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규(1974)

최근 편집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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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70 박진만 [[코치(스포츠)#s-2.1|

]] · 75 손주인 · 76 타치바나 · 77 배영섭
· 78 강봉규 · 79 이병규 · 87 박희수 · 89 이정식
· 94 권오준 · 97 강명구 · # 이진영 · # 정민태 · # 정연창'''

2군
71 조동찬 · 74 박한이 · 90 박찬도 · 91 다바타
· 98 채상병 · # 정대현 · # 강영식 · # 김지훈


육성군
85 김정혁 · 88 정현욱 · 92 정병곤


컨디셔닝
72 나이토 · 80 황승현 · 81 권오경 · 82 김현규 · 83 윤석훈
86 한흥일 · 93 윤성철 · 95 박승주 · 96 류호인 · # 김용해 · # 염상철 · # 허준환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군입대선수등록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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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규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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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6
2,296 안타[1]
2012년
-

이병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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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7주니치.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로고.svg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1998

파일: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2002

파일:2000 시드니 올림픽 로고.svg
2000 시드니 올림픽 야구 종목
동메달
200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7 KBO 리그 신인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5, 2013 KBO 리그 타격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9, 2000, 2001, 2005 KBO 리그 최다 안타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1 KBO 리그 득점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11 KBO 올스타전 미스터 올스타

보유 기록
연타석 최다 안타
10안타[1]
통산 외야수 부문 최다 골든글러브
6개



이병규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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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트윈스 등번호 9번
한대화
(1994~1996)

이병규
(1997~2006)


오지환
(2009)
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번
카와이 마사히로
(2004~2006)

이병규
(2007~2009)


디오니스 세자르
(2010)
LG 트윈스 등번호 9번
오지환
(2009)

이병규
(2010~2016)


KBO 영구결번
LG 트윈스 등번호 91번
노찬엽
(2015~2016)

이병규
(2018)


이권엽
(2021~)
LG 트윈스 등번호 9번
KBO 영구결번

이병규
(2019~2022)


KBO 영구결번
질롱 코리아 등번호 9번
홍창기
(2019-20)

이병규
(2022-23)


현역




파일:LG 이병규 9 코치 프로필 사진.jpg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No.
LG 트윈스 No.9
질롱 코리아 No.9
삼성 라이온즈 No.[1]
이병규
李炳圭 / Lee Byungkyu

출생
1974년 12월 8일 (49세)[2]
파일:전라북도 휘장.svg 전라북도 파일:김제시 CI.svg 김제시 죽산면 홍산리 외리마을[3][4]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서울청구초 - 서대문중[5] - 파일:FB_IMG_1611689718795.jpg 장충고 - 파일:다운로드파일 - 8.jpg 단국대
신체
188cm|체중 88kg|O형
포지션
중견수[6], 우익수[7], 지명타자[8], 좌익수[9], 1루수[10]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7년 1차 지명 (LG)
소속팀
파일:LG 트윈스 엠블럼(1990~2005).png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LG 트윈스 (1997~2006)
파일:주니치 드래곤즈 엠블럼.svg 주니치 드래곤즈 (2007~2009)
파일:LG 트윈스 엠블럼(2006~2014).svg LG 트윈스 (2010~2016)
지도자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1군 타격보조코치 (2018~2019)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2020~2021[11])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잔류군 야수코치 (2021[1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2군 타격코치 (2022)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모자 로고.svg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 코치 (2022~)
파일:질롱 코리아 엠블럼.png 질롱 코리아 감독 (2022-23)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23~)
해설위원
파일:skySports 로고.svg sky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7)
병역
예술체육요원[13]
SNS
파일:싸이월드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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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모
아버지 이길강[1]
배우자
류재희(1974년생) (2003년 ~ 현재)
자녀
장남 이승민(2005년 1월 6일생)[2]
차남 이승언(2007년 1월 16일생)
등장곡
Run-D.M.C. - It's Tricky(2004)
Max Raabe - Sex Bomb(2005~2006)[3]
Queen - I Was Born to Love You(2010~2016)[4][5][6]
응원가
구단 자작곡[7][8]
주니치 시절[9]
종교
무종교

1. 개요
2.1. 수상 내역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이후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야구인. 현역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 現 삼성 라이온즈 수석 코치. 주 포지션은 일본 진출 전 중견수, LG 복귀 후엔 우익수지명타자.


2. 선수 경력[편집]



2.1. 수상 내역[편집]


KBO
수상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6회 (1997, 1999~2001, 2004, 2005)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 (2013)
신인왕 (1997)
타율 1위 2회 (2005, 2013)
안타 1위 4회 (1999~2001, 2005)
득점 1위 (2001)
NPB
수상

일본시리즈 우승 (2007)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한국프로야구의 대표적인 배드볼 히터. 전성기 시절 이병규의 컨택 능력은 리그에서도 압도적이었으며 높은 볼부터 거의 바닥에 처박히는 볼까지 일단 휘둘러서 공을 맞히고 보는 타입으로,[14] 컨디션이 좋을 때의 이병규는 별 희한한 공까지 안타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인다.[15] 덕분에 통산 타율 자체는 한국프로야구 역대 4위(0.314)에 올라 있으나, 배드볼 히터 특성상 볼넷 숫자 또한 적어서[16] 출루율은 커리어 내내 4할을 넘겨본 적이 없다.

전성기 시절에는 잠실구장을 쓰면서도 30홈런을 달성하는 등[17] 상당한 장타력을 과시했으며, 그 이후에도 꾸준히 두 자릿수 정도의 홈런은 기록한 선수. 단, 2003 시즌의 무릎 십자인대 파열 이후 주루 능력은 많이 떨어져서 그 이후 도루에 관해 내세울 만한 기록은 없다.[18]



2002년 한국시리즈 다이빙 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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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뿐 아니라 수비 면에서도 역대급의 외야 수비를 자랑하는 선수로, 괴물같은 타구 판단능력에 기반한 위치 선정이 특기로, 타자가 공을 치면 낙구 지점에 미리 가서 만사 귀찮은 듯이 글러브만 살짝 뻗어 잡아내는 수비가 일품이다. 설렁설렁 하는 것 같아 보여도 타구 종착 지점에 이미 가 있기에 문제가 없다. 센스뿐 아니라 빠른 발과 강한 어깨 등으로 신체조건 또한 좋아서, 많은 야구인들도 역대 외야수 중 손꼽히는 수비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요약하자면 이순철에 이은 소위 라면 수비의 계승자.

특징으론 잡지 못할 공은 상술한 빠른 타구 판단능력에 기인해, 세컨 플레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특유의 성의 없어 보이는 움직임과 합쳐져 싸이에 달린 댓글로 인해 '동네 슈퍼에 라면 사러 가는 것 같은 수비' 라는 말이 퍼지며 까이게 되어 라면사러가는 병규(라뱅)라는 별명까지 붙었다.[19] 이는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타격 부진과 한일전에서의 실책성 플레이를 하여 평소에 야구를 보지 않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선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병규의 타격폼도 언뜻 보면 성의 없게 멀뚱멀뚱 서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수도. 최근에 이런 풍평피해를 받고 있는 선수는 바로 양의지이다.


4. 은퇴 이후[편집]



4.1. 해설위원[편집]


은퇴 후 행보를 모색하던 도중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에 합류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

그리고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박찬호와 함께 해설을 한다고 한다. 당분간 해설위원을 하면서 야구에 대해 더 공부할 듯 하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7040300718_0.jpg
skySports 해설위원 당시 프로필 사진

파일:external/image.ajunews.com/20170405154503691230.jpg

WBC 해설을 마치고 kt wiz 감독으로 부임한 김진욱 감독의 후임으로 skySports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정식 합류했다.#

2017년 4월 4일 LG와 삼성의 경기에서 해설자로 데뷔했다. 처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어조로 굉장히 능숙하게 해설을 진행했다. 최근까지 필드에서 선수로 뛰던 현장감을 잘 발휘하여, 선수들과의 관계, 그라운드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을 상황에 맞게 잘 녹여냈다는 평. 그리고 이 날 LG는 삼성을 무려 11대 0으로 털어버리면서 이병규의 해설자 데뷔전을 축하했다.

해설 스타일은 매우 직설적으로, 좋은 점은 칭찬하고, 안 좋은 점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예를 들면 다린 러프의 1루 수비를 두고 불필요한 송구에 대해 이해가 안 된다고 한다든지, 구자욱이나 히메네스의 타격 부진에 대해 하체나 팔이 불안정하다며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타 해설들에 비해 목소리가 작고 조용한 편이라, 임용수 캐스터와 붙으면 졸리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반대로 얘기하면 듣기에 무리 없는, 편한 해설이라는 말도 맞다.

LG에서만 17년을 뛰어서 가끔 '우리 팀에서...'라고 말하고 바로 '아니 LG에서'라고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흔히 일어나는 일인 데다 이종범이 아들 이정후가 뛰고 있는 키움(당시 넥센)을 저희 넥센이라 한 것에 묻혀서 딱히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6월 15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사구를 맞은 나지완에 대해 '맞았으면 그냥 나가야죠'라고 말하는 등 '오버할 일이 아니다'며 롯데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으로 편파해설 논란이 있었다. 본인도 이 논란에 대해 알고 있다고.[20]

해설 중 '그렇죠'라는 말을 유독 많이 사용한다. 툭히 특유의 발음 덕에 '구로초'라고 들려 이병규의 해설을 좋아하지 않는 야구팬들에게는 '구로초 홍보대사(...)'라며 까이기도 한다.

4.2.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병규(1974)/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1997년 프로 데뷔전부터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는데 다름 아닌 경기 후 인터뷰 때 했던 도발성 발언. 해태 타이거즈와의 시즌 홈개막전에서 상대 투수였던 조계현[21]에게 4타수 3안타의 맹타를 휘두른 것 까진 좋았지만, 경기 후 인터뷰 도중 했던 말이 "신인이라고 봐주지 마시고 성의 있게 던져 주셨으면 좋겠다." 이 흠좀무한 인터뷰에 해태 선수단은 물론 팬들도 난리가 났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망정이지 요즘 같았으면 아주 가루가 되다 못해 나노 분자가 될 때까지 까였을 경솔한 발언.[22] LG 트윈스 선수단도 다른 의미에서 난리가 났으며, 바로 다음 날 코치진들이 직접 이병규를 데리고 해태 덕아웃에 와서 정중히 사과함으로서 일단락되었다. 참고로 당사자인 조계현이 이 때를 회고하기를 후배 투수들이 많이 화가 나서 "(빈볼을) 어디에다 맞히면 되느냐?"고 물어왔지만, 조계현 본인은 이병규의 이런 당돌한 패기가 마음에 들어 "그러지 말고 그냥 삼진으로 잡아라"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실 이병규의 저 발언이 진짜 선배를 도발하려는 의도였다기보단, 일종의 말실수였다는 걸 이해해 주고 넘어간 셈. 이병규 본인도 어지간히 데였는지 은퇴 당시 야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라고 회고했다. 지금 돌아보면 자기가 생각해도 황당한 인터뷰였다고.

  • 1998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이병규가 친 타구를 강동우가 잡으려다 펜스에 부딪히면서 무릎 골절을 당해 선수 생활을 망치다시피 한 부상을 입었을 때 손으로 목긋기 제스처를 해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당시 심각한 부상인줄 몰랐고, 코치에게 자신이 아웃되었냐고 묻는 의미로 사용한 제스쳐라는 해명을 하긴 했지만 당시 상황이 영상으로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남은 지라... 타 팀 팬들이 이병규의 멘탈에 의구심을 품게 한 대표적인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당사자인 강동우는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이 넘은 2014년 베이스볼긱과 한 인터뷰에서도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는 굉장히 섭섭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사건이 지난 후에 서로 관계회복을 했다면 모를까, 사건 당시에 아무런 오해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 LG가 계속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 듯 선배인 김용수에게 술먹고 전화해서 하소연 하면서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 하지만 2013년에 오랜만에 포스트시즌 진출하면서 나아진 듯. 그리고 현재 LG 소속 선수로서 가을 야구를 가장 많이 치른 선수가 바로 라뱅이다. 이병규는 3번의 한국시리즈를 포함 총 6번이나 가을야구를 LG 선수로서 경험하였다. 그리고 주니치에서는 우승도 했다.

  • 시드니 올림픽을 뛰었던 시절 동메달 결정전때 8회말 극적으로 이승엽이 2타점 2루타를 치면서 결승 득점을 하고 돌아오면서 다음 타자인 김동주 에게 엉덩이를 때린 적이 있다.

  • 같은 팀에 7번을 단 작뱅 이병규가 있기 때문에 가끔 가다 분신술을 썼다는 등의 개드립이 나오곤 하며, 실제로 2010년 5월 1일 SK 와이번스 전과 2011년 8월 2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한 이닝에 두 선수가 홈런을 같이 친 적이 있다.뱅투뱅

  • 2013년 11월 24일에 방영된 런닝맨 초능력 특집에 출연해서 예상치 않은 예능감을 보였기 때문에 이병규를 처음 본 사람들은 호감이 간다며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마법진 자세를 LG트윈스 러브 페스티벌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본인 말로는 두 아들이 런닝맨을 좋아해서 출연했다고 했으며, 한 번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악역의 이미지를 부각된 영화배우 안길강과 은근히 닮았는데 묘하게도 안길강은 LG 트윈스 팬이다. 공교롭게 이병규 부친의 이름이 이길강이다.

  • 미인 아내를 두었으며[23] 슬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가족 사랑이 대단해 현역시절 헬멧 오른쪽에 아내의 성씨(RYU(류재희))와 두 아들(SM(이승민), SE(이승언))의 이니셜을 썼었다. 이 중 첫째 이승민은 현재 휘문고등학교에서 외야수로 활동하고 있다. 투타도 아버지와 똑같은 좌투좌타.
파일:external/www.xportsnews.com/1323589870293.jpg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3100301000380100022421.jpg
파일:external/pds.joins.com/201404251550778042_535a061ca0948.jpg

  • 다소 와일드한 이미지 덕에 목소리가 걸걸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목소리 톤이 높다. 반대로 푸근한 이미지를 가져 목소리가 좀 상냥할 것으로 보이는 이진영은 목소리가 상당히 걸걸한 편.

  • KBO 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싸인매너가 별로 좋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 유독 엠엘비파크디시인사이드 등 야구 관련 커뮤니티에서 코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선수로 꼽히는 불가사의한 여론이 많기도 하다. 특이한 점은 안티들만 이러는 게 아니라 충성도 높은 LG 팬들까지도 이런 글을 올리는 게 자주 보인다.(…). 이병규가 타격코치가 되면 "내가 치는 거 봐봐! 공이 딱 오지? 그럼 치면 돼! 쉽지?"라고 할 게 뻔하다는 게 그 이유. 이 점은 이병규가 확실히 자신만의 노하우로 놀라운 컨텍 능력을 가졌지만 이런 스킬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유도 있지만, 왠지 이병규는 성격상 이럴 거 같다는 어느 정도의 선입견이 배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2015년 시점에서도 코치 생활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무능하고 실패하는 코치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능력보다는 철밥통이나 붙임성으로 자리를 지키거나 거기에 안주해 코치로서 자신의 코칭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거나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독불장군형들이 주로 이런 실패한 감독 & 코치의 유형임을 생각해볼 때 벌써부터 이병규가 코치하면 무조건 실패할 거라는 결론은 너무 앞서가는 것이며, 누구든 간에 지도자가 돼서 많은 공부와 실패에 대한 피드백을 잘하고 발전해 나가려는 노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니 벌써부터 지도자로 성공 & 실패를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병규가 은퇴한 뒤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면 거기에 대한 준비나 공부를 철저히 하려는 자세를 가지는 게 필요하다.[24] 21세기부터는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들도 네티즌들이 지켜보는 시대가 되었고 그런 변화에 따른 일종의 관심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코치직이 현실이 되면서 어떻게 될 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 LG 트윈스프랜차이즈 스타이면서 팀을 이끄는 클럽하우스 리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실제로 부상 등으로 LG 트윈스 2군에 내려가게 될 때 2군 후배들이 불편해 하는 사항들을 구단에 즉각적으로 알려 시정 요구를 했다. 2014년에 다리 부상으로 3개월간 구리 챔피언스 파크에 내려가 있을 때 2군 후배들이 이른 시각 + 짧은 식사시간으로 불편해 하자 구단 담당자에게 곧바로 보고해 식사시간을 조절케 했으며 1군 선수들에게만 LG전자의 휴대폰이 지급되자 구단측에 2군 포함한 전 선수들에게 LG전자 휴대폰을 지급해 달라고 요구한 이도 이병규였다.

  • 팀 후배 박용택을 극찬하면서도 경계했다. "용택이가 내 기록 다 깬대"라며 웬만한 자신의 개인 대기록을 깨뜨릴 주인공으로 인정했다. 실제로 박용택은 19년을 뛰었고 이미 2000안타를 포함해서 여러 기록을 넘어섰다.

  • 진갑용이 2015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2016년에도 현역 생활을 지속할 경우 2016시즌에는 최고령 야수가 된다. 심지어 2015년 시즌 종료 후 이병규보다 연상인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타니시게 모토노부 등이 전부 유니폼을 벗으면서 일본프로야구에도 이병규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가 없게 되었다. 야수 아시아 최고령.... 그러나 투수를 포함하면 최고령 선수는 아마도 될 수 없을 듯하다. 최영필이 은퇴하지 않는 한....

  • 2016년 KBO 리그 미디어데이에서 류제국이 말한 바에 의하면, 2016년에 LG 트윈스가 우승한다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에 외야 펜스 문이 열리며 이병규가 말을 타고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을 달리겠다고 한다(...) 이에 박용택은 "몇 년 전부터 얘기해 왔던 것으로, 실제로 프런트에서 이 약속을 꼭 지켜주겠다고 했다"라고(...) 기사

  • 정찬헌 - 정근우 빈볼 시비 벤클에서 유래한 밈으로 라뱅이 시켰다가 있다. 당시 빈볼에 대해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 정찬헌이 단독으로 했을 리는 없고 고참 선수가 시켰을 것이다 - 이병규가 시켰다 - 라뱅이 시켰다 라는 추측으로 유래한 것으로 추정. 이후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라뱅이...라뱅이 시켰다..."라는 쪽으로 간혹 튀어나오게 되었다. LG랑은 1그램도 상관없는 일이더라도(...)

  • 은퇴시 본인이 꼽은 야구 인생의 결정적인 네 장면으로 1997년 데뷔전 후 도발성 인터뷰 사건과 2002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2013년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순간과 2016년 10월 8일의 현역 마지막 경기를 꼽았다.#

  • 구렁이를 매우 무서워한다. 정글의 법칙에 출연했을 때 구렁이가 나타나자 PD 뒤로 숨어버렸다(...).

  • 포지션의 임재욱과 꽤 친한 사이인 듯. #1 #2 #3 그리고 은퇴식에서 임재욱이 이병규의 등장곡인 I Was Born To Love You를 열창하였다.

  • 2001년 한 인터뷰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4할에 도전해야 하는 타자가 자기 재능에 만족하고 3할에 안주한다고 비판하면서 이른바 "게으른 천재"라는 비난 또한 함께 받았다. 하지만, 이건 그냥 비난이 아니라 그만큼 김성근이 이병규의 자질을 아껴서 하는 말이기도 했다. 또다른 인터뷰에서는, 김성근 본인이 평생 맡아본 선수 중에 타자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 적도 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복귀할 때 구단에 영입을 요청하기도 했고 이병규 또한 코나미컵에서 만났을때 제일 먼저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서 포옹하기도 했다고. 사실 김성근의 말은 어디까지나 김성근 개인의 견해고, 이병규는 실제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모범적으로 노력하는 선수였다. 김성근의 말로 인해 아무것도 모르는 야알못들이나, 김성근을 신앙처럼 절대적으로 믿는 김성근 감독 팬들이나 이병규가 게으른 천재라고 이병규를 폄하했지만, 이병규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라 노력하는 천재였다. 심지어 이병규 본인 또한 은퇴식 때 은퇴사를 발표하며 "난 천재가 아니라서 항상 많은 노력을 했다. 지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더 많이 노력했고 열심히 했다."는 말을 했다.

  • 다만 젊은 시절에는 정말 게으른 천재 소리 들을 정도로 설렁설렁했다는 제보도 있다.
박명환야구Tv에서 신윤호가 말하길, 흔히 라면수비라고 불리는 공 중에서는 중견수 시절 대충 뛰다가 런닝 캐치로 공을 뒤로 빠트린다던가, 뛸수 있는데 안뛰어서 놓친 공이 안타가 된 케이스도 많았다고 한다. 투수들도 딱 봐도 저건 그냥 대충한 거다.라고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근이 LG 감독으로 있을 당시 이병규의 실책이 나오고 그걸로 지자 수석코치 이홍범을 시켜 집합을 시킨 다음[25] 일본 억양이 섞인 발음으로 엄청나게 이병규를 혼내고 곧바로 이병규를 2군으로 보내버렸고, 돌아온 순간 엄청나게 열심히 뛰는 것을 보고 1군 선수단이 웃었다고....

  • 현재 프로야구 영구결번 선수 중 몇 안 되는 KBO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는 선수이다.[26] 다른 팀의 우승 경험이 있는 영구결번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선수 시절 활약상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지만 어찌보면 암흑기에 팀을 지탱한 소년가장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그래도 주니치에서 일본시리즈를 우승한 경험이 있기에 다행히도 우승 경험은 가지고 은퇴하게 되었다.[27]

  • 2019년까지 22년 동안 LG 트윈스 소속의 마지막 신인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가 정우영의 신인왕 등극으로 정우영에게 타이틀을 넘겨주게 되었다.

  • 1999년에 기록한 30홈런 이후로 LG 트윈스에서는 20년간 30홈런 타자를 배출하지 못하다 2020년에 와서야 외국인 선수에 의해 깨졌다. 이병규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부분.

  • 2022년 9월 7일 잠실 SSG 랜더스경기에서 KBO리그 40주년 레전드 40인 시구자로 나선다.

6. 관련 문서[편집]



[1] 현재 9번이 비어있기에, 삼성에서도 9번을 사용할 확률이 높다.[2] 등록상의 10월 25일은 음력으로 밝혀졌다. 은퇴 발표때 11월 24일(= 음력 2016년 10월 25일.)이 생일날이라며 이날 은퇴를 결정했다고 직접 언급했다.[3] #[4] 한때 포털사이트 등에는 출신지가 서울특별시로 되어있다 보니 서울 출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그가 김제 출생이고 5세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상경해 성장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현재는 네이버 프로필에는 출신지가 전라북도 김제시로 수정되었다.[5] 1992년 폐교되고 같은 자리에 한성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6] 일본 진출 전인 06시즌까지 리그 최고 수비를 자랑하는 중견수 였으며, 일본 시절을 포함하면 07년까지 중견수로 활약하였고, 그 이후로도 간간히 출전했다. 이병규의 주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다.[7] 일본 2년차 시절부터 우익수로서 출전 빈도가 늘어났고 한국 복귀해서도 3~4년 정도 우익수로 뛰었다.[8] 13시즌부터 은퇴할 때까지 주로 지명타자로 출전했다.[9] 11시즌 한정 주전 좌익수로 활약했다. 그 이외의 시즌에도 간간히 나오긴 했지만 많다고 할 정도의 빈도는 아니다. 11시즌도 우익수로 나온 적도 꽤 된다.[10] 통산 36경기만 출장했고 그야말로 알바 수준의 빈도로 나왔다.[11] 9월 12일까지.[12] 9월 13일부터.[13]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금메달 획득.[14] 공을 맞히는 데 우선하는 타격을 해서 그런지 어드레스 시 오른 어깨가 다소 빨리 열리는 타격폼이다. 이병규 특유의 타격폼을 지적하던 해설자들도 그런 폼으로도 안타를 곧잘 만들어내는 이병규를 보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15] 전체적으로 비판하는 논조이긴 했으나, GQ에서 김성근 감독은 '컨디션 좋을 때의 이병규는 스즈키 이치로급 컨택을 가지고 있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16] 연평균 40개가 조금 넘는 수준이고, 2001년 54개의 볼넷을 기록한 게 한 시즌 최다 볼넷 기록이다. 그러나 컨택 능력이 워낙 뛰어난 데다 그만큼 삼진 수도 적고, 필요할 때는 볼넷도 골라 나가는 등 선구안이 나쁜 선수는 아니다. 실제로 통산 볼삼비는 박용택보다 더 뛰어나다.[17] 1999년. 당시 도루도 31개를 해서 30-30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이병규는 잠실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LG와 두산 역사에서 유일하게 30-30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20-20의 경우 이병규 포함해서 김재현, 박건우, 오지환까지 총 4명밖에 세우지 못했다. 다만 30홈런을 기록했던 1999년이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역사에 남을 기록. 타고투저 시즌이긴 했지만 같은 잠실 구장을 홈으로 쓰는 우즈, 심정수, 김동주 등의 거포형 타자들도 각각 홈런이 34개, 31개, 22개이다. 거포 스타일이 아닌 잠실을 홈으로 쓰는 타자이기에 많이 친 건 맞다. 애초에 40년 KBO 역사상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 한 시즌에 30개 이상의 홈런을 친 타자는 타이론 우즈, 김동주, 심정수, 김재환, 이병규, 로베르토 라모스 뿐이다.[18] 베이스 러닝 자체는 선수 생활 후반기에도 나이에 비해 빠른 편에 속했지만 40대에 접어들고 선수로서 말년을 보내던 2015 시즌 즈음에 이르러서는 주루툴은 사실상 없는거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19] Large+뱅(병규)가 아니라 라면수비+뱅(병규)다. 하지만 1983년생 이병규의 존재로 인해 전자도 틀린 말은 아니다.[20] 사실 롯데를 두둔했다기보다 투수가 던진 공이 실투였고 중계석에서는 강민호와 나지완이 나눈 대화가 안 들리기 때문에 나지완이 화낼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21] 조계현은 1993~1995 시즌 동안 LG의 천적이었다.[22] 2007년 김광현이 미디어 데이에서 류현진을 가볍게 도발했을 때 먹었던 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감안하면 절대 과장이 아니다.[23] 이병규와 동갑인 1974년생으로 상당한 동안이다. 2003년에 결혼했다.[24] 물론 이 점은 이병규뿐 아니라 은퇴를 앞둔 선수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거긴 하다.[25] 원래 LG 시절 김성근은 경기 후 집합을 안 시키는 타입이었다고 한다.[26] 이만수는 한국시리즈 우승은 못했지만 1985시즌 통합 우승이 있다. 또다른 한국시리즈 우승 무경험 선수로는 영구결번 1호인 김영신이 있지만 영구결번 사유가 특수하기에 보통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이병규 이후 2021년 5월 29일 한화 이글스김태균이 영구결번이 되었다. 그 다음 사람은 불행히도 같은 팀의 레전드이며 김태균과 마찬가지로 2020년에 은퇴한 박용택.(...) 박용택 다음으로는 이대호가 이 모든 것을 넘어 한국시리즈 미경험 영구결번이 되었다. 물론 이대호, 김태균도 이병규처럼 일본시리즈 우승 경력이 있으며 이대호는 일본 시리즈 MVP까지 타봤다. 소속팀의 우승 경력없이 영구결번이 되는 선수는 박용택이 유일하다.[27] 주니치의 이 2번째 우승은 53년만에 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가 있는 우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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