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체르냐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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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초대 제3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
이반 다닐로비치 체르냐홉스키
Ива́н Дани́лович Черняхо́вский
Ivan Danilovich Chernyakhovsky

파일:체르냐홉스키.jpg
출생
1907년 6월 29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우만군 오크사니노
(現 우크라이나 체르카시주 우만군 오크사니나)
사망
1945년 2월 18일 (향년 37세)
나치 독일 동프로이센주 멜자크
(現 폴란드 바르미아마주리주 브라니에보군 피에니엥즈노)
묘소
러시아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초대 제3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
1944년 4월 24일 ~ 1945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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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다닐 니콜라예비치 체르냐홉스키
어머니 마리야 루도비고브나 체르냐홉스카야
복무
소비에트 지상군
1924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장[1] (소비에트 지상군)
병과
기갑
주요 참전
바그라티온 작전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동프로이센 공세
주요 서훈[2]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레닌훈장
적기훈장 (4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2회)
쿠투조프 훈장 1등급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의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2.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2.2.1. 벨라루스 전역
2.2.3. 빌니우스의 폴란드 국내군 탄압
2.2.5. 갑작스러운 전사
3. 평가
4. 여담
5. 진급 이력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맹활약했던 소련군의 장성.

독소전쟁 초기였던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만 해도 평범한 영관급 장교에 불과했지만, 이후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동프로이센 공세 등 여러 대전투에서 대활약했고 마지막에는 불과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대장 계급을 달며 전선군사령관에 오른 것으로도 유명하다.[1][2] 하지만 이런 완벽한 전략적 성공과는 다르게 폴란드 국내군의 탄압을 주도했다는[3] 어두운 면도 공존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편집]


1907년 6월 29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 오크사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공이었는데, 체르냐홉스키가 9살 때 발진티푸스에 감염돼서 죽었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서 철도공이 되었지만 1924년에 이를 그만두고 붉은 군대에 지원해, 1928년 키예프의 군사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졸업한 1928년은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우고 있던데다가 대숙청으로 혁명당시부터 군에 참여했던 고위직들이 모조리 갈려나갔는지라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교육받은 세대인 체르냐홉스키는 대숙청을 피해 굉장히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당장 1938년 체르냐홉스키는 제9경전차여단장이 되었고, 1941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한 뒤, 발트 군관구 예하 제28기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편집]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체르냐홉스키의 쾌속 승진은 멈추지 않았다. 1942년 그는 소장으로 진급한 뒤 보로네시를 방어하는 제18기갑군단장이 되었고, 얼마 뒤에는 제60군사령관이 되었다.


2.2.1. 벨라루스 전역[편집]



2.2.1.1. 쿠르스크 전투[편집]

1943년 2월 8일 체르냐홉스키와 그가 지휘하던 제60군은 제일 먼저 쿠르스크에 입성해 도시에 적기를 거는 전공을 세웠다. 이들은 이미 몇 주 전에 보로네시도 탈환한 상태였는데, 이로 인해 체르냐홉스키는 스탈린에 눈에 띄게 되었고, 스탈린은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2.2.2. 바그라티온 작전[편집]


바그라티온 작전을 얼마 앞두고, 스탈린은 체르냐홉스키를 상장으로 진급시킨 뒤 과감히 제3벨라루스 전선군의 지휘를 맡겼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로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전선군사령관에 올랐고, 세 달 뒤에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대장이 되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동안 체르냐홉스키는 제3벨라루스 전선군을 지휘하며 벨라루스 방면에서 주로 활약했다. 체르냐홉스키는 1944년 6월 27일 이반 바그라먄의 제1발트 전선군과 협력해 비텝스크를 탈환했다. 이때 제3벨라루스 전선군의 좌익은 오르샤를 탈환했고, 이로 인해서 모스크바-민스크 간 고속도로 사용이 가능해지며 소련군의 민스크 탈환이 앞당겨졌다. 민스크는 7월 2일에 탈환되지만 체르냐홉스키는 민스크 탈환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대신 폴란드 국경과 무려 64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 중부집단군은 전체 33개의 사단 중 무려 25개를 잃어버린 상태였고, 철벽같던 나치 독일의 몰락은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후로도 소련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바그라먄은 칼끝을 돌려 발트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실시하였고 독일 북부집단군은 붕괴함과 동시에 두 개 (동프로이센/발트)로 나뉘었다. 비슷한 시기 남부에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공격이 있었다. 공세 개시 24일 만에 소련군은 최종적으로 폴란드와의 국경선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독일군은 무려 38만 1천 명의 전사자를 냈다.[4] 이 공세의 여파로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패배에 격분한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사령관을 에른스트 부슈에서 발터 모델로 교체했다.


2.2.3. 빌니우스의 폴란드 국내군 탄압[편집]


1944년 7월 17일, 소련군이 폴란드 영내로 진입한 이후 빌니우스에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시를 받아 폴란드 국내에서 반 나치 활동을 이어가던 저항 조직인 국내군(Armia Krajowa, 일명 AK)의 무력화를 위한 NKVD에서 파견한 NKVD 장교인 이반 세로프와 함께 소련군의 비밀 작전이 개시되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독일군에게 큰 충격을 준 바르샤바 봉기를 단독으로 일으킬 정도로 폴란드 국내군의 세력은 무척 강성했는데, 소련군은 폴란드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면서 세력도 강성한 이들이 차후 폴란드를 공산화할 때 큰 방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따라서 NKVD의 지령을 받은 체르냐홉스키는 이 작전에서 폴란드 저항 조직의 지도자들을 꾀어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체르냐홉스키는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는 우선 국내군을 위시한 폴란드의 저항 조직 지도자들을 함께 나치 독일에 맞설 방안을 궁리해보자는 거짓말로 사령부까지 불러냈고, 이후 지도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즉각 그들을 체포해 버렸다. 비슷한 시기 다른 마을에서도 체르냐홉스키와 저항군 조직 장교들과의 모임이 있었으나, 거짓 모임의 결과는 마찬가지로 저항군 장교들의 체포와 구금이었다.[5]

이런 식의 거짓 면담 작전으로 체포된 폴란드 국내군의 숫자는 무려 8,000명에 달했고, 이들은 차후 심문을 받은 뒤 협조적인 자들은 소련군 휘하의 폴란드 동부군에[6]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굴라크로 끌려가거나[7] 최악의 경우에는 총살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작전으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면서 성장한 폴란드 국내의 자체적인 저항 조직들은 거의 소멸했고, 소련은 전후 폴란드를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손쉽게 위성국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8] 이 때문에 현재도 폴란드에서는 체르냐홉스키에 대한 반감이 큰 편이다. 물론 대놓고 매국노 취급받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만큼은 아니지만.


2.2.4. 비스와-오데르 대공세[편집]



2.2.4.1. 동프로이센 공세[편집]

같은 해 여름, 독일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한 소련군의 공세가 다시 한번 실행되었다. 이때의 목표는 바로 동프로이센 지역이었고,[9] 체르냐홉스키는 그 선봉에 섰다. 1944년 8월 1일, 공세의 전초전이 벌어졌고, 그와 제3벨라루스 전선군은 메멜 강을 도하해 카우나스를 점령했다. 본격적인 공세는 이후에 시작되었다. 체르냐홉스키의 제3벨라루스 전선군과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공동으로 독일 제3 기갑사단의 숨통을 끊고 동프로이센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했다. 로코솝스키가 그단스크를 공략하는 동안, 체르냐홉스키는 그 유명한 쾨니히스베르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쾨니히스베르크는 철저히 요새화되어 있었고 바그라티온 때와 다르게 독일군의 저항도 조직적이었던 관계로 제3벨라루스 전선군은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같은 시각 로코솝스키는 주코프와 만나 단치히로 진격,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을 아예 동프로이센 지역에 고립시켜 버렸다.[10] 1945년 2월 10일 로코솝스키는 항구도시 엘빙에 도달했고 동프로이센 일대를 좌우로 포위했다. 이 시점에서 체르냐홉스키는 동프로이센 전역의 지휘를 맡고 있었다. 1945년 2월 1일 체르냐홉스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엘빙 공략을, 하나는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맡겼지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명령이 되었다.


2.2.5. 갑작스러운 전사[편집]


불행하게도 하늘은 이 젊은 천재 사령관의 편이 아니었다. 1945년 2월 18일 체르냐홉스키는 동프로이센 멜자크(Mehlsack)[11]에서 공세 준비를 위하여 전선을 시찰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독일군의 포격으로 인해 전사했다. 그야말로 천재적 군인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신은 천재를 너무 사랑한다… 이후 사령관을 잃은 제3벨라루스 전선군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2] 원수가 후임 사령관을 맡아 지휘를 이어갔고 동프로이센의 중심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체르냐홉스키가 전사한 지 거의 2달 뒤인 1945년 4월 16일에야 소련군 손에 들어갔다.[13]

전사한 체르냐홉스키의 유해는 소련에 합병된 리투아니아 SSR의 수도 빌뉴스에 안장되었다가 1990년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노보데비치 수도원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또한 1946년 7월 전후 소련 영토가 된 동프로이센의 도시 인스터부르크(Insterburg)가 그의 활약을 기려 체르냐홉스크(Черняхо́вск)로 개명되었고 현재도 그 이름은 유지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5일 후인 1945년 2월 23일은 원래 제3벨라루스 전선군 사령관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의 전승훈장 수훈과 원수 진급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 원수로 진급했으면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원수가 됐을 것이다. 그야말로 최고의 명예와 최고의 계급을 불과 5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3. 평가[편집]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체르냐홉스키는 30대의 나이로 전선군 사령관에 오를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소련군 지휘관이었다고 평가받는다.[14] 일각에서는 그가 쿠르스크에 먼저 입성한 것 때문에 거창한 것을 좋아하는 스탈린에 눈에 띄어 운 좋게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도 주장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당장 체르냐홉스키는 스탈린의 눈에 띄기 이전인 독소전쟁 초기부터 전선에서 무공을 쌓았고, 스탈린에 눈에 든 뒤에도 바그라티온 작전과 동프로이센 공세에서 대활약하기 때문이다.[15]

다만 폴란드에서는 당연히 평가가 좋지 않다. 체르냐홉스키는 폴란드 저항조직의 상징인 폴란드 국내군 해체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조직원들과 조직 간부들이 구금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로 인하여 폴란드는 전후 사실상 소련에 아무런 저항 없이 위성국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술할 동유럽 공산권 붕괴 후 동상 철거는 폴란드인들이 생각하는 체르냐홉스키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소련과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영웅으로 취급되고, 우크라이나(키이우) 출신이었으며 동시에 우크라이나와 척을 진 것도 없는 관계로 우크라이나에서도 평가가 좋다. 이는 2013년 우크라이나의 군사대학 중 하나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16]


4. 여담[편집]


소련군 역사상 가장 어린 대장이다.

2015년 9월, 체르냐홉스키가 전사한 피에니엥즈노 근처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폴란드 정부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러시아 정부 측은 주러시아 폴란드 대사를 호출해 항의하였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인물로는 발터 뱅크가 존재한다. 뱅크 역시 대단히 유능한 지휘관이었으며 독일 국방군에서 최연소(45세)로 병과대장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독소전쟁에서 손꼽히는 유능하고 전설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계 또는 밀리터리계에서는 아직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게임 스틸 디비전 2 초반 캠페인에서 소련측 주인공이다. 바그라티온 작전 초반부의 공격부터 민스크 점령까지 플레이할 수 있다. 후반부의 주인공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이다.


5. 진급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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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 관계로 다른 전선군사령관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 주코프로코솝스키와는 11살, 코네프와는 10살 차이다. 그나마 나이 차이가 좀 적은 게 바투틴으로, 6살 차이이다.[2] 참고로 체르냐홉스키는 1945년 2월 23일에 전승훈장 수훈과 동시에 원수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전시라 진급이 빠른 걸 감안하더라도 불과 30대 후반(만 37살)에 원수로 진급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원수 진급 불과 5일 전인 1945년 2월 18일 체르냐홉스키는 독일군의 포격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3] 후술하겠지만 체르냐홉스키의 국내군 탄압 자체는 그의 단독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NKVD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다만 체르냐홉스키가 탄압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실시한 것 또한 사실이다.[4] 다만 이건 소련군의 단독 기록이고, 실제 독일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5] 서방에서도 이 사실을 알았으나 전쟁 문제 때문에 묵인 할 수 밖에 없었다.[6]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서방 측의 자유 폴란드군과는 다른 조직이다.[7]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에 세웠다가 버리고 간 유대인 절멸 수용소 등에 임시로 수용되기도 하였다.[8] 만약 이러한 사전조치가 없었다면 폴란드에서도 1953년 동독 봉기1956년 헝가리 혁명 같은 대규모 반공 운동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9] 더 넓게 보자면 이 공세는 후에 있을 베를린 공략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10] 이들은 별도로 "쿠틀란드 집단군" 또는 "쿠틀란드 포켓"이라고 불렸다. 워낙 이들은 수가 20만으로 많았긴 했지만 보급의 문제로 공세 실시 능력을 상실한 관계로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아서 소련군은 굳이 쿠틀란드 집단군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이후 한니발 작전으로 해상으로 탈출했으나 대부분은 독일의 항복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11] 현 폴란드 피에니엥즈노(Pieniężno).[12] 참고로 바실렙스키는 촉망받는 자국 내 인재가 갑작스레 전사한 게 몹시나 안타깝고 아쉬웠는지, 체르냐홉스키 대장의 전사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제3벨라루스 전선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체르냐홉스키를 회상하며 그를 매우 높이 평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13] 다르게 말하자면 쾨니히스베르크의 방어력이 상당히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에게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도시여서 이곳을 지키는 독일군의 사기가 높았던 것도 한몫했다.[14] 그는 눈부신 전공을 인정받아, 전승훈장 수훈과 원수 진급을 불과 5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15] 만약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공적은 대부분 하향세를 타는 게 일반적이지만 체르냐홉스키는 반대로 승전을 계속했다.[16] 다만 해당 군사대학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명령으로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