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나 슬루츠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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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슬루츠카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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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리나 슬루츠카야2.jpg

2006 유럽선수권에서 통산 7번째 금메달 획득 당시
이름
이리나 에두아르도브나 슬루츠카야
Ири́на Эдуа́рдовна Слу́цкая
Irina Eduardovna Slutskaya
국적
[[러시아|

러시아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행정구
]]

출생
1979년 2월 9일 (45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신체
160cm
종목
피겨 스케이팅
은퇴
2006년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경력
2.1. 1992-93 시즌
2.2. 1993-94 시즌
2.3. 1994-95 시즌
2.4. 1995-96 시즌
2.5. 1996-97 시즌
2.6. 1997-98 시즌
2.7. 1998-99 시즌
2.8. 1999-00 시즌
2.9. 2000-01 시즌
2.10. 2001-02 시즌
2.11. 2002-03 시즌
2.12. 2003-04 시즌
2.13. 2004-05 시즌
2.14. 2005-06 시즌
3. 평가
4. 기록
5. ISU 공인 최고점수
6. 수상 기록
7. 기타



1. 개요[편집]


러시아의 前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며, 세계선수권 2회 우승, 유럽선수권 7회 우승, 그랑프리 파이널 4회 우승(3연패)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1992-93 시즌[편집]


1993 주니어 세계선수권[1]에서 8위를 하며 주니어 데뷔를 했다.


2.2. 1993-94 시즌[편집]


시니어 레벨로 네벨혼 트로피에서 우승하고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주니어 레벨에서는 1994 주니어 세계선수권 동메달[2], 러시아 주니어선수권 우승을 하였다.


2.3. 1994-95 시즌[편집]


Goodwill Games(친선경기) 6위, 네벨혼 트로피 우승, 스케이트 아메리카 3위를 하였다.

1994년 11월 21일~27일 간 열린 1995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작년에 이어 동메달을 따면서 유럽선수권에 출전할 기회를 얻었다.

1995 유럽선수권 쇼트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했지만 프리에서 만회하며 3위를 기록했고, 종합 5위로 마쳤다. 이 결과로, 종합 7위에 머무른 러시아 선수권 챔피언 마리아 부티르스카야를 제치고 은메달리스트인 올가 마르코바와 함께 세계선수권에 출전할 자격을 얻었다.

1995 세계선수권에서는 또다시 쇼트에서 넘어졌지만, 프리에서 6개의 트리플을 성공시키며 분전하여 프리 5위, 종합 7위로 마무리했다.


2.4. 1995-96 시즌[편집]


챔피언 시리즈[3] 스케이트 아메리카 3위, 트로피 랄리크 4위를 기록하고 파이널에 진출했다.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이후 1996 유럽선수권에서 러시아 여자 싱글 선수 최초로 우승하였다. 이 대회에서 프리 스케이팅에서 6번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하며 디펜딩 챔피언이자 5회 우승에 빛나는 수리야 보날리를 제쳤다. [4]

또한 부티르스카야와 함께 미셸 콴에게 이번 시즌 유일한 패배를 안겨주면서 빙상 100주년 기념식에서 우승했다.

1996년 2월 말 파리에서 열린 1995-96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5]에서 95 월드 챔피언인 천루(4위)를 제치고 미셸 콴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1996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는 3위를 기록한 후,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프리에서 초반에 넘어진 것을 극복해내며 6번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켰다. 따라서 최종 동메달을 따며 본인의 첫 번째 월드 포디움에 입성하면서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2.5. 1996-97 시즌[편집]


챔피언 시리즈 2차 대회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떠오르는 신예인 타라 리핀스키를 따돌리고 본인의 첫 챔피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시즌을 시작했다. 이어서 4차 나치온스 컵, 6차 컵 오브 러시아에서 모두 우승하며[6] 파이널에 진출했다.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땄고, 1997 유럽선수권에서는 7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하며[7] 우승하면서 2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1996-97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에서는 점프 난조를 보이면서 미국타라 리핀스키미셸 콴에 이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1997 세계선수권 쇼트에서 컴비네이션 점프를 놓치며 6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설상가상, 프리 스케이팅 연습 중 크게 넘어짐으로 인해 허리 부상을 입었다. 프리 프로그램 <오페라의 유령> 에서는 트리플 살코+트리플 룹 컴비네이션을 포함한 6개의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키며, 3명의 심사위원으로부터 1위 표를 받았다.[8] 하지만 구채점제의 특성상 쇼트 순위를 극복해내지 못하고, 최종 4위로 마쳤다.


2.6. 1997-98 시즌[편집]


Goodwill Games(친선경기) 6위, 핀란디아 트로피에서 우승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챔피언 시리즈 나치온스 컵 2위, 컵 오브 러시아에서 우승하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1997-98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에서는 4위, 러시아 선수권에서도 4위를 했다.

이후 1998 유럽선수권에서는 마리아 부티르스카야에 밀려 은메달을 따면서 3연패에는 실패하였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여, 쇼트에서는 예정된 3-2 컴비네이션을 더블 러츠-더블 토룹 처리하는 바람에 5위를 기록했다. 프리에서는 3-3 콤비네이션 점프를 포함한 5번의 트리플 점프를 랜딩하며, 두 명의 심사위원(미국 심판과 헝가리 심판) 3위 표를 받았다. 평소에도 스케이팅이 빨랐는데, 프리 경기 때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바람에 펜스와 충돌할 뻔했다. 이 대회에서 동메달 싸움이 치열했는데, 최종 5위를 기록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열린 1998 세계선수권에서 쇼트에서 넘어졌지만 프리에서는 두 번의 3-3 컴비네이션을 성공시키는 등 분전하여 러시아 여자 싱글 최초은메달을 획득, 정상권 선수로의 입지를 굳혔다.

2.7. 1998-99 시즌[편집]


그랑프리 시리즈 스케이트 캐나다컵 오브 러시아에서 동메달,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을 따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이듬해 1월, 러시아 선수권에서 4위를 하며 유럽선수권과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1999 포포라트·타트리 동계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땄다.

3월에 열린 1998-99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타티야나 말리니나마리아 부티르스카야에 이어 동메달을 땄다. 이 시즌 어머니의 병 간호와 결혼 때문에 성적이 부진하면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2.8. 1999-00 시즌[편집]


이 시즌 성공적으로 복귀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랑프리 시리즈 슈파카센 컵 3위, 컵 오브 러시아에서 우승하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이후 러시아선수권에서는 오랫동안 챔피언 자리를 지켰던 마리아 부티르스카야를 꺾고 첫 내셔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리나의 위상을 확 바꿔놓는 계기가 된 경기가 2000년 1월 열린 1999-00 그랑프리 파이널이었다. 이 해와 이 다음 해의 그랑프리 파이널에는 슈퍼 파이널이라는 경기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쉽게 말하면 1위와 2위 선수들끼리의 최종 일대일 경기이다. 다른 대회처럼 쇼트와 프리를 치러 일단 1위부터 6위까지 순위를 결정한 후, 1위와 2위 선수들이 다른 프로그램으로 프리 경기를 한 번 더 해서 그 경기의 승자가 우승자가 되는 방식이었다.[9]

이리나는 미셸 콴에 이어 쇼트와 프리에서 모두 2위를 하고로 이 슈퍼 파이널에 진출해, 여자 싱글 역사상 처음으로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점프를 성공시켰다. 곧이어 시도한 트리플 살코-트리플 룹도 무사히 착지하여 3-3을 두번이나 성공시켰다.[10] 판정 결과 만장일치로 이리나가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이 대회는 정상권 선수이긴 했어도, 콴에게 늘 밀렸던 이리나가, 올림픽 금메달만이 없던 시대의 최강자 미셸 콴의 라이벌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달인 2월, 2000 유럽선수권에서 통산 세 번째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다.

2000 세계선수권에서는 콴이 승리하고 이리나가 준우승을 했다. 쇼트에서는 부티르스카야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프리에서는 3S-3Lo 컴비에서 2S 처리한 것을 제외하고 6개의 트리플을 뛰며 콴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2.9. 2000-01 시즌[편집]


Goodwill Games(친선경기)에서 우승하며 시즌을 시작했다.

이 시즌에는 이리나의 기세가 더 강해져, 그랑프리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미셸 콴과 맞붙어 승리하며 우승했으며, 컵 오브 러시아NHK 트로피에서도 모두 우승하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슈퍼 파이널로 진행된 2000-01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다시 한 번 미셸 콴을 제치고 우승했다.

이후 러시아 선수권에서 2연패를 달성하고, 유럽선수권에서는 4번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로써 이 시즌에 출전한 모든 대회를 석권한 상태에서 2001 세계선수권을 맞았다.

쇼트에서 1위를 차지한 후 프리에서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트리플 살코-트리플 룹-더블 토룹 점프를 성공시켰으나, 역시 처음으로 시도한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더블 토룹 점프가 투풋 랜딩이 된 데 이어 다른 두 번의 점프들에서의 실수가 겹쳐, 심사위원 투표에서 2개의 1위 표를 받는 데 그쳤다.[11] 결국 미셸 콴의 구성점 우위를 자신의 기술점 우위로 극복하는 데 실패하면서 다시 한 번 은메달에 그쳤다.[12]

이렇게 두 시즌을 치른 후 그녀는 미셸 콴의 완벽한 라이벌이 되었다.

2.10. 2001-02 시즌[편집]


그랑프리 스케이트 캐나다 2위, 컵 오브 러시아에서 우승을 했고 2001-02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미셸 콴을 제치고 우승하며 3연패를 달성했다.

이후 러시아 선수권에서 우승하며 3연패를 달성하였고, 2002 유럽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따고 올림픽에 출전한다.


2.10.1.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편집]


라이벌 구도가 정립된 상태에서 맞은 올림픽 시즌에서는 막상 이리나와 미셸 콴 둘 다 아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고 다른 선수에게 패배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콴은 그의 오랜 코치였던 프랭크 캐롤과도 결별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리나는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다시 한 번 콴을 제치고 우승하는 등 이 시즌에 계속 콴에게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은 콴의 홈그라운드인 미국에서 열릴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점을 감안하면 승부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 지는 예측 불허였던 상황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피겨 스케이팅 스캔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런데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러시아프랑스 심판이 서로 밀어주기로 하여 페어는 러시아, 아이스 댄싱은 프랑스” 식의 편향된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 와중에도 남자 싱글에서 누가 딸 거냐[13]가 문제였지 자국의 금메달은 거의 확정적이었고, 프랑스의 금메달 후보 아이스 댄스 조의 여자 선수도 러시아에서 귀화한 선수였다. 말하자면 나쁜 짓을 해놓고도 챙겨갈 건 다 챙긴 나라라는 게 여자 싱글 경기 직전 러시아의 이미지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리나는 사라 휴즈에 밀려 은메달을 따게 되었다. 이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평생 생각하며 살 것" 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10.2. 2002 세계선수권[편집]


올림픽에서 이런 일을 겪은 직후에 열린 2002 세계선수권에서 이리나는 미셸 콴을 2위로 밀어내고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쇼트 프로그램 슈베르트 <세레나데>는 예술점수 6.0점이 두개나 나왔다.이로써 이 시즌에서는 콴에게 전승했다.


2.11. 2002-03 시즌[편집]


이 시즌 어머니의 병환으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랑프리 컵 오브 러시아 3위, NHK 트로피 2위를 기록했고 2002-03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은메달을 땄다. 러시아 선수권에서도 은메달을 따며 연패 기록은 3연패에서 멈추었다.

2003 유럽선수권에서는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선수권은 기권했다.

한편 미셸 콴은 이 무렵부터 그랑프리 시리즈는 거의 불참하고 전미선수권과 세계선수권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2003 세계선수권에서는 우승을 했으나 2004년에는 동메달을 땄다. 이 무렵부터 미국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선수가 2002-03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이리나를 꺾고 우승한 사샤 코헨이었다.


2.12. 2003-04 시즌[편집]


심장병으로 인해 성적이 부진했는데, 이때 예브게니 플루셴코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리나는 그때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고 밝혔다.

신채점제가 도입된 그랑프리 시리즈는 참가하지 않았고, 러시아 선수권은 기권했으며, 구채점제로 치러진 2004 세계선수권에서는 9위를 기록했다.


2.13. 2004-05 시즌[편집]


신채점제가 전면화된[14] 2004-05 시즌에 이리나는 부상에서 복귀하여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제 3의 전성기

그랑프리 4차 컵 오브 차이나와 6차 컵 오브 러시아에서 모두 우승하였고 2004-05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우승했다. 러시아 선수권에서는 4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005 유럽선수권에서는 통산 6번째 우승을 달성했으며 2005 세계선수권에서는 총점 192.85점이라는 높은 점수로 우승했다. 이는 두 번째 세계선수권 두 번째 우승이며, 시즌 모든 대회를 석권함으로서 시즌 스윕을 달성했다. 이로써 신채점제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이 대회에서 4위를 차지한 미셸 콴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최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리나는 당시 시니어 선수 중 드물게, 정확한 점프[15]와 다양한 스핀을 구사하는 선수라 그 세대 대부분의 선수들과 달리 신채점제를 잘 적응해나갔다. 이리나를 포함하여 아라카와 시즈카, 사샤 코헨, 카롤리나 코스트너, 안도 미키가 이 과도기를 잘 넘긴 케이스이다.


2.14. 2005-06 시즌[편집]


그랑프리 3차 컵 오브 차이나에서 쇼트 70.22점을 기록, 여자 싱글 두번째로 70점을 돌파하였고 총점 196.12점이라는 고득점으로 2위인 아사다 마오를 20점 차로 따돌리며 우승했다. 그랑프리 5차 컵 오브 러시아에서는 총점 198.06점으로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며 우승하였다.

2005-06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아사다 마오에게 도리어 10점 가까운 차이로 우승을 내주었다. 그러나 이때 이리나는 자신의 수행에 대한 판정이 박했음을 주장했고, 다시는 일본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나선 중요한 경기에서 우승을 못한 데에 대한 굉장히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16]
2006 유럽선수권에서는 190점대를 회복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우승으로 유럽선수권 7회 우승자가 되면서 여자 싱글 선수 최다 우승 기록을 달성했다. 그리하여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자타가 인정하는 올림픽 금메달 후보 1순위가 되었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에서 2위를 기록하며 사샤 코헨과 금메달을 경쟁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프리에서 트리플 플립+더블 토룹 컴비네이션의 첫 트리플 플립을 더블로 처리하고, 단독 트리플 룹에서도 넘어졌다.[17] 게다가 러시아의 전 종목 석권 부담감으로 인해 프리에서 3위로 밀리며 아라카와 시즈카사샤 코헨에 이어 동메달을 땄다. 라이벌 미셸 콴이 밟았던 "은메달 이후 동메달"의 행보를 그대로 따라간 셈이다.

3. 평가[편집]


트리플 악셀이 들어간 컴비네이션 점프를 제외한 것 중[18] 여자 싱글 선수가 뛴 가장 어려운 3-3 점프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점프를 최초로 성공시킨 선수다. 이러한 점프 능력과 유연한 스핀, 빠른 스케이팅을 바탕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까지 라이벌 미셸 콴과 함께 여자 싱글의 양강으로 군림했다.

무려 10년의 기간 동안 정상권에 머무르며 올림픽 2회 입상[19], 세계선수권 2회 우승, 유럽선수권 7회 우승, 그랑프리 파이널 4회 우승(3연패) 등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은 레전드다. 그녀 이후로 소위 잘한다고 떠올랐던 선수들은 두 시즌을 못가고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만큼 그녀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유독 여자 싱글에서만 약했던 러시아를, 마리아 부티르스카야와 함께 강국으로 끌어올렸다.[20]


4. 기록[편집]


  • 2003-04 시즌 신채점제가 그랑프리 시리즈에 도입되고 난 후 1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여자 싱글 총점 기록
날짜
점수
대회
비고
2005.11.26
198.06
2005 컵 오브 러시아
2006년 12월 2일 아사다 마오에 의해 경신.

  • 유럽선수권에서 7회 우승하였으며, 이는 여자 싱글 최다 우승 기록이다.
  •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4회 우승하였으며, 아사다 마오가 타이 기록을 세워 공동 기록이 되었다.
  • 그랑프리 파이널 3연패를 달성한 유일한 여자 싱글 선수이다.
  • 다리를 바꿔서 양쪽 다리 모두로 비엘만 스핀을 성공시킨 최초의 선수이다.[21][22]
  • 유럽선수권에서 우승한 최초의 러시아 여자 싱글 선수이다.
  •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딴 최초의 러시아 여자 싱글 선수이다.
  •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최초의 러시아 여자 싱글 선수이다.(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 신채점제 이후 시즌 스윕에 성공한 최초의 여자 싱글 선수이다.[23]
  •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한 최초의 여자 싱글 선수이다.(2000-01 그랑프리 파이널)
  • 트리플 살코-트리플 룹-더블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한 최초의 여자 싱글 선수이다.(2001 세계선수권)


5. ISU 공인 최고점수[편집]


ISU 공인 최고점수
쇼트
70.22(2005 컵 오브 차이나)
프리
130.48(2005 컵 오브 러시아)
총점
198.06(2005 컵 오브 러시아)[24]


6. 수상 기록[편집]


대회



올림픽
0
1
1
세계선수권
2
3
1
유럽선수권
7[25]
2
0
그랑프리 파이널
4[26]
3
2
유니버시아드
0
1
0
주니어 세계선수권
1
0
1
합계[27]
14
10
5

올림픽
은메달
2002 솔트레이크시티
여자 싱글
동메달
2006 토리노
여자 싱글
세계선수권
금메달
2002 나가노
여자 싱글
금메달
2005 모스크바
여자 싱글
은메달
1998 미니애폴리스
여자 싱글
은메달
2000 니스
여자 싱글
은메달
2001 밴쿠버
여자 싱글
동메달
1996 에드먼턴
여자 싱글
유럽선수권
금메달
1996 소피아
여자 싱글
금메달
1997 파리
여자 싱글
금메달
2000 비엔나
여자 싱글
금메달
2001 브라티슬라바
여자 싱글
금메달
2003 말뫼
여자 싱글
금메달
2005 토리노
여자 싱글
금메달
2006 리옹
여자 싱글
은메달
1998 밀라노
여자 싱글
은메달
2002 로잔
여자 싱글
그랑프리 파이널
금메달
1999-00 리옹
여자 싱글
금메달
2000-01 도쿄
여자 싱글
금메달
2001-02 키치너
여자 싱글
금메달
2004-05 베이징
여자 싱글
은메달
1995-96 파리
여자 싱글
은메달
2002-02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자 싱글
은메달
2005-06 도쿄
여자 싱글
동메달
1996-97 해밀턴
여자 싱글
동메달
1998-99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자 싱글
유니버시아드
은메달
1999 포포라트·타트리
여자 싱글
주니어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 부다페스트
여자 싱글
동메달
1994 콜로라도 스프링스
여자 싱글


7. 기타[편집]


  • 여자 싱글에서만 유독 약했던 러시아를(소련 시절 포함) 여자 싱글에서도 강국으로 만들게 한 1세대 주자이다. 이러한 커리어와 명성으로 자국내 국민영웅으로 대접 받는다. 다만, 현재 러시아 피겨 스케이팅 내에서는 오히려 그녀의 후배 격인 율리아 리프니츠카야의 인지도와 인기가 더 높은데, 슬루츠카야가 러시아 여자 싱글을 강국으로 만든 1세대 주자라면, 리프니츠카야는 침체되어 있던, 러시아 여자 싱글을 소치 올림픽을 계기로 러시아 내에서 본격적으로 하나의 문화로, 대중화 시킨 2세대 주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종합적인 커리어는 슬루츠카야가 압도적으로 좋다.
  • 러시아의 조혼 풍습에 따라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며 은퇴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던 1998-99 시즌을 끝낸 뒤 운동 트레이너인 남자 친구와 결혼하여 선수 은퇴 후 1남 1녀를 두었다. 결혼 후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성숙하면서 기량이 꽃 피었으며, 미셸 콴과의 본격적인 라이벌 관계도 결혼 이후에 시작되었다.
  • 라이벌 미셸 콴과는 의외로 상당한 친분을 맺었다. 오히려 국내 선배이자 자국내 라이벌이기도 했던 마리아 부티르스카야[28]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콴 역시 사라 휴즈사샤 코헨과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으니 이 점에서도 둘이 비슷한 셈이다.
  • 아버지가 유대인이며 2009년 국제 유대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1] 당시 주니어 세계선수권은 1992년 12월에 열렸다.[2] 당시 우승은 미셸 콴이었다.[3] 그랑프리 시리즈의 당시 명칭이다.[4] 3위는 마리아 부티르스카야[5] 그랑프리 파이널의 당시 명칭이다.[6] 당시에는 챔피언(그랑프리) 시리즈를 세번까지 출전할 수 있었고, 이 경우엔 상위 두 대회의 성적으로 파이널 진출 여부를 가렸다.[7] 다만, 한 번의 점프에서는 랜딩에 살짝 문제가 있었다.[8] 이때 미셸 콴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리나의 점수를 지켜보기도 했다.[9] 3-4위, 5-6위 선수들도 같은 방식으로 순위 결정전을 치렀다.[10] 지금도 3-3 컴비네이션을 두번 시도하는 선수는 별로 없다.[11] 미셸 콴은 7개의 1위 표를 받았다.[12] 이 때 이리나가 금메달이라는 논란도 많다. 당시 영국 유로 해설도 이리나가 금메달이라고 격분하였을 정도다.[13] 같은 러시아의 라이벌 알렉세이 야구딘vs예브게니 플루셴코.[14] 이 시즌부터 선수권 대회도 신채점제로 치러지기 시작했다.[15] 2000년 이후로는 러츠를 중립에 가까운 아웃엣지로 도약하는 러츠를 구사했으며, 점프 회전수 관련 논란도 종종 있었다. 다만 구채점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신채점제 도입 초기에는 점프의 엣지에 대해서 채점상 크게 지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에 큰 이슈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러츠와 플립의 엣지 구별이 본격적으로 엄격해진 건 2007년 이후로, 이 시기에 엣지콜 이슈로 의문의 여지가 있는 불이익을 겪은 대표적인 선수가 김연아이다.[16] 물론 아사다 마오가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는 등 수행면에선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다.[17] 이 대회 빙판은 역대급으로 빙질이 최악으로 평가받는 대회였다. 프리 경기 때는 많은 선수들이 넘어졌는데, 심지어는 점프를 뛰지 않는 아이스 댄스 선수들도 넘어졌다. 경기 중계를 보면, 슬루츠카야가 트리플 룹 점프에서 넘어질 때 빙판이 너무 녹아있던 관계로 스케이팅 날이 박혔다.[18] 트리플 악셀-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를 키히라 리카2017-18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성공시켰다.[19] 은메달 1회, 동메달 1회. 출전은 3번 했다.[20] 그녀 이후로 엘레나 소콜로바(2003 세계선수권 준우승), 알료나 레오노바(2012 세계선수권 준우승), 율리아 리프니츠카야(2014 세계선수권 준우승) 등을 배출하기 시작했다.[21] 비엘만 스핀은 한쪽 다리로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2] 극강의 근력과 유연성을 보유하지 않으면 절대 시도할 수 없다. 의문이 간다면 바닥에서 양쪽 다리를 순서대로 머리까지 올려보자.[23] 두번째는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24] 총점은 2014 유럽선수권에서 율리아 리프니츠카야아델리나 소트니코바가 200점을 돌파하기 전까지 유럽 선수 역대 최고의 성적이었다.[25] 유럽 선수권 여자 싱글 최다 우승 기록[26] 여자 싱글 최초이자 유일한 3연패이다.[27] 국제 대회 총 31회 우승으로 여자 싱글 선수 최다 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28] 이리나가 부티르스카야에게 막혀, 여러번 러시아 내셔널 챔과 유럽선수권 우승은 놓쳤지만, 그파와 월드 성적은 이리나가 우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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