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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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文順)
본관
경주 이씨[1][2]
출생
1876년[3] 7월 7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호명리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4]
사망
1944년 6월 8일
종교
개신교 (장로회)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이만집은 1876년 7월 7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호명리(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서 아버지 이원채(李源埰, 1846. 5. 10 ~ 1918. 12. 22)와 어머니 일직 손씨 손숙명(孫淑明, 1842. 7. 4 ~ 1894. 2. 1)[5]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주군 강서면(현 경주시 안강읍) 안강리로 이주했다가 1906년 전후 경상북도 대구군으로 이주하여 대구군 서상면 전동(현 중구 대신동 240-1번지)에 살았다. 1918년 2월 16일 대구부 남산정(현 중구 남산동) 342번지로 이주했으며, 이후 대구부 남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115번지로 옮겨 거주하는 등[6] 현재 대구 도심 일원에 거주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0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제임스 E. 애덤스[7] 선교사의 전도로 경주에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 1906년 대구에 계성학교가 개교했을 때 한문 교사로 부임하면서 사역 활동을 시작했다. 1909년에는 대구 남성정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將立)되었다. 1912년 장로의 직책을 사임하고 순회 조사(助事)로서 부해리(傅海利, Henry. M. Bruen)[8] 선교사와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 순회 전도를 하였다.

191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4년 말 대구에 남산교회를 설립하고 부해리 선교사와 함께 사역 활동을 하였다. 또 1917년에 평양신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제2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고 그해 9월에 남산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1918년 2월에는 대구 남성정교회 위임목사가 되었고, 같은 해 9월에는 대구 개신교계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발기로 교남기독청년회(현 대구 YMCA)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24일경,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대구 출신인 이갑성은 이만집을 방문하여 곧 프랑스에서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는데, 외국에 머물고 있는 조선인들은 이 회의에 조선 독립에 관한 청원을 할 계획이라고 하면서 이 청원 활동에 대한 응원으로 조선 각지에서 독립을 희망한다는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면서, 경성부에서는 이미 시위운동에 관한 계획을 세워놨으니 대구도 그 운동을 해야 할 것이라며 특히 정부에 대하여 각지 대표자의 연서(連書)로 독립에 관한 청원을 할 것이라면서 시위운동 및 독립청원에 대구 대표로 활동해줄 것을 권유했다.

이만집은 그 당시에는 일의 성공여부를 확신할 수 없기에 결정을 바로 하지는 않았는데, 며칠 후 3월 1일에 경성부와 평양에서 3.1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듣고 또 이튿날인 3월 2일 이갑성이 심부름차 보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으로부터 경성부에서 작성된 2백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나서는 대구 대표로 활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남산교회 김태련(金兌鍊) 조사와 업무를 분담하여 이만집 자신은 시위 참가자를 물색하고, 김태련 조사는 독립선언서 인쇄 등 거사에 필요한 준비물을 담당했다.

이어 김태련·김영서(金永瑞) 등 대구 유지들과 함께 서문 밖 장날[9]인 3월 8일 오후 3시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가 주민과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3월 6일 경, 앞서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태련은 남산동 자택에서 등사기를 사용하여 선언서 200여 부를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 4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했다.

거사 당일인 3월 8일 오후 3시 경, 서문 밖 장터에는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대구성경학교[10] 등 대구지역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때 이만집이 연설을 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주도자를 비롯한 7, 800여 명의 시위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일경과 기마대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11] 앞 삼각지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12]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13]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7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당시 계성학교 학생이었던 차남 이성해(李聲海)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나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의 1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당일 출옥해 복역하지는 않았다.#

판사 : 너는 종교인이면서 인민을 선동하여 나라에 불안함을 조성하는 것은 제멋대로인 행동이 아닌가?

이 목사 : (미소지으며) 나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 사람이니 우리나라 우리 백성을 위해 거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판사 : 이 일을 시작한 장소와 인쇄소가 어딘가?

이 목사 : 우리 집이다.

판사 : 그렇다면 너는 융희 2년(1908) 보안법 위반에 의해 너희 나라의 법대로 3년형에 처한다.

이 목사 : 융희 시기의 법률을 나에게 쓰는건 감사한데, 그 법이 한국 독립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적용한다는 조문이 어디 있나?

판사는 기가 막혀서 잠깐 말을 잇지 못하였다.

판사 : 주모자가 누구인가?

이 목사 : 바로 나다. 그러므로 이 72명이 받을 형벌을 모두 나에게 적용하고 부족하면 나의 대대손손까지도 복역시키든지!

-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이 있었을 때 판사가 이만집 목사에 심문할 당시 한 부분.


이후 특별 사면이 있어 2년으로 감형되어 출옥하였는데, 출옥 후 1921~1922년 계성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영자인 선교사들의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사건을 일으키자 학생들을 지지했다. 그러자 경북노회에서는 1923년 이만집과 그를 지지하는 남산교회 목사 박영조(朴永祚)를 정직시키고 남성정교회 장로 4명과 집사 1명을 면직시켰다. 그러자 이만집 등은 "30성상에 각오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면 진리에 속하자. 교회는 신성한 것인데 불의의 구속을 어찌 당하겠는가. 지금부터 우리 대구교회는 저 권리를 주장하는 선교사의 정신지배를 받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하겠노라"하고 '자치교회'를 창립했다.#

결국 그해 5월 남성정교회 목사직을 경북노회에서 지명한 임종하(林鍾夏)에게 넘겨주어야 했으나 남성정교회 측에서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10월에는 조선예수교회를 창설하여 선교사를 배척하고 경북노회와 장로교총회에서 완전히 이탈하였다.# 그리고 자치교회에 대구 시내 10개 교회를 비롯, 영양군의 세 교회, 경주의 한 교회 등 14개 교회가 자치 선언을 하면서 가담하는 등 영향이 있었다.# 1926년 8월에는 조선예수교연합직원회[14]에서 이만집 목사 배척문제를 정식으로 논의하여 전도부를 조직하여 이만집의 자치교회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며, 이만집 목사의 부정교리 선전을 바로잡아서 그가 회개할 때까지 다시 의논치 않을 것을 공론화하였다.1926년 8월 6일 동아일보 기사

한편, 이만집 목사의 남성정교회 측은 예배당을 경북노회에 넘겨주지 않고 명의를 그대로 유지했는데, 이때문에 경북노회와 오랜 소송을 벌여야 했다. 1927년 4월에 있었던 일련의 소송에서는 승소했으나, 1931년 다시 이뤄진 일련의 소송에서는 경북노회 측에 결국 패소하였고 그해 11월 결국 예배당을 노회 측에 넘겨주었다.#

이만집은 곧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여 6년간 자치교회 목회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자, 장남 이광세에 목사직을 위임하면서, 차남 이성해가 운영하던 경주 안강면의 과수원을 매각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장안사(長安寺)의 토지를 확보, 수양관을 세워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정직되거나 병을 얻어 사역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목회자들을 위한 쉼터로 사용케 하였으며, 이만집 자신은 이곳에서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이후 1944년 6월 8일 별세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으며, 2005년 6월에는 예장통합 경북노회가 이만집 목사 복권위원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역사연구 위원회를 조직하고 논의한 끝에 이만집 목사의 복권을 결정하였다.#


3. 여담[편집]


  • 4대가 대대로 목사로 시무하는 목사 가문으로 유명하다. 이만집 목사와 이만집 목사의 차남 이성해 목사, 이성해 목사의 아들 이호문 목사, 이호문 목사의 아들 이선목 목사로 이어지며, 특히 이성해 목사로부터 이호문 목사, 이선목 목사의 3대는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의 인천광역시 숭의교회에서 내리 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이러한 3대 세습은 인천 숭의교회가 국내 최초의 사례라고 하며#, 일각에서는 이러한 관습에 대해 불만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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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전공파(判典公派)-호계공파(虎溪公派) 34세 집(集) 항렬.#[2] 전주 이씨라고 기재된 문헌도 있다.[3] 1875년생이라고도 한다.[4] 수형인명. 인근의 모서리와 함께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5] 손진원(孫震遠)의 딸이다.[6] #[7] 한국식 이름 : 안의와(安義窩)[8] 신명여학교 설립자 부마태의 남편이다.[9] 당시 서문시장은 현재 위치인 중구 대신동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달서문 터(중구 서성로1가 109-1번지. 현 삼정헬스사우나)에서 구 동산파출소 자리(중구 동산동 13-2)에까지 걸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서문시장' 이름 자체가 달서문(達西門) 밖에 열린 장터를 의미한다. 현 위치로 옮긴 것은 1923년이다.#[10] 대구 남성정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이다.[11] 현 대구 지하철 3호선 청라언덕역 인근에 있었다.# 그래서 이 부근에는 여전히 '군청만댕이(또는 군청말랭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12] 이만집의 1심 판결문에 의하면, 동부 시장정(현 동산동)에서 출발하여 본정(현 서문로1, 2가), 경정을 거쳐 동성정을 행진했다고 한다.[13] 항목에 원판결 취소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당시 관련자 75명이 한꺼번에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만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나머지는 그대로 적용되었다.[14] 당시 회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대구의 3.1 운동을 같이 주도했던 김태련 장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