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수(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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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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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20.postimg.org/OB1995.pn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5
1998
2000





OB 베어스 등번호 5번
박창언
(1986)

이명수
(1989~1997)


김정규
(1998~1999)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번}}}
윤용하
(1994~1995)

이명수
(1998~2001)


권영석
(2003)
{{{#fab93d [[현대 유니콘스|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3번}}}
김용달
(2000~2002)

이명수
(2003~2007)


팀 해체
{{{#fff [[넥센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3번}}}
팀 창단

이명수
(2009~2011)


채종국
(2012~2016)
두산 베어스 등번호 71번
김광림
(2004~2011)

이명수
(2012)


문동환
(2013~2016)
KIA 타이거즈 등번호 73번
이건열
(2009~2012)

이명수
(2013~2014)


박흥식
(2015~2020)



파일::.jpg

이명수
李明洙 | Myong-soo Lee

출생
1966년 7월 29일 (57세)
경기도 이천시[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전곡초 - 휘문중 - 휘문고 - 고려대[2]
포지션
2루수, 1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2차 2라운드 (OB)
소속팀
OB 베어스 (1989~1997)
현대 유니콘스 (1998~2001)
지도자
현대 유니콘스 2군 타격코치 (2003~2004)
현대 유니콘스 2군 수비코치 (2005)
현대 유니콘스 1군 수비·주루코치 (2006)
현대 유니콘스 1군 타격코치 (2007)
서울-넥센 히어로즈 1군 타격코치 (2009~2011)[3]
넥센 히어로즈 2군 타격코치 (2011)[4]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2)[5]
두산 베어스 2군 수비코치 (2012)[6]
KIA 타이거즈 3군 타격코치 (2013)[7]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주루코치 (2013)[8]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14)
휘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6~2018)
응원가
미국 동요 - Mary Had A Little Lamb[9]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주요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OB 베어스, 현대 유니콘스 소속의 내야수이자 前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 두산 베어스, KIA 타이거즈의 타격코치, 휘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 경력[편집]



파일:attachment/1289021187_e0044438_47dc04c1d6b68.jpg

안경현이 등장하기 이전 OB 베어스의 대표적인 2루수였으며,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1등 공신이기도 하다. 1995년에는 .290 9홈런 32타점으로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고질적인 허리 부상 때문에 수비범위는 넓지 않았지만 안정적인 수비를 했으며, 2할 중후반대의 타율과 클러치 능력을 꾸준히 유지해오는 등 타격 능력도 어느 정도 있었다. 실제로 전성기 때는 OPS .800 내외의 준수한 타격을 하는 공격형 2루수였다.

이후에도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고액 연봉자들을 정리해야 했던 OB는 노쇠화의 기미가 보인다는 핑계로 1997년 시즌 후 그를 방출했다.[10]

박명환야구TV에서 정수근이 술회한 바에 따르면 1997년 해태와 더블헤더 경기에서 당시 고졸 2년차 외야수 정수근의 중계 송구가 낮다는 이유[11]로 경기 도중 화장실로 정수근을 불러서 일방적으로 스파이크를 신은채 욕설을 퍼부으며 구타를 했다고 한다. 열받은 정수근은 그 이후 평소와 다른 타격폼으로 경기도 설렁설렁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후에 앞의 상황과 같이 송구 중계를 해야하는 상황이 와서 이명수가 받으려 하는데, 아예 땅바닥에 던져서 공이 바닥에 구를 정도로 엉망으로 송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1-0으로 이기고 있는 9회말 투아웃 상황에서 누군가[12]의 타구를 펜스 앞에서 잡을 수 있었으나 고의로 외야 펜스로 넘겨버리며 아웃으로 끝나야할 게임을 끝내기 투런 홈런으로 만들어줬다고 한다. 당시 승리투수의 기회가 날아간 박명환만 억울했다고 한다. 물론 정수근은 다른 선배들[13]에게도 맞았다고 본인이 말한 일화가 많을만큼, 사고뭉치에 본인도 후배를 때린 적이 있었다[14]고 했으니 순수한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때 타선 재정비 작업에 열중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그를 곧바로 영입했다.[15][16] 1998년에 현대로 이적한 그는 생애 첫 3할+10홈런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전준호-이명수의 완벽한 테이블 세터 활약을 했다. 다만 골든글러브의 경우 아쉽게도 롯데 박정태에게 내주었다. 이후 2001년 은퇴할 때까지 주로 1루수나 지명타자, 내야 백업으로 뛰며[17] 팀의 맏형이자 정신적 지주로 활약함과 동시에 현대의 2회 우승을 이끌었다. 2000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는 당시 시리즈 내내 불안한 수비를 보이던 박종호를 대신해[18] 2루수로 선발 출장,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팀의 우승을 확정짓는 데 일조했다.

2001년 시즌 종료 뒤 은퇴하였다.

덤으로 OB 베어스는 당시 LG 트윈스의 '야생마' 이상훈에게 특히 약한 면모를 보였는데, 당시 팀 내에서 유일하게 이상훈에게 강했던 타자가 이명수였다. 당시 3, 4번 타자였던 김형석김상호이상훈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으니...


3. 지도자 경력[편집]



3.1.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 시절[편집]


은퇴 후 2002년 한 해동안 현대 구단의 지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귀국 후 2003년부터 현대 유니콘스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1군 주루코치, 2007년에 1군 타격코치를 맡아서[19] 팀 타율 1위를 기록하였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히어로즈로 재창단하는 와중에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팀을 떠나 2008년은 무적 상태로 보냈다.[20][21]

2009년 시즌을 앞두고 김시진 감독이 서울 히어로즈로 컴백하자 이광근, 김성갑 등 흩어졌던 현대 시절 코칭스태프들이 복귀할 때 이명수도 함께하면서 히어로즈 코칭스태프로 영입되었다. 보직은 현대 시절과 마찬가지로 1군 타격코치. 이 때까지만 해도 지도자로써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2009 시즌 히어로즈의 1군 타격코치를 맡아서 팀 홈런-도루수가 150 - 150을 넘어서 명수매직이란 별명이 붙었다.[22] 하지만 2010 시즌 이후 타선이 부진하여 2군 코치로 내려갔다.[23] 그리고 온 게...

2011년 시즌은 2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3.2.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2012 시즌을 앞두고 김진욱 신임 감독의 부름을 받고 두산 베어스의 1군 타격코치로 영입되면서 15년 만에 친정 팀으로 컴백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년도까지 강력한 타선을 자랑하던 두산의 팀 타격 지표가 시즌 초부터 바닥을 치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24] 결국 시즌 중 이토 쓰토무 수석코치가 타격코치도 겸직하기로 하면서 2군 수비코치로 내려갔다.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1년만에 다시 친정팀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2013년부터 송재박장원진이 두산 1군 타격코치를 맡은 뒤 타격지표가 예전과 비슷하게 회복되자, 타격코치로써의 이명수에 대한 평가는 더욱 나빠지고 말았다.


3.3.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2013 시즌에 앞서 KIA 타이거즈의 3군 타격코치로 부임하였다. 이후 8월 17일에 김용달과 교대하여 1군 타격코치로 승격되었고 3군으로 내려간 김평호 코치 대신에 주루코치도 겸한다. 하지만 팬들은 큰 기대를 안하는 상황.

팬들의 예상대로 김용달에 비해서 타선은 나아진 바가 전혀 없었지만 감독이던 선동열이 모든 욕을 대신 져 준 덕에 아오안인 상태. 하지만 시즌 끝난 뒤에도 자리를 보전할 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이순철 수석코치, 김평호 주루코치, 박철우 타격코치, 조규제 투수코치가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나갔는데 이명수는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걸 보면 1군 타격코치를 놓고 김용달과 경쟁할 것으로 보인다.

2014년에도 계속해서 KIA 타이거즈의 1군 타격코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25] 하지만 팬들에게 온갖 욕을 다 얻어먹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악명높은 김기아 타선에서 그나마 꾸준하다고 내세울 만한 눈야구가 사라졌다는 게 컸다. KIA의 팀 타격 성적이 워낙 굴곡이 심하긴 했지만, 적어도 눈야구를 기반으로 볼넷을 얻어내는 능력은 괜찮았었고, 덕분에 출루율이 어느 정도 나와줬었다.[26] 그러나 2014년 시즌의 1/4가 지난 5월 14일 기준으로 KIA의 팀볼넷은 9개구단중 압도적인 꼴찌로 떨어져버렸고, 당연히 팀 출루율도 밑바닥을 깔게 되었다. 자꾸 타자들이 초구, 2구를 건드리고 죽는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상대 선발은 잘 던지든 못 던지든 별 일 없으면 6-7이닝을 먹고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2014년 5월 13일에는 NC 다이노스의 선발 태드 웨버에게 16타석 연속 퍼펙트를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2014년 5월 2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KIA 타이거즈의 대타로 출전해 역전적시타를 때린 이종환선수가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코치가 노리고 있으라는 공이 안들어오자 자신이 생각한 공을 때렸다고 인터뷰해 무능함이 더 드러나고 있다.

무능한 인물인지라 타이거즈 팬들은 시즌 종료 후 선동열 감독, 김용달 2군 총괄코치, 한대화, 백인호, 김정수코치와 같은 무능력자들과 같이 아예 팀에서 잘리길 바라고 있다. 그나마 잘한 게 있다면, 김무관도 고치지 못한 이대형을 개조시켰다는 점.

2014 시즌 후 김기태 감독 부임과 함께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 팀을 떠나게 되었다.


3.4. 휘문고등학교 감독 시절[편집]


2016년 중간에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의 감독을 맡으며 팀을 봉황대기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정후, 안준, 최준서[27], 전형근 등 프로야구계 후배들의 아들을 팀원으로 두고 있었다. 2018년에 김영직에게 감독직을 넘겨주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1989
OB
96
257
0.253
65
11
2
5
31
27
1
42
47
.357
.370
1990
91
239
0.188
45
8
0
3
30
14
2
34
40
.282
.259
1991
46
97
0.196
19
8
0
1
10
9
1
14
23
.292
.309
1992
96
253
0.253
64
12
1
4
22
26
2
27
33
.325
.356
1993
119
417
0.283
118
20
8
4
56
52
6
57
43
.367
.398
1994
71
240
0.229
55
9
1
2
28
20
2
28
28
.309
.300
1995
111
383
0.290
111
11
1
9
32
46
1
41
55
.357
.394
1996
103
342
0.281
96
13
0
4
24
31
0
44
55
.363
.354
1997
90
257
0.276
71
6
2
8
35
26
3
26
32
.340
.40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1998
현대
106
327
0.315
103
13
3
11
46
48
5
36
62
.379
.474
1999
114
333
0.297
99
13
1
5
51
39
3
41
40
.370
.387
2000
85
206
0.335
69
10
2
4
39
26
1
24
24
.399
.461
2001
91
153
0.248
38
6
0
1
19
19
1
29
20
.366
.307
KBO 통산
(13시즌)
1219
3504
0.272
953
140
21
61
423
383
28
443
502
.351
.376

5. 관련 문서[편집]


[1] 성장은 서울특별시에서 했다.[2] 경제학과 85학번[3] ~4월 25일[4] 4월 26일~[5] ~5월 21일[6] 5월 22일~[7] ~8월 16일[8] 8월 17일~[9] 강영수에게 물려받았으며 이후 김동주가 물려받았다.[10] 이명수가 팀을 떠난 이후 OB는 외국인 타자 에드가 캐세레스를 주전 2루수로 내세웠고 첫 시즌에는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듬해 부진하며 시즌 종료 후 방출된다. 이후에는 안경현이 주전 2루수를 차지, 골든 글러브만 세 차례나 수상하는 등 당시 최고의 2루수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11] 송구 중계 시, 가슴팍으로 정확하게 공을 던지지 않으면 공을 잡아주지 않던 성격이었다고 한다. 낮게 송구하면 잡느라 허리 삐끈했다고 화를 냈다고..[12] 정수근은 해태 정회열 선배의 타구라고 설명하였으나 사실이 아니다. 거의 20년도 더 넘은 일이다 보니 정수근이 다른 선수가 친 홈런을 정회열이 친 것으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1997년 당시 정회열은 시즌초 9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뒤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어 다시는 1군 경기를 하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해태에서 방출되었기에 홈런을 쳤을 수 없다.[13] 특히 훗날 두산의 감독이 된 김태형에게 많이 맞았다고 한다. 투수가 매우 부진한 날 수비를 오래하느라 피곤한 티를 냈다가, 김태형이 팀분위기 흐트린다고 경기 끝나고 인적드문 곳으로 끌고가서 개패듯 팼다고 한다. [14] 본인이 김태형에게 맞았을때와 같은 행동을 후배가 해서 두산베어스 구단버스로 끌고가서 맞으면서 배운대로 엄청나게 욕을 하며 폭행했다고 한다.[15] 이 시절 현대는 김동기, 윤덕규가 은퇴한 상태에서 물방망이로 악명높던 염경엽, 손차훈, 하득인, 김인호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외야는 기존 박재홍이 버티는 상황에서 전준호, 김광림의 영입으로 이미 1997 시즌에 정리된 상황이었고 이제 2, 3루수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때마침 2할 8푼 이상 쳐주던 이명수가 OB에서 자유계약으로 방출되자 잽싸게 영입했다. 하득인은 1997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염경엽김인호는 내외야 대수비 요원으로 살아남았다.[16] 이 당시 현대 구단이 2루수 보강을 위해 이명수를 데려오려고 OB에게 현금을 주는 조건으로 이명수를 방출시켰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김인식 OB 감독도 이러한 팀 운영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적도 있다.[17] 본격적으로 1루수로 전업한 건, 김경기가 하락세를 타던 1999 시즌 이후다. 당시만 해도 이숭용은 1루수보단 외야수로 출장하는 비중이 높았고, 이 무렵 LG에서 트레이드되어 들어온 박종호가 2루를 보다 보니 이렇게 됐다.[18] 전날 경기인 6차전 9회 초 동점 상황에서 2연속 수비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두산에게 역전패를 당했고, 동시에 시리즈를 7차전까지 끌고 가고 말았다. 결국 7차전에서는 박종호를 지명타자로, 이명수를 2루수 선발로 냈다.[19] 기존 1군 타격코치였던 김용달 코치가 김재박 감독을 따라 LG 타격코치로 옮겼다.[20] 야구단 경영에 무지했던 이장석 이하 신규 경영진은 상당수 인력들을 정리해고하고 잔류 인력중 베테랑 선수들과 코칭스탭, 프런트의 연봉을 무지막지하게 후려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이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김시진 감독, 이광근, 김성갑, 이명수, 염경엽 등 과거 태평양 시절부터 팀을 지켜왔던 상당수 코치들과 프런트가 팀을 떠나게 되었다.[21] 이미 2006년 말 김재박 감독이 LG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존 현대의 코칭스태프, 트레이너, 스카우터, 프런트 상당수를 빼간 상황에서 오직 김시진 감독과의 의리와 유니콘스에 대한 애정으로 잔류했던 인력들마저 떠나자 히어로즈는 신인 지명, 선수육성, 재활, 전력분석 등 과거 왕조 시절의 모든 노하우를 상실하고 빈껍데기로 전락해 버렸다.[22] 특히 이 해 강정호, 황재균, 이택근 등이 타격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23] 물론 이명수만의 잘못은 아닌 게 이 때는 이택근, 황재균, 클리프 브룸바 등이 모두 팀을 떠나 전년도에 비해 팀 타선이 약해진 상황이었다.장돌뱅이를 욕합시다 장돌뱅이를 그나마 이러한 악재 속에서 장기영이 풀타임 중견수로 뛰었고, 강정호가 데뷔 첫 3할 타율+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성과도 있었다.[24] 김현수는 예전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매년 쉽게 기록하던 3할 타율에 실패하는 등 커리어 로우 시즌을 보냈고, 이 해 두산 타자들 중에 두 자릿 수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윤석민밖에 없었을 정도로 2012년 두산 타선은 급격하게 물타선으로 식어버렸다.[25] 반대로 김용달 코치는 사실상의 2군 감독 역할인 2군 총괄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기존 2군 총괄코치였던 한대화가 1군으로 올라와 수석코치를 맡게 됐다.[26] 2013년의 초구 좋아하는 김용달 코치 하에서도 KIA의 팀 볼넷은 1위였다.[27] 최태원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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