞섰으나 전부 패배하자, 한당도 군을 이끌고 황충을 추격하러 나선다. 황충이 좁은 골짜기로 들어가자 한당은 이를 의심하면서 추격을 멈추고 화살만 쏘도록 시키는데, 황충이 과연 한당은 뱀같은 장수로다 라면서 역돌격을 지시한다.

당연히 좁은 골짜기에서 튀어나오는 황충군은 이미 진형을 짜고 화살만 쏴대는 한당군에게 학살을 당하고 황충도 몇 발이나 화살에 맞으면서 후퇴하자 한당도 그제야 의심을 풀고 진격 명령을 내리는데, 매복해 있던 촉군이 한당군을 박살낸다. 한당과 주태가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뽑은채 몸을 던지려는 찰나, 정보가 예비대를 이끌고 그들을 구원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정보는 사마가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육손의 판단이 맞았다고 여긴 손권은 육손에게 대도독의 직책을 내린다. 육손은 몇 달 후 하늘에서 30만 대군이 떨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산지마다 영채를 세워서 지연전을 펼친다. 무려 3번이나 후퇴하고 4번째 방어선에 도달하자 오의 장수들의 불만이 상당한 상황. 이에 장수들이 우린 언제까지 후퇴해야 하느냐 더이상 도망가기 싫다며 육손에게 말하자 육손도 이 곳이 돌파당하면 이젠 평지밖에 없으니 더이상 후퇴는 없으며 이곳에서 생사를 함께 하자며 장수들을 다독인다.

과연 연전연승하던 유비군이 네 번째 방어선에서 치열한 저항을 맞아 한 발자국도 진군을 못하는 상황. 이에 마량이 더위와 풍토가 다른데다 물도 부족해서 병사들이 지쳤으니 몇 달간 후퇴하고 가을에 다시 진격하는게 어떻냐고 제안하자 유비는 오나라는 더 지쳤을 것이라며 받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장포또한 유비가 병력을 더 주면 뚫어보이겠냐고 하자 열심히 하겠다고 대답을 회피하는 상황. 유비는 어쩔수 없이 후퇴를 받아들이고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숲에 진을 친다. 마량이 적과 아군의 진의 상세도를 그려 승상에게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유비가 짐은 병법을 모른다는 말이냐면서 약간 불쾌감을 들어낸다. 하지만 마량이 의견은 모일 수록 좋은 것이고 폐하같은 성군은 의견을 많이 모아야 한다고 하니 그대로 따른다.

그림을 보자마자 제갈량이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 폐하께 이딴걸 간언한게 누구냐며 물으면서, 간첩이거나 간신이니 반드시 목을 잘라야 한다고 하자 폐하가 직접 생각한 진형이라고 하니 말을 잠깐 그만둔다. 그러다가 빨리 이릉으로 달려가서 폐하의 진영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며, 만약 이미 화공으로 대패했다면 백제성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한다.

육손이 유비가 숲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자 지금 껏 받은 수모를 모두 돌려주겠다는 표정으로 이제 촉은 끝났구나 하면서 기뻐한다. 이에 장수들을 모아 내가 일전에 하늘에서 30만 대군이 내려올 거라 했는데 모두 믿지 않았는데, 오늘 드디어 30만 대군이 내려왔다고 선언하면서, 촉군이 병과 더위로 나자빠졌는데 이게 30만 대군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말하자 장수들이 70만 군세가 아니라 70만 병자라면서 촉군을 비웃는다. 육손은 산과 숲을 보면서 저게 아궁이 속에 있는 장작더미 같지 않냐면서 화공으로 유비군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라고 선포한다.

결국 제갈량이 보낸 마속과 조운보다 육손의 화공이 유비의 진에 먼저 도착했고, 결국 유비는 대패하고 고작 수 백명과 휘하 장수들만 대동한 초라한 꼴로 백제성으로 피신한다.

이후 종반인 93편에서 사마의를 끝장내기 위해 상방곡에 함정을 파고 불을 지르게 한 제갈공명이 사마의의 최후가 가까워지는 걸 바라보며 '잘 타는군. 이릉 숲의 불보다 잘타' 라는 이릉 현장에 없었는데 어떻게 아시죠? 독백을 하며 이릉대전을 언급한다.#


6.7. 엽기 삼국지[편집]



촉한정통론을 의식했는지,이 전투를 아예 없는일로 하고,스페셜 에피소드 수엄칠군편으로 땜빵하여 조조의 대홍수로 수장시켰다.자세한건,엽기 삼국지 스페셜 에피소드 참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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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중국 후베이성 이창 시 이링 구(이릉), 샤오팅 구(효정) 충칭 시 우산 구, 펑제 구[2] 현재는 이 범위 내에 싼샤 댐이 있다.[3] 이하에 적힌 수치는 피해를 포함하여 각주로 별도로 명시하지 않을 경우 모두 검증되지 않은 사료상 수치이다. 동양사의 수치적 재구성이 어려움을 감안하여 읽어야 하며, 이는 '삼국지' 내 다른 모든 전투의 수치값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4] 문제기 주석인 위서가 출처. 촉군이 오의 자귀를 점령한 이후, 형주의 입구인 자귀를 넘어 형주평야로 직접 나간 유비의 병력이 40,000명에 기마가 2,000 - 3,000필로 언급된다. 이 수치가 본대와 별도로 이릉을 장악한 수군을 포함하는지는 불명확하다. '자귀에서 나온' 병력이므로 후방은 포함하지 않은 값으로 보인다.[5] 유엽전 주석 부자가 출처. 촉군 80,000명이 죽었다고 적었다. 육손군은 자귀를 넘어 백제까지 유비를 추격하였으므로, 자귀에서 나오지 않은 후방 병력을 포함한 값이 된다.[6] 중국군사사의 추론. 중국군에서 발행한 현대 서적이다.[7] 오서 오주전[8] 오서 오주전의 수치에 무릉만 안정화를 위해 파병된 보즐의 10,000명을 포함시킬 경우. 이 군은 유비와의 교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9] 오주전, 육손전[10] 유엽전 주석 부자[11] 삼국지 오서 오주전[12] 고대도 아니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인인 몽테뉴도 이런 말을 했다: "황제들의 영혼들과 구두 수선공들의 영혼들은 같은 거푸집에서 만들어진다. ... 우리가 이웃과 말다툼을 벌이는 바로 그 이유가 군주들 사이에서 전쟁을 일으킨다."[13] 촉서 이회전.[14] 촉서 이엄전. 오일의 형주자사 직함이 확인됨.[15] 촉서 후주전.[16] 오일의 형주자사 직위는 기록의 부족으로 인해 계속 유지되었는지, 혹은 사라졌는지 확실히 단정지을 근거가 없지만, 양국의 외교 흐름상 마찬가지로 229년에 사라졌을 것으로 보인다.[17] 물론 이는 영유권으로 확대될 만한 직위가 상대방에 대한 결례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결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러한 직위를 정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8] 화양국지 유선주지.[19] 이릉대전 때 제갈량의 부재를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1인자가 전투에 나가면 본국의 보급과 내정 등은 믿을 수 있는 2인자에게 맡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한중 공방전 때도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서 내정 및 보급을 담당했었다. 연의의 이미지와 다르게 제갈량 또한 유비의 치세 아래에서는 같은 역할을 하였다. 직접 군사를 이끌게 되는건 후임 황제이자 당시 어린 황제이던 유선 때부터였다. 심지어 유비는 제갈량에게 승상과 녹상서사의 직책을 맡겼는데, 이는 사실상 '(나는 원정 갈 테니 다른 건) 너 알아서 해라'는 의미에 가깝다. 제갈량을 얻기 전의 유비는 보통 관우, 장비에게 본진을 맡겼고, 관우도 유비처럼 미방에게 본진을 맡겼다.[20] 9개의 주를 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천자의 직책이랑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21] 오주전[22] 오서 오주전, 건강실록[23] 촉서 선주전[24] 촉서 선주전[25] 육손전, 선주전.[26] 손환을 포위한 이도와 강을 건너고 마주보는 거점이다. 자귀로부터 물길을 기준으로 약 40km 거리.[27] 황권전[28] 육손전[29] 이 사건의 정확한 시열은 불분명하다.[30] 파군에서부터 당대의 물길을 따라 이은 기준. 남군까지 이으면 약 620km가 된다.[31] 선주전[32] 오서 오주전, 오서 육손전, 촉서 선주전[33] 위서 문제기[34] 700리가 말이 700리지 한나라 시대 700리를 한국 영토를 기준으로 하면 직선거리로는 속초에서 울산까지고 해안을 따라 가는 식으로 하면 속초에서 포항 남부까지다. 휴전선이 아니라 38선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사실상 남한의 남쪽에서 북쪽까지를 진채로 만들었다는 말이다.[35] 오서 육손전[36] 쓰촨 분지 내 촉의 가장 가까운 거점인 파군으로부터 물길로 재면 이도까지의 보급거리는 약 400여 km에 달한다.[37] 오서 육손전, 촉서 선주전[38] 오서 반장전[39] 오서 손환전, 오서 육손전, 촉서 황권전[40] 오서 서성전[41] 오서 육손전[42] 계한보신찬[43] 오서 육손전[44] 연의에서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촉한의 군세가 지쳤다고는 하는데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지만 당시 중국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한랭건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45] 삼국지 오서 육손전, 삼국지 오서 오주전, 건강실록[46] 후퇴할 때 추격하는 적군을 막기 위하여 남는 부대.[47] 계한보신찬[48] 촉서 상총전[49] 계한보신찬[50]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다.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상 국역 자치통감에 달려 있는 주석.[51] 오서 손환전, 촉서 선주전[52] 촉서 선주전, 화양국지 유선주지[53] 촉서 선주전[54]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55] 오서 육손전[56] 촉서 황권전. 위서 문제기[57] 정확한 시점은 파악 불가.[58] 기전체 서술은 해당 기전의 중심인물이 거둔 사소한 실패는 가급적 누락하고 공적에 집중하는 특징을 가지는데, 오서에서는 형주에서 상당한 명사였던 마량을 잡은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의심할 근거가 된다. 하지만 별도의 사서가 출현하기 전까지 이러한 의심을 확정지을 방법은 없다.[59] 촉서 선주전[60] 오서 오주전, 건강실록[61] 이 기록의 출처는 유비군을 관찰 중이었던 손권이 조비에게 직접 보낸 서신으로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기록이다.[62] 엄밀히는 손환을 포위하고 있던 이도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이도와 효정이 서로 강을 사이에 끼고 마주보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오군은 이도의 촉군 공격을 건너뛰어 효정을 타격할 수 있었다. 이도의 촉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한 이후로 별다른 기록이 없는데, 관우의 사례처럼 그대로 와해되었을 수도 있고, 퇴각에 성공하여 유비 본대에 합류하였다면 결국 자귀에서 다시 패퇴당했다는 결론이 된다.[63] 당시 위연은 한중태수였다. 한중은 촉한의 수도 성도 다음의 대도시이자 대위전선의 노른자위다. 이런 위연을 뜬금없이 오나라 침공에 내세울 순 없다.[64] 입촉부터 공을 세우기 시작했고 주된 활약도 북벌 시기이므로 2세대에 가깝다.[65] 처음 받은 군이 광한군을 아우르는 군대다.[66] 원문: One must admire the diplomatic and military energy and skill which Sun Quan and Lu Xun had shown: in a little more than a year Sun Quan had acquired rank second only to an emperor, had defeated his immediate enemy,declared himself as an independent ruler, and then restored the defensive alliance which at least confirmed his former enemy's neutrality and could yet be developed further. In many respects he was now back on the path of policy which his former adviser Lu Su had recommended. In the intervening period, however, he had seized all of Jing province, humiliated Liu Bei, and out-manoeuvred both Cao Cao and Cao Pi. Honesty and good faith had been in short supply, but it was nonetheless a brilliant record against equally tough and unscrupulous opposition.[67] Rafe de crespigny,Generals of the South[68] 정확히는 남형주(형남) 한정. 북형주(형북)는 여전히 위의 세력권이었고 이와 관련한 논란은 형주 공방전/평가 문서에 나와 있다.[69] 오서 오주전.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합비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지만 널리 퍼진 오해와는 달리 형주 방면으로도 수 차례의 공세를 펼쳤다.[70] Rafe de crespigny, Generals of the South.[71] 가와카쓰 요시오,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72] Rafe de crespigny, Generals of the South.[73] 주를 나눠서 계산할 경우, 형주의 현 증가율은 반올림해 88%이며 교주의 경우에는 증가율이 116%에 달한다. 양주는 둘 사이이다. 익주와 비교할 경우 익주 전체의 현 성장율은 20%에 불과하다. 제갈량의 남중정벌 당시 공략대상이 된 4군 지역의 현 성장율은 18%로서 익주 평균보다 성장율이 낮다. 즉, 이민족이 다수인 구역이라는 이유만으로 별도의 국가적 정책 없이도 현이 자연스럽게 증가한다고 볼 근거는 없다.[74] 자는 백여. 공여라는 자를 쓰는, 고구려를 침략한 왕기와는 동명이인[75] 실제로는 당시 촉한 중앙정부가 장악한 인구가 94만으로 70만에서 75만은 소설적 허구다. 만약 정말 이대로 끌고 나갔으면 북벌이고 뭐고 촉은 망한다. 이정도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린이, 노인, 거기다 여자들까지 종군시킨 셈이다.[76] 대신 마초는 실제 역사에서는 이릉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사망하지만 연의에서는 수명을 조금 더 늘렸다.[77] 마량은 지도를 그려서 승상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고 진언했고, 유비는 나도 전장에서 수십년을 누볐는데 이런 일까지 승상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고 자만심을 내비쳤지만 결국 마량의 고집으로 실행하게 된다.[78] 육손은 연의에서 나타나는 이미지 때문에 청년 장수로 각인되어 있지만 이릉대전 당시 40줄이 가까운 나이로 이미 장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전에 손권 수하에 들어 온 것으로 나와 있는 정봉은 실제로는 손권 사후에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인물이다.[79] 삼국지연의가 다루는 시대는 서기 184년부터 280년까지로,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제갈량의 사망(234년)은 반환점에 해당되는데 120회본인 모종강본 기준으로 이 부분은 105회까지다. 나머지 절반의 세월을 15회 동안에 몰아넣은 것. 결국에는 한 번에 10년을 건너뛰기까지 할 정도다. 그런데 이문열은 자신의 평역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사망 시기를 232년에 서진의 통일을 282년이라고 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이는 2020년에 판권이 민음사에서 알에이치코리아로 넘어간 뒤에도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80]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후반부 장수에게 능력치가 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능력을 가진 장수가 있었다 한들 활약할 기회가 드물었으니(…) 그로 인해 갈수록 후반기 비중을 줄이면서 10PK까지 간간이 등장했던 제갈량 사후 시나리오도 11부터는 아예 등장하지 않다가 13PK에서 겨우 부활했다.[81] 그나마 나관중이 연의에서 강유의 북벌 횟수를 아홉번으로 늘렸는데도 한 권 반 분량 정도다. 이건 흥세 전투 같은 사건을 안 넣은 나관중에게도 책임이 있다만(…)[82] 길게 보자면 서진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겪고 전조(한나라)에게 멸망하는 316년까지지만 이때는 삼국지가 아니고 사실상 서진 시대다. 그리고 서진이 전조에게 멸망한 직후에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했다.[83] 만약 방통이 죽었다면 서릉, 이릉에서 데리고 올 수 있는 주술사가 아예 없어진다.[84] 개중에는 무력이 잡병 이하로 허접한 놈들도 껴 있다. 그래도 영걸검 보물빨로 생각보다는 아프지만.[85] 와구관 전투에서는 뇌동과 장합이 붙어서 뇌동이 패배, 한수 전투에서는 오란 vs. 조창 일기토에서 오란이 패배하지만 연의와는 달리 둘 다 퇴각만 하고 사망처리는 되지 않는다.[86] 참고로 이 일기토가 다른 일기토와는 다른 점이 있는데, 일반적인 일기토의 경우에는 일기토를 하는 두 장수가 정면에서 접촉 혹은 공격한 경우에 시작하지만(즉, 대각선 방향에서의 공격으로는 일기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기토는 유일하게 사마가가 주태를 공격했을 시에 일기토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태가 적군의 턴에 사마가를 공격했을 시에 일기토가 시작된다. 즉, 아군의 턴에는 사마가가 주태를 정면에서 공격하더라도 일기토가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일기토를 보려는 유저들은 이것을 염두에 둘 것.[87] 죽은 척 했었던 조조가 촉과 오가 싸우다가 틈을 타 천하통일을 하려고 했던 계획이 있었다. 사실 3장의 맥 전투 이후의 조조의 유언 이벤트에서 이 내용의 복선이 있었다.[88] 만족병 2부대를 끌고오는데 부대가 꼴랑 2천 명 정도 밖에 안 돼서 별 도움은 안 된다.[89] 굳이 황권이 필수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마초나 장익처럼 통솔력 높은 장수가 대신 참전할 수 있다.[90] 플레이어가 유비라면 더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각 성의 병력을 빼내 성도의 부대를 10부대로 만들고, 이릉에 진이나 석진 건설 후 곧바로 이벤트를 진행하면 아군은 8만에 가깝고 오군은 3만도 안 되는 탓에 자동으로 전투를 맡겨도 그냥 이긴다.[91] 오군의 투함은 그냥 상대할 수 없다. 더군다나 오군의 장수들은 제독 특기를 갖고 있어 물위에서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안 그래도 아군은 사기가 낮아 순서가 늦는데 주가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92] 이때 유비의 소속도시가 강릉으로 변하고, 강주는 장포가 태수가 되고, 성도는 제갈량이 태수가 된다. 여담으로 마초를 자동에서 해임해서 성도로 부임시켰을 경우 마초가 성도 태수가 된다.(아무래도 공적이 우선 되는 듯하다.)[93] 영지는 강릉과 강하, 형주 4군이다.[94] 만약 전투에서 졌을시에는 강릉과 형주 4군을 빼앗기고 육손은 강하와 시상의 도시를 갖게 된다.[95] 당장 선두인 황충만 해도 궁신 특기 때문에 아군에게 스플뎀 없이 광역 난사를 쏟아부을 수 있으며, 관색은 질주 특기 때문에 한번 물리면 그대로 고립된다.[96] 크로스오버 외전인 무쌍 오로치는 마왕재림에서 동명의 전투가 나오지만 이름과 맵만 이릉전투지 오로치와 위의 전력전이라서 본가의 이릉전투와는 완전히 별개의 전투가 되었다.[97] 심지어 초급 난이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98] 게임시간 3분만에 유비를 제외한 촉군 전체가 전멸당한 예시가 있을 정도.[99] 특히 육손은 내버려두면 석병팔진에 들어갈 때 석병팔진 조사를 개시하여 효과를 약화시키므로 우선적으로 잡아야 한다.[100] 중앙의 무장상 8개를 전부 파괴해야 한다.[101] 삼국지연의 본작을 비롯하여 연의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이릉전투에서는 유비가 화공을 당한 직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부하들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된다.[102] 보통 이 부분에서 시간이 굉장히 모자란다. 마속을 열심히 잡고 있으면 손권이 마량에게 당하는 경우가 10에 3, 4 정도. 그렇다고 마량부터 잡으러 갔다간 지옥을 맛본다.[103] 가상모드로 가면 동영상에서 성채와 같이 처음 등장하고, 육구 전투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로 첫 등장.[104] 둘 다 격파하면 계책이 물거품이 되어서 텅 빈 플레이어의 머리를 쪼개고 싶다며 화내는 법정을 볼 수 있고 손권은 화계가 실패했지만 승기는 본인들에게 있다며 총공격을 개시한다.[105] 특히 3편의 BGM "Avenging Battle" 이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주의] 본 만화는 허구이니,역사책을 읽으라고 오프닝 끝부분에서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