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용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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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중 행적
2.1. 왕위에 이르기까지
2.2. 조사의의 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결
2.3. 아버지와의 이별,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
2.4. 말년, 속죄의 죽음
3. 캐릭터 평가
3.1. 불같은 성격
3.2. 불효자이면서 효자
3.3. 동복형들에겐 좋은 동생
3.4. 아들들에 대한 부성
3.5. 사정없는 외척 숙청
3.6. 노골적인 여색
4. 기타


1. 개요[편집]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진 주인공. 배우는 유동근.[1]

대한민국 사극 드라마 중 태조 왕건궁예야인시대시라소니 등과 더불어 드라마의 임팩트있는 진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2. 작중 행적[편집]



2.1. 왕위에 이르기까지[편집]


첫 등장은 아버지 이성계가 요동 정벌 강행과 회군 사이에서 고민하는 와중에 아버지의 지인인 정도전과의 장기 한판을 두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한참 사이 좋게 장기를 두는 와중에 정도전이 장기판 상황을 빗대어 아버지인 이성계의 상황을 말해주며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 이를 들은 후 바로 가족들을 고향인 함흥으로 피신시키는 일을 수행한다.[2]

이후 위화도 회군을 한 아버지 이성계를 찾아가 대업을 위한 혁명이라고 말을 하나 이성계를 노하게 하며 이성계에게 경솔한 입이 화근이 될 것이라는 복선이 담긴 말로 꾸짖음을 들은 후 쫓겨난다. 이성계가 결국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며 실권을 쥐게 되는 가운데,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친어머니 신의왕후를 잃기도 하지만 실제 역사와 같이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정몽주와 마주한 자리에서 그 유명한 하여가단심가를 통해 서로의 속내를 확인하고 그를 암살함으로써 조선의 개국에 큰 공헌을 한다. 그러나 정몽주를 포섭하려던 이성계의 큰 분노를 사서 얼마 동안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어 위화도 회군 때부터 두 부자의 어긋남의 징조를 예고한다.[3]

엉뚱하게도 개국에 공이 없는 이복동생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분노하며 아버지와 계모 신덕왕후에게 반발하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에 자신의 휘하와 종친들을 규합, 정도전과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였다. 정도전이라는 강적과 대립하면서도 왕실의 위엄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답게 무분별한 흑색선전이나 저급한 수단은 지양했다. 아내인 민씨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내관을 매수하고 측근 조영무를 부려서 방석의 세자빈 유씨가 내시 이만과 통정한 일을 잡아내 궁을 뒤집어 놓자 크게 역정을 낸다. "이 이방원이가 제수씨가 바람난 일을 트집 잡아 세자가 되란 말이오!"라는 호통이 절창. 왕권에 대한 야심은 버리지 않고 있으나 왕실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스캔들을 기회로 삼고 싶지는 않은 면모를 드러낸다. 사실 바람에 관대한 성격 때문이다

그래도 이방석을 세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만은 가하다 여겼는지 아버지 이성계를 찾아가 "부인도 건사하지 못하는 방석에겐 세자의 자격이 없다"고 간언하지만, 도리어 "이게 다 네 수작이란 걸 모를 것 같으냐"는 역정만 듣고 만다. 본래 이 일에 직접적 관련이 없는 본인으로서는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나, 사태를 적발한 조영무부터가 이방원의 충복이라 오해를 피할 길이 없었다.

실제로 신덕왕후며 정도전까지 모두 이 일의 배후에 이방원이 있을 것이라 지목했는데, 이방원 본인이 움직이지 않았다 뿐 이방원 휘하 세력이 단단히 작정하고 이방원을 위해 벌인 일이니만큼 오히려 당연한 오해라고 하겠다. 이방원은 세자 자리에 사심이 없다며 둘째형 이방과를 대신 세자로 앉히시라고 주청을 하지만 격노한 이성계는 오히려 세자를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이방원의 궁궐 출입을 금지시킨다. 이후 일을 주도한 부인이며 조영무에게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일을 꾸몄느냐고 제대로 역정을 낸다.[4][5] 이후 신덕왕후가 병에 걸린 초기에 큰왕자들이 문병을 갔다가 문전박대당하고 돌아왔을 때에도[6] 부인 민씨가 집 마당에 들어서면서 "꼴에 자존심 부리냐"면서 이죽거릴 때에도 "사람이 할 소리가 있고 못 할 소리가 있는 법이다."라며 점잖게 타이르기도 했고, 신덕왕후의 국상일에 일을 벌이자는 수하들의 건의도 모두 물리친 것을 보면 적은 적이되 지킬 선은 지킨다는 생각이 확고한 듯.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7] 사병혁파 등으로 곤경을 겪으면서도[8]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가며, 이숙번과도 만나 그의 앞에서 먼저 무릎까지 꿇어 보이는 것을 통해 의형제 관계를 맺게 된다. 또한 신덕왕후와의 갈등도 심해져 사냥한 노루를 궁까지 짊어지고 와[9] "아바마마께서 여색에 빠지시어 몸이 쇠하셨다, 이걸 고아 드리라"고 상 앞에 던져놓는 패드립을 저지르기에 이른다.[10][11] 그러나 자신의 압박이나 방석의 비행으로 마음의 병이 심해진 신덕왕후의 임종이 임박해오자, 생애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가지 말라는 원경왕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병석에 찾아가 묵묵히 유언을 듣는다. 하지만 이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신덕왕후를 보고 연민의 감정이 생겼기 때문은 아니었다. 신덕왕후를 찾기 직전 뭐하러 가냐고 불만을 비치는 민씨에게 자신은 계모가 한 짓을 절대 잊지않으며,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저 일국의 왕족으로서 왕실의 위신을 우선했을 뿐 이었다. 이때의 독기어린 선언은 10년도 훨씬 더 지나 신덕왕후의 정릉을 다 파버리는 걸로 증명된다[12].

신덕왕후 사후 상심한 이성계가 무리하다가 병중에 들자, 정도전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들을 암살하려는 타이밍에 반란을 일으켜 역습을 가해 이복동생들과 정도전의 당여들을 죽이고 사실상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그 동안 이래저래 한이 많이 쌓였던 정도전에게 왜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하지 않냐,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이제 그만 쉬게 해달라는 정도전의 거부에 그를 죽일 것을 명하며 그 최후를 씁쓸하게 지켜본다. 이방석의 경우 신병을 확보한 그 즉시 살해했지만 이방번과 이제는 일단 그냥 놓아줬다. 허나 이방간이 그들을 죽이려 쫓아가는 걸 보고 멈추라는 듯, 한 번 부르기만 했을 뿐 결국 그냥 묵과한다.[13]

이 모든 참극에 절망한 이성계가 물러나자 둘째 형 이방과를 왕에 세웠다. 이에 이지란 등이 그럴 것 없이 그냥 왕위에 앉으라고 재촉하기도 하지만 본인은 정당하게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결코 서두르려 하지 않는다. 반란 이후 아버지와 만난 자리에서 벼루를 맞고 물러나는 와중에서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고, 강렬하게 거부당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효도를 드리려 할 정도.

이 문제의 벼루 사건은 정종과 이방원 내외가 이성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터졌는데, 이때 이성계는 도저히 이방원을 곱게 맞이해 줄 심정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이방원에게 동복 형제와 남편을 잃은 딸 경순공주가 결국 출가하였고, 이성계는 그 출가하는 삭발 의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계는 분을 참지 못하고 "뚫어진 입이라고 말은 그럴싸하게 하는구나! 이 못된 놈, 금수 같은 놈!!"이라며 벼루를 머리에 던지고, 이방원을 죽이겠다며 자신의 어검을 가져오라고 호통을 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의를 갖추려 하는 이방원의 모습도 볼거리.[14]

또한 공신들과 연회를 가진 자리에서 함께 승전의 기쁨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정 집사 앞에서는 결코 기뻐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씁쓸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의 집사가 자신을 암살하려다 죽임을 당하자, 그 충의를 높게 사서 무덤을 마련해주는 등 실제 역사에서와 같은 포용력을 보여준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권력 다잡기에는 철저해서 공신들의 원망을 사면서까지 사병혁파를 진행시키는 한편, 넷째 형 이방간이 권력욕을 드러내며 은밀히 움직이는 가운데 자신을 타도하기 위해 암약하던 조사의의 부하들이 이끄는 군사들의 습격에 부상을 입고 드러눕게 되자 위중한 척하며 향후 흘러가는 동향을 살펴본 뒤 건재함을 과시해 방간 등을 반쯤 데꿀멍시키는 등의 압박을 가한다.
훗날 선위 드립으로 신하들을 갖고 놀던 노하우의 싹수가 이때부터 드러난다.

결국 이방간이 박포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자 친형을 치는 것에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를 꺾어버린다. 이후 방간의 처우를 두고 갈등하다가 결국 살려주기로 한다. 하지만 이방간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박포는 국문 후 본보기로 처형하며, 박포는 죽기 직전 처형장에 모인 신하들에게 나 다음은 당신들이 될 거라는 발언을 한다. 이방원은 잠깐 흠칫하지만 어차피 죽을 놈 헛소리나 실컷하게 놔두라고 하며 떠난다.[15] 반란을 진압한 뒤로도 사병혁파에 계속 전념해 박포의 예견처럼 끝내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공신들 다수를 유배보내기에 이른다.[16] 그 뒤 백성들 앞에서 현 조정의 건재와 방과와의 우애를 증명해 보이는 차원에서 함께 사냥에 나서지만, 이미 물러나기로 마음먹은 방과는 이제까지의 나약한 모습과는 다르게 방원의 의향과 상관없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마침내 조선 제 3대 임금 태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17]


2.2. 조사의의 난,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결[편집]


그렇게 염원하던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며칠도 되지 않아 답답한 궁궐 생활에 싫증을 내서 밖으로 나가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위에 오른 그날 밤에 이숙번의 집으로 미행을 나갈 정도.[18] 자주 미행을 나가지만 돌아올 때 사관과 언관들에게 걸려서 폭풍 잔소리를 듣기도 한다.[19][20] 훗날 후궁으로 들이는 선빈 안씨도 이숙번의 집에 미행을 나갔다가 만났다.[21] 그러나 그와 별개로 책무에는 철저했고 여러 빠른 개혁을 이루는 판에 동북면에 가뭄이 들고 심지어 임금이 된 그 자신이 머무는 궁궐에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고 명나라에선 이방원의 책봉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여러 악재들까지 겹쳐 갈수록 일이 어려워져갔다. 여기에 그의 껄끄러운 양위 배경을 두고 다시 정종을 모시자는 변남룡의 복권 운동까지 일어났다. 그런 마당에 그 전부터 타도 이방원의 기치 아래 세력을 키워오던 조사의가 준동하고 있었다.

한편 아버지 이성계는 이에 격노하여 옥새를 거머쥔 채 금강산을 시작으로 하여 동북 면으로 가버리는데, 환궁을 요청하러 온 신하에게 화살을 쏘는 것으로 이제까지의 반목과는 전혀 다른 본격적인 행동으로 나설 것은 천명하는 동시에 이방원의 왕위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사를 보였다. 결국 조사의와 만나 손을 잡게 되고, 방원은 이런 아버지를 모셔오려 연이어 차사를 파견하지만 맨 처음에 보냈던 박석명만 무사히 돌아오고 나머지는 보내는 족족 살해당한다. 본인은 이런 아버지의 반응에 서글퍼하며 난감해하고, 결국 조사의가 난을 일으키자 아버지와 직접 칼을 맞대야 한다는 사실에 또다시 갈등하지만 이숙번의 일갈에 마음을 다잡고 아직 어린 양녕대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정하기에 이른다. 실로 하늘을 찌를 듯 맹렬한 조사의 휘하 군대였지만 결국 내부의 배반을 유도해 진압에 성공한다. 조사의와 마주한 자리에서 자신과 아버지를 싸우게 한 것에 대한 맹렬한 분노를 드러내고, 그에 대해 냉담히 비웃는 조사의에 대해 삼족을 멸할 것을 명한다.[22]

이러한 일련의 과정 끝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오게 되고, 미리 활과 철퇴로 무장하고 있던 이성계의 공격에서도 살아남아[23] 드디어 조선의 정식 국왕임을 인정받기에 이른다.[24][25]


2.3. 아버지와의 이별,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편집]


앞으로 주상이 다스려 가야 할 그 많은 날들을 위해서 차마 사람으로써 하기 어려운 일들을 이 애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상.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소? 내 말하지 않았소, 임금은 눈물을 보여서는 아니된다고!

주상께서 짊어지고 가야 할 모든 악업은 이 애비가 맡을 것이오. 그것은 바로 주상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함이요.

이제부터는 주상의 시대입니다.

주상에게 들어야 할 욕은 이 애비가 대신 다 들어 주겠소.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우리 주상은 알아야 합니다.


조사의의 난 이후 수년의 텀을 두고 진행된 2부에서는 아직 별다른 일 없이 왕권강화와 국정에 전념하고 있었고 나라 사정도 안정되어 있었다. 아버지 이성계는 자주 밖에 머물다가 나이가 들어 그것도 힘들어 이방원의 권유대로 다시 궁궐에 머물러 지내게 된다. 이 때 그 유명한 일명 용의 춤이라 불리는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 일화로 드디어 완전히 화해를 이루게 된다. 자세히 묘사하면 이방원이 직접 이성계의 두 다리를 주물러주며 한때는 불세출의 명장이자 태산과도 같았던 조선의 건국왕이 나이가 들면서 왜소해졌다는 걸 깨닫고 죄책감과 안쓰러움이 든 이방원이 그 동안 못한 효도를 해야겠다며 직접 춤을 췄고, 누워서 보던 이성계가 놀라서 '주상, 이 뭐하는 행동이시오!'라고 만류하나 이방원은 개의치 않으며 춤을 멈추지 않는다. 이를 계속 지켜보던 이성계는 지난 날들을 떠올리고서는 이방원에게 이해감을 가진 후 '지난 날은 모두 잊었고, 이젠 손자들 보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겠소.'라고 화해를 직접적으로 입에 꺼낸다. 이에 이방원은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아바마마. 소자에겐 이제 아버님밖에 계시지 않사옵니다"란 말과 함께 왕으로서 위엄이고 뭐고 팽개친 후 이성계에게 안기며 아이처럼 엉엉 운다.[26]

그러나 조정에서 이숙번과 민씨 형제의 알력이 조금씩 본격화되는 가운데 겉으로는 그냥 넘기는 척 하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후궁의 일로 원경왕후와 갈등을 빚은 뒤 본격적으로 외척 경계의 싹수를 드러내 선위 소동으로 민무질, 민무구 형제의 꼬투리를 잡아 원경왕후의 원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권력을 박탈시킨 뒤 유배를 보내기에 이른다.[27]

도중 아버지 이성계의 병세가 위중하자 어의를 닥달하고 [28][29]부처님에게 공양을 드리는 등[30] 안간힘을 써서 쾌유를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버지는 이방원에게 자신처럼 피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간곡히 남기며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슬픔을 억누르고 있다가 잠시 빈전에서 나와편전에 홀로 남게 된 자리에서 편전 위 용상에 용포를 입고 자기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환영을 보게 된 후 그 동안 아버지를 상대로 저지른 모든 죄를 회상하다가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라 절규하며 오열하고 만다. 그 뒤 글을 잘 쓰는 관료들로 하여금 생전 이성계의 공덕을 금가루로 쓰게 하고[31] 능의 선정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이후 장인어른 민제의 병세가 위중하자 원경왕후의 다그침과 다른 대군들의 간곡한 요청에 마지못해 일시 두 형제를 유배에서 풀어 아버지의 상을 치르게는 해줬지만, 이 무렵부터 조금씩 본격화되는 양녕대군의 탈선이 외숙들이 원인이라 생각해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정없이 다시 유배를 보내버렸고[32] 아예 섬에 위리안치 시켜버린다. 그리고 이전 유배지에서 두 형제에게 대우를 잘 해준 지방관, 토호들마저 처벌했을 정도.[33]

그리고 종국에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해버렸고 이로 인해 원경왕후로부터 짐승 및 살인마라는 소리마저 듣지만 사정없이 내쳐버린다. 그걸로도 모자라 공개적으로 폐비 의사를 거론하다가 신료들 전원이 반대하자 새로운 후궁 두 명이 내명부를 관리하게 하는 형태로 원경왕후에게서 중전으로서의 모든 권환을 박탈해버린다. 그리고 민씨 형제 밑의 다른 두 동생들[34]을 조정으로 불러 벼슬을 주며 표면적으로는 잘 대해주다가, 후에 원경왕후의 생신 때 양녕대군과 만난 이들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이를 꼬투리 잡아 죽여 버린다.[35] 행동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 의심하고 관련자 앞에서 슬슬 속을 긁는데 마치 편집증에 걸린 사람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양녕의 정신나간 행동이 이해가 안가면서도 이방원의 작태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뒤 의형제와도 같은 이숙번마저 마지막 술자리를 가진 끝에 귀양을 보내며 더욱 왕권 강화에 매진한다.작중에서야 이방원의 충신이자 의리남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이숙번은 오만방자하여 태종의 심기를 계속 건드렸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기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이고 유능하니 감싸주던 태종도 이숙번이 아예 대놓고 태종을 무시하며 불러도 안 나오는 태업을 일삼자 귀양보냈다. 태종에게 무례하게 굴기도 했지만 태종과는 시종일관 우애깊은 형제 사이이던 정종에게 공개적으로 굴욕을 안겨준 적도 있다. 개인적인 형제애만 아니라 왕실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던 태종이 이걸 마음에 안 뒀을리 없다. 일각에서는 아직 한참 왕성히 활동할 수 있는 연령대였기에 태종 이후 왕에게 걸림돌이 될 소지가 역력하여 싹을 잘랐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숙번이 자초한 것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숙번을 쫓아낸 태종은 임종 때 세종대왕에게 자신이 눈을 감아도 절대 이숙번을 복직시키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훗날 세종대왕은 이숙번을 유배에서 해금하여 고향인 안산에 거처하게 했지만은 절대 그를 조정에 불러들이지는 않았다. 사실 민무구, 민무질에 대해서는 적어도 사리판단 못하고 제 무덤 파는 짓을 어느정도 묘사했는데 이숙번에 대해서는 그의 비행이나 문제행각들을 거의 묘사하지 않아서 본작만 보면 그냥 이방원 독한놈 소리 나오게 생겼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피로 피를 씻는 권좌에 염증을 드러내 계속 탈선하는 세자 양녕 때문에 속을 썩이면서 매를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으며 빌기도 하는 등 부정을 보여주지만 결국엔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황희 역시 유배형에 처한다.[36]

그 뒤 마침내 충녕에게 진짜로 선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나지만[37] 실제 역사에서와 같이 군권은 자신이 쥐고 있었고, 그 힘을 바탕[38]으로 이번에는 충녕-세종의 처가에 화살을 돌려 처가를 완벽하게 박살내버리고, 그의 장인 심온은 사사해버렸다.[39] 이에 세종은 눈물기까지 비치며 장인인 심온의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을 부탁하지만, 이방원은 오히려 "주상... 울음을 그치지 못하겠소? 내 말하지 않았소! 임금은 눈물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고!"라는 호통[40] 과 함께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악업은 자신이 지고 갈 것이라는 말로 거부한다.

도중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역시 훗날 화가 될 수 있으니 제거해야 한다는 일부 신료들의 간언을 듣지만 단호하게 거부한다. 왕후까지 정리해 버리면 결국 새 중전을 들인다는 이야기인데, 새 중전을 들이면 이전의 살육은 아무 의미가 없는 사법살인이 될 뿐이며, 새 중전 측에 딸린 외척들을 날려버리는 일을 또 해야 하기 때문이다.[41] 이젠 사람 때려잡는 일도 지긋지긋하다는 분노와 회한 어린 일갈이 일품.[42]


2.4. 말년, 속죄의 죽음[편집]


모처럼 돌아온 양녕의 거지 같은 몰골에 성화를 내던 중, 원경왕후가 그 꼴을 보고 실신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자신도 등창이 시작되어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느끼고, 원경왕후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 때문이라며 극중 처음으로 죄책감을 드러낸다. 이후 원경왕후의 병석으로 찾아가 용서를 빌고, 왕좌에 오른 뒤 자신은 사람이기를 포기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이후 체념이 서린 용서를 받지만 끝내 원경왕후가 눈을 감자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한편 조선 전역에 극심한 가뭄이 든 가운데 그의 병세도 악화되어 어의로부터 요양을 갈 것을 요청받지만, 백성들이 고통 받는 가운데 자기 몸이나 돌볼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리고 이젠 자신도 늙었고 주변의 사람들도 대부분 남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젠 정말 끝이 다가왔음을 절감하며 그나마 세종의 뛰어난 통치력에 안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세종이 찾아와 재차 요양을 갈 것을 부탁하지만 역시 거부하고, 이전 내쳤던 황희의 복권을 부탁한다.

그리고 계속 조선 전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뭄에 걱정을 금치 못하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은 사람인 내금위장(정만쇠)에게 주위에 당시 주상인 세종을 포함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뒤 병이 깊어진 몸으로 홀로 뙤약볕 아래 기우제를 지낸다.[43] 와중 감정이 복받친 태종은 하늘 아래 자신이 쌓아온 악업을 피를 토하듯 늘어놓는다.



그러하옵니다. 이 몸은 죄인이옵니다. 씻을 길 없는 많은 죄를 지었사옵니다. 형제도 죽였사옵니다. 아버님의 가슴 속에도 평생토록 한을 심었사옵니다. 계모님도 그랬사옵니다. 평생의 반려자인 대비마저도 그리했사옵니다. 하오나 미련한 이 몸은 그 길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을 했사옵니다. 그랬사옵니다. 동지들도 다 죽였사옵니다. 처남들도 죽였사옵니다. 사돈마저 죽였사옵니다! 다 죽였사옵니다! 왕실의 걸림돌을 치우기 위함이었사옵니다! 그것이 악업인 줄 알면서도 그리 했사옵니다! 모든 죄는 이 몸에게 물으시오소서. 이 몸, 이승을 떠나기 전에 간절히 기원하옵나이다! 모든 죄는 이 몸에게 물으시오소서![44]

(중략)

이 몸이 뿌리고 흘린 피를 헛되이 하게 하지 마시옵소서. 수 없이 죽어간 저들의 원성과 절규를 헛되이 하게 하지 마시옵소서. 무엇 때문에 흘린 피였사옵니까? 어떻게 지켜온 왕조였사옵니까?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사옵니다.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사옵니다! 기도를 들어 주시오소서. 기도를 들어 주시오소서! 비를 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45]

결국 기우제 끝에 드디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쏟아진다.[46] 이에 태종은 한을 토해내듯 "드디어 이 몸을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옵니까!" 하고 절규한다. 이윽고 세종과 중신들이 일제히 그 자리로 몰려들어 태종을 부축하고, 태종은 세종에게 꼭 성군이 되어 피바람 부는 왕실을 다신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다.[47] 그리고 맏아들 양녕이 보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하고 마지막으로 "아버지... 아버지... 아... 버..."라는 유언을 남긴 이후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다.


3. 캐릭터 평가[편집]




태종이 한 일이 어찌 세종보다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태종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이다.

한국 사극에 등장하는 모든 이방원 중에서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존재. 더 나아가 한국 사극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 태종 이방원의 인생을 실제 역사에 가깝게 디테일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유동근의 연기력에 힘입어 하늘을 찌를 만한 카리스마를 자랑한다. 이 사극이 한국 사극의 블록버스터로 남게 된 원동력들 중 하나.

원래는 이성계와 함께 2대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용의 눈물이 인기에 힘입어 59회나 연장하여 그의 전 생애를 다 다루게 되면서 결국 태종의, 태종에 의한, 태종을 위한 드라마가 되어 사실상 진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이 드라마의 이방원을 두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친혈육간의 정이 눈물겨운 이이자 무자비한 왕조 시대 정치가이자 군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이성계나 동복 형제들에 대한 정이 지극하고, 맏아들 양녕에 이르러서는 평생 하지도 않는 결정 번복이나 애걸복걸도 무릅쓰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라면 고락을 같이 한 공신들도 결국 다 쳐내 버리고, 처남들도 날려버리고, 결국에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맏아들마저 폐세자를 시킬 정도로 강력한 결단력과 인정사정없는 숙청능력을 선보인다. 원조 킬방원 이러한 태종의 캐릭터를 멋지게 요약하는 대사는 양녕을 두고 뇌까리는 한탄. "과인은 평생 결정을 번복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내 아들이 이토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니...."

대체로 여색과 야심과 냉혹무비함 등 정치인 이방원의 어두운 면모가 여과 없이 묘사되었다는 평이지만, 중간 중간 드러내는 인간적인 흔들림과 고뇌가 배우의 연기력과 어우려져 강렬하기 짝이 없는 탓에 일부에서는 역사상의 냉혹함에 대한 실드가 다소 들어가지 않았냐는 평도 존재한다. 세종을 향한 애비가 주상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없는 짓을 한다는 일갈에 설득당하는 시청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방원의 잔인한 숙청, 여색 등을 비교적 빠뜨리지 않고 낱낱이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복잡미묘한 입체성과 배우의 호연이 던지는 자기합리화가 주는 설득력이 너무나 강력했다. 실제로 용의 눈물에서의 캐릭터 해석은 방영이 끝난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실제 역사상 태종이라는 인물을 해석할 때 그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다.[48]

사실 각본이 이방원을 미화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작중 이방원의 작중 행동들을 잘 보면 냉혹한 숙청과 조선건국 정당화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는 반면 실제 역사상에서의 명군으로서의 치세는 그리 잘 묘사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왕권 강화로 인해 신료들과 백성들이 핍박받고 고통받는 식의 묘사가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숙청의 묘사가 너무 강해서[49] 살인마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잔혹함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여기에 한국 사극 주인공 중에 대놓고 역사왜곡을 지시하는 이는 이방원 뿐이다. 고려사와 태조실록을 편찬할때 왕실의 위신에 손상가지 않게 여말선초의 피비린내를 알아서 잘 윤색하라고 압박을 준다.[50] 실록 등에서 이방원을 좀 과하게 실드쳐주는 부분이 있으면 나레이션에서 직접 그것을 반박하는 등의 장면도 있었다.[51] 이방원 하면 '사관에게 적지 말라고 해라' 라는 명령이 기록된 일화가 유명하여 사관 우대 군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치세 동안 사관들을 험한 말로 갈구고 옥에 가두기도 했다는 사실을 나레이션으로 고스란히 묘사한다. 신문고 역시 원 취지와 달리 왕권강화의 틀로 쓰였음을 비판받고 있다. 즉, 이방원의 미화는 작중 묘사가 균형잡힌 데 반해 배우의 카리스마와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단점이 가려 보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회의 기우제 장면은 내내 비 좀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을 길게길게 보여주는데, 배우가 연기력으로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 버릴 정도. 기우제 동안 과거의 악행을 낱낱이 하늘에 자백하는데도, 백성을 위해 비를 달라고 울부짖는 호연에 가려서 시청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다만 후반 이숙번과 양녕대군, 임종을 맞는 원경왕후를 통해 나온 "딱한 사람"이란 표현을 써서 약간 동정표를 얻을 만한 연출이 나와 그 전까지의 사정없는 냉혹함을 미화하려는 듯한 연출이 나온 건 사실이다. 그리고 원작에 비해 이방원을 꽤 좋게 평가해준 것은 사실이다. 몇 번 각주 등을 통해 소개했지만, 원작에서의 이방원은 그냥 두뇌 그림 그리면 권력이 한 99% 정도 차지하고 있는 수준의 권력귀, 권력마 수준으로 친혈육에 대한 정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아예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이 작살난거 아닌가 싶을 지경이며 심지어는 여기에 역사왜곡도 좀 섞여있다. 이를테면 이방간의 아들 이맹종은 2차 왕자의 난 중 무쌍난무를 벌이다가 이방원의 활에 맞아 죽으며 이방원과 정도전의 관계도 과거 함께 대업을 꿈꾸던 동지관계에서 나오는 애증은 거의 없이 그냥 서로를 눈엣가시로 보고 죽이려 안달나있을 뿐이다. 조사의의 난 후 이성계의 귀환식에서도 이성계가 옥새를 내놓자 이방원은 아버지에게서의 용서나 인정보다는 옥새득템에만 관심이 쏠려있을 뿐이고 이후로 이성계를 위해 준비한 의정부 에피소드라든가 후궁을 들여준다든가 하는 여러가지 노력들은 효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그냥 여색으로 꾀어 비위맞추기 수준이다. 위에서 각주로 언급했듯이 태종우에 대해서도 언급 한 번 없이 그냥 '과부를 이궁에 들여 살다가 죽었다'[52]로 끝을 낼 정도이니 아무리 사료 접근이 어렵던 1970년대작이라 해도 작가가 얼마나 이방원을 싫어한건가 싶을 정도다.[53] 뭐 작중에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무학대사를 왕사로 모셔와서 무인정사에 대해 변명하자 대놓고 "너님은 나라와 왕실 때문이라고 변명질하는데 주공단 모르냐? 그렇게 잘났으면 니 동생을 잘 보필해서 나라와 왕실을 안정시키면 됐을텐데 뭐래냐?"고 까댈 정도니.[54]

그야말로 실제 역사 속 이방원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으나 딱 하나 빠진게 있는데 바로 백성들에 대한 너그러운 모습이 없다는 것.[55] 실제로 태종(조선)에도 나오지만 외척과 관료들에게는 그야말로 야차였을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에게는 매우 너그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고[56], 조운선 침몰로 수많은 인명 및 재산손실 사고가 터졌을 때 이 사고는 내게 책임이 있다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서는 그러한 모습이 거의 없이 왕권 강화에만 매진한 모습만 보여준 것은 다소 아쉬울 따름이다.[57]


3.1. 불같은 성격[편집]


위화도 회군서 부터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냉철한 판단과 언변, 카리스마로 좌중을 휘어잡는 태종이지만 몇몇 장면에서 보면 대놓고 불같이 성질을 내는 장면도 많이 보여준다.

대표적으로는 정몽주가 이성계 제거에 실패한 후 태연하게 상황을 살피러 이성계의 문병을 왔을 때 저자가 어찌 여기를 오냐며 옆에 있던 조영무의 칼을 뽑아서 냅다 들어가려는 걸 숙부인 퉁두란이 말려서 겨우 멈췄으며,[58] 세자위가 엉뚱하게 이복동생인 방석에게 갔을 때는 아버지 이성계도 있는 자리에서 중전께서 우리에게 제대로 해준 적이 있었냐는 식으로 대놓고 쪼고, 심지어 이성계가 드러눕게 되었을 때 형제들과 뵙기를 청했음에도 신덕왕후가 거절하자 자신이 사냥에서 잡아왔던 노루를 신덕왕후의 찻상에 내던지며 "아버지께서 여색에 빠져 앓아 누우셨으니 이거 고아서 드리시고, 행여나 고기 한점 떼먹지 마시옵소서"라고 말하며 다과회를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무리 계모가 마음에 안 든다지만 전근대 기준으로 아니 현대 기준으로도 대놓고 불효에 패드립을 저지른 셈.

무인정사 이후 공신 심사에 불만을 품은 박포가 술에 취해 형인 이방과가 왕위에 오른후 있던 주연에서 난동을 부리자 마시던 술잔을 집어던지며 호통을 치고 갑사들을 호출하여 자리에서 그대로 끌어내 순군사(훗날 의금부)에 가둬버렸고, 결국 그 죄로 박포가 귀양가자 이에 대해 직접 찾아와 한마디 했던 조영무에게 격노하여 밥상 뒤집기를 시전하기도 했다.[59][60] 이후 세자위에 오른 후 사병혁파의 일환으로 조영무, 이천우, 조온을 귀양보낸 후 측근인 민무질이 술자리에서 크게 취하여 "이제 매형과 민씨 가문 세상이니 저희도 같이 권력좀 나눠달라"고 했을 때도 다시 한번 밥상 뒤집기를 시전, 술이 떡이 되어 헤롱거리던 민무질이 술이 번쩍 깨서 안절부절 못하게 하기도 했다.[61] 여기서 '동생을 죽이고, 아버님을 내쫓고, 형님을 귀양보내는 마당에 처남들 쯤이야'라는 태종의 발언은 외척인 민씨 가문에 대한 1차 경고였다. 이 경고를 잊어버렸던 민씨 형제들은 훗날 모두 피의 대가를 치뤄야 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원경왕후와 외척 견제 문제로 서로 불같은 언성으로 부부싸움을 했으며 세자시절 양녕이 봉지련과의 스캔들로 시끄럽자 얼굴에 두꺼운 책을 냅다 던지고[62][63] 그에게 역정을 냈다. 물론 그 뒤에 양녕의 멱살을 잡고 한참 그를 질책하다가 지쳐서 "아들아, 제발 이 아빠말좀 들어다오ㅠㅠ"하면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양녕이 물러나가자 어지러진 집무실을 스스로 정리하며 흐느낀다.

또한 정사를 볼때도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조사의의 난 와중에 명나라에서 그의 국왕 책봉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하자 명의 인정보다 아버님께 인정받는게 중요하다며 외교문서를 가져온 관리에게 상소문을 냅다 집어 던졌으며[64][65], 민무구-민무질 옥사 때 그들을 변호를 하면서 자신을 힐난한 이지성에게 대노하여 그 자리에서 끌어내 귀양보내 버리기도 했다. 결국 이지성은 쭉 유배되어 있다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사사할때 후환을 끊는 차원에서 사사 된다.

셋째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은 그 정점. 이 때 세자 책봉 후 편전에서 세자[66]와 세자빈을 앉혀놓고 백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회를 보는데 황희가 대놓고 그의 말을 끊고 세자 책봉의 부당함을 주장할 때 그는 곤복 차림에 면류관의 구슬을 휘날리며 백관을 압도, 황희를 그대로 끌어내 유배조치 하고 다시 세자 문제 가지고 왈가왈부 하면 군율로 다스리겠다 하며 분위기를 서슬퍼렇게 찍어눌러 버린다.

다만 이런 분노는 자신의 가족, 자신과 왕실의 권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에게 주로 터져 나왔다. 물론 이외에 조영무같이 궁녀인 줄 모르고 건드렸던 사건에 대해 버럭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런건 그 자리에서 적당히 타이르고 경고 한번 단단히 주고 끝냈다.[67] 물론 이거이는 그게 계속 쌓여서 정치 생명이 작살났지만....


3.2. 불효자이면서 효자[편집]


아버지 이성계에게는 최악의 불효자인 동시에 최고의 효자였다. 이방석이 세자로 등극한 뒤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와 충돌이 몇 번 빚어지긴 했지만[68], 왕자의 난 이후로는 벼루가 날아들든 화살이 날아들든 철퇴가 난무하든 항상 공손한 저자세로 일관하며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과 임종 뒤 오열하는 장면, 이성계가 죽기 얼마 전에 궁 안에 승려들을 불러들여 염불을 하게 하고 스스로 연비를 하겠다며 팔뚝을 지지는 장면[69], 죽음을 맞이하는 가운데에서도 아버지를 찾는 모습은 이성계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끊임없이 그를 생각하던 이방원의 효심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

다만 단 한 번 성질을 낸 적이 있는데 2차 왕자의 난 이후 세자 책봉이 있은 후 태조에게 문안인사를 갔을 때 "세자? 삼척동자가 웃을 노릇이구나!"라고 일갈한 후 "네 덕 봐가면서 내 이름 천추에 빛내고 싶은 생각 없고, 네놈한테 부탁 하나 하겠는데 다시는 내 앞에 네 얼굴 보이지 마라!"라고 하는 모습에 화딱지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궁녀에게 나갈 테니 문을 열라고 버럭한 적이 있다. 그래도 이를 꽉물고 더이상 화를 내지 않으려 부들부들 하며 "문후인사 앞으로도 자주 올리러 올 테니까 부디 옥체 보전하시라"며 참으려는 모습이 대단하기도 하다.

어머니인 신의왕후에겐 그냥 효자 그 자체. 신의왕후가 몇 화 나오지 못하고 퇴장하기에 그 묘사가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위화도 회군 같은 상황에도 어머니가 걱정하자 잘 도닥이며 갔다 오겠다고 하며 마음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의왕후가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는[70] 어머니의 마음을 최대한 신경써주며 제발 일어나달라고 말하며 슬퍼했다. 신의왕후도 그런 방원이의 능력과 성격을 알기에 죽어가면서도 안타까워했다. 이후 죽은 이후에는 3년상을 치루며 어머니를 넋을 달래고자 했을 정도.[71] 이성계가 죽은 이후에 과거를 회상할 때도 신의왕후가 죽었을 때를 떠올릴 때는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여전히 사랑하는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원이 이렇게 신의왕후에게 지극한 것은 신의왕후 사후에 이방원의 입으로 알 수 있는데, 아이를 무려 여덟이나 낳으면서도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온 이성계가 죽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면서도 따뜻한 정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늘 안타깝고 안쓰러웠던 듯하다.[72] 그래서인지 나중에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받았을 때는 신덕왕후의 초상화를 보고선 분노로 내쳐버린 것과 반대로 얼굴이 크게 밝아지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3. 동복형들에겐 좋은 동생[편집]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점적으로 다뤄져 드문드문 보여지지만 동복형제들에 대한 우애도 애틋하다. 권력욕 없는 둘째형을 징검다리로 쓰기 위해 반강제로 왕위에 앉히긴 했지만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지켰다.[73] 2차 왕자의 난이 끝난후 신하들이 정종 면전에서 양위하라 압박을 주고 동궁전에 들어오자 형님에게 뭐하는 짓이냐며 호통치고 최대한 물렸다.[74] 몸이 달아 정안왕후를 겁박하다시피 했던 원경왕후와는 정반대.[75] 원경왕후가 이성계나 정종에 대하여 투덜거릴때는 내 아버님이고, 내 형님이라며 왕실의 일원으로써 예의와 체통을 지키라고 하면서 딱 잘라버린다. 이방원에게 선위를 한 이후에 정종 복권 계획이 벌어졌을 때는 겁을 먹은 정종에게 조심스레 대하며 안심시켰다. 형들을 절대 이용할 생각이 없는만큼 정종이 이런 저런 부탁을 해도 부탁을 웃으며 잘 들어줄 정도로 관계는 매우 좋았다.[76]

이방의 경우에는 주로 혼자 나오는 경우가 없어 묘사가 별로 없었지만, 병중이던 셋째 방의가 2차 왕자의 난 중에 절제사 인수를 들고오자 형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해 눈물을 쏟았으며, 그의 투병이 길어지자 상왕으로 물러난 형 방과와 함께 문병도 가고 어의를 보내는 등 정성을 다했고 결국 병으로 사망했을 때는 직접 찾아와 어찌 이리도 일찍 세상을 뜨냐면서 눈물을 보였다. 실제 익안군 이방의는 권력 욕심을 전혀 내지 않았으며 2차 왕자의 난이 터졌을때 방원에게 자신의 모든 권한을 내놓다시피 했다. 권력욕도 없고 형제간의 우애만 생각하는 익안군을 태종이 존경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77]

넷째 방간은 나이 차이가 가장 적고 가장 가까운 형인만큼 큰일이 터지면 자신의 수하들 다음으로 늘 도움을 받았던 사이였다.[78] 그러나 방간의 권력욕이 커지고 관계가 조금씩 멀어지다가 2차 왕자의 난을 꾸미는 와중에 방원을 방심시키라는 박포의 조언을 따라 일부러 다시 살갑게 굴었는데도 한치의 의심도 않고 믿었다.[79] 교묘하게 낚은 것도 아니고 설장수의 임종을 보고 오는 길에 한동안 서먹서먹하던 방간이 갑자기 다시 잘 지내보자며 다가온 부자연스런 상황이었는데 굉장히 기뻐하며 받아들였다. 하륜과 민씨가 입을 모아 갑자기 저러는게 수상하다고 몇번이나 간언했지만 한번 의심하면 끝도 없다면서 오히려 불편해하며 전혀 듣지 않을 정도.[80] 심지어는 반란이 진압된 직후에도 형이 난을 일으킨 것을 인정했음에도 정중한 목소리로 왜 자신을 속였냐며 슬퍼했고 처형도 아니고 처후가 있기 전까지 댁에서 기다릴 수 있도록 모셔가라고 말했다.[81]

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되고도 희희낙락하는 공신들이나 민씨와는 달리 침울해하며 민씨가 마련한 주안상을 물린채 고뇌했고 측근들이 입을 모아 방간을 반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전부 뿌리치고 방간을 살려서 귀양을 보내는 걸로 끝냈다. 이후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결국 사망하자 종친의 일원이 죽었으니 종친들 모두에게 상복을 입으라 명하며 슬퍼했다. 이방간의 입장에서는 동생의 뛰어난 능력에 밀려 질투하는 뒤처진 형으로서 묘사되면서도 동시에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기백과 의기가 있는 형으로 동생의 위기엔 늘 도와주던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묘사되었다.[82] 그럼에도 동생을 원망하거나 죽일만큼 싫어한 것은 아니라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기 직전에도 다시금 가까워진 동생을 떠올리며 동생을 안 죽이고 반란을 성공할 방법은 없는지 박포에게 물어볼 정도인 걸 보면 증오로 점철된 관계는 절대 아니다.

그나마 사이가 약간 안 좋았던건 진안군 이방우 정도인데, 이것도 동생이 봤을 때, 형이 너무 올곧고 안 굽혀서 그렇지, 형님 대우하고 존칭 쓸 거 다 쓰면서 조심스레 대해줬지만 방우 입장에서는 집안에서 최초로 과거에 급제해 가문의 자랑이었던 동생이 권력에 눈이 뒤집혀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갈아 엎으려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방우가 사라지기 전까지 서로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형이 사라지고 방석이 자리에 앉기 전까지 방원은 왕의 자리는 당연히 형님인 진안군이시고 안 계시면 둘째 형님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이후에 그런 이야기를 방우에게 했다가 형님에게 된소리만 듣고 쫓겨났다. 물론 형님들에게는 예우를 다하는 방원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뿐이었지, 작중에서 드러나는 이방원의 성정을 보면 분노를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점.


3.4. 아들들에 대한 부성[편집]


실제 역사에서도 아들바보로 유명한 그의 부성 또한 심도 있게 다루었다.[83]

양녕대군이 성장한 중후반부부터 점점 엇나가자, 자식을 혼내고 꾸중하면서도 어떻게든 달래고 감싸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녕의 막장행위가 극에 달한 후반부에는 말 그대로 눈물로 애원을 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하지만[84], 이러한 노력이 헛되게도 결국은 양녕을 세자 자리에서 폐위하게 된다. 세자폐위의 명을 내린 뒤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모습 또한 압권. 앞서도 서술했지만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양녕이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는데, 그의 깊은 부성을 짐작케 한다. 참고로 명필로 유명한 양녕대군이 태종의 눈앞에서 뛰어난 서예솜씨를 선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온갖 호들갑을 다 떨며 기뻐하는 등 상당히 팔불출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85] 이후 신하들에게 주책없게 자식자랑을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후 결국 그의 비행을 더는 묵과하지 못하고 폐세자 조치 했을 때는 어명을 받든 도승지가 나간 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엉엉 울어 버리기도 했다.[86]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고증오류로 저 양녕대군에 대한 것이 꼽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양녕대군을 향한 태종의 애타고 간절한 마음과 행동만은 실제 역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효령대군과 훗날 왕위에 오르는 충녕대군의 경우에도 부성이 깊기는 마찬가지로 훗날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하고 궁궐 밖으로 나가 살라고 했지만 그래도 입궐하여 학사들을 통한 학문 연마는 막지 않았다[87]. 상왕이 되고 효령대군이 오랫동안 지방을 여행하고 문안인사차 찾아왔을 때는 얼굴이 활짝 펴져서 하던 업무를 물리치고 맞이하기도 했다. 심란할 때 찾아온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겐 "일국의 왕자라는 놈들이 큰 놈은 거러지패들과 어울리고, 작은 놈은 염불에 미쳐서 절간을 전전하고.. 잘들 하는 짓이다"면서 세트로 까기도 했지만 이것도 속상한 마음에 버럭한 거..[88]

충녕대군의 경우에는 그가 왕이 된 후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아들의 왕권을 위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옥사를 일으켜 문제가 되는 측근과 왕의 장인인 심온과 그 가족까지 피도 눈물도 없이 정리해버리며 아들의 위치를 견고하게 다졌다.

성녕대군의 경우에는 결혼까지 했지만 몸이 안 좋은지라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출궁시키지도 않고 곁에 두었지만, 결국 홍역으로 투병하다가 어린 나이로 사망한다. 이 때 태종은 어린 아들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채 눈물만 뚝뚝 흘리며 슬퍼한다. 특히 작중에서 이때는 이미 태종이 처남들을 전부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다음이라 원경왕후와는 완전히 틀어져버린 시기인데, 집안이 멸문지화에 가깝게 박살난 원경왕후는 다른 건 다 놓아버리고 오직 이 병약한 막내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끼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요절해버리자 원경왕후는 그간의 원망까지 전부 더해 태종에게 쏟아내며 "당신이 죽였소!"라면서 피맺힌 절규를 토해내는데,[89] 태종은 그저 고개를 돌리고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뭐라 대꾸도 못하고 그 소리를 다 듣기만 한다. 평소에 성격이 불 같은 태종이 이런 비난을 얌전히 듣고만 있는 모습은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 이때가 유일했다.[90]


3.5. 사정없는 외척 숙청[편집]


이런 아버지나 동복형제, 아들에 대한 따뜻함과는 별개로, 외척의 숙청에서만큼은 인정사정없는 냉혈한으로 돌변한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의 죽음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방석을 죽이고 방번과 이제의 죽음을 방관할 때에조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과는 180도로 다른 모습. 사병혁파의 과정에서 공신들을 유배 보내다 이를 이루자 일부는 다시 복권시켜주는 포용력과도 전혀 다르다. 사소한 꼬투리 하나를 잡은 것만으로도 반역으로 몰아붙여 권력을 빼앗아 유배 보내고 잔인하게 국문하고 어릴 때부터 그들 사이에서 자라온 양녕대군에게 이를 참관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게 한다. 이는 이를 통해 양녕에게 자신이 짊어질 책임을 더욱 강하게 통감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안 그래도 피흘림에 지겨웠던 양녕이 더욱더 권좌를 증오하게 되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를 세종의 처가에마저 반복하는 모습은 실제 역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무자비한 숙청형 군주. 거기다 신덕왕후의 정릉의 석물들을 헐어 청계천에 처박아 정종 부부를 아연케까지 한다. 와병 중이던 정안왕후는 뒷날 자기 내외의 능도 그리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나마 민무구, 민무질은 권력을 탐했고 민무휼, 민무회는 매형에게 불만이 있는 걸 삭이고 있기나 했지만, 심온은 외척을 싫어하는 태종의 성향을 잘 알고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했는데도 꼬투리 잡아 죽이고 만다.

이에 대한 그의 인간적 고뇌가 드러나는 장면이라고는 세종의 처가에 대한 처우를 두고 역정을 낸 것과 임종을 앞둔 원경왕후 앞에서의 고백, 기우제에서의 고해성사뿐이다. 원경왕후의 짐승, 살인마라는 저주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일면이다. 게다가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죽여놓고 반발하는 원경왕후의 내명부 수장 권한을 박탈해 새로 들인 후궁 둘에게 넘긴 뒤 원경왕후는 앓아누워있는데 자신은 후궁 둘과 혼례식을 올리며 즐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불러일으킨다.[91][92] 다만, 작중에서 원경왕후가 태종을 상대로 어그로를 끌어 숙청을 자초한 면도 있다. 태종의 여성 편력에 투기심을 드러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태클을 걸 때마다 나와 우리 민씨 집안이 그렇게 고생해서 왕위에 올려줬는데 이러냐는 말을 입을 달았다. 가뜩이나 외척이 왕권을 어지럽힐 것을 강박관념급으로 싫어하는 태종에게 원경왕후가 이런 발언을 서슴치 않게 하며 어그로를 끈다면 태종 입장에서는 나한테 반기를 들고 왕권을 위협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받아들여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93] 실제로 실록에 따르면 태종과 원경왕후는 자주 부부싸움을 하여 부부싸움이 벌어졌다하면 원경왕후를 모시는 상궁과 나인들이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태종도 부부싸움이 지긋지긋했는지 폐비까지 생각했다가 정종이 말려서[94] 관뒀다고 한다. 물론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태종의 외척 숙청은 그 어떤 미화도 들어가 있지 않고 여과없이 나오기에 용의 눈물의 평가를 더욱 드높이는 부분.

2000년대 시각에서는 다르게 볼 수 있지만 용의 눈물이 방영되던 1990년대는 시국이 워낙 권력자의 친인척 비리에 대해서 시선이 안 좋을 때라서, 이런 인정사정없는 모습조차도 단호하다고 호평받기도 했다.[95]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무구의 아래 두 동생을 처벌하는 부분은 저렇게까지 해야하는가라는 의견이 나온다.[96][97][98]


3.6. 노골적인 여색[편집]


다른 한편 여색을 밝히는 모습도 타 매체의 이방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보적이다.[99] 신덕왕후 앞에서 아버지가 여색에 홀렸다고 야유할 처지가 전혀 못 된다 첫 시작은 효빈 김씨.[100] 막내 동생이 세자가 되고 정도전의 견제를 받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일 때 민씨의 여종 덕실을 보고 후실로 들인다. 이일로 인해 원경왕후와 두고두고 싸우게 된다.[101][102] 그나마 즉위 후 원경왕후가 덕실에 대한 미움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 봉합되는가 싶더니 선빈 안씨를 시작으로 후궁을 계속해서 들이고 침소에 드는 궁녀는 말 그대로 날마다 바꿔서 원경왕후의 복장을 뒤집는다. 원경왕후는 이 문제로 태종과 끊임없이 지지고 볶았는데[103] 이것은 신덕왕후와의 악연, 민씨 형제의 부적절한 처세와 함께 태종이 외척 제거의 결심을 굳히는 원인이 된다.

다만, 공사구분이 철저해서 아버지 같은 원칙에 어긋난 무리수는 없었기에 국정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호색에는 원래 여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왕실의 세력을 키우고[104] 외척인 민씨를 견제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중전의 친정 못지않게 후궁 혹은 그 친정이 왕의 총애에 힘입어 세력을 키우는 것도 경계해서 선빈 안씨가 자기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는 욕심을 보이자 처소에 발길을 끊어버렸으며 원경왕후를 대신해 궐 안의 살림을 돌볼 후궁 2명을 들일 때도 친인척에게 수혜를 주거나 투기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본인이 호색한이라서 그런지 휘하 공신들의 여자문제에는 엄청나게 관대한 편이다. 무인정사 이후 사병혁파 문제로 대립 중이던 이거이 부자가 방석의 기생첩과 스캔들이 터졌을 때 이를 공격수단으로 쓰자는 이숙번의 건의에, 사병혁파와 왕권강화라는 숙원 때문에 받아들이긴 하지만 여자문제로 트집 잡는 게 제일 치사한 일이라며 탐탁찮아했다. 조영무가 어쩌다 궁궐의 여인을 끌어다 첩실을 삼은 사건에서 이 호색함과 아량이 잘 드러나는데, 처음에는 조영무를 사정없이 질책하면서 '궁녀라면 과인에게 속한 여인네거늘!' 운운하고 당장 목을 치겠다며 버럭버럭 화를 낸다[105]. 그렇게 조영무를 압박하며 으름장을 놓는데, 조영무가 쩔쩔매면서도 '내놓지는 못하겠습니다' 하고 떠는 모습을 보이자 이내 분위기를 전환하고 '수전증에 걸린 게야, 떨긴 왜 떨어!' 하고 꾸짖으며 같은 사내끼리 이 일은 그냥 넘어가자는 일종의 사후승인을 내려 준다. 조영무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명장면 실제 태종도 '왕권에 직접적인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웬만한 건 쿨하게 넘어가는 쿨가이였다.

여담으로 용의 눈물 후일담 스페셜에서 태종을 연기한 유동근은 "에로왕" 에 등극했는데, 아예 여색의 장면이 없는 정도전의 안재모의 이방원, 그리고 기껏해야 분이에게 키스를 한 육룡이 나르샤유아인의 이방원 그리고 가례색의 언급과 다른 궁녀들과 잠을 잤다는 태종 이방원주상욱의 이방원과는 다르게 실제로 잠자리를 함께 하는 모습이 유난히 많이 나왔고 태종의 후궁들의 속살이 유난히 많이 드러난듯 제대로 여색을 탐하는 모습이 더욱 강조된다.

4. 기타[편집]


유동근은 정안대군을 연기하기 전에 1990년 드라마 파천무에서 정안대군의 손자 수양대군을 절륜하게 연기하여 생애 처음으로 상을 받았는데 용의 눈물에서 수양대군의 할아버지 정안대군도 훌륭하게 연기하면서 또 상을 받았다. 그리고 훗날 정도전에서 이성계까지 연기하며 조선 전기 3대 쿠데타 수괴를 다 연기한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고 여기서도 또 상을 받음으로서 조선 전기 3대 쿠데타 수괴를 다 연기하고 그때마다 다 상을 받은 명배우가 되었다.

극중에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뒷날 공개된 NG 장면들에 의하면 유동근의 장난기 때문인지 애드립성 조크 장면이 많은 편이었다. 극중의 모습이 워낙 강렬했기에 더더욱 뿜게 만드는 장면들.

문과 급제자 출신이지만 문무를 겸비했다는 언급이 있으며 실제로도 제법 뛰어난 무예를 선보인다. 싸우는 모습이 많지는 않으나 두 장면 정도 직접 싸우는 모습이 나왔는데, 1차 왕자의 난 직후 술을 마시고 들어가던 중 자객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자객 하나를 순식간에 처단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군사들과 길을 가던 중 조사의의 부하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어깨에 독화살을 맞아 피를 철철 흘리는 와중에도 병사의 창을 빼앗아 들고 자객들 몇을 찔러죽이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먼 훗날 평행세계에서 아버지로 환생하여, 자신으로 환생한 셋째 아들에게 끔찍한 보복을 당하게 된다. 허나 여기에선 이성계가 야심이 많긴 하지만 한편으로 정도 많고 순박한 인물로 묘사되는데다, 이 쪽 이방원의 마지막 행태가 상당히 패드립적이라 인과응보라기보다는 안쓰러울 정도의 위화감을 자아낸다. 묘하게도 네가 왜 이렇게 됐냐는 연민의 대사는 그 이방원과 자신 양쪽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 더욱이 용의 눈물의 이성계는 마지막에 이르러서 아들과 화해하여 한을 풀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도전의 이성계는 이제 막 지옥에 들어섰을 때 드라마가 끝나버려 시청자들에겐 고통받는 존재로 인식된다는게 더욱 비극적일 뿐.
[1] 이덕화가 이 배역에 한때 거론되기도 했었다.[2] 다만 장남인 이방우는 회군에도 충심을 드러내며 거부했기에 피신을 시키지 못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동복이든 이복이든 형재애가 지극했던지라 답답해하면서도 형님을 걱정했고 동시에 그 뜻을 존중해줬다.[3] 부자가 원래부터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이방원은 집안 최초로 무인 집안에서 과거시험을 합격한 인물로 이성계도 굉장히 기뻐했고 이방원의 과거 합격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그의 합격 사령장을 수차례 읽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에는 역사와 작중 모두 정몽주를 독단적으로 암살하면서 오랫동안 사이가 나빴다. 작중에서도 원경왕후와 단둘이 이야기할때 이 이야기를 꺼내며 부부 모두 착잡함을 드러낸다.[4] 세자 자리에 대한 야심만큼은 확실히 있었으나 그보다는 왕실의 위엄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 작중에 명확히 드러난다. 가령 세자가 되어 궁궐에 들어온 첫날 정종이 언제 양위를 받겠느냐고 하자 '나는 왕실의 위엄만을 생각하는데 형님은 이 아우를 옥좌에 눈이 먼 미치광이로 보시는가!' 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그것. 어쨌든 이 일의 결과로 이방원이 얻은 것이라곤 왕실의 혼란과 이성계의 어그로밖에 없다. 이때 조영무를 꾸짖으면서 '사내에게는 금기가 있어! 적어도 계집 얘기 따위로 한 사람을 매장시키고 죄를 잡으려 든다는 것은 사내가 해서는 아니 될 짓이야!' 하고 호통을 친다.[5]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후술하겠지만 조영무가 감히 궁녀와 간통하는 크나큰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쿨하게 넘어가줬다.[6] 안그래도 세자의 안위가 걱정되는 판국에 큰왕자들이 몰려오기까지 하자 무슨 죽을병에 걸렸다고 문병을 왔냐며 돌려보낸 것.[7] 신덕왕후는 이를 두고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하며 화근이 없어졌다고 좋아하다가, 무사히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안색이 돌변한다. 이방원의 성공적인 외교 수행과 귀국을 전하는 부인 민씨는 신덕왕후의 반응을 즐기는 듯 씩 웃는게 또 다른 관전 포인트. 이방원이 안그래도 사이가 껄끄러워진 명에 간 것 자체가 일생일대의 위기로 간주되어 세인들의 출입이 뚝 끊겨버린 상황이었는데, 무사귀국이라는 반전이 터졌으니 민씨 입장에서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8] 이 과정에서 마찰이 빚어지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의 집사들이 대신 곤장을 맞는 형에 처해지고, 이방원의 수족과도 같은 정만쇠는 곤장을 맞은 이후로 몇회동안 아예 자리에 몸져누워 간신히 복귀했을때에도 허리를 제대로 못 펴고 절뚝거리며 마당으로 나와 궁에서 돌아오는 이방원 내외를 맞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이방원은 정도전과의 대화로 인해 완전 폭발하여 그냥 들고 일어나려 하다가 하륜의 질책에 가까운 만류로 겨우 참는다. 참고로 실제로는 이후 진법훈련 중 종친들의 훈련실적이 영 꽝이라 하여 종친들을 족칠수는 없으니 대신 그 휘하 사람들에게 태형을 집행했다.(그런데 남은 등 정도전 친구들도 똑같이 훈련실적이 꽝인데 공신이라고 역시 밑에 사람이 맞았다.)[9]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불러서 위로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방원만 쏙 빼고 이방과, 방간, 방의 세명만 불러서 위로를 했다. 하지만 불려온 3명의 왕자들도 떨떠름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10] 이 노루가 마취된 채 살아있는 생노루를 팽겨친 것이고 실제 신덕왕후 역을 맡은 김영란 씨가 이걸 모르고 있다가 기겁했다는 일화가 있다. 촬영 후 놀라서 울게 된 김영란에게 유동근이 커피를 사주며 달래느라 고생했다는 건 덤. 그리고 노루라는 동물이 결코 가벼운 몸무게가 아닌만큼 유동근도 짊어지느라 무거웠다고 한다.[11] 용의 눈물 종영 16년 뒤에 방영된 정도전에서는 이성계가 아직은 고려의 신하였을 때 이방원이 이성계 대신 명에 사신으로 갈 때 강씨가 준 수필낭을 갈갈이 찢어서 "곧 방석이도 이리 만들 것입니다."라 말하며 병석에 누운 신덕왕후 강씨의 손에 쥐어주는 식으로 더 패륜아스럽게 오마주했다.[12] 정확히는 '이장'(무덤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긴 하나 정릉에 설치 되었던 석물들을 모조리 파내어 청계천 광통교를 만드는데 써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석물들은 관심을 덜 받던 곳이다보니 무사히 보존되어 현대에서 여말선초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13] 이제의 경우 실제로는 이방원이 그냥 집에 가래서 갔더니 반란군이 집에 쳐들어와 죽였다.[14] 이 벼루 장면은 이후 드라마 정도전에서 배우가 바뀐 채 그대로 오마주한다. 상황은 좀 바뀌었지만(정몽주를 살해한 뒤에 분노한 이성계와 이방원), 이성계 역을 맡은 배우가 이 유동근이고, 벼루를 이방원에게 내던지고 곧바로 칼로 내리치려 하며 '나는 사람 새끼가 아니라, 짐승 새끼만도 못한 놈을 키웠다!'라고 대노하는 모습 등 거의 내용을 그대로 오마주했다.[15] 훗날 박포의 말은 사실이 된다.[16] 다만 이들은 얼마 후 전부 복직하며 이후에도 중도에 폐서인당한 이거이와 이저를 제외하면 모두 잘 먹고 잘 살았다. 사실 본인들도 그렇고 이숙번이나 민무구 형제도 이들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륜만은 이들이 곧 돌아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사실 사병도 모두 빼앗겼고 중도에 귀양간 전적도 있어 정치력이 떨어진 이들은 더 이상 왕실에 위협이 되긴 어렵고 오히려 적당한 시기에 복직시켜주면 감복할 가능성이 높으니 살려주는게 나은 선택이긴 했으며 실제로 조사의의 난 직전 시점에서 대부분 다시 돌아온다.[17] 작중의 모습과 다르게 실제로 정종 이방과는 강직한 무골이자 무인으로서 입지가 있었으니 동생 눈치를 보지는 않았을거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무인인 것과 정치적 능력 혹은 야심의 유무는 별개이며 실제로 이방과는 아버지를 위해 설정된 목표 이상으로 어떠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해 본 적은 없었다.[18] 이 때 이숙번의 집에는 하륜이 찾아와서 나랏일을 이야기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방원이 행차하자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는 장면이 압권이었다.[19] 하필이면 자신이 미행을 나갈때 몰래 추적하려던 언관에게 걸렸다. 이 때 태종이 아까 그 언관인 걸 확인하고 이마를 누르며 "아오..."라고 신음을 내지르는게 백미. 직무상 어딜 다녀오셨는지 기록해야한다며 태종을 닥달하는데, 이 때 태종이 뿔이 나서 "뒷간에 다녀오느니라!!!! 고얀 놈...."하고 일갈하고는 대전으로 들어가버린다...[20] 실제로 태종 이방원은 둘째 형인 정종 이방과가 왕위에서 물러난 후 유유자적하며 평온하게 지내는 모습을 부러워했다는 기록이 존재.[21] 원작인 세종대왕에서는 이숙번이 바친 여인이 효빈 김씨가 된다. 하지만 실록에서 이방원이 효빈을 원경왕후의 몸종 출신이라고 떠들어댄 게 있으니 일단은 용의 눈물 쪽이 적어도 실록 기록은 잘 반영한 편이다. 실제 효빈 김씨의 정체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22] 조사의는 이방원에게 '넌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니 얼른 나도 죽이라.'고 이죽거렸다. 이는 작중 2차 왕자의 난 때 박포를 죽일 때 박포가 했던 발언에 이은 태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가 된다.[23] 이성계의 의도를 파악한 하륜의 기지가 있었다.[24] 이때 이성계가 철퇴로 상을 부수면서 고함을 지르는데 다른 신하들이 피하라고 하자, 부친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듯 "닥쳐라!" 라고 일갈하며 가만히 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성계는 그런 이방원을 보며 "천운이로고...." 라고 말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은 명장면.[25] 여담으로 이성계를 연기한 김무생 옹이 이 장면에서 철퇴가 갑자기 손잡이에서 빠져 어딘가로 굴러나가는 NG 장면이 발생하자 황당해하는 코믹한 모습이 나왔다.[26]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원경왕후 역할의 최명길 씨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데,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감정이입이 되어 운 거라고 한다. 베테랑 연기자인 그녀도 몰입시킬만큼 두 배우의 연기가 빛을 발휘한 장면이다. 또한 김무생 옹이 작중 엉엉 우는 태종을 연기한 유동근의 등을 토닥여주는 모습은 애드립으로 별다른 연기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한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혈육의 정과 자신 장단점을 그대로 닮은 아들의 모습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27] 이게 바로 상술한 '용의 춤' 장면 이후에 벌어진 상황인데, 이에 원경왕후는 시아버지에겐 그렇게 지극정성을 다하면서 왜 우리 집안은 이리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며 태종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28] 태조 때부터 세종 때까지 계속 자리지키는 이 어의는 신덕왕후 때는 무슨 병인지도 진단 못해서 '황공하옵니다.' 이성계 때는 '환후가 의술의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성녕대군을 진료하면서는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소헌왕후가 몸져누웠을 때는 '마음의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라고 매번 얼버무릴뿐, 병 고치는 장면이 안 나온다.[29] 종방후에 방송된 특별방송에선 패널로 나온 개그맨 전유성은 이 어의를 용의 눈물 공포의 저승사자라고 불렀다.[30] 이 때 상왕인 정종과 함께 팔뚝에 수계 의식을 하며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데 이게 지금의 향불로 살짝 찌르는게 아니라 초 심지를 올려놓고 태워서 팔뚝에 큰 화상을 남기는 고행 행위다.[31] 이를 들은 원경왕후는 그만큼 자기네 일가에게도 신경 좀 써줬으면 하는 원망을 드러냈고, 양녕대군은 생전 그렇게 권력을 두고 다투다 이제 와서 생색을 내냐고 냉소를 드러냈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훗날 계유정난 때 동생손자에게 저지른 짓을 보면 전형적인 내로남불.[32] 이 때는 민제의 유언인 "자식들을 잘 부탁드린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마주한 처남들에게 자신에게 달리 할 말이 없느냐며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왜 귀양을 가야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두 형제는 망설이다가 "아무리 그래도 어찌 저희에게 이러실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대답해버렸고, 결국 태종은 "장인어른은 훌륭한 분이셨지만, 그건 그분에게만 해당되는구만"이라는 최후통첩을 날리고 나가버린다.[33] 사실 대우를 잘 해줬다기보다 아첨을 떠는 것에 가깝게 묘사되었다. 한양에서의 사정을 잘 모르는 지방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아무리 유배를 와 있다 하더라도 왕실의 외척인 만큼 금세 풀려날 것이니, 이 참에 잘 보여야겠다는 것. 외척을 배격했던 태종이 보기에는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는 일이었다.[34] 처음 민씨 형제를 귀양 보낸 뒤 "내가 너희 형들을 처벌한 일에 대해 원망하고 있잖아, 그렇지? (민무율, 민무회: 아닙니다. 전하.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야... 너희들은 역시 그때의 일로 과인을 원망하는 것이 틀림없어." 라며 은근슬쩍 속을 긁어댔다.[35] 이 부분이 참 비정한 게 민무구, 무질을 죽인 다음 무휼, 무회를 불러 양녕을 위로하라 한 다음, 양녕에게 친척들끼리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며 타이른다. 그리고 얼마 후 무휼, 무회도 목매달아 버린다. 죄라도 있다면 모르겠는데 태종 본인 입으로 "솔까말 민씨 걔들이 뭔 죽을죄를 지었냐? 좀 분수에 넘친 죄 그거 하나뿐이지."라고 말했다.[36] 황희는 폐세자론이 본격화될 때도 따로 태종을 찾아와 절대 불가하다는 걸 상기할 정도였고, 성녕대군의 상이 진행될 무렵 양녕의 폐세자 및 충녕의 세자 등극이 단 하룻밤 사이에 이뤄지자 아무 것도 못 하다 비로소 여기서 다시 호소한 것이다. 문제는 이걸 주장하면서 한다는 예시가 1차 왕자의 난이며 그 때의 고통을 알지 않느냐고 간언한 것이라 태종 입장에서는 역린을 맞은 격이었고 당연히 직빵으로 유배를 보내버린 것. 원작에서는 아예 황희가 양녕대군과 밀지로 충녕대군이 세자로 좋겠다고 의견교환을 하면서 막후에서 판을 열심히 깔아놓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나중에 황희가 폐세자에 반대하다가 귀양갔다고 나온 것에 비하면 그럭저럭 일관성을 보인 것.[37] 이때 조말생과 이야기를 하는데 양위 이야기를 하기 직전에 나라를 위해 생각을 많이 했다 라고 하자 조말생이 뭔가 감이 온듯 놀라면서도 벙찐 표정을 짓는다.[38] 조말생과의 이야기에서 주상이 있는 경복궁과 자신이 있는 궁 쪽으로 병사들을 추가 배치시킨 것을 영의정 심온이 재가시켰으나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았다. 이때 좌의정 박은과 영돈녕부사 유정현을 불러 한 소리 하는데 이제는 나를 아주 허깨비로 본다면서 엄청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 더불어 세종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39] 역모로 몰아서 고문을 하는데 대쪽같은 심온은 끝내 자신은 역모와 무관하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허나 밤에 은밀히 옥에 태종이 사람을 보내어 왕권 강화를 위한 외척 정리의 뜻을 솔직히 전달하자, 끝까지 누명을 씌우려 했다면 거짓 자백하지 않으려 했으나 대의가 그러하다면 따르겠다며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튿날 유배길에 비단끈과 사약 중 사약을 선택하고 이런 일은 자신으로 끝내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40] 태종이 왕인 처음에 세종에게 존댓말을 하다가 버럭 역정을 내며 반말을 섞어가며 화를 낸다.[41] 작중에서도 소헌왕후의 존재로 인해 후환이 두려웠던 유정현과 박은이 직접 '후환이 두렵다.' 고 말하며 소헌왕후의 폐위를 요구했으나 태종은 도리어 이 두 사람에게 외척을 날린 이유를 설명해주며 '이제 피 냄새는 지긋지긋하다. 날더러 언제까지 사람 죽이는 일을 하라는 말이냐' 며 고함을 친다. 당시 주상으로 있는 세종에게 조말생을 위시로 하는 건의가 들어오자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성격이 제대로 폭발한 채로 일갈하며 계속 언급이 되면 대역죄로 다스리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라고 답하는데 태종이 내보인 논리와 똑같은 논리인 셈이다.[42] 소헌왕후의 친정을 숙청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경왕후가 소용이 없을 걸 알면서도 태종을 찾아와 "우리 가문을 박살냈으면서 이번엔 며느리 가문까지 박살내십니까?"라고 따졌다.(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기개가 약해져서 애처로운 하소연이나 마찬가지다.) 이때 태종은 대꾸없이 조용히 처형장을 보러 갔는데, 원경왕후의 말을 듣기 전부터 무자비한 숙청으로 여럿의 목숨을 끝내버린 것에 진저리를 느낀 걸로 보인다.[43] 이때 정만쇠가 큰일 난다면서 만류했으나 이방원 자신이 "나도 사람다운 일을 해야지... 사람다운 일을...." 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 그의 뜻에 따르게 된다.[44] 이 말 이후로 정몽주를 살해할 때부터 심온을 사사할 때까지 이방원 자신이 저지른 모든 악업들이 회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밖에선 세종과 소헌왕후 및 재상들이 전부 태종에게 문을 열라고 간청한다.[45] 그 이후에도 태종이 계속해서 하늘에 대고 간청하는 장면과 밖에서 문을 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이 연속되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워지는 장면이다.[46]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죽으면서 내가 죽으면 반드시 비가 올 것이라 유언했고 정말로 비가 내리자 이후 이를 태종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드라마에서도 나레이션으로 이를 설명해주었다.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없이 그냥 무미건조하게 태상왕이 연화방 신궁에서 훙했다고 적었을 뿐이다. 다만 난중일기에까지 관련 내용이 있는 걸 보면 민간에서 꽤 유명하게 회자되는 이야기였던 듯.[47] 그의 증손자숙부 때문에 일어난 정변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양위하게 된 일 뿐만 아니라 후대의 조선 왕들 및 세자들로 인해 생긴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씁쓸하기 짝이 없는 대사이다.[48] 단적으로 2017년 대선 정국 당시 사람들이 평하길 앞으로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인물은 세종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면서도 단호한 숙청을 보여준 태종이 되어야 한다는 시각이 있었다.[49] 이 드라마에서 국문은 정말 답정너로써 국문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으로보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게 한 두번이 아니다. 특히 심온을 때려잡을때는 본인 스스로가 억지로 사람을 때려잡는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다.[50] 조선건국에 저항한 이숭인, 이종학 등을 장살한 일을 사서 편찬하는 타이밍에 갑자기 거론해서 조정을 뒤집어 놓고 대간들이 사초쓰는 이들을 국문하겠다며 날뛰니 '뭐, 꼭 그런 뜻은 아닌데'하고 슬쩍 빠지고 그러면서 왕실위신 해치지 않게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도승지를 '식견높고 정치 잘 안다'며 칭찬한다. 이후 편찬작업을 하던 하륜을 불러다가 '내가 못믿어서 그런건 아닌데 그거 그렇게 쓸거요? 역사 쓰려면 헤아려야 할 게 많으니 알아서 다 고려하시오'하고 대놓고 곡필을 지시한다. 물러난 하륜은 그 이방원도 역사는 무서워 한다는걸 깨닫는다.[51] 예를 들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이 "내가 원래 방석이 방번이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이거이 부자가 나한테 제대로 상의도 하지 않고 나서서 쳐 죽인거임" 이라고 했다는 실록 기록을 소개한 뒤 바로 이어서 이런 실록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까 버렸다.[52] 이직의 딸인 신순궁주 이씨와 이운로의 딸인 혜순궁주 이씨.[53] 그런데 정작 태종우 에피소드가 실려있는 연려실기술은 이미 1968년까지 전권이 번역되어 나왔기 때문에 못봐서 안넣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그래도 삼국지연의를 번역할 정도로 한학실력으로 정평이 나있던 월탄이 고작 연려실기술 따위를 국역이 안되었다고 못 읽을 리도 없고.[54] 물론 왕사라고 저렇게 자근자근 밟아댄 건 아니고 나름대로 공손한 투로 얘기했다.저랬으면 불교계는 씨가 말랐을 듯[55] 다만 이 문제는 용의 눈물의 이방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태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탓인지 다른 작품에 나오는 이방원들을 보아도 백성들에게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작품은 거의 없다.[56] 어린 아이들이 궁궐 앞에서 간 크게도 공에다가 자신과 대군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차고 놀았는데도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넘어가고 다시는 이 사건을 논하지 말라고 명했다. 당시는 군왕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것조차도 중죄로 취급되던 시대였다.[57] 다만, 부족하지만 약간은 나오기는 한다. 대표적으로 세자에게 방해가 될까봐 자신의 처남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양녕대군이 밖으로 나돌아다닐 때 막지 못한 궁궐의 관리, 병사들의 목을 베라는 명령까지 내리는데 정작 양녕대군과 같이 놀았던 '잡놈'들은 죽이지 않고 모두 놓아주었다는 것. 관리와 병사는 무슨 죄[58] 다만 퉁두란이 무관인 이성계가 문관인 정몽주따위에게 당하겠냐며 말렸는데, 듣고 나름 납득을 한 것으로 보인다.[59] 이 때 무인정사 때 싸운 동지들을 이렇게 홀대하시는건 사나이의 의리가 아니라고 조영무가 항변하지만 "이놈아, 이것은 정치야!!! 그 자리에서 내가 넘어갔다면 왕권이 실추되고 권위가 흔들리게 된단 말이다! 뭘 알고 떠들어!!!"라고 단호하게 거절한다.[60] 여담으로 이 밥상 뒤집기는 유동근의 전매특허로써 정도전에서도 뭔가 분노한 일이 있을때 수시로 이성계가 밥상 뒤집기를 시전한다.[61] 이때 밥상 뒤집기를 하면서 손이 베여 피가 났는데 유동근이 연기를 계속 이어가면서 극에 더욱 몰입하는 효과가 나왔다.[62] 이때 연출된 것인지 실제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양녕을 맡은 이민우의 코에 책이 직격한 후 코에서 피가 줄줄 나왔다.[63] 역시 정도전에서도 이성계가본인이 이방원본인에게 책을 던지는데 이때도 이방원이 맞고 피를 흘린다.[64] 동시에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감놔라 대추놔라하는 명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참고로 태종은 사신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서 현재 명과 척을 지려는 정도전을 제거하면 그의 왕위 등극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이때 태종은 '이것은 우리 조선 내부의 일이고 타국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 도움을 단칼에 거절한다. 훗날 이런 문제가 불거질 걸 생각하면 태종이 매우 잘 판단한 것.[65] 이는 이후 하륜이 조선을 대표로 명에 방문하여 영락제와의 담판을 지으며 수습된다. 동시에 여진족의 조사의의 난 개입문제도 동시에 해결하여 귀국하게 된다.[66] 훗날의 세종.[67] 사실 그때 버럭했던건 조영무 때문이라기 보단 권세를 쥔 중신들을 전체적으로 기어오르는거 같자 군사훈련 겸해서 다시 한번 제대로 눌러버리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메인타겟은 조영무가 아니라 사서 태조실록을 편찬하고 있던 하륜이었다.[68] 사실 아버지와 충돌 할 때도 큰 소리 안내고 조용히 간곡하게 호소하는 스타일이였다.[69] 불이 다 타들어가자 내관에게 다시 갈아 올리라고 계속 명하여, 끝내 큰 화상을 입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시 원경왕후의 아버지 민제도 중병에 걸려 있었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자기 아버지에게는 저렇게나 효를 다하는데 장인에게는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나' 하고 원망했을 정도. 더불어 이 장면은 실제 실록 기사에 근거한 것이다.[70] 신의왕후의 말에는 늘 작고 예의바른 어투로 부드럽게 대답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냐는 힘 없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노비에게 말을 할 때는 폭발한 듯한 목소리로 파발을 띄웠냐고 노비들을 쏘아붙인다.[71] 그 당시에도 3년상은 거의 못 치룰 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려 조정에서도 특별한 조치로 3년상을 면해 줘서 다른 형들은 조정에 다시 출사하기 까지 했는데 방원은 홀로 남아 스스로 3년상을 치른다.[72] 근데, 반대로 이게 신덕왕후를 더 미워하는 계기도 됐는데, 신덕왕후가 이성계를 홀린 여우 취급하고 어머니를 견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지막에 앓던 어머니가 외롭게 죽어간 모습과 자신과 형들을 짐승 취급하며 무시하는 것에 대한 경멸감을 느낀 듯 하다.[73] 형인 정종과 있을 때 예의를 잊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왕의 집무실인 대전에 아버지 태조가 걸어 놨던 신덕왕후의 초상화가 그대로 걸려있는걸 보자 대뜸 일어나 잡아채서는 내동댕이 쳐버린 것 정도가 있다. 참고로 이때 동생의 신덕왕후에 대한 반감과 원한을 잘 알던 정종은 뭐라 말도 못하고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물론 이방원은 정종을 겁 주려고 그런 게 아니었지만.[74] 특히 자신의 측근인 이숙번과 하륜의 경우 이때 왕위 계승에 대한 말을 하려고 하자 "듣기 싫어!!!!!!!!!!!"라고 쩌렁쩌렁하게 일갈하여 말을 잘라버리기도 했다.[75] 그래도 훗날 자신이 내명부 최상위인 중궁전을 차지했을때는 다시 부드럽게 대한다. 뒷날 자신의 처가가 풍비박산난 이후엔 정안왕후에게 함부로 대했던걸 후회하기도 한다.[76] 이는 정종 쪽에서도 동생에게 누를 끼칠까 권력과 관계 없는 부탁만 형쪽에서 하는 것도 있었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묘사가 자주 나오는 편인만큼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77] 실제로 실록을 보면 이방원은 왕이 되고나서도 자주 방의의 집에 문병을 왔고 이후 사망하였을 때도 친히 장례식에 방문하여 형의 빈전 앞에 절을 올리고, 장례식에 지원할수 있는 모든 걸 베풀었다.[78] 1차 왕자의 난 때도 암살계획을 눈치챈 이방원이 함께 있던 대군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눈빛으로 의사표현을 했던 것 역시 방간이었고 그를 바로 눈치챘던 것도 방간이었다.[79] 어린 시절 독사에 물린 방원을 업고 10리 길을 달려서 목숨을 구해줬다는 설정이 붙어있다. 여기에 신덕왕후와 비슷한 연배인 첫째, 둘째 형 그리고 셋째 방의와의 나이 차이도 있다. 그래서 세 형들보다 훨씬 가까운 바로 윗형에 정도전에게 맞설때 형제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방간이 권력욕을 내비치기전엔 제일 친한 형이었다. 그래서 그 과거 이야기를 했을 때, 방간은 아직도 그런 걸 기억하냐며 쑥스러워했지만, 방원은 진심으로 그 순간을 아직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며 형님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80]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러 나설때 형님에게 상처 하나라도 입히면 군율로 다스리겠다며 살릴 뜻을 분명히 한다. 이 말 자체는 실록에 기록된 말이지만 방원이 사전에 난의 전모를 파악하고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라 출병전의 눈물쇼와 합쳐 왕실의 위신을 해치지 않으려는 연극으로 볼 수도 있는 실제 역사와 달리 작중에서는 초반에 방원이 크게 불리한 상황에 놓인걸로 각색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심이다. 이 와중에도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보다 형이 자신을 미워하고 배신했다는 사실에 측근들이 대비를 해야한다고 말하는데도 슬퍼서 눈물을 흘릴 정도.[81] 와중에 박포가 따지는 목소리에는 냉혹한 목소리로 죽여버릴 것이라고 말하며 극과 극의 차이를 보여줬다.[82] 그 부분에 대한 인식은 주변도 비슷해서, 퉁두란도 의외로 방원이만큼 기백이 있다고 칭찬했으며, 다른 이성계 파벌쪽도 방간은 방원 다음으로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라 걱정했고, 신덕왕후는 아예 방원이랑 함께 꼭 죽여야 할 인물로 생각했을 정도.[83] 다만 실제 역사에서도 태종이 지독한 아들바보였던 것은 양녕이 태어나기에 앞서 무려 세 명의 아들들이 전부 아기일 때 요절한 탓도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그 점은 다루지 않았다.[84] 말 한마디하지 않고 반항하는 양녕을 위해 주위를 다 물리고 직접 다가와 양녕의 손을 꼭 잡고 "얼굴도 잘생기고 책도 많이 읽은 우리 세자가 왜 그럴까. 아비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다오. 내 꼭 고쳐보마."라고 말을 한다.[85] 평소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다소 코믹할 정도이다.[86] 사실 이 명령을 내리기전에 어명을 도승지에게 내릴때도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최대한 끝까지 왕의 모습을 보였고 결국 도승지가 집무실에서 나가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실록에서는 아예 신하들 앞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결정이 내려지자마자 엉엉 울었다.[87] 역시 자식들 사랑하기는 마찬가지인 원경왕후의 경우에는 너무 빨리 출궁시키는거 아니냐며 서운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88] 훗날 같은 작가의 드라마에서 두 아들의 후손의 행적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89] 특히 성녕대군의 마지막 유언이 태종과 원경왕후에게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이었기에, 원경왕후는 "이 어린 것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죽으면서까지 저런 소릴 하겠소!"라면서 태종을 원망한다.[90] 아버지인 이성계가 도적놈, 살인마라고 쏘아붙일 때도 자신은 왕실을 위해 그랬다고 스스로를 변호했었다. 그런 태종이 아들이 남긴 유언을 들먹이며 '얼마나 우리 사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의 눈에도 막장이었으면 죽으면서까지 부부 간의 화목을 바라고 죽었겠냐!'는 원경왕후의 일갈에 최소한의 반론조차 못하고 그저 울면서 듣기만 한 건 그만큼 태종이 남의 비난을 듣고도 아무런 말을 못할 정도로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는 소리다. 실제 역사에서도 태종은 성녕대군 사후 아들이 생각나 울 것 같다면서 성녕대군이 살던 집 앞을 지나가지도 못하고 빙 돌아서 갔다.[91] 다만 본인도 사실은 어거지로 흥을 낸 것이었으며 이후 후궁 둘에게 내명부 수장으로서의 역할만 맡겼을 뿐 중전의 권위는 여전하며 함부로 이를 넘봤다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엄포를 놓긴 했다.[92] 여담으로 이 후궁 둘 중 한 명의 인상이 매우 표독스러워 은근히 존재감이 있었다. 후궁이 된 이후 원경왕후를 직접 대면하는데 이미 권력욕구를 다 내놓은 원경왕후가 초연한 말을 하자 한 명은 어쩔 줄 몰라하며 맞장구만 치지만 이 후궁은 표독스런 눈길로 원경왕후를 쳐다보는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소름이 돋는다는 시청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이 후궁이 뭔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했지만 이후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냥 맥거핀화되었다.[93] 이 부분은 이방원의 계모였던 신덕왕후의 친정인 곡산 강씨 집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태종 최대의 트라우마라 할만한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단순히 왕비 개인의 영향력 행사를 통한 후계자 책봉 수준이었다면 어차피 원경왕후는 확실한 정실이니 크게 문제삼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신덕왕후가 행사한 막대한 영향력은 그녀의 친정이 동북면 촌뜨기에 불과했던 이성계를 사위로 받아주어 개성 중앙권력에 안착시켜 준 곡산 강씨 집안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태종은 외척이 마음만 먹으면 8형제 중 막내를 세자로 만들어 한 나라의 왕실을 피떡으로 만들고,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게 만드는 수준의 전횡도 충분히 부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절감했다. 이렇다보니 누구보다 왕권강화에 열을 올리는 이방원 입장에서는 외척을 아예 입도 뻥끗 못하게 단도리 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작의 이방원은 그 무엇보다도 왕실의 권위와 위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릭터이니 더더욱. 하지만 드라마든 실록이든 정작 이성계의 개성 진출 초기 경처가의 조력 내용이나 이후 막후에서 강씨 집안의 움직임은 잘 묘사되지 않아 시청자들 보기에는 아무리 그래도 민씨네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너무하다는 소리가 나올만도 하다. 정도전에서도 그저 강씨가 이리저리 고군분투할 뿐이었지 그녀의 친정이 힘을 보태준다든가 하는 묘사도 없었고.[94] 태종에게 "야, 너는 아들도 셋이나 낳아 놓고 애들 앞에서 부부끼리 사이가 그렇게 나빠서야 되겠냐? 나는 내 부인하고 자식은 없어도 젊어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정으로 잘 살고 있다. 너는 자식도 많으면서 또 후궁은 뭐하러 들이려고 그러냐?"라고 지적했고, 태종도 받아 들였다.[95] 특히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의 비리로 이런 시각이 극대화 되어 극중 이방원이 더 호평받은 면도 있다. 이 이미지 때문에 유동근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일 때 국민과의 대화에도 참여하여 친인척관리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96] 정말 저 사람이 한때 매형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잔인하고 답정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국민이 안 그런게 어디있겠냐만 정말 이 두 형제는 주리형, 압슬형, 인두형 등 당시에 가옥했던 형벌은 다 받는다. 사실 드라마를 봐도 민무구, 민무질은 어느정도 권력을 얻고 나서 오만방자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그렇다고 죽이는건 아무리 봐도 심했지만 민무휼, 민무회 형제는 형들이 당한것도 있어서 조용히 살다가 정말 작은 실수 하나 한 것이었다. 괜히 중전이 난리를 친게 아니다. 사실 민무구, 민무질까지는 보통 애들 보는 역사만화책 같은데도 나오니 어느정도 알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후 민무휼, 민무회 형제까지 조져버리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애초에 이들 형제에 대한 인지도 자체가 높지 않던 터라 시청자들이 적지않게 충격을 받았다.[97] 예전 사극들은 현대 사극들보다 고문 장면의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했다. 용의 눈물에서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고문이 나오는데, 이중 가장 정점이 바로 민무휼, 민무회 형제의 고문 장면이다.[98] 다만 이방원도 작중 처음부터 외척을 숙청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민무질이 술자리에서 "권력이라는 건 부귀영화를 누리는 거니 남자라면 당연히 가져야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발언을 눈치없게 하여 사병 혁파 과정에서 공신들을 귀양 보내서 괴로워하는 이방원을 눈치없이 자극하여 이방원이 "권력은 자식, 친족, 형제, 처가도 없는 것."이라 일갈하며 민무질에게 잘 처신해서 괜히 화를 자초하지 말라고 경고를 암시했으나 알아듣지 못했으며, 원경왕후와 민무구도 이런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왜 괜히 심기를 건드렸냐." 면박만 줬지 권력을 얻기 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여 결국 사망플래그를 제대로 터트렸다.[99] 사실 이나마도 실제 태종의 행적과 비교하면 많이 줄인 편이다. 작중 내레이션을 통해 여자가 너무 많아 일일이 등장시킬 수 없었다고 대놓고 언급한다.[100] 선빈 안씨가 세자 자리에 욕심내다 총애를 잃어버리는 것과 달리 이쪽은 욕심 없이 태종의 사랑만 갈구한 덕에 (첩실 생각할 틈도 없이 바쁘던 세자 시절을 제외하면) 꾸준히 사랑받는다.[101] 이 과정에서 원경왕후는 덕실에게서 난 자식(뒷날의 경녕군 이비)을 죽이려 하다 이방원의 노여움을 사고, 이것이 뒷날 그녀의 남은 두 동생마저 죽게 하는 구실 중 일부가 되고야 만다.[102] 그런데 효빈 김씨는 자신과 원경왕후의 위치를 떠나서 원경왕후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고 저자세로 일관했다. 반항한 적이 딱 두 번 있는데 경녕군을 임신했을 당시 낙태시키는 약을 먹이려는 원경왕후에게 맞선 것과 왕후가 교육을 이유로 당시 아직 젖도 못뗀 경녕군를 떼어 놓으려고 했을 때 저항한 것 정도. 다만 이 정도는 어머니로서 당연한 태도로 경녕군을 세자로 운운한 적은 전혀 없었으며, 원경왕후도 이 때문인지 다른 후궁들과는 달리 그녀에 대해서는 날을 세우지는 않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03] 함흥차사로 태종이 한참 심란해졌을 때도 마누라 등쌀에 내전에서 나와 지내고 있었다.[104] 잠저시절부터 왕실은 씨가 넉넉해야 한다는 말을 수시로 한다.[105] 당시 궁궐에 속한 나인과 상궁은 왕의 여인으로 분류, 간통시에는 기본이 참수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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