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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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폭발사고
裡里驛 爆發事故
Iri station explosion

파일:external/www.ilyojournal.co.kr/17_L_1242807164_2.jpg
발생일
1977년 11월 11일
사고일로부터 16936일
발생 위치
전라북도 이리시 창인동 이리역 (現 전라북도 익산시 창인동2가 익산역)
유형
폭발
원인
열차 화재
인명피해
사망
59명
부상
1343명
1. 개요
2. 사건의 경위
3. 사건의 여파
4. 사고 이후
5. 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mogija_164927_1%5B202559%5D.jpg

폭발 사고 이전의 이리역.


이리역 폭발 사고 혹은 폭발 사건은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폭발 사고다.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2. 사건의 경위[편집]


당시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가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고성능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폭발 사고를 냈다.

수사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무일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열차 안에 켜 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게 큰 사고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였다.

  • 원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으나 이 원칙이 무시되었다.
  • 철도역 화차 배차 직원들이 기관사를 비롯한 같은 철도 직원들에게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1]을 받고자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강제로 대기시켰다. 당시 철도법 제61조상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며 지금도 위험물 운송차량은 대통령 전용열차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높다.
  • 이렇게 대기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화가 난 호송원은 을 마시고[2] 열차 화물칸에 들어갔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고 호송원은 총포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하며 흡연자,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 이런 규칙 역시 모두 무시되었다.
  • 호송원 신무일은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규칙을 무시하고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다.
  • 불이 옮겨붙은 상황에 잠에서 깨어난 호송원이 침낭으로 불을 꺼 보려 했으나 불은 오히려 더 크게 번졌다.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처럼 유사시 사용할 제대로 된 소화기구가 없었다.
  • 화약 열차에 불이 붙었음을 알고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 못했다.

3. 사건의 여파[편집]


파일:external/blog.joins.com/iri.jpg

결국 열차에 불이 붙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탄 등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사고로 인해 이리역에는 지름 40m,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상 및 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피해 규모로는 최대였다. 사건 이전에 이리역 주변은 철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홍등가가 난립했으며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철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 버려 역 주변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면서 한쪽에서는 재개발의 기회라고 속으로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는데[3] 사고 이후에는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중앙시장을 경유하는 중앙로 1길 확장노선과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익산대교를 경유하는 익산대로가 건설되어 익산의 주요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다.[4]

중요 시설물들도 당연히 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객화차 등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 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채가 완파, 1288채가 반파되었다. 한편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있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는데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로 신축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5] 철도 바로 옆에 있었던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폭발사고의 직격탄을 맞아 교사가 파괴되었고[6][7]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남겨진 자리에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임시 입주하여 소라산 신교사가 완공되는 1985년 4월까지 임시 교사로 활용되다가 이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성맨션이 들어섰다.[8]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4km 이내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김제군 백구면, 공덕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20여 km 거리인 군산, 전주 및 백 리(40 km) 밖 논산군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사고의 확대를 막은 뒷이야기도 있다. 사고가 나던 때에 승객 600여 명이 탄 여객열차[9]가 이리역 직전 역인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각에 이미 이리역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기관사가 부용역에 진입하면서 통표(운전허가증) 회수에 실패[10]하는 바람에 부용역 통과 허가가 나지 않아 통표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 멈춰있어야 했다. 사고 발생 약 5분 후 통표를 회수하여 출발이 가능해졌음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진입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본인의 실수 탓에 열차를 지연시킨 기관사는 초조해져서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고 재차 문의했지만 이리역 측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고만 답하였다. 그러나 기관사는 통표를 얻었으니 운행을 강행하기로 하고 결국 열차를 이리 방향으로 출발시켰다. 한편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은 폭발 때문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뒤 해당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송석준 역무원은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화차로 조성된 열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 모현동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열차를 신속히 이동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만일 유조 열차가 구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11]로서 그 중요도로 말미암아 신속한 복구작업이 전개되어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운행을 재개하였고 11월 20일에는 모든 선로의 복구를 완료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12]

파일:external/www.sotongsinmun.com/8._copy2.jpg

4. 사고 이후[편집]


파일:external/www.sotongsinmun.com/10.jpg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13]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이었던 약 90억 원[14]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을 피해자들을 위해 헌혈시켰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가게 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다시 반납시켰고 직원들의 11월 급여 중 2%를 재해 기금으로 갹출하였다.

사고 때문에 이리역은 1년 뒤인 1978년 11월에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다.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는데[15]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리 하면 이리역 폭발 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라 카더라. 사실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 버렸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16] 이리시와 익산군은 1994년 1차 시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이었기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씨는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법원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개정형법에 따르면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를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17] 1987년 만기 출소하였다. 시민들은 신 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하던 신 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듬해(1978)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를, 또 이듬해(1979)에 창인주공아파트를 건설했다. 이 중 모현주공1단지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림산업에서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아파트도 재개발 승인이 났다.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mogija_164927_1%5B202566%5D.jpg

이리역 앞 삼남극장.

한편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같이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18]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이리 시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던지라[19] 이들은 군산으로 이동하여 도립 의료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는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때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냈고 이 때문에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인 '국민 가수'급이었다. 하춘화는 6살 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이었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의 정밀진단 결과 하춘화는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져서[20] 1980년대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TV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후 이 경기를 중계하던 KBS에서는 자막으로 이리역 폭발 사고를 속보로 알렸다. 해당 영상 그리고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 학생의 아버지가 축구 중계를 보고 공부하라며 권유하여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학생의 방 쪽에서 진동이 느껴져 달려나와 보니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 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한다. 만약 그 학생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그 학생 입장에서는 천년감수를 한 셈이다.

한편, 사고 당시 군산수산전문학교 기숙사에서 축구를 보고 있던 이리시 출신 학생들은 기숙사 방송을 통해 '본가가 이리인 학생들은 전부 기숙사 앞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고 운동장으로 나갔고 당직 교사로부터 '이리에서 사고가 크게 났으니 빨리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가족들 안부를 확인하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에 학교에서 마련해 준 택시를 타고 가족들이 있는 이리시로 향하던 중 이리역으로부터 5km 넘게 떨어진 목천포에서부터 깨진 건물 유리창 파편이 도로 위에 깔려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택시 바퀴에 유리 조각이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사망자 중 역무원이었던 한인석 씨는 부친 역시도 철도공무원이었고 광주역에서 무단횡단하던 어린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바 있다. 이후 정부는 유가족에게 재건된 역의 매점운영권을 주었다.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었고 후임에는 민병권이 임명되었다.

씁쓸한 후일담이지만 사고 이후 이리역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집[21] 근처에서 목걸이반지 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보물뿐만 아니라 인체의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도 재현된 풍경이다.

대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험이 진정되자 동네 어르신들이 진두지휘하고 청년들이 군말 없이 따르며 각 가정에서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었다.

임시 대피소 건설을 위해 군은 물론이고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징발하여 전기 공사 등을 시켰다고 한다.

익산역에는 이 사고의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 당시 군의관으로서 현장에 달려간 윤장현(전 광주광역시장)이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 추모행사'에서 익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 당시 윤장현은 다급한 마음에 파견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인원과 장비를 챙겨서 독단적으로 이리시에 가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법적으로는 탈영이지만 서종철 국방부장관이 훌륭한 초동 출동이라며 크게 칭찬하고 격려를 받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고.


5. 매체에서[편집]


  •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2008년 개봉했다. 참고로 재난 영화는 아니다. 작중 주인공의 출생 직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는 '설정' 정도. 가을로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다뤄지는 것보다도 더 적게 다루는 수준.


  •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아나운서가 이 사고의 현장 기자를 연결했을 때 기자가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어떠냐?"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아마 북한의 소행으로 착각했었던 듯.

  • 2004년 MBC 타임머신 122회에서도 이 사고를 다루었다. #[22]

  • 2007년 9월 18일 KBS 상상플러스 147회 하춘화, 장윤정[23]의 스타댓글에서도 사고 당사자였던 하춘화가 이 사고에 대해 언급하였다. #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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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

76
창녕 남지읍 나룻배 전복사고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 195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
[ 194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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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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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시가로 1인당 300원 내지 500원으로 직급에 따라 달랐다. 지금으로 치면 6천 원 내지 1만 원인데 이 푼돈 받겠다고 위험물을 방치한 것이다.[2] 막걸리와 소주를 한 병씩 섞어 마셨다.[3] 판자촌과 홍등가였던 만큼 이 무허가 건물들과 땅의 실소유주들은 거주민과 무관한 지주들이었다.[4] 출처[5] 이후 군청을 익산군 관내로 이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당시 함열면과 금마면, 황등면 등이 군청 유치 경합을 벌였는데 금마면은 철도가 통과하지 않았고 황등면은 이리시와 너무 가까워서 결국 함열면이 군청을 유치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전국의 군청 소재지가 일괄적으로 읍으로 승격되면서 군청을 유치한 함열면도 함열읍으로 승격되었다.[6]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던 남성여고 구 교사는 남성여고가 남중동 구 남성고 교사로 이전된 후 이리서초등학교 교사로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피해가 컸던 남성여중 교사는 붕괴, 균열된 부분은 철거되고 남겨진 일부분이 상가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7] 남성여고 교사가 남성여중 교사보다 피해가 덜했던 데는 남성여중 교사가 벽돌 조적식으로 지어진 반면 남성여고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다는 점도 한몫했다.[8] 남성맨션이 지어진 때는 훨씬 뒤인 1980년대 중반이다.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남성여중고의 소라산 이전과 남성국민학교의 폐교 전후 시점에 있었던 일.[9] 탑승객 규모로 보아 특급(통일호) 또는 보급/보통(비둘기호)열차였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새마을호 1칸의 정원은 56석이며 600명을 태우려면 무려 11량으로 운행했다는 뜻인데 그 당시 그렇게 긴 새마을호를 호남선에 운행했던 적도 없을뿐더러 당시 초호화 귀족열차였던 새마을호에 600명을 태울 만큼의 수요가 호남선 지역에 있었을 리 만무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호남선 새마을호는 3~4량 편성이었다.[10] 역에 진입할 때 통표걸이에 걸린 통표를 기관사가 직접 손으로 낚아채는 방식인데 이에 실패하면 통과역이라고 해도 열차를 멈춰세워 통표를 주으러 가야했다.[11]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교차하는 역[12] 바로 1년 전에 있었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마오쩌둥 사망, 그리고 1977년에 출범한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정권의 갈등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안보 불안이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리에 왔다가 사고를 당했던 하춘화도 사고 직후에 '드디어 전쟁이 터졌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13]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이다.[14]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는 무려 5000억 원에 상응한다.[15] 통합은 1995년 5월 10일, 역명 변경은 9월 1일.[16] 예를 들자면 익산우체국은 그 명칭을 구 이리우체국에 넘겨주고 함열우체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든지(현 익산함열우체국), 현재는 없어진 익산등기소는 이름을 이리등기소에 넘겨주고 북익산등기소로 바뀌었다든지.[17] 오늘날이라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성립할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에는 살인의 기준을 굉장히 엄격하게 잡았기 때문에 과실이나 결과적 가중범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인죄로는 처벌하지 않았다. 당시 사건 경위 및 판결 내용은 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법원은 신 씨에게 "폭약호송"을 선행행위로 인한 보증인지위 인정, "쉽게 진화 가능했음에도 도주한 것"을 폭발물 파열과 같은 작위행위와 동가치하다고 봐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1995년 개정형법은 제172조 제1항의 죄의 죄명을 폭발물파열죄에서 폭발성물건파열죄로 바꾸면서 화약을 그 객체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개정형법에 의하면 본 사건에서는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제119조 제1항)가 성립한다.[18] 무너지는 지붕에서 떨어진 벽돌을 머리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였다. 하춘화는 다행히 단순 타박상 정도에 그쳤다.[19] 원광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원광의료원이 개설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20] 거기다 이때 이주일 덕에 목숨을 구한 하춘화가 이후 자신의 공연에 사회자로 항시 이주일을 지목하면서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21] 사고로부터 7년이 지난 1984년까지 철거되지 않은 채 남겨진 폐가도 있었다.[22] 당시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가 일어난 시기에 방송되어 마지막 부분 서경석이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23] 여담으로 이 방송분은 세대공감 OLD & NEW의 마지막 방송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