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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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대신
안평강공(安平康公)
李百藥 | 이백약

시호
(康)
작호
안평현공(安平縣公)

이(李)
이름
백약(百藥)

중규(重規)
부친
이덕림(李德林)
출생
565년 ~ 648년
출신
정주(定州) 안평현(安平縣)
국적
수(隋) → 당(唐)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수나라 시절
2.3. 수말당초
2.4. 태종에게 중용되다.
3.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이백약은 수나라부터 당나라까지 활약한 대신이자 역사가로 자는 중규(重規)이다. 아버지인 이덕림이 편찬을 시작했던 북제의 역사서인 북제서를 완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이백약은 565년에 정주 안평현에서 당시 북제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던 이덕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백약은 어린 시절에 병치레를 많이 하여, 할머니인 조씨가 백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백약은 7살에 글을 잘 지었고, 아버지의 친구인 서릉이 지은 문장을 한번에 해석하여 주변 사람들의 놀라움을 샀다.


2.2. 수나라 시절[편집]


수나라가 건국되고, 이백약은 부친의 음서로 동궁통사사인으로 임명되었으며, 태자사인, 동궁학사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어떤 이가 이백약의 재능을 시기하자, 이백약은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이후 이백약은 인수궁으로 소환되어 부친의 작위인 안평현공을 계승하였다. 수나라의 좌복야인 양소와 이부상서 우홍은 이백약의 재능을 총애하여 그를 벽소하였고, 태자인 양용이 이백약을 동궁학사로 삼았다. 이백약은 조정에서 율령의 제정과 음양서의 편찬에 참여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그런데 당시 수문제의 아들인 진왕 양광은 양주에 있을 때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이백약을 벽소하려고 했는데, 이백약은 병을 핑계로 진왕 양광에게 나아가지 않았다.

604년, 수문제가 세상을 떠나고, 진왕 양광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양광은 과거 이백약이 병을 핑계로 자신이 찾아오지 않은 것을 원한 삼아, 즉위한 뒤에 이백약을 계주 사마로 좌천시켰다. 그 뒤에 양제가 주현제를 군현제로 대체하면서 이백약은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뒤에 다시 건안군승을 역임하였다.


2.3. 수말당초[편집]


수나라 말, 양제의 실책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가운데, 이백약은 심법흥, 이자통, 두복위의 휘하를 전전하였다. 이백약은 두복위의 휘하에 있을 때, 어떤 이로부터 참소를 당하여 유폐되었다가, 두복위에게 성궁부(省躬賦)를 바쳐 자신의 사정을 전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당나라의 고조가 두복위를 초무할 때, 이백약은 두복위에게 입조할 것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두복위는 도중에 이백약의 권유를 들은 것을 후회하여, 이백약을 죽이려고 하였다. 두복위는 석회에 탄 술을 이백약에게 마시게 하여 이백약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부하인 보공석에게 이백약을 죽이라고 하기도 하였지만, 부하 장수인 왕웅탄의 구명으로 이백약은 살아난다.

이후 보공석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백약을 이부상서로 제수한다. 보공석의 반란 소식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백약이 보공석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참소가 돌게 되는데, 보공석이 평정된 이후, 고조는 이백약을 주벌하려고 했지만, 두복위가 보공석을 시켜 이백약을 죽이라는 문서를 발견하면서, 이백약을 처벌하는 대신, 경주(涇州)로 유배시켰다.


2.4. 태종에게 중용되다.[편집]


626년에 즉위한 당태종은 이백약의 재능을 매우 중시하여, 그를 중서사인으로 제수하고 안평현남의 작위를 내렸다. 이백약은 628년에 예부시랑으로 제수되어 율령의 제정과 북제의 역사서 편찬에 참여한다. 이백약은 예부시랑으로 있을 때 조정 내에서 제기된 황족과 공신들에게 분봉을 하자는 주장에 대해 봉건론(封建論)을 헌상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백약은 630년에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로 제수되어, 태종의 태자인 이승건을 보좌하였다. 당시 이승건이 비행을 많이 저지르자, 이백약은 찬도부(讚道賦)를 지어 이승건에게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백약이 참여한 북제의 역사서 편찬은 아버지인 이덕림이 이루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636년에 북제서를 완성하였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이백약은 작위가 안평현공까지 올라갔고, 몇년 뒤에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648년에 사망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백약에게 강(康)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3.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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