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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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및 방향
청계천 복원사업 · 747 공약 · 국방개혁 307 · 녹색 성장 · 한반도 대운하 (4대강 정비 사업 / 논란 · 경인 아라뱃길) · 자원외교 ·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 5+2 광역경제권 · 알뜰 시리즈(알뜰폰 · 알뜰 주유소) · 한국장학재단 · 보금자리주택 · 의료분쟁조정법 · 협동조합기본법 · 3차 FX 사업 · 방송통신심의위원회 · AH-X · L-SAM · 한국형 차기 구축함 · 셧다운제 · 아크부대 · 사증 면제 프로그램 가입 · 한EU FTA · 글로벌녹색성장기구 · 마이스터고등학교 · 미디어법 · 종합편성채널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사회와 문화) · 논란이 있는 평가
타임라인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광우병 촛불집회 ·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정부세종청사 착공
2009년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 신종플루 유행 · 호남고속철도 착공 · 명텐도 ·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 · 쌍용차 사태 ·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 대청해전 · 롯데월드타워 건축허가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 연평도 포격전 · 5.24 조치 ·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 경부고속철도 2단계 개통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 ·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사건 · 내곡동 사저 의혹 · 외규장각 반환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 2012 여수 엑스포 ·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 제18대 대통령 선거 · 정부세종청사 개청 · 번개사업
2013년
나로호 3차 발사
별도 문서가 없는 평가 및 논란은 해당 주제 관련 문서를 참고
이명박 개인과 관련된 문서는 틀:이명박 참고






1. 개요
2. 서울특별시 이명박 시정 (2002~2006)
3.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 (2008~2013)
3.1.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3.1.1. 청해부대 창설 및 아덴만 여명 작전 성공
3.1.2. 대북 지원 축소
3.1.3. 연평도 포격전과 대규모 보복계획 수립
3.1.4. 아크부대 창설 및 UAE 파병
3.1.5.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
3.1.6. 보훈활동
3.1.6.1. 보훈보상대상자 제도 신설
3.1.6.2. 유공자 및 순직유족 보상 강화
3.1.6.3. 천안함 전사자 예우
3.1.6.4.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예우
3.1.7. 대한민국 최동단 독도 방문
3.2. 외교에 대한 평가
3.2.1. 한-미동맹 복원 및 강화
3.2.1.1. 부시 행정부
3.2.1.2. 오바마 행정부
3.2.2. 한-중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
3.2.2.1. 후진타오 주석
3.2.2.2. 시진핑 부주석
3.2.3. 한-일관계 '미래지향관계' '셔틀외교' 구축
3.2.4. 한-러관계 강화
3.2.5. 한-EU관계 설립
3.2.6. 한-UAE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형제국가' 구축
3.2.7. 한-호주관계 강화
3.2.8. 우방국 확보
3.2.9.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영향력 강화
3.2.9.2.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
3.2.9.3. G20 정상회의 개최
3.2.10. 외규장각 의궤 반환 성공
3.3. 경제에 대한 평가
3.3.1. 무역 1조 달러 달성
3.3.2.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과 한미중일 통화스와프 성공
3.3.3. 세계 6번째 원전 수출국 달성
3.3.4. 4대강 정비 사업과 치수역량 증대
3.3.5. 석유·자원 자주개발률 증진
3.3.6. 세계 3위 경제영토 확보
3.3.6.2. 한EU FTA 비준
3.3.7. 부동산 가격 안정화
3.3.8. 나로우주센터 준공
3.3.9. 국가경쟁력순위 갱신
3.4. 교육에 대한 평가
3.4.1.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 실시
3.4.2. 고졸취업 개선
3.4.3. 교련 완전 폐지
3.4.4. 대학구조조정
3.4.6. 수능시험 점수제 환원
3.5.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5.1. 출산율 증진
3.5.2. 아동안전
3.5.3. 교육 및 취업제도 정비
3.5.4. 약사법 개정 및 의료복지 강화
3.5.5. 협동조합기본법 제정
3.5.6. 2012년 버스 운행 중단 사태
3.5.8.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법 제정


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 이명박 시정과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정리한 문서다.

2. 서울특별시 이명박 시정 (2002~2006)[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서울시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 (2008~2013)[편집]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나중에 돌아보면 평가 받을 것" 연설


3.1.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편집]



3.1.1. 청해부대 창설 및 아덴만 여명 작전 성공[편집]


이병박 정부는 2009년 3월 3일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에 정기적으로 파병하는 해상부대인 청해부대(淸海部隊, Cheonghae Unit)를 창설하였다. 정식 명칭은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이다. 청해부대의 창설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소말리아 해역을 해적들로부터 안전하게 통과하며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우리 군의 작전반경이 페르시안 만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청해부대 환송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더 이상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험 속에 방치할 수 없다. 우리 손으로 우리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청해부대 환송식에서#


새로 창설된 청해부대는 2011년 1월 15일 아브디 리스케 샤크가 이끄는 소말리아 해적 일파에 의해 피랍된 1만톤급 화물선 삼호 주얼리(SAMHO JEWELRY)호를 구출하기 위해 아덴만 여명 작전(아덴灣黎明作戰)을 실시하였다. 이는 한국군이 해외에서 수행한 최초의 인질 구출 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청해부대는 해적 8명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하는 동시에 인질 21명 전원을 구출하였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덴만 여명 작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데만 여명 작전 성공 직후, 직접 브리핑을 하는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설

국방부 다큐멘터리 - 아데만 여명 작전


3.1.2. 대북 지원 축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북 지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10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에 옥수수-강냉이 1만톤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의 식량 지원을 거부했다. 서울의 북한 전문가인 북한전략 센터의 김광인 박사는 "북한이 자존심이 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북한 입장에서는 지원의 '규모'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지난 10년간 남한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쌀과 비료를 매년 40만톤 가량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지원축소와 북한 도발


3.1.3. 연평도 포격전과 대규모 보복계획 수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연평도 포격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한반도의 서해 5도 중 하나인 대한민국령 연평도를 북한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전투. 또한 정전 협정 이래 최초로 발생한 민간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공식 명칭을 '연평도 포격 도발'로 규정했다. '포격전'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은 것은 '전투'라는 명칭에서 오는 상호 대응의 성격을 감추고 북한의 일방적인 도발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 명칭이 2021년 '연평도 포격전'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계속 쓰였다.

연평도 포격전 당일 지휘하는 이명박

연평도 포격 당시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의 회고록 <임무(DUTY)>에 따르면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때 대한민국이 보복을 계획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말렸다고 한다. "보복계획에 공중공격과 포격이 포함됐으며 과도하게 공격적이었다"고 한다. 미국은 보복이 전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자신, 마이크 멀린 합참모의장까지 며칠에 걸쳐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 등을 설득했다고 한다.

미국이 반대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규모 보복계획

연평도를 방문한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이명박


3.1.4. 아크부대 창설 및 UAE 파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UAE 군사훈련 협력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란 핵위기 당시 술렁이던 국제 정세와 유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원전 수주를 위한 조건이었던 아크부대를 2011년 아랍에미리트에 주둔시킴으로써 한국이 안정적인 원유 공급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아랍에미리트가 유사시 우리나라 전체가 7일 동안 사용 가능한 원유 600만 배럴을 무상으로 비축해줬다.## 또한 아크부대의 지정학적인 위치 덕분에 우리 군의 작전반경이 중동/아프리카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아랍에미리트(UAE)에 파견된 아크부대는 UAE군의 정예화, 선진화 및 전투력 향상 등을 통해 UAE와의 국방협력을 강화하고 중동평화와 국익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고온·건조한 사막훈련과 UAE군의 첨단 시설 및 장비를 활용한 훈련을 통해 대테러, 사막작전 등 우리 군의 중동지역 연합작전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아크부대는 세계 최강 특전부대의 위용을 드높이고 우리나라의 국격 향상에 기여하는 국군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이후 아크부대는 2011년 삼호 주얼리호의 해적을 진압한 아데만 여명 작전, 2021년 아프가니스탄 사태 중 국민을 구출한 미라클 작전, 2023년 수단 내전 중 국민을 구출한 프라미스 작전 등에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어 중동지역의 우리 국민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크부대에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아크부대 지도

국방부 다큐멘터리 - UAE 파견 아크부대


3.1.5.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편집]


오바마 대통령과의 지속적인 회담으로 2012년에 11년만의 한미 미사일 지침 변경을 이끌어 내었다. 이 지침 변경으로 미사일 사거리를 기존 300km에서 800km로 연장하였다. 또한 모든 미사일의 탄두 중량을 500km로 제한했던 기존 지침에서 사거리와 연계해 탄두 중량을 늘렸다. 사거리 500㎞ 미사일은 탄두 중량을 1t까지, 사거리 300㎞ 발사체는 탄두 중량을 2t까지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군의 미사일 반경과 탄두 중량이 늘어나서 북한의 도발에 더욱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굉장히 대단한 성과인데, 2001년 1차 개정 이후로 11년간 없었던 미사일 지침이 비확산(non-proliferation)을 강조하는 미국의 민주당(2012년 오바마) 집권기에 미사일 지침이 파격적 조건으로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침 개정으로 인해 사거리 800km에 탄두중량 500kg인 탄도미사일 현무-2C 등이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참조.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개정 당시 주변국 탄두 중량과 사거리#


3.1.6. 보훈활동[편집]



3.1.6.1. 보훈보상대상자 제도 신설[편집]


군인과 경찰ㆍ소방ㆍ일반 공무원이 출ㆍ퇴근 중 사고로 사망하거나 의무복무자로 군 복무 중 발생한 질병으로 사망하면 보훈대상자로 분류돼 국가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보훈대상자는 국민의 생명ㆍ재산보호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상적인 직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하거나 상이를 입은 경우를 가리킨다. 군인과 경찰, 소방공무원, 일반 공무원이 출ㆍ퇴근 중 사고로 숨지거나 부상하면 보훈보상대상자로 분류된다. 2012년 6월 국가유공자와 구별되는 보훈대상자 신설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보훈체계 개편 법률 시행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2012년 7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3.1.6.2. 유공자 및 순직유족 보상 강화[편집]


국가보훈처는 2010년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월보상금을 평균 5%인상하는 내용의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에 따라 국가유공자 보상금을 5% 인상하기로 하면서 2009년보다 1,100억원 늘어난 2조 6,000억원이 50만명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60세 이상의 무공 수훈자에게 지급하는 무공영예수당은 1만원, 6.25전몰군경의 자녀에게 지급하는 수당은 15.2~17.6%씩을 인상하기로 했다. 건국훈장 1~3등급에 해당하는 애국지사는 매월 받는 386만 1,000원에서 405만 4,000원으로 193,000원이 인상된다. 또 상이등급 1급 1항에 해당하며 60세 이상인 상이군경은 보상금, 간호수당을 포함한 월 399만 4,000원에서 409만 3,000원으로 99,000원 인상됐다.

국가유공자 중 최저 상이등급인 7급 대상자는 매월 15,000원 많은 309,000원, 최고 등급인 1급 대상자는 매월 99,000원 많은 3996,000원을 받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전몰 및 순직유족 보상금을 7% 인상하고 중상이자 특별수당을 신설하는 등 안보희생자에 대한 보상도 강화하였다. 2011년부터 상이1급 중상이자에게 매달 94,000원(1급3항)~312,000원(1급1항)의 특별수당이 지급되었다. 전몰 및 순직유족 보상금도 7% 인상돼 월 100만원을 지급하게 되었다. 종전에는 유족 유형을 구분하지 않고 보상금을 일괄적으로 지급했으나 2011년부터는 전몰 및 순직유족 보상금이 일반유족(4% 인상)보다 우대 인상되었다. 저소득(3인 기준 월 155만 5,500원) 보훈대상자에게 지급되는 생활수당도 9만~20만원에서 15만~25만원으로 상향 조정됐다. 6.25참전 유공자에게 제공되는 참전명예수당은 월 9만원에서 12만원, 무공영예수당은 월 15만원에서 18만원으로 각각 인상하였다.

동시에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와 고엽제 후유증 2세 환자에게 장애등급에 따라 지급하는 수당을 평균 5% 인상토록 하는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도 처리했다.



3.1.6.3. 천안함 전사자 예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천안함 피격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사건이 터진 이후 특별담화에서 천안함 희생장병을 잊지 않고 평생 예우할 것이라 하였고, 실제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매년 천안함 용사 묘역을 찾아서 애도하였고 8주기 부터는 구속수감으로 인하여 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예우를 지속하고 있다.
1주기 2주기 3주기 4주기 5주기 7주기 8주기[1]

이후 2023년에 특별사면이 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러면서 사면 후 첫 공식일정으로 2023년 3월 22일에 서해 수호의 날을 맞아 5년만에 참배를 했다.


천안함 침몰 후 눈물흘리며 추모연설을 하는 이명박 대통령
"명령합니다 그리고 약속합니다" 연설


천안함 묘역 찾은 이명박


3.1.6.4.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예우[편집]

2008년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서해교전이라 불리었던 명칭을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시키고 해군이 주관하던 행사를 국가가 직접 주관하는 행사로 격상하였다. 당시 다른 해군 관계자는 “사전적 의미와 교리적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교전’은 육지 등에서 발행하는 소규모 전투를 일컫는 용어로 ‘해전’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 해군의 대체적인 여론”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 그 후 2012년 6월 29일 이명박 대통령이 연평해전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전사상자 보상 문제에 대해서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에 대한 보상을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했으나 # 국방부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대해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씨는 "대통령이 지시한 것을 국방부가 못해주겠다는 것은 직무유기이고, 대통령은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명백한 전사 장병들에게 예우를 못해준다는데 누가 군에 충성을 하고 목숨을 바치겠냐"며 "다른 유족들과 협의해 국방부에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20대 국회에서[2]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2017년 12월 29일 국회를 통과하여, 2018년 1월 16일 공포되어, 7월 17일 시행되었다. 이로써 기존의 '순직자'에서 '전사자'로 규정됐으며 2018년 7월 3일 청와대가 국무회의에서 제2 연평해전 전사자에게 추가 보상액을 지급하는 절차를 정한 ‘제2연평해전 전사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의결함으로써 추가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중사의 아버지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 아이들이 마음의 밖으로 나온 것 같아 기쁘고 자랑스럽다”며 “과거 정권 때는 우리 아이들을 쥐구멍에 감춰놓은 식으로 대해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도 “해사는 우리 아이의 모교이자 나의 모교인데 아들 동상이 모교에 세워져 영광스럽다”며 “후배들이 보고 배울 수 있게 흉상이 학교에 설치될 수 있게 노력해 준 해군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전사한 박동혁 병장의 가족도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감격의 뜻을 전했다.“이제야 제대로 대접… 고맙다, 고맙다”

윤영하함을 둘러본 뒤 유족들을 위로하는 이명박


3.1.7. 대한민국 최동단 독도 방문[편집]


2012년 8월 10일 오후 2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이후 현직 대통령 최초로 독도를 방문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그곳에서 "독도는 진정한 우리의 영토이고, 목숨바쳐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긍지를 가지고 지켜갑시다"라는 말을 남겼다.


독도의 한국령 암각을 만지는 이명박 전 대통령


독도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

3.2. 외교에 대한 평가[편집]


현대건설 사장과 서울특별시 시장의 경험을 가졌던 이명박 대통령은 탁월한 친화력으로 재임기간동안 수 많은 외교인사들[3]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러한 이명박의 능력은 이명박 정부의 외교력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이후 네티즌들로부터 인싸(insider)라는 별명을 얻게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서로를 브라더(Brother)#라고 부르는 절친사이로 알려져 있고#, 부시 대통령과는 퇴임 후 여러 차례 만나고 함께 골프까지 칠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UAE의 무함마드 대통령과는 형제국가관계를 계기로 의형제 사이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다#. 호주의 케빈 러드 총리는 이 대통령을 "명박"이라고 부르는 사이로 알려져 있고, 줄리아 기라드 총리와도 재임기간 동안 외교적으로 여러 차례 만나 깊은 친분관계를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출국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뒷모습


당선 축하를 위해 방문한 해외 특사들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대화하고 농담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이명박 당선인과 힐 차관보의 대화 번역

이명박 당선인 "Oh! (Clap) Oh, How are you? (오! (박수) 오~ 잘 지냈어요?)"

힐 차관보 "Nice to see you again! (오랜만입니다)"

이명박 "Good to see you! (반가워요!)"

힐 "You are working very well! Congratulations! (열심이시던데요!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명박 "Thank you! and you are welcome (고마워요! 환영해요)"

...

이명박 "Shakehands again? Thank you! (악수 다시? 사진 감사합니다!)"

...

이명박 "When you stayed here, we met your daughter. Is she in State? (예전에 왔을 때, 딸도 만났었는데, 지금은 미국에 있나요?)"

힐 "Yeah, she went back to State and she finished her degree from W college (네, 딸은 미국에 가서 W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명박 "Oh, I see! (오 그렇군요!)"

힐 "So, she is now working at Boston (그리고 지금은 보스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Working at Boston? (보스턴에서 일한다고요?)"

힐 "Yeah. Working at Boston and still ice-skating (네. 보스턴에서 일하고 있고, (다 컸는데) 아직도 스케이트를 탑니다)"

...

힐 "He (President Bush) was very very pleased with his phone call with you. He commented about golf. Right? (부시 대통령께서 이 당선인과의 통화에 대해서 정말 너무 좋아하셨어요. 골프 얘기도 하셨고요. 알고 계시죠?)"

이명박 "Everyday I talked about it (내가 맨날 그 얘기했었거든)" ||



"인싸 이명박" 별명을 소개하는 보도


국민에게 경제외교에 대해 설명하는 이명박 대통령
"우리 정부에서 마련한 먹거리가 다음 정부의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연설


3.2.1. 한-미동맹 복원 및 강화[편집]


한미관계가 급격히 개선된 원인은 물론 부시 행정부의 계산적인 의도와 한반도 주변 여건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발휘했던 특유의 개인적 친화력과 같은 이익 공유도 중요한 요소였다. 한미 정상간의 관계는 곧 이어진 미국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최상이었으며 이를 반영하듯 퇴임 이후 부시와 오바마 전 대통령 모두 이명박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기사1 기사2


3.2.1.1. 부시 행정부[편집]

2008년 한미정상회담 (캠프 데이비드)

이명박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골프카트 대화 번역

부시 대통령 "Do you want to drive? (너가 운전할래?)"

이명박 대통령 "Oh! Can I drive? (오! 내가 운전해도 돼?)"

부시 "Yeah, you got it (당연하지)"

이명박 "Okay, I'll try! (그래, 해볼게 그럼)"

부시 "Afraid of my driving (내가 내 운전실력을 못 믿어서 그러는거야~)"

이명박 "Who's the guest? (도대체 누가 손님인거야?)"

부시 "Fine drive! Fine drive!" (운전실력이 좋아! 아주 좋아!)"

한미동맹을 위해 노력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참여정부 때의 한미관계는 이혼관계[4]라는 평가를 들었고, 사실상 한미관계가 파탄 그 자체였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외교는 대미외교의 복원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이제는 한국을 믿을 수 있으니 정보를 주겠다"라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였다.기사

덕분에 한미관계의 복원과 함께 다시 밀월관계를 과시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대일외교에서도 한국이 주도하는 입장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미국의 전략에 편승의 형태의 합의를 이루게 된다. 특히 천안함 피격사건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위기상황에서 한미관계의 협력은 가장 잘 두드러지는 모습이 되었다.

그 까다로운 미국 방문 비자 면제 프로그램 가입도 이명박 대통령의 한미관계 핵심 업적이다.

행사장에서 만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이명박 정부가 가장 중요한 외교적 과제 중 하나로 ‘창조적 한·미 동맹’을 설정한 것은 미국의 안보·군사전략 변화, 중국의 부상 등 동북아 안보환경 변화 속에서 단기적인 안보현안에 대한 대응뿐 아니라 미래 수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나갈 필요가 있다는 전략적 인식 때문이었다. 이명박정부는 21세기 도전에 능동적인 대응을 위하여는 한·미 양국이 동맹으로서 위협에 대한 공동 인식( ’무엇에 대한 동맹인지 ’)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공동비전(’무엇을 위한 동맹인지 ’)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고, 출범 직후부터 한·미관계의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발전기반 구축을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클린턴 부부와 소통하는 이명박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한미동맹의 미래 지향적인 발전이 한반도의 안정 및 북한·북핵문제 해결에 매우 긴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한·미 FTA 발효와 저탄소 녹색성장 협력 등을 통한 상호 공동번영 추구, 동북아 지역 내 평화와 안정에 대한 한·미 동맹의 건설적 역할과 입지 제고,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다양한 도전에 대한 한·미 간 협력 강화는 양국공동이익의 확대·발전으로 직결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한·미 동맹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는 동맹의 효용성과 발전 필요성에 대한 양국 국민들의 인식과 체감도의 제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인식 하에 한·미 동맹의 미래발전 방향을 동맹 미래비전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이를 구체화시기 위한 노력을 임기 내내 활발하게 전개하여 나갔으며, 미국의 정치적 환경변화를 고려하면서 단계별로 전략적으로 진행되었다.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반갑게 인사하는 이명박
우선 2008년 정부 출범 당시에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마지막 해였던 점을 감안, 한·미 간 신뢰관계를 공고히 회복하면서 21세기 한미 전략동맹 발전 추진에 대한 미국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새로운 미래지향적 발전기반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무기구매(FMS: Foreign Military Sale) 지위 격상, 미국 비자면제프로그램(Visa Waiver Program) 가입, 대학생연수취업프로그램(WEST: Work, English Study and Travel) 신설 등을 조속히 완결지어 동맹 발전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집중하였다.

퇴임 후 제주도에서 보자는 약속을 지킨 부시 대통령#

3.2.1.2. 오바마 행정부[편집]

파일:이명박 오바마 태권도.jpg
함께 태권도하는 오바마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가장 절친한 외국 정상 5인 중 하나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꼽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말 미국 대선 및 오바마 행정부 출범과정에서부터 차기 미 행정부와의 협력관계를 조기에 구축하고, 오바마 신 행정부 출범과 함께 한·미 전략동맹 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적극 경주한 바, 2009년 6월 동맹미래비전 채택을 통하여 한·미 전략동맹의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한·미 간 주요 현안과 상호 관심 사안에 대한 서로의 의견과 정책을 긴밀히 조율하여나갔다.

이러한 한·미 간 긴밀한 공조와 협력은 대북 정책 측면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바, 한·미 양국은 2009년 중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실험에 대하여 찰떡공조로 평가받은 긴밀한 조율을 통하여 대처하는 한편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및 추가 미사일 발사 등 계속된 도발과 김정일 사망 및 3대 세습으로 야기된 한반도 정세변화에 대하여 원칙에 입각한 전략적 대응을 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견인하여 나갔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변화하는 안보 환경을 감안하여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확고히 하여나가는 노력도 지속 경주하여 나간 바, 양국 간의 제고된 신뢰와 공조를 기반으로 미측과 전작권 전환 시기 조정에 관한 협의를 통하여 2010년 6월 양국 정상은 토론토 G20 정상회의 계기 회담시 기존 2012년 4월 17일로 되어있던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 1일로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울러 새로운 전작권 전환 시기에 맞춘 포괄적인 동맹현안 점검 및 관리 계획(전략동맹 2015)을 채택·이행하여나감으로써 안보태세를 공고히 하는 가운데 전작권 전환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동맹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물적 토대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점증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비와 전략적 억지 태세를 더욱 강화하여 한·미 간 공조 하에 북한의 핵 및 재래식 위협에 대하여 핵우산·재래식 전력 및 미사일 방어능력 등 여타수단으로 확장억지(extended deterrence)를 제도화하였으며, 2012년 10월에는 오랜 현안인 미사일 지침 개정 등을 통하여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1년 10월 11일부터 16일까지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펜타곤을 방문했다. 또 한국 국가원수로는 다섯 번째로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한미 FTA 체결의 의미와 미래지향적인 한미 동맹을 강조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디트로이트 자동차산업단지로 안내하고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도 방문했다.

백악관 환영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이명박 대통령 소개

오바마 대통령 "배가 고파서 물로 배를 채우고 독재에 항거하다 감옥에도 간, 자신의 삶과 나라의 운명을 함께한 지도자를 환영하고자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디트로이트 방문

디트로이트 방문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이명박 대통령 소개

오바마 대통령 "(디트로이트 프로야구모자를 쓰고 온 이명박을 가리키며) As you can see, President Lee is a pretty good politician (보시다시피, 이명박 대통령은 탁월한 정치인입니다)"

청중들 "(환호와 박수)"#


뉴욕타임즈의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 평가

For a visiting head of state (미국을 방문한 국가원수 중), the carpet does not get any redder than that (이보다 더한 환대는 없을 것이다), and it suggests that there may be something mysterious and powerful at play between Mr. Obama and Mr. Lee (이것은 오바마와 이명박 사이에 무언가 신비롭고 강력한 교감이 있기 때문이다): Call it a presidential man-crush (대통령 크러쉬라 할 수 있겠다).#


G20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이명박 대통령 평가

오바마 대통령 "My personal friendship with President Lee and my admiration for him continues to grow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나의 우정과 존경은 계속 커지고 있다)."#


빅터 차 전 부시 행정부 아시아 고문의 평가

빅터 차 고문 "When Obama deals with foreign leaders, he tends to be very transactional (오바마 대통령은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들을 대할 때, 매우 거래적인 경향이 있다), But there’s absolutely no doubt that he has really connected on a personal level with this leader (하지만 이 지도자(이명박 대통령)와는 그가 개인친분의 수준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사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오랜만에 만난 이명박

백악관 오찬 바이든 부통령 환영사#

바이든 대통령 "힐러리 국무장관과 많은 분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이 '불도저'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겁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요."

바이든 "그 별명을 얻게 된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의 예전 (현대건설 시절) 커리어 중 불도저를 어떻게 하면 개선시키고 더 낫게 운용할 수 있을까를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불도저를 완전히 해체한 후 재조립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바이든 "예전부터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리 놀랍지 않았어요."

청중들 "(웃음)"

바이든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까지 보여준) 그의 끈질긴 인내심과 놀라운 참을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에 전 놀라지 않았습니다.

바이든 "그는 '문제를 너트와 볼트 단위로 분석하여 더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내놓는다'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바이든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까지 달성해 온 성과로 미뤄볼 때 제가 평가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어려움을 극복해 왔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우리 미국이 많은 목표를 파악하고 달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이든 "이명박 대통령께 감사드리고 백악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백악관 오찬 이명박 답사#

이명박 대통령 "바이든 부통령이 설명하신 제 '불도저'라는 별명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보태자면 제가 해체한 것은 캐터필러 사(미국회사)의 불도저였습니다."

청중들 "(웃음과 박수)"

이명박 "심지어 새로 들여온 불도저였죠."

청중들 "(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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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간 4년에 걸친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2012년에는 지난 정부에서 서명된 한미 FTA의 발효를 실현시킴으로써 한·미 동맹을 기존의 군사안보 중심의 동맹에서 경제동맹으로 확대·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한·미 간 협력과 신뢰를 기반으로 2008년 11월 G20 정상회의와 2010년 4월 핵안보 정상회의에 1차 회의부터 참석하고, 2010년 11월 2010 G20 서울 정상회의와 2012년 3월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였으며, 2011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세계개발원조총회를 주최함으로써 국제경제·안보·개발 분야에서의 글로벌 거버넌스 발전에 있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우리의 입지를 명실상부하게 신장하였다.

백악관에서 대화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오바마 전 대통령
이와 같은 이명박 정부의 전략적인 대미외교의 추진의 결과로 구축된 당시 한·미관계는 역대 최상의 관계로 미측으로부터도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11회에 걸친 한·미 정상회담은 한·미 정상 간 두터운 우의와 신뢰를 토대로 주요 현안과 관심사를 시의 적절하게 조율하여온 정상외교의 모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퇴임한 친구 이명박 대통령을 찾아온 오바마 대통령

한국 방문 때 퇴임한 친구 이명박 전 대통령 찾은 오바마 전 대통령

3.2.2. 한-중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편집]



3.2.2.1. 후진타오 주석[편집]

한국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과 이명박 대통령

APEC에서 이명박을 만나 반가운 후진타오 중국 주석
이명박 정부는 한중관계를 중국이 취하는 외교 5단계 중에서 2번째 수준에 속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는데 성공한다. 사실상 중국과 맺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외교관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중국 시진핑 정권 출범 이후 한중관계의 난맥상[5] 등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격세지감.


3.2.2.2. 시진핑 부주석[편집]

한국 방문한 시진핑 부주석과 이명박 대통령


3.2.3. 한-일관계 '미래지향관계' '셔틀외교' 구축[편집]


아키히토 일왕과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총리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직후 일본을 방문하여 일왕, 총리, 그리고 일본시민들을 만난다. 일왕의 한국방문과 관련해서는 "원론적인 면에 있어서는 일왕이 한국방문을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독도와 과거사 등의 해소 없이 미래지향 관계가 가능하겠냐는 의문에 "물론 과거 역사를 우리가 항상 기억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나가는데 지장받아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는 일본이 할 일"이라고 밝혔다. 또 일본 TBS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해서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에서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못 뻗는다'라는 옛말은 틀렸다"면서 자신을 때렸던 옛친구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었다라고 했다.#

일본 방문하여 일왕, 총리, 일본시민들 만난 이명박 대통령
"때린 친구는 기억을 못한다" 연설

농담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아소 다로 총리

이승엽 사인 유니폼을 선물하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이명박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


3.2.4. 한-러관계 강화[편집]


함께 사진 찍는 이명박과 메데베데프 대통령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은 러시아연방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초청으로 2008년 9월 28일부터 9월 30일까지 러시아 연방을 공식 방문하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건설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양국 정상회담에서 1990년 수교 이후 다방면에 걸친 양국 관계 발전을 평가하고,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유익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연방 대통령은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2010년 11월 10일부터 11일까지 대한민국을 국빈방문하였다. 양국 정상은 정상회담을 갖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정신하에 양국관계 발전방안 및 주요 지역·국제문제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였다.

이명박과 메데베데프 대통령이 환담하는 모습

2012년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러 가스관 사업을 위한 협력 체계를 약속했다.

오랜만에 만난 푸틴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3.2.5. 한-EU관계 설립[편집]


이명박 정부의 대한민국은 개별 유럽국가가 아닌 전체 유럽연합(EU)과 무역협정을 맺는 것을 성공시킨 세계 2번째 국가이자[6] 아시아 최초의 국가가 되었으며, 2023년 현재에도 한국은 멕시코, 싱가포르[7]와 함께 EU와 FTA를 체결한 3개국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한EU FTA 협정 주요내용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한EU FTA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6. 한-UAE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형제국가' 구축[편집]


이명박의 초청으로 한국 온 무함마드 왕세자

UAE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우방국으로 이명박 정부부터 양국의 외교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실제로 2021년 아프가니스탄 사태 중 국민을 구출한 미라클 작전과 2023년 수단 내전 중 국민을 구출한 프라미스 작전은 UAE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서 가능했다.# 또한 UAE는 세계 5위 수준의 산유국으로 유사시 우리나라가 원유공급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외교적 관계를 가진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2010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 당시 왕세자가 청와대를 방문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프랑스로 사실상 넘어갔던 바라카 원전을 수주할 당시 수차례 설득했던 당사자가 당시 왕세자였던 무함마드 대통령이었다. 양국 관계를 상징하는 ‘형제 국가’라는 표현도 이명박 대통령과 무함마드 대통령의 2009년 통화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이 대통령은 아부다비에서 칼리파 빈 자에드 알 나흐얀 UAE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칼리파 대통령과 함께 모하메드 왕세자의 선친인 고(故) 자이드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 자리에 모하메드 왕세자가 예고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 대통령이 모하메드 왕세자에게 "선친이 하늘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며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덕담했고, 이에 모하메드 왕세자는 눈물을 비쳤다고 한다. 이 대통령과 왕세자가 만난 것은 이번 방문이 처음이었지만, 우리나라의 원전 수주가 어렵다는 사실이 전해진 뒤 6번이나 전화 통화를 하며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이 대통령이 현대 시절부터 수많은 입찰을 경험한 특유의 세일즈 감각으로 왕세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당시 모하메드 왕세자는 첫날 아부다비 국제공항에 나와 이 대통령을 직접 영접한 데 이어 귀국길에 오르는 이 대통령을 비행기 앞에서 배웅했다. 그는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까지 보였고, 이 대통령도 모하메드 왕세자가 여전히 공항에 서있다는 보고를 받고 기내 좁은 창문을 통해 답례하는 성의를 나타냈다.#

이러한 친분 덕분에 아랍에미리트는 유사시에 우리나라 전체가 7일 동안 사용하는 원유 소비량인 600만 배럴을 우리나라에 무상으로 비축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의 UAE 국빈 방문 때도 무함마드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의형제 이명박의 손을 잡고 안내하는 무함마드

무함마드 대통령과 UAE원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무함마드 대통령 초청으로 UAE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3.2.7. 한-호주관계 강화[편집]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청와대와 2009년 태국 후아힌에서 ASEAN+3/EAS 정상회의에서 케빈 러드 호주 총리와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 핵문제 해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일괄타결(Grand Bargain) 방안을 설명하였으며, 러드 총리는 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습니다.

공동기자회견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러드 총리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참석차 방한한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를 미리 청와대로 초청,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이 현재 추진 중인 한-호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조기에 타결되도록 협의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또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의 협력과 양국의 협력증진 방안, 지역 및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등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두 정상은 또 양국 관계의 심화·발전을 위해 제반분야에 걸친 실질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데도 인식을 같이 했다.#

이 대통령은 회담에서 "한국과 호주는 우방 중 우방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6·25 전쟁 때도 그렇지만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문제가 있을 때 항상 한국을 지지해줬다"며 "그런 점에서 우리 국민은 호주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갖고 있다"고 인사했다. 이어 "이번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호주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지해 성공적인 회의가 되도록 도와줘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길라드 총리도 "내일은 특별히 한국전에 참전한 호주 전사를 기리는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며 "G20 회의 준비 과정에서 보여준 리더십을 축하하며 서울 회의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것으로 생각하고, 특히 개발의제가 포함된 것은 앞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줄리아 길라드 총리를 안내하는 이명박 대통령

2011년 아세안+3(동남아국가연합+한·중·일)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이 대통령은 줄리아 길라드 이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외교·국방장관 간 2+2회담'을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정상회담에서 발생했던 볼뽀뽀사건이 유명하며, 두 정상의 관계가 더욱 각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길라드 총리의 호주는 이명박의 재임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외교국방정책과 궤를 같이하는 우방국의 역할을 해주었다.

볼인사 중 립스틱이 묻어 미안해 하는 길라드 총리 (위)
할꺼면 제대로 하라고 농담하는 이명박 대통령 (가운데)
진짜로 다시 볼뽀뽀를 해주는 길라드 총리 (아래)

퇴임 한 친구 이명박 대통령을 찾은 러드 전 총리


3.2.8. 우방국 확보[편집]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기간동안 수 많은 해외인사들과 소통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그들과 단순한 외교적 관계를 넘어서는 깊은 개인적 친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외국정상을 만나던지 상대방에 대한 정보(성장배경, 가족, 관심사, 필요, 상대국의 뉴스 등)를 철처하게 숙지하고 만났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친화력 덕분에 국제정상들 사이에서 유명한 존재가 되었고, 재임기간 동안 수 많은 국가들의 초청을 받았다. 덕분에 그들은 국제무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의견에 꾸준한 지지의사를 보여준다. 이러한 이명박의 외교력이 그의 재임기간 동안 대한민국에 이득이 되는 국제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가 많다. 퇴임 후에도 이명방 대통령이 그들과 꾸준히 소통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끈끈한 친분관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언제 다시 이 사람(외국 정상)을 만날 지 모릅니다. 그래서 5초를 만나도 나를 잊을 수 없도록, 아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을 잊을 수 없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야만 나중에 한국을 한번이라도 더 챙겨주지 않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 남미 순방중 #


디트로이트에 함께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

의형제인 이명박 대통령과 포옹하는 무함마드 대통령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반갑게 손깎지하는 이명박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오랜만에 만난 이명박

쯔언 떤 상 베트남 주석의 초청을 받은 이명박

이명박이 국제회의 쉬는 시간에 찍어준 잉락 태국 총리(위)와
길라드 호주 총리의 사진(아래)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이명박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 초청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

한국방문 때 이명박을 찾은 얀 발케넨더 네덜란드 총리

만찬장에서 싱 인도 총리와 대화하는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내외 배웅하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내외

손 잡고 마르티넬리 파나마 대통령을 안내하는 이명박

절친 이명박과 청와대에서 비공식 산책하는 오바마

3.2.9.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영향력 강화[편집]


평창올림픽 유치, 최초의 대한민국 주도 국제기구 GGGI 출범과 함께 제 5차 G20 정상회의와 50여개 국가가 참가한 제 2차 핵안보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 의장국이 되어 국제 회의를 주도하고 정상 선언문을 발표하여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간 우호적 관계를 넘어서, 많은 국제사회의 지도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만들어낸 이명박 대통령의 친화력과 외교술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3.2.9.1. 평창 올림픽 유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유치과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8 평창올림픽 유치 프리젠테이션하는 이명박 대통령
"우리는 여러분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We will make you proud)" 연설

2010년 벤쿠버 올림픽 선수단을 환영하는 이명박 대통령


3.2.9.2.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편집]

2010년 10월 2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아세안 + 3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이를 계기로 한중일 정상회의도 열렸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이명박 대통령이 한중일 역내협력을 위해 중일 양국에 제안하면서 만들어진 회의이다. 당시 센카쿠 해역에서 중국어선이 일본 순시선에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졌고, 중국은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금지시키는 보복조치를 한 상황이었고 중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의장으로서 이 회의를 주재하며 원자바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중일 양국의 골칫거리였던 희토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와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손을 잡아끌어
맞잡게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이명박 대통령


3.2.9.3. G20 정상회의 개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0 G20 서울 정상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외신들도 감탄한 G20 대한민국 소개영상

2010년 서울에서 열린 2010 G20 서울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는 아시아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비영어권 국가 중 최초로 이뤄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11월 11~12일 이틀간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서울정상회의에서 우리나라는 기존 정상회의 합의사항을 성공적으로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가교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이행하였을 뿐아니라 주도적으로 신규의제를 제시해 향후 논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너무 미국의 페이스로 가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어 합의에 이르는데에 난항이 예상됐었다.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수 많은 양자회담과 전화외교를 진행했고, 만찬장에서 이 대통령이 정상들에게 "오늘 바로 정리가 돼야 한다. 각국의 세르파(Sherpa. 교섭대표)들을 불러 얘기하고 정상들이 공감했으니 합의할 수 있도록 하자"고 요청해 밤늦게 회의가 소집됐고 결국 합의가 이뤄졌다. 이 대통령의 이런 중재 노력에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효율성을 보여준 회의였다. 각국의 격차도 해소될 회의였고, 이 대통령의 외교력이 컸다"고 평가했고, 영국과 독일 등의 유럽 정상들도 이 대통령의 주장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이런 적극성을 보이고 이를 성과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상들과의 '친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알려졌다.#

서울정상회의에서는 우선 G20의 정책공조 방안과 개별국가별 정책약속들을 종합한 ‘서울액션플랜(Seoul Action Plan)’을 마련해 세계경제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환율정책에 대한공조방향에 합의하고, 글로벌 불균형 완화를 위한 새로운 모멘텀을 제공하였다. 또한 은행자본·유동성 규제(Basel Ⅲ) 및 체계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SIFI) 규제를 채택하고, 금융시스템 차원의 리스크 관리를 위한 거시건전성 규제와 신흥국 관점의 규제개혁 과제 등 새로운 이슈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국제통화기금(IMF)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쿼터 및 지배구조 개혁을 달성하고, DDA 협상의 조속한 종결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표명해 막바지 협상을 앞당기는 성과를 도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는 외부충격으로 인한 급격한 자본유출입 변동성에 대응하는 글로벌 금융안전망을 구축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최초로 개도국의 빈곤 및 개발격차 해소를 G20의 주요어젠다로 논의하는 등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신규의제를 제시하는 실질적 성과를 내었다. 이를 통하여 국제적 위상 제고를 통한 세계 리더국가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세계경제를 논의하는 가장 중요한 다자간 국제회의라는 G20 회의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퍼 총리와 오바마 대통령에게 같이 사진찍자고 하는 이명박 대통령 (위)
빠른 진행을 요청하는 이명박 대통령 (아래)


3.2.9.4. 핵안보정상회의 개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0년에 열렸던 G20 서울 정상회의로 대표되는 경제분야에 이어 2012년 3월 26일~27일 이틀간 서울 코엑스에서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안보분야에서도 국제 외교무대에서 여러 국가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잘 조율하여 하나의 국제적 합의를 도출해나가는 국제사회의 룰 메이커(rule maker)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선 G20 서울 정상회의의 약 두 배의 규모인 47개국 4개 국제기구가 참석하였는데,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로 기록되었다. 국제회의 규모 중 UN총회를 제외하면 핵안보정상회의만한 규모의 회의가 전무한데, 50여명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본 회의와 핵안보정상회의 기간에 국가별로 열렸던 수 많은 다자회의를 의전 문제 없이 완벽하게 치뤄낸 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양적인 면 외에도 질적으로는 오바마 대통령의 '핵 없는 사회' 기조에 따라 개최된 2010년 제1차 핵안보정상회의의 성과인 워싱턴 코뮤니케와 액션플랜을 계승하였다. 2013년까지 핵무기로 전환 가능한 고농축 우라늄을 자발적으로 축소하기 위한 정치적 합의를 이끌었고, 실질적으로 연구용 원자로에서 핵연료로 전용가능한 고농축 우라늄 원자로를 저농축 원자로로 전환하는 것을 합의하였다. 관련하여 한국과 미국, 프랑스와 벨기에 4국이 저농축 우라늄 공동연구사업을 발표하였다.

IAEA와 국제법에 의해서 유일하게 핵물질과 핵무기를 통제하는 강제성이 있는 개정 핵물질방호협약(CPPNM)의 국가별 비준을 2014년에 각각 발효하기로 협의하였으며, 핵안보 훈련센터 건립 및 더티 밤 방호. 2011년에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 사고와 핵안보의 상관관계 논의로 핵물질의 통제와 감축, 방호내역을 협의한 서울 코뮤니케와 서울 액션플랜을 발표하여, 의장국으로서의 국제사회의 신뢰할 수 있는 회의진행능력을 인정받았고, 국제 외교무대에서 세계 리더국가의 하나로서 위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2012 서울핵안보회의에서 세계 정상들과 농담하는 이명박 대통령


3.2.9.5. 글로벌녹색성장기구 설립[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글로벌녹색성장기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는 2010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대통령령으로 싱크 탱크로 출범하였으며, 2012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유엔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 공식 국제기구로 인정받았다. 세계의 많은 국제기구들 중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주도 하에 출범한 국제기구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

2012년 글로벌녹색성장기구 출범을 위해 브라질 리우를 방문한 이명박


3.2.10. 외규장각 의궤 반환 성공[편집]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성공하였다. 일부 네티즌들의 헛소문으로는 TGV 고속철도 계약의 반대급부로 이뤄낸 굴욕외교라고 깎아내리는 이야기들이 돌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17년간의 지지부진한 상황을 타파한 외교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참고1 참고2

외규장각도서 이관 관련 정부간 합의문 서명#

또한 조선왕실의궤 반환에 성공 하였다. 혜문 스님과 이명박 정부의 노력으로 일본으로부터 모두 환수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측은 일부는 자신들이 직접 구입한 목록도 있었으니 부분 반환에 합의한다고 하였지만 결국 <무신년진찬의궤>(궁중잔치기록집) 1종 4책까지 막후 협상 끝에 모두 돌아오게 되었다.

외규장각 의궤 귀환 환영대회


3.3. 경제에 대한 평가[편집]



3.3.1. 무역 1조 달러 달성[편집]


이명박 정부 당시 2011년 12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번째 무역 1조 달러 달성의 신화를 썼다. 아울러 2012년에도 2년 연속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였다. 해방후 67년 만에, 그리고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행 이후 50년 만에 수출은 1만 배, 무역은 2,000배가 증가하여 수출 5,000억 달러와 무역규모 1조 달러를 이루어 낸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무역이 줄어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무역 1조 달러 클럽 진입에 성공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으며 미국, 독일, 일본과 같이 주로 3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들이 달성한 위업을 세계 9번째로 달성하였다. 특히 수출과 수입이 비슷한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세계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열린 무역대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역규모는 1970년 세계 33위, 1980년 세계 19위 수준에서 1990년대 들어와 12~13위로 크게 성장하였다. 이명박 정부 들어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도약하여 2010년 이후 세계 9위로 상승하였고 2012년에는 이탈리아를 제치고 세계 무역 8강에 최초로 진입하였으며, 수출 규모로만 보면 G7의 일원으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였다.

무역 1조 달러와 50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이명박 정부


3.3.2.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과 한미중일 통화스와프 성공[편집]


세계 평균 성장률을 밑돌고 선진국 평균 성장률을 웃돌던 노무현 정부와 달리 금융위기 여파로 전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찍을 때 2009년 0.8% 성장을 기록하며 마이너스 성장을 피하고 2010년에는 6.8% 성장을 달성했다. 덤으로 2010년에는 한국이 세계 GDP의 2.1%를 차지하게 되었는데,[8] 이는 현재까지도 한국의 GDP가 세계에서 차지한 비중 중 가장 높은 비중이다.[9]

사실 대침체 당시에는 한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더 경제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재무부는 2009년 한국의 GDP가 -2%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고 한국경제연구원은 -3.7%,[10], IMF는 -4%,[11] 골드만삭스는 한국이 최악의 경우에는 -4.5% 성장까지 기록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심지어 2008년 하반기에는 OECD 회원국 가운데 국제금융 시장에서의 국가부도 위험지수가 4번째로 높았다고 하며,[12] 당시 해외에서도 하나같이 한국이 아시아 신흥국 중 가장 빨리 부도할 가능성이 컸다고 봤고, 전반적으로는 말레이시아태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졌다.[13] 더구나 타국의 사례들과 비교하면[14] 당시 기준으로 선진국에 진입한 지 얼마 안 되었던 한국이[15] 최악의 경우에는 대침체의 직격탄을 맞고 중진국으로 떨어졌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던 상황인 것이다. #

실제로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8년 4분기 한국 경제성장률은 -5.1%였으나 2009년 1분기에는 0.1% 성장을 기록하며 단 1분기 만에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고, 2분기에는 2.6%, 3분기에는 3.2%, 4분기에는 0.2% 성장을 기록했다. # 이렇게 이명박 정부가 역성장 위기를 0%대 성장이나마 달성하며 가까스로 막아냄으로써 이들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고, 한국은 대침체로 큰 피해를 받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16]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08년 이후 세계를 강타한 경제 위기를 이겨낸 국가로 한국과 폴란드, 캐나다, 스웨덴, 인도네시아, 터키, 멕시코를 선정하며 이들 7개국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켰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경우 연구 및 개발(R&D) 지출 확대, 원화 가치 하락 정책에 따른 수출 이익 전략 등을 발판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소개하며 이를 통해 경제위기 극복 뿐만 아니라 삼성, 기아, 현대 등 한국 대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

영어 위키피디아 'Great Recession' 항목에서도 한국은 호주[17]와 함께 선진국 중 거의 유이하게 '경기 침체를 피한 국가(Countries that avoided recession)'로 분류되었다. 특히 대침체 이전 1인당 GDP는 한국과 엇비슷한 수준이던 포르투갈과 한국 이상의 선진국이던 그리스가 대침체를 견디지 못한 끝에 선진국 말단 수준으로 추락한 것을 감안하면 이명박의 대처가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대침체가 몰아치던 2009년 세계 경제성장률을 보면 GDP 순위 Top 20 국가 중 플러스 성장을 기록한 나라는 중국, 인도, 호주, 대한민국, 인도네시아 5개국밖에 없으며,[18] 대침체가 회복기에 들어든 2010년에도 한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은 나라는 Top 20 국가 중 중국, 브라질, 인도, 터키 4개국밖에 없다. 한국 이상으로 대침체를 잘 극복한 국가들이 호주, 이스라엘 외에는 전부 개발도상국이며 개발도상국들이 대침체의 영향을 덜 봤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선진국 중에서는 최상위권 대처를 한 셈이다. 사실 2009년, 2010년 모두 플러스 성장을 기록한 선진국은 한국과 호주 외에도 싱가포르, 카타르, 바레인, 이스라엘, 뉴질랜드도 있긴 하나 이들은 모두 국가 체급이 한국, 호주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다.

당시 한국이 대침체에서 선방했던 것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2015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산업화 이후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위기'로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50%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최근(박근혜 정부) 경기 침체와 저성장은 33.1%를 차지했으나, 2008년 금융위기의 비중은 박근혜 시기 경제 문제의 비중의 1/5 미만 수준인 6.2%에 불과했다. #

물론 이에 대해서는 과거 진보 정권들이 외환보유고를 세계 6위 수준으로까지 탄탄하게 쌓아놨던 것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도 있지만, 한국보다 외환보유고가 더 많았던 일본, 러시아[19], 대만과 한국 버금가는 수준으로 외환보유고를 보유했던 브라질[20]이 같은 2009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는 것을 보면 한국의 선방은 정부의 대처의 영향이 더 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1]

참고자료 주소의 2023을 2009, 2010으로 바꾸면 확인할 수 있다.

전설의 이명박 대통령 한미중일 통화스와프 이야기

이명박의 "단언컨데 한국에 외환위기는 없다" 국회 시정연설

이명박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연설


3.3.3. 세계 6번째 원전 수출국 달성[편집]


UAE와의 지속적인 회담을 통하여 2009년 12월 프랑스를 제치고 원전 수출에 합의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원전 수출 사례이자, 미국, 프랑스, 캐나다, 러시아, 일본에 이어 6번째 원전 수출국이 되었다. 2009년 당시 한국이 아랍에미리트와 체결한 수주 규모는 약 400억 달러(2009년 기준 한화 약 47조원) 규모이며 앞으로의 중동 건설과 원자로 건설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한국형 원전의 경쟁력 비교#


3.3.4. 4대강 정비 사업과 치수역량 증대[편집]


강수량이 특정시기에 집중되는 한반도 기후로 인해 발생하는 잦은 홍수와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유역을 정비하는 4대강 정비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으로 하류로 흘러가는 유량을 조절할 수 있게되어 홍수 발생빈도가 줄어들었고, 가뭄시기에 활용할 수 있는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효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기후위기로 인해 홍수와 가뭄이 많아지면서 이 사업이 우리나라의 치수기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파일:attachment/4대강 정비 사업/4river_map.jpg
파일:4대강사업전후.jpg
4대강 정비 사업 계획도
4대강 정비 사업 전(위)후(아래) 모습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4대강 정비 사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5. 석유·자원 자주개발률 증진[편집]


이명박 정부 시기 자원외교를 통하여 자원 개발률을 증가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석유 자주개발률은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4.2%에서 2012년 13.8%로 대폭 증가하였으며, # 6대 주요 광물인 유연탄, 우라늄, 철광, 동, 아연, 니켈의 자주개발률이 2007년 약 15%에서 2011년 약 27%로 증가하였다. 2010년 해외광물자원 신규 진출 사업은 43개로 전년대비 16개 감소했지만 누적 사업 수는 289개로 늘었다. 2010년 해외광물자원 투자액은 전년대비 157% 증가한 26억 4,000만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당시 투자 회수액도 전년대비 39% 늘어난 5억 5,300만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리튬과 희토류 등 신전략광물 자주개발률도 당초 목표보다 3%포인트 많은 8.5%를 달성했다. #

특히, 2012년 11월 21일 한국석유공사는 UAE 아부다비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UAE 아부다비 왕세자가 참석한 가운데 UAE 국영석유회사인 ADNOC사와 원유 600만 배럴(우리나라 전체 7일 사용량) 규모의 전략적 공동비축사업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은 이전에 체결한 ‘석유가스 분야 협력 MOU’의 후속조치로서 아부다비 원유 600만 배럴을 우리나라 비축시설에 3년간 저장하고 유사시에는 우리나라가 우선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우리나라는 석유공급 위기상황이 발생할 경우 계약물량의 우선 구매권을 확보함으로써 공동비축을 통해 직접 원유 구매·비축에 필요한 정부 재정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게 됐다. 600만 배럴을 재정으로 구매 비축할 경우 당시 유가기준으로 약 7000억원이 소요된다.#

3.3.6. 세계 3위 경제영토 확보[편집]


이명박 정부는 임기기간동안 한EU FTA한미 FTA 등 여러 FTA를 체결 및 추진하였다. 동시다발적으로 수 많은 나라와 교역을 추진함으로서 자유무역 경제영토를 세계 3위 크기로 넓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이명박 퇴임 직후 대한민국 경제영토


3.3.6.1. 한미 FTA 비준[편집]

한미 FTA는 참여정부가 시작해서 협상을 타결했으며, 이명박 정부가 주도적으로 국회 비준 받기 위한 환경을 조성했고, 2011년 발효되었다.

당시 수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미루어 판단해볼 때, 당시 FTA가 대한민국에게 손해가 되었다는 의견은 상당한 어폐가 있었던 것이었다. 당장 미국부터 자국에게 손해가 된다는 판단하에 재협상 압박을 가하고 있고, 심지어 현재 미국은 LG, 삼성을 대상으로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할 것으로 전망된다. 즉, 생각보다 한미FTA가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에 꽤나 큰 호재였음은 자명하고, 대미 무역 흑자도 크게 증가하는 등 대한민국에게 큰 이익이 되주었음이 드러났다. 실제로 한미 FTA는 제프 세션스 공화당 하원의원이 한미 FTA로 미국의 대한 수출은 거의 증가하지 않은 대신 한국의 대미 수출만 엄청나게 늘어 미국의 대한 무역적자가 280% 증가했다며 불평을 표했던 데다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도 "미국이 한국과의 무역협정으로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재검토를 요구할 정도로 한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https://www.yonhapnewstv.co.kr/news/MYH20160503011400038


3.3.6.2. 한EU FTA 비준[편집]

한EU FTA는 참여정부 시기인 2003년부터 검토되어왔고 2006년부터 협상을 시작했지만, 한EU FTA를 성사시키고 체결시킨 것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업적 중 하나이다. 한EU FTA 발효 이후 5개월간 관세 인하가 일어난 품목군에서만 수출이 14.8%(EU 수입통계 기준) 증가, 경쟁국을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기간 EU의 한국 품목 전체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8.5% 감소했지만 FTA로 관세인하 효과가 있는 품목군의 수입은 전년 동기 대비 14.8%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는 같은 기간 EU의 세계 수입 증가율 7.9%는 물론 중국(0.5%), 일본(2.6%), 대만(-4.5%)으로부터의 수입 증가율을 큰 폭으로 앞지른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EU로 수출하는 제트유 등 석유제품, 완성차 및 부품, 인조섬유, 타이어, 조명기기, 모니터 등의 관세가 발효 즉시 철폐 및 인하돼 최대 20배 이상 수출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한EU FTA가 발효된 2011년 7월 이후 EU의 국내 투자 규모도 큰 폭으로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상반기 20억 5,000만달러를 기록했던 EU의 투자는 하반기 29억 8,000만달러로 확대됐으며, 이에 힘입어 2011년 EU의 국내 투자는 2010년 32억달러를 큰 폭으로 웃도는 50억 3,000만달러에 달했다.


3.3.7. 부동산 가격 안정화[편집]


파일:집값.jpg
역대 정부 집값 변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주택 공급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취임 첫해인 2008년 9월 ‘보금자리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서울 강남권 그린벨트를 풀어 내곡동과 세곡동에 시세의 절반 수준인 아파트를 2012년까지 총 32만 가구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당초 목표만큼 완공하지는 못했지만 2012년 첫 입주를 시작해 강남 집값 안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 도심 재개발 사업도 적극 추진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 시작한 뉴타운 사업을 본격화해 은평과 길음, 왕십리, 아현 뉴타운 등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완공했다. 이 때문에 2010년 3만3825가구였던 서울 입주물량은 2014년 5만1452가구까지 늘어났다. MB표 공급 확대 정책으로 전국 아파트 가격은 2014년까지 안정세를 유지했다. 이명박 정부는 시장에 공급을 지속적으로 늘릴 것이란 사인을 줬다.#

이명박 정부는 집값 안정을 바탕으로 규제를 완화했다. 이는 주택 거래 활성화로 이어졌다. 사지도 팔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과는 정반대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서울 강남 3구를 제외하고 투기지역을 해제했다. 양도세를 한시적으로 감면해주고 분양권 전매제한도 풀어줬다. 2010년엔 대출 규제를 풀었다. 강남 3구를 제외한 전 지역에 대해선 은행권 자율로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정하게 했다. 2012년엔 강남 3구도 투기지역에서 해제했고 은퇴자 DTI도 완화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노무현 정부 때 만든 종합부동산세의 규제를 대폭 완화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미국의 부동산 시장 과열로 인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그로 인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하락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더불어 2008년 9월 보금자리주택, 그리고 공급 확대정책을 발표하였고 시장에 적용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크게 하락하여 서울 아파트 중위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기간이 소득 1분위는 48년에서 35년, 소득 5분위는 7년에서 6년의 기간으로 단축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미분양이 속출하는 지경에 이른다.[22] 지가도 이명박 정부 임기 내내 하락하여 총 195조원 하락하였다.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집값을 잡았다고 말 할 수 있는 대통령이다. 이명박 정부가 친기업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부동산 측면에서 보면 친 서민 대통령이리고도 할 수 있을 정도. 시간이 지나 박근혜 정부 때는 이명박 정부 때보다 집값이 약간 오르는 수준이었으나, 문재인 정부 때는 서울 아파트 매매가 평균 13억을 상회하는 수준까지 올랐다. 강남 집값은 20억을 넘겼다. 당시에도 이명박 정부는 부동산정책에 관해서는 긍정평가가 있었으나, 2020년대 들어 이명박의 부동산 정책이 또 다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역대 정부 부동산 정책

3.3.7.1. 보금자리주택 공급[편집]

이명박 정부의 주거안정정책인 보금자리주택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총 10년간, 150만 채의 공공주택을 분양과 임대로 나눠서 공급하는 매더드급 정책이었다. 보금자리주택 정책은 국민 모두가 집을 '소유'한다는 국가적 목표를 갖고 탄생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비싸게 주택을 공급하는 민간에만 주택 공급을 맡기지 않고,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활용하여 공공주택을 저렴하게 공급함으로써 누구나 집을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이 구체적 목표였다. 특히 매년 공공 분양이 될 보금자리주택이 연 7만 호, 10년간 총 70만 호에 이르렀다. 당시 연평균 25만 호 수준으로 민간 분양을 하던 상황에서 보면 보금자리라는 이름의 공공 분양은 총 분양의 30%에 이르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리먼 사태로 거시경제가 침체에 빠진면도 있지만 게임체인저급의 보금자리주택 공급량은 집값 상승을 막았다.


3.3.8. 나로우주센터 준공[편집]


나로우주센터는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 507만㎡(약 150만 평) 부지에 건설된 우주센터로 2000년 12월 착공한 지 8년 6개월 만에 완공했다. 3124억원이 투입됐다. 이 센터 건립으로 한국은 우주센터를 가진 13번째 나라가 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나로우주센터 준공식에 참석, 격려사를 통해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의 힘으로 우주시대를 여는 세계 7대 우주 강국이 되도록 할 것”[23]이라고 말했다. 또 “1990년대 초반 한발 늦게 우주개발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며 “오늘 이 우주센터의 준공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이 한 단계 높아졌음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만간 우리는 우리 자체 기술력으로 우주로, 달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간 습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고유의 한국형 발사체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로우주센터 준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3.3.9. 국가경쟁력순위 갱신[편집]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매년 평가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한국은 2010년 23위로 오르는 덕에 역대 최고 순위에 올라 일본을 추월하였다가 # 2011년엔 한 계단 더 상승한 22위를 기록해 다시 한번 역대 최고 순위를 갱신하였다. 이후 임기가 끝나는 2012년까지 22위를 유지하였다. #


3.4. 교육에 대한 평가[편집]



3.4.1.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 실시[편집]


이명박 정부는 전국적인 초중고 학업성취도 평가를 실시하여 학생들의 학습수준을 확인하고 점검하였다. 또 대학들이 수능점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좋은 교육없이 좋은 인재를 기대할 수 없고, 좋은 인재없이 좋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연설


3.4.2. 고졸취업 개선[편집]


마이스터(장인)고등학교를 출범시키며 고졸의 취업문을 열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고교 졸업하면 누구나 대학 가려 해 이러다 보니 취업률 낮을 수밖에”라는 말을 남기며 독일식 교육제도를 벤치마킹하며 취업시기를 보다 앞당기기도 했고 기형적인 대학진학의 문제를 약간이나마 해소시켰다. 마이스터고도 고졸로서의 애환이 존재하지만, 이전에 고졸이 받던 대우와 비교하면 사회적 지위가 다소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24] 뿐만아니라 공기업 고졸자 취업률도 24%로 최고치를 달성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이후 찬밥신세를 받고있고 이를 예방하고, 마이스터고교와 고졸취업개선이 장기적으로 이루어 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과학자, 마이스터고등학생, 벤처기업인, 세계에서 활동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이명박 대통령
"도전합시다" 연설

이명박 대통령의 마이스터고 첫 졸업식 연설
"여러분들이 마이스터로 우뚝서는 그 날 대한민국도 선진일류국가로 확고히 서게 될 것입니다"


3.4.3. 교련 완전 폐지[편집]


교련은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과목으로 박정희가 전국민 모두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국가에 충성하게 만들기 위해 만든 과목이다. 하지만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종식되고 대통령 직접선거 등 군국주의 물이 빠졌기 때문에 교련 과목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1987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되고 있던 교련은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에 2007 개정 교육과정을 적용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교련 과목의 폐지는 매우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권위주의 국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3.4.4. 대학구조조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학구조조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명박 정부는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제도를 실시했는데, 수치화된 평가 기준을 도입하여 대학을 평가한 후 부실하게 운영되는 하위권 대학에는 정부 재정 지원 및 학자금 대출을 제한하는 제도이다. 이를 통해 부실대학(깡통대학)을 없애기 위한 포석을 놓았으며, 이 역시 바로 위의 마이스터고 정책과 연결되는 정책이다. 즉 쓸데없이 돈만 축내는 대학을 없애서 기술 배워서 학생들 먹고 살게 하자는 것이 당시 의도. 직전 정권에서 폭등한 등록금 인상폭을 줄이고 각 대학에 인상자제 권고를 직접 내린 것도 이명박 정부의 큰 성과 중 하나다. 물론 직전 정권 이전 수준으로 큰 폭의 인하는 없었지만 저축은행 대출금리 수준의 높은 인상률[25]을 1~2%대로 낮추었거나 오히려 단돈 몇만 원이라도 인하하게 된 것은 이명박 정부의 큰 공이다.


3.4.5. 한국장학재단 설립[편집]


저소득층 대학생에 대한 학자금 지원을 하는, 교육부 산하 위탁집행형 준정부기관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저소득층 대학생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정부에서 만든 재단이다. 이 상품의 이자율은 연 1.7%이며, 이것보다 저렴하고 한도가 높으면서, 재직 증명도 필요없고 상환기간까지 10년 이상으로 긴 무담보 대출은 사회에는 절대 없다. 그리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점 관리를 잘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학업의 목적을 전도시킨다는 또 다른 문제를 갖는다. 그래도 학점 관리 안 하고 노는 것보다는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되긴 한다. 인재육성사업으로 다양한 경험이 가능하다. 또 '개인별 신용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본인의 신용등급 관리에 이익이 될 수 있다.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대출은 정부에서 보증하는 은행권 신용대출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연체 없이 이용한 이력만 잘 유지하면 신용등급이 점차적으로 상승해갈 것이다.


3.4.6. 수능시험 점수제 환원[편집]


노무현정부에 시행되어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 수능 등급제를 다시 점수제로 되돌려 입시 정상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변경으로 2009학년도 수능 응시자들(대부분 90년생)에게 혼란을 초래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등급제 수능이 예고되어있었고, 내신 및 모의고사도 등급제로 시행되었으나 수능이 얼마남지않은 시점인 3학년 때 제도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능등급제를 그대로 끌고 갔다면 더 큰 혼란을 초래했을테니 '차라리' 이게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3.5.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편집]


"공직자의 탈세, 예산낭비, 횡령은 범죄다" 연설


3.5.1. 출산율 증진[편집]



이명박 정부의 출산율은 직전인 노무현 정부에 비해 상승하여, 2008년 출범당시 1.19명에서 2012년에 1.30명 까지 상승했다.[26] 이후로 박근혜 정부에서는 2015년까지는 출산율이 소폭 상승했지만 2016년에는 출산율이 소폭 감소했고, 2017년에는 2005년의 역대 최저기록을 경신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서는 2018년 0.98명으로 0명대로 진입하고 임기내내 한번도 반등시키지 못했으며 2022년에는 합계 출산율 0.7명대라는 충격적인 수치를 기록하면서 대한민국은 현재 전 세계 최악의 저출산 국가다.


3.5.2. 아동안전[편집]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2007년 성탄절에 발생한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피해 어린이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한달 남짓 앞둔 2008년 3월에 수원의 한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자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 특히 딸을 둔 엄마들의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아동안전 문제가 18대 총선 최대의 이슈가 되었다. 초등학교 주변에 아동안전지킴이집이 다수 지정되었고 초등학생 핸드폰 보급률이 급증했다. 이렇게 부모들의 불안감이 고조되어 갈 때 일산의 어느 아파트에서 초등학생 여자어린이가 성범죄 전과자에게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명박 대통령은 바로 직접 일산경찰서로 찾아가 관계자들을 매우 강하게 문책했고,[27] 범인은 몇시간 후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서 검거되었다. # 이명박의 이러한 행보는 서울 및 수도권에 거주하는 젊은 엄마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그것이 그대로 한나라당 지지율로 연결되어 결국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 보수정당 역사상 최고의 압승[28]을 거두었다.

경찰 질책하는 이명박 대통령


3.5.3. 교육 및 취업제도 정비[편집]


독보적인 친기업정책에 힘입어 취업률이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실업률도 OECD, G20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수치였다. 해소하는 과정에서도 양극화와 취업의 질이 어느정도 좋아졌다. 미국, 그리스이탈리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세계 경제 악화의 여파로 청년 실업률이 하늘을 찔렀다는 점과 비교하면 한국은 취업률을 매우 잘 사수한 축에 속할 것이다.


3.5.4. 약사법 개정 및 의료복지 강화[편집]


이명박 정부는 ‘국민 중심의 지속가능한 의료체계’ 구축을 목표로 종합적인 보건의료개혁에 착수하였다. 과잉진료를 유발하는 의료공급체계의 비효율과 낭비요인을 제거하고, 보건의료 수요자의 편익 증진과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가정상비약 약국 외 판매, 불법 리베이트 근절, 포괄수가제 의무시행, 건강보험 약가인하, 의료분쟁조정제도 도입 등을 추진하였다.

의약 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접근도를 구조적으로 제약하는 요인을 해소하기 위하여 2012년 약사법을 개정하여 약국 이외의 장소에서도 가정상비약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건의료서비스 공급체계에 내재된 비효율과 낭비요인을 제거하고, 의약품 등의 잘못된 거래관행을 바로 잡아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편익을 소비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0년 의료법, 약사법, 의료기기법을 개정하여 리베이트 쌍벌죄를 도입하였다.

또한 보건의료서비스 이용에 따르는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2012년 7월부터 모든 병·의원을 대상으로 수정체수술, 편도선수술, 항문수술, 탈장수술, 맹장수술, 자궁수술, 제왕절개수술 등 7개 질병군 입원환자에 대하여 포괄수가제를 시행하였다. 2013년 7월부터는 종합병원급 이상에 대하여도 포괄수가제를 의무화할 예정이다.

국민부담 경감 및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를 위하여 2012년 1월 약가제도를 개편하여 동일 효능 의약품에 동일가격을 부여하는 원칙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2012년 4월 약가 재평가를 통하여 제네릭과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의 가격을 특허만료 전 오리지널 약가의 53.55%로 조정하여 약값을 평균 14% 인하하였다.

아울러 의료분쟁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경감하고 의료사고를 당하고도 신속하게 피해구제를 받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2011년 3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여 의료분쟁조정제도를 도입하였다.


3.5.5. 협동조합기본법 제정[편집]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을 제정하였다.법안보기 협동조합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도 잘 설명되어 있다.협동조합기본법은 유럽 일부 국가와 한국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시기에도 농협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기획재정부가 나서서 협동조합기본법 발의에 나섰고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재가하였다.

당시 민주당인 야권에서도 제정에 찬성하여 협동조합기본법은 한국 헌정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여야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협동조합의 제도화를 적극 추진한 이명박은 가장 협동조합 친화적인 대통령으로 기록되게 되었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협동조합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대선에서도 야당이 패배하고 새누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국회 상황에서, 그것도 정부 주도 하에서 이 법안이 통과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이명박 정부의 역설?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리라 꿈에도 몰랐다"


3.5.6. 2012년 버스 운행 중단 사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2년 버스 운행 중단 사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7. 민주주의 지수 상승[편집]


2006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첫 출범 년도인 2008년에 처음으로 28위로 20위권에 진입하였으며 한국은 이때 처음으로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되게 된다.[29] 2010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2년전인 2008년보다 8단계 오른 20위를 기록하였고 이는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20대 최상위권에 진출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10점 만점에 종합 점수 8.11점을 받아내었다. 이후 2011년에 22위로 2위 하락했으나 2012년에 다시 20위로 올라간다.[30] #


2008년 이명박 대통령 5.18 기념사


3.5.8.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법 제정[편집]


국회에 해당법률 정부안을 제출한 이후 최종적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어 2015년 부터 시행되었으며 시행 4년후인 2019년, 배출권 업체 수가 2018년(586개)보다 24개 늘어난 반면 배출량은 배출권거래제 시행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2.3% 감소했다.
출처


3.5.9. 미디어법 제정[편집]


2009년 방송법, 신문법, IPTV법으로 이루어진 미디어 활성화를 위한 법안을 제정하였다. 대기업과 신문사의 방송사 지분 참여 허용, 종합편성 PP신규 허가, 보도전문채널 허가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 언론중재법, 정보통신망법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 법에 의해 현재의 종합편성채널들이 만들어졌다. TV조선, JTBC, MBN, 채널A 등의 종편의 개국으로 대한민국의 방송 환경을 다양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언론들은 흔히 보수언론으로 불리기 때문에 편향적이라는 지적도 있으나, 방송국을 만들 정도의 큰 규모를 가진 언론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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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부터 구속수감으로 인하여 화환으로 대체하고 있다.[2] 이 특별법은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군인연금법 개정안'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의 '제2연평해전 전투수행자에 대한 명예선양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을 소관 상임위원장인 국방위원장이 통합·조정한 대안으로 통과되었다.# 당시 국회 구성은 더불어민주당 123석, 새누리당 122석, 국민의당 38석, 정의당 6석, 무소속 11석이다.[3] 해외로 출국한 것만 49회로 연 평균 9-10회의 해외 방문을 했다[4] 해당 항목 참고.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다.[5] e.g. 한한령[6] 1번째는 멕시코로, EU-멕시코 FTA는 1997년 체결되었다.[7] 2018년 체결[8] ## #[9] #[10] # 더욱이 한경련은 운이 좋으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최대 -2.6%를 기록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다른 경제연구원들도 한국이 -2%대의 경제성장율을 기록할 것이라고 봤다.[11] #1 # IMF는 G20 회원국 중 한국이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봤다고 하며, 이와 동시에 선진국 평균 경제성장률은 -2%로 잡았다고 한다.[12] #[13] #1 #2[14] 2차 오일쇼크 시기인 1980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6%였으며, IMF 외환위기 시기인 199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5.1%였다. 그리고 2009년 경제 위기 당시 PIGS라고 엮일 정도로 경제적 침체기에 빠졌던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의 성장률이 각각 -3.1% / -3.8% / -4.3% / -5.3%였다.[15] 실제로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은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외에서도 전반적으로는 신흥국으로 분류되었으며,(다만 한국은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실질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했다) 이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였다.[16] 참고로 한국보다 상황이 더 나을 것이라고 평가받던 말레이시아는 -1.5%, 태국은 -0.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17] 한국 이상으로 대침체 대처를 잘 한 유이한 메이저 선진국인데, 실제로 호주는 2009년 경제성장률이 한국의 3배 가량인 2.2%였으며, 심지어 대침체 전인 2008년(1.9%)보다도 높았다! 다만 이는 케빈 러드 총리가 경기 부양을 위해 118억 달러를 지출한 것도 있지만 중국을 위시한 신흥국의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며 원자재 수출을 위한 광업 산업이 호황을 이루었던 것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으며, 심지어 호주는 호주/경제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 '자원의 축복'을 가장 톡톡히 보는 나라 중 하나이다.[18] Top 50까지 꼽아도 이란, 폴란드, 나이지리아, 콜롬비아, 이스라엘, 이집트, 싱가포르, 파키스탄, 필리핀, 알제리 15개국이 전부이다. 이스라엘과 싱가포르, 폴란드를 제외하면 전부 명백한 개발도상국들이다.[19] 참고로 러시아는 2009년 경제성장률이 -7.8%로 대침체에 가장 큰 직격탄을 맞은 메이저 국가였다.[20] 2009년 경제성장률이 딱 -0.1%였다.[21] 대만[22] 부동산 규제 완화 등을 골자로 하는 박근혜정부의 초이노믹스로 부동산 광풍이 시작되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소득 1분위는 72년의 기간, 소득 5분위는 10년의 기간으로 돈을 모아야지만 집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대폭 증가하였다.[23] 우리 기술로 완성된 첫 우주 발사체 누리호가 두 번의 도전 끝에 발사에 성공하면서 대한민국이 세계 7대 우주 강국으로 도약했다. 이와 함께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24] 아이러니하게도 고졸의 취업률은 올라간 반면에 대졸의 취업문이 좁아졌다는 역차별 문제도 제기되기도 한다.[25] 당시 입대 휴학시 등록금 안 내고 휴학하면 바보 소리 듣던 시절이었다.[26] 다만 2010년부터 2012년까지의 비교적 높은 출산율은 각각 백호, 백묘, 흑룡띠 출산 붐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있다. 물론 속설만으로 출산율이 오르지는 않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영향도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27] 당시 경찰은 아동 납치 미수 신고를 접수하고도 단순 폭행사건으로 상부에 보고하며 목격자 조사를 미루고 사흘 동안 폭행 장면이 담긴 CCTV 화면도 확보하지 않는 등 수사에 허점을 드러내 시민들의 질타를 받고 있었다.[28] 특히 서울에서 48석 중 40석을 휩쓸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22년 서울시장 선거에 버금가는 보수정당 역사상 서울지역 최대의 승리였다.[29] 2006년 최초 조사에는 '결함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됐지만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이명박 정부 임기동안 '완전한 민주주의'를 유지하였다. 임기동안 완전한 민주주의를 유지한 대통령은 거의 없다.[30] EIU에서 발표하는 민주화 지수는 2006년 조사 시작 후 2010년 까지는 2년마다 조사였지만 2010년 이후 매해 조사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