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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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
Ива́н Турге́нев
Ivan Turgenev


파일:투르게네프.jpg

본명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Ива́н Серге́евич Турге́нев
Ivan Sergeyevich Turgenev
출생
1818년 11월 9일
러시아 제국 오룔현 오룔
사망
1883년 9월 3일 (향년 64세)
프랑스 제3공화국 세네와즈 부지발
국적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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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작가, 번역가
분야
소설, , 희곡
사조
사실주의 문학
서명
파일:Ivan_Sergeevich_Turgenev_Signature.svg.pn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학력
모스크바 대학교 (1833–34)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1] (서양고전학, 러시아문학, 문헌학 / 학사)
옥스퍼드 대학교 (민법학 / 1879년 명예박사)
가족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 (1793–1834)
어머니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투르게네바 (1787–1850)[2]
형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1816–1879)
남동생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여동생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지토바 (1833–1900)[3]
종교
무종교(불가지론)[4][5]
묘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볼코보 공동묘지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한국어
이반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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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ワン・ツルゲーネフ
중국어
伊万·屠格涅夫
독일어
Iwan Turgenew
프랑스어
Ivan Tourgueniev
스페인어
Iván Turguénev
그리스어
Ιβάν Τουργκένιεφ
폴란드어
Iwan Turgieniew
아랍어
إيفان تورغينيف


1. 개요
2. 생애
3. 작품 특징
4. 러시아에서의 대우
5. 기타



1. 개요[편집]


“당신에 대해 공부할수록 당신의 실력은 저의 입이 벌어지게 만들 뿐입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투르게네프는 투르게네프이기 때문에 읽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 하나이자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2. 생애[편집]


러시아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뒤, 알렉산드르 푸시킨 , 니콜라이 고골 등 대표적인 러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만난 후 '서구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인 <첫사랑>, <루딘>[1] 등의 소설은 세련된 필체와 묘사로 유명하다. 중년기 이 후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구체제에 반대하는 소설을 다수 썼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투르게네프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한다. 세르게이는 자신의 아버지(즉 이반의 할아버지) 니콜라이가 빚을 갚지 못해서 채권자 감옥에 끌려갈 상황이 되자 니콜라이는 아들 세르게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제발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서 부자 여성과 결혼해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결국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긴 세르게이는 자신보다 7살 연상이던 부잣집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후에 이반의 어머니가 되는) 바르바라 페트로브나 루토비노바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반을 낳았다. 이러한 가정사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인 첫사랑에서도 반영됐다.

어릴적의 투르게네프는 기병 장교였던 아버지가 계속 외도와 도박을 하며 집 밖을 돌아다니다가 일찍 죽고 난 뒤, 오렐 지방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던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다.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는 프랑스인독일인 가정교사를 불러와 투르게네프를 가르치게 했고 프랑스어로 말하게 했다.[2]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일상 생활에서도 프랑스어를 써야 했고 신에게 바치는 기도도 프랑스어로 해야 했다. 반면에 러시아어는 농노 하인에게서 배웠고 러시아어로 된 책은 8살 때 잠겨있던 러시아어 책이 있는 방에 몰래 들어가 처음 봤다. 그가 러시아의 대문호로 날리게 되는 미래를 생각하면, 굉장한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투르게네프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은 러시아 농노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대지주였던 그의 어머니는[3] 농장을 관리하면서 사소한 잘못에도 체벌을 가하고 시베리아로 보내버릴 정도로 농노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했다. 그리고 그녀는 농노들을 마구 후려쳤던 채찍으로 아들도 함께 때렸을 정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4]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어릴 적부터 이런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1850년에 어머니가 죽자마자 물려받은 농노 약 천 명(혹은 5천 명 이상)을 해방시켰다. 투르게네프의 이러한 행동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다만 정부에게 '사회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요주의 인물'로 찍힌 부정적인 의미였다. 농노들을 그저 해방만 한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재산도 쥐어지고 몇몇 농노들이 일꾼이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면 받아줘서 언제라도 그만두고 마음대로 나가게 할 자유민 일꾼으로서 농장에서 일하게끔 했다. 이런 일꾼들에게도 매우 잘 대해줘서 이들은 투르게네프가 죽을때까지 농장에서 착실하게 일했다고 한다.

농노를 해방하고 몇 년 후에 발표한 <사냥꾼의 수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여행기 양식을 빌은 책으로 러시아뿐 아니라 서구권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러시아 식자층 사이에서는 농노 역시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을 환기시켰고,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되면서 유럽 각지에 당대 러시아 농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심지어 당국이 이 책 때문에[5] 그를 체포, 감금할 때, 러시아 전역에서 반대 여론이 거세게 들고 일어났을 정도. 투르게네프가 체포당할 당시 '대체 뭔 내용이길래 난리야?'하고 놀란 대중들에 의해 사냥꾼의 수기 초판이 순식간에 매진되면서 다시 금서로 지정하는 일마저 불가능해졌다. 금새 매진된 책이 재판을 거듭하면서 농노제 폐지 여론에 힘을 더해주었고 결국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출간은 1861년 2월에 농노 해방령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6]

결국 러시아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에 질려서 출국한 투르게네프는 이후 파리에 살면서 러시아 농노제를 반대하는 각종 작품을 발표하여 서구권과 러시아의 인텔리로부터는 찬사를, 정부로부터는 공갈협박을 받았다. 이후 1883년 연인이던 비아르도 부인의 별장에 있는 별저에서 병사했다.


3. 작품 특징[편집]


1852년 사냥꾼의 수기로 명성을 얻은 이후 1856년 루딘을 통해 본격적으로 장편작가 이력을 시작했다. 루딘(1856)부터 귀족의 보금자리(1859), 전날밤(1860), 아버지와 아들(1862), 연기(1867), 마지막 장편 처녀지(1877)까지 6대 장편은 183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러시아인들의 삶과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실주의 작품들이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은 대표작으로 거의 항상 지명된다. 원제는 <Отцы и дети> , 즉 복수형으로, <아버지들과 아들들>이다. 이는 이상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귀족 계층의 아버지 세대와 혁명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잡계급의 아들 세대들의 갈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당대 러시아의 시대적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후에 염상섭의 <삼대>에 어느정도 영향을 준다.

투르게네프는 심각한 유럽빠의 면모가 있었고 특히 문학이나 사상 쪽에 있어서는 대책없는 프랑스빠였다고 한다. 그러나 투르게네프가 유별난 인물인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당대 유럽 문학의 선도국은 프랑스였으며 19세기 러시아에서 서구 우월주의는 차다예프를 시작으로 러시아 사상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마치 전근대 한국에서 상류층은 한글 대신 한문을 썼듯이 러시아 황궁과 귀족들 사이에서는 러시아어가 아니라 프랑스어가 일상용어로 쓰였다. 참고로 사상계의 다른 한 축은 호먀코프, 키레옙스키, 도스토옙스키 등으로 대표되는 슬라브주의. '러시아는 유럽의 변방이며 서구 문명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서구 우월주의와 '러시아는 노쇠한 서구 문명을 대체할 젊은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슬라브주의의 논쟁은 19세기 러시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며 20세기, 21세기 현대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투르게네프의 서구지향적 성향은 단순한 이런 개인적 기호가 아니라, 비사리온 벨린스키, 알렉산드르 게르첸 같은 동시대 슬라브주의자들과 맞서 치열한 사상 싸움을 했던 지식인 파벌 중 일원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항상 레프 톨스토이에 밀려서 만년 콩라인 취급을 받으며 가끔은 '톨스토이와 좀 친하게 지냈던 19세기 소설가' 정도로 폄하되기도 한다. 이는 그들에 비해 특색이 떨어지는 작품성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는 종교적인 인간에 대한 예찬이 두드러고, 톨스토이의 작품들에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존재하는 반면 투르게네프는 3명 중 가장 서유럽 리얼리즘에 가까운 작가로 그만의 특이점이 없다.

러시아 문학가들 중 가장 정석적인 작가로, 글에는 큰 특색이 없지만 그 정석적인 문체 덕분에 뭘 읽든 평균 이상은 간다. 특성상 번역으로 느낌을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산문시를 제외하면 번역을 크게 타지 않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일정 이상의 완성도가 담보되면서, 난해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고, 심오하지 않은 대중적이고 무난한 내용에 도스토옙스키처럼 고료 노리고 분량을 냅다 늘리지 않아서 다른 작가들처럼 여러 출판사 번역본 놓고 머리 싸 맬 필요 없고 읽는데 시간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생겼는데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방대한 분량과 이름 외우기도 버거운 수많은 등장인물에 질린 사람이라면 투르게네프가 좋은 선택이다.[7]

첫사랑, 루딘, 처녀지, 사냥꾼의 수기 같은 대표작들은 단권으로 내기엔 분량이 모자라서 서로 묶이거나 다른 단편과 묶여 번역될 때가 많다.


4. 러시아에서의 대우[편집]


그는 개인적인 이유로 파리에 살면서 유럽 내에서 조국 러시아에 봉사했다. 우리는 그에게 러시아 지식인의 대사라는 별명을 붙였다. 문학, 미술, 음악에 종사하는 러시아 남녀 중에서 투르게네프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막심 코발레프스키


러시아에서도 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이 곳곳에 존재하는 등 톨스토이 못지 않은 대문호 대접을 하고 있다. 문학적으로 진부하고 작품속 등장인물은 정상이 없다며 도스토옙스키를 굉장히 낮게 평가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문호들을 시험점수 매기듯 줄 세운다면 (선지자인 푸쉬킨과 레르몬토프는 제외하고) 톨스토이가 단연 으뜸이며 두번째가 고골, 세번째가 체호프, 네번째가 투르게네프라고 평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낙제해서 자기 사무실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투르게네프는 프랑스로 추방된 상황에서도 러시아어 문학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직접 번역하여 서구권에 러시아 문학을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가 서구권에서 반향을 일으키기 이전 러시아 문학은 아마추어 번역가들에 의한 불완전한 번역으로 피상적으로 소개되었었다. 투르게네프는 19세기 중반 기준으로 서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작가였는데, 이러한 자신의 입지를 활용하여 다른 러시아 작가들이 독일과 영국, 프랑스 출판사들과의 계약을 주선하는데 힘을 써주었다. 투르게네프의 주선 덕분에 곤차로프,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작가들이 유럽의 문학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보통 작가 사이에는 라이벌 의식이 있기 마련이지만 투르게네프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톨스토이와도 종종 개인적으로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방해는 커녕 오히려 적극 홍보해주는 대인배이기도 했다.

소련 시절에도 인민을 위하여 엄청 봉사한 위대한 작가로서 크게 우대받았다. 러시아인들의 투르게네프에 대한 존경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도 잘 나타난다. 제2차 세계 대전독일 국방군의 침략 때문에 화물칸 열차에 빽빽하게 피난민들이 탔는데, 그곳에는 독일군의 손에 훼손될까 봐 같이 옮겨지던 투르게네프의 소파가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소파에 안 앉았다고 한다.[8]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자신이 주창하는 사상이나 작품과는 별개로 실생활에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당대에도 인격자로 알려졌다. 그는 젊고 가난한 작가들의 육성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농노 해방에 있어서도 실천적인 행동가였으며, 지식인의 '명예'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사생아 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딸을 끝까지 책임지고 양육하며 교육한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투르게네프는 생전에도 매우 존경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투르게네프는 농노 해방령이 선포되었던 1861년에 오룔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한 적이 있는데, 두 명의 농민들이 자신을 찾아와 '러시아 모든 민중의 이름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러시아 방식'으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했던 일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는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5. 기타[편집]


  • 후배인 도스토옙스키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투르게네프가 동업자들을 싫어한 건 아니고 도스토옙스키가 동업자들을 싫어했다(...)[9]. 특히 투르게네프에게 열폭 + 정신승리 스킬을 시전하면서 사이가 나빠졌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유형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서유럽 문명을 비판했으니 서구주의자에 가까웠던 투르게네프와는 상극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투르게네프의 마지막 장편 처녀지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다. 이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네차예프 사건을 기반으로 하지만 서구주의자들을 사정없이 몰아세우고 비판하는 악령과 달리 처녀지는 온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런데 정작 도스토옙스키는 글로는 그리도 투르게네프를 욕하면서도 돈이 급하면 그에게 와서 비굴하게 애원하며 돈을 빌려가곤 했다. 나중에 도스토옙스키가 독일까지 가서 원정도박하다 파산하자 도와주기도 했다(...). 뭐 투르게네프가 돈이 부족함 없이 부유한 경제적 환경에서 살았던 것도 있어서 도스토옙스키가 이에 대하여 질투하던 점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늘그막에 이른 도스토옙스키와 화해했고 마지막에서야 서로 글로 서로가 대작가라고 호평하며 죽기 전에 앙금을 깨끗히 씻었고 도스토옙스키 장례식에 투르게네프는 참가하여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2년 뒤 그가 죽자 도스토옙스키 유족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10]

  • 톨스토이와는 친하면 친하다고도 할 수 있는 관계였지만, 서로에 대해 미묘한 갈등도 있었다. 톨스토이는 투르게네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파리 여행중에 같이 놀기도 하고, 투르게네프가 톨스토이의 영지인 야스야나 폴랴나에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투르게네프가 톨스토이가 심혈을 내놓은 대작 <전쟁과 평화>에 대해 악평을 했는데, 이에 대해 톨스토이는 지인들에게 투르게네프에 대해 증오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 '투르게네프'라는 성씨는 튀르크타타르인을 조상으로 둔 성씨이다.[11]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고 살았는지, 독일 바덴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사할 때 지인에게 반쯤 농담삼아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나의 둥지를 잃게 되어 무척 유감입니다. 하지만 내가 유목민인 타타르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어디엔가 정착하겠다는 뜻이 없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서 살든 그 집은 임시 천막일 뿐입니다.

  • 폴린 비아르도(1821~1910)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가수였던 폴린이 공연하는 걸 처음 보고 반해 접근한 후 함께 살다시피 하는데, 바로 옆집에서 살며 폴린이 이사를 가자 또 이사간다. 공교롭게도 폴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유부녀였다. 사실 남편이 합의한 불륜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관계인데, 투르게네프는 삼각관계에도 불구하고 폴린의 남편과 친했으며 같이 문학 토론을 하거나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폴린과 남편 소생의 자식들을 모두 가르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2] 단편소설 중 '첫사랑'의 히로인 지나이다도 폴린이 모델일 거라는 가설이 있다.[13][14][15] 폴린도 투르게네프가 하녀와 낳은 사생아를 입양하고 교육해주었으며 투르게네프는 말년에는 폴린 집에서 보살핌을 받다 죽으면서 전재산도 폴린에게 남긴다. 결혼만 안했지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었던 관계. 모파상은 투르게네프와 폴린의 관계를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평했다. 아무튼, 투르네게프의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폴린은 편히 살아가면서도 입양한 의붓자식들을 소중히 아꼈으며, 작곡이라든지 여러 활동도 하면서 천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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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의 변혁을 바라는 이상주의자이지만 막상 현실의 행동에서는 무력감을 나타내는 1840년대 '나약한 지식인' 루딘을 그린 소설. 중국의 문호 루쉰의 필명도 본작의 루딘의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2] 러시아의 귀족 가문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녀를 양육했다. 외국인 가정 교사를 불러와 서구식으로 가르쳤으며 프랑스어로 말하게 하고 러시아어는 쓰지 못하게 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도 자녀가 러시아어로 말하는 것을 프랑스어로 교정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톨스토이 본인도 학교로 가기 전까지는 푸쉬킨의 시를 몇 편 읽은 것 외에는 러시아 문학을 접하지 못했다.[3] 그녀의 대농장은 자신을 학대하던 의붓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다.[4] 그녀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들어온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으나 의붓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홀로 다 물려받았다. 부자가 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인과 결혼했지만 그렇게 얻은 남편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며 외도를 밥 먹듯이 하고, 결국 그녀는 자신에게 쌓였던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아들들이나 농노들을 학대하면서 대리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5] 명목은 극작가 고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 불순한 내용을 적었다고 잡혔지만 시기도 그렇고 정황도 딱. 거기다 정부는 <사냥꾼의 수기>의 출판을 허가한 검열관도 잘랐다.[6] 물론 당시 농노 해방은 농노들의 의견은 배제하고 러시아 황실과 기득권층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정책이라는 한계가 있어서, 명목상으로는 해방이었지만 농민들은 원래 토지 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토지 상환금을 분할 지불해야 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불완전한 농노 해방을 단행한 것 때문에 귀족과 농민 양측으로부터 불만을 샀고, 과격단체의 폭탄 공격으로 끔찍하게 죽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알렉산드르 2세 항목 참조.[7] 러시아 문학을 처음 읽는 외국인 독자에게 등장인물 이름은 생각보다 큰 장벽이다. 이름도 길고 생소한데 애칭까지 등장히기 때문에 처음 읽는 사람은 등장인물 파악하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8] 출처는 리차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Russia's War)》. 투르게네프가 쓴 《사냥꾼의 수기》가 러시아에서 농노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농노 해방 과정에서도 한계나 어두운 면이 있었기는 해도) 농노 해방이라는 엄청난 역사의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부분 농노의 자녀 및 그 후손들인 러시아 국민에게 투르게네프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본인과 가족,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은인이다.[9]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아싸력과 히스테릭한 성격에서 나오는 열폭, 그리고 당대 작가들과는 다르게 그닥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되게 자란 영향이 컸다. 대표적으로 도스토옙스키는 또다른 명문가 출신 대문호였던 톨스토이와도 사이가 나빴다.[10] 참고로 도스토옙스키는 전술한 톨스토이와도 늘그막에 그나마 가까워졌으나,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안나 카레리나를 읽고 톨스토이를 극찬했으며 톨스토이도 죽기 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을 정도로 각자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인정했으나, 우연히 마주칠 기회를 날리거나 하는 식으로 죽기 전에 서로 존경하는 관계로 만난 적은 없었다.[11] 다만 아예 황금씨족 출신이거나 러시아 제국 귀족원에서 공식적으로 타타르-몽골계로 인정받은 부류가 아닌 한 러시아 귀족들의 족보상의 시조는 시조전설이 대다수인데다가, 미천한 출신의 러시아 귀족들이 상대적으로 족보조작이 쉬운 타타르-몽골계 귀족 출신임을 자주 자칭했기 때문에 실제인지는 알 수 없다.[12] 자식 중 아들 한 명은 투르게네프의 자식이 아니냐는 말도 있다.[13] 첫사랑은 애초에 자전적 소설이라고 본인 입으로 인증때렸다. 작중 지나이다는 여러 남자 추종자들을 거느리며 사교적이고 지적인 모습, 주인공의 사랑을 받지만 정작 그녀는 나이 많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점 등이 폴린과 흡사하다. 실제 폴린은 전유럽에서 날리던 당대 최고의 디바로 당연지사 팬도 엄청나게 많았으며 폴린 남편은 그녀보다 20살 가까이 연상이었다.[14] 작중에서 블라지미르는 지나이다가 높은 데서 뛰어내릴 수 있냐고 드립으로 말하자 진짜 4m 담장에서 뛰어내리는데, 투르게네프도 친구와의 편지에 '폴린의 명령이라면 발가벗고 온 몸을 노란 칠한 채 지붕 위에서 춤추래도 할 각오이다'라고 쓴다.[15] 그러나 지나이다라는 캐릭터에 폴린의 모습이 반영됐을 뿐이지, 지나이다라는 캐릭터의 모델은 따로 있다. 지나이다의 모델은 예카테리나 류보브나 샤호프스카야(Екатерина Львовна Шаховская)라는 여류 시인으로 투르게네프의 어린 시절 이웃이었으며 투르게네프보다 연상인점, 그리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불륜 관계였고 지나이다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에서 지나이다의 모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