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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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주이자 초대 회장이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엔 한량처럼 보내기도 했고 사업도 몇번 말아먹었지만, 힘든 순간 속에서도 재기에 성공한 이후 무역업, 제분업, 제면업, 모직업, 설탕, 비료 사업 등에 뛰어들며 삼성을 국내 최상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고, 말년엔 반도체 산업에도 진출해 이후 삼성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을 쌓았다.
오늘날 대기업 그룹인 삼성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이 모두 이병철을 1세대로 하여 비롯되었다. 그 외 현재는 기업 규모가 작아졌지만 제지업계 최대 규모 기업인 한솔그룹과 국내 2위의 미디어 기업인 중앙그룹[6] 과 유통특화 준대기업인 BGF그룹까지 포함된다. 이병철을 시초로 하는 범삼성가는 현재도 대한민국 재계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차남 이창희의 고명딸 이혜진이 이끄는 래딕스글로비즈[7] 및 래딕스플렉스와 그녀의 남편 조명희가 이끄는 디엠퓨어텍, 3녀 이순희의 아들인 김상용이 이끄는 알머스(前 영보엔지니어링) 등도 범삼성가에 속하며 이들도 삼성 등 범삼성가 기업들과 상부상조한다.
2. 생애[편집]
2.1. 유년~청년기[편집]
1910년(융희 4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경주 이씨 판전공파의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태어나 천석꾼의 집안에서 꽤나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8] 1922년 3월 지수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그해 9월 경성부 수송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였으며#,1926년 열일곱의 나이로 3살 연상의 아내 박두을과 혼인했다.[9]
1929년, 서울 종로의 중동학교를 26회로 졸업하고 이어 1930년 4월에 와세다대학 부속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으나, 일본 유학 생활 중 건강 악화로 1934년 중퇴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본인은 훗날 학창 시절에 대해 중퇴하긴 했지만 수학은 제법 했으며 지는 걸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고향에서 건강을 회복한 뒤 다시 상경했으나, 2년간 그저 부친의 송금을 받으며 직장없이 지냈다.[10] 하릴없이 낙향해서도 집안일은 부친과 형이 했고 본인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직접 일본에서 상업 작물 종자를 들여오고, 개량돈(豚)과 씨앗닭도 들여왔으나, 취미 수준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러다 이웃 친구들과 도박의 일종인 골패에 빠졌다. 즉, 뭔가 위인스런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과 달리 이병철의 20대 젊은 시절은 꽤나 한량이었던 것.[11] 한밤중까지 도박이 계속되어 늘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러다 네 아이[12] 의 아버지가 된 26세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온다. 방문을 열고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자책하고 밤새 공무원이 될까, 사업을 할까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다 결국 사업으로 방향을 정한다. 훗날 이병철은 인터뷰에서 이 때가 헛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삼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칩시다.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습니다.
2.2. 삼성 창업과 성장[편집]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13] 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부동산업에 진출했으나 일본이 전시 체제로 전환되면서 대출이 중단되어 마산에서 시작한 사업은 거하게 망했고, 이를 정리한 후 남은 돈과 부친의 지원으로 다시 한번 새 출발을 계획한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중국과 만주를 돌아본 그는 만주와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리라 결심하고, 1938년 대구에서 조홍제, 허정구 등과 함께 지금의 삼성그룹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삼성상회를 설립했다.[14] 이때 삼성을 일으킨 것이 제분업과 제면업으로, 이후 유명해지는 별표국수가 대구에서 이름을 날리며 자리를 잡는다. 이후 건어물, 과일 유통 무역으로 진출하여 크게 성장하게 된다. 1942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했다.[15] 서울로도 진출해 사업을 확장한다.
광복 이후 6.25 전쟁이 벌어지자, 초기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서울에 있었으나,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자 90일간 북한군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의 쉐보레 승용차는 인민군에게 노획되어 박헌영이 타고 다녔다는 루머도 돌았지만, 삼성사를 정리하는 이용우 전 중앙일보 기자에 의하면 인민군 간부로 내려온 이순근이[16] 가져가 관용차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 전시 체제하에서 점령 지역 시민들의 살림살이를 징발하는 북한을 보며 이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17] 삼성물산처럼 물자를 쌓아둔 창고가 있는 경우는 아무래도 더 손해를 봤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운전기사 위대식의 헌신으로 서울을 간신히 탈출했으며[18] ,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의 종잣돈으로 1951년 부산광역시에서 삼성물산을 설립, 전쟁으로 사방에 널리게 된 고철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 고철을 제2차 세계대전의 물자 징발 여파로 쇠가 부족했던 일본[19] 에 팔고, 다시 일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중국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해 국내 시장에 공급, 사업 6개월 만에 삼성물산은 10억 원이 넘는 이익을 올렸으며 1년 뒤에는 무려 60억 원의 재산을 쌓으면서 단숨에 재기에 성공한다.[20] 고철 수집 사업을 시작할 무렵, 전쟁 전에 중국에 수출한 면실박(棉實粕, 목화씨에서 기름을 짜내고 남은 깻묵) 대금 30,000 달러가 도착해 다시 든든한 자본금을 갖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호재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던 구리 탄피들을 긁어모아 이를 재수출하는 사업까지 하면서 돈을 갈쿠리로 쓸어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삼성물산에서 모은 자금으로 1953년에는 제일제당(CJ그룹의 전신),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손님에게 설탕을 탄 물을 대접할 만큼, 시장에서 고급 기호품으로 귀하신 몸 대접을 받는 설탕 값을 낮추는데[21] 기여했으며, 양복 사업은 품질관리 부족[22] +이미 시장을 선점한 외국 제품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1957년 정부의 모직물 수입 금지 조치 수혜 등을 입으며 국내 시장에서 성장하게 된다.
1940~1950년대에 사업 전환과 시행착오를 거쳐오다 50년대 후반 되어서야 사업이 궤도에 오른 현대그룹의 정주영과 달리[23] , 상술했듯 이병철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또 당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한 해 비료 양은 40만 톤이었지만, 충주와 나주에서[24] 생산되는 비료는 6만 톤에 불과해 당시 정부로부터 달러 지원을 약속받으며 비료 공장 설립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25] 안국화재도 58년 인수한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비료 공장 설립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부정축재와 탈세 혐의로 검찰에 연행되어 벌금 50억을 내며 한숨을 돌리려던 찰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다. 당시 정권이 바뀐 후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는데, 재계 1위 기업의 이병철은 당연히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병철 등을 부패 혐의로 지목했으나 여러 속사정으로 결국 이들과 타협하였고[26] , 이병철도 "전시세금이(1,000환을 벌면, 1,200환을 세금으로) 지금도 유지되는 상황"을 설명하며, 사업 투자로 나라에 기여하게 해달라고 요구, 박정희 정권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비료 공장 설립도 재개하였다. 다만 지방의 명망있는 양반가 출신으로 유교적인 소양을 중시했던 이병철은, 초창기까지만 해도 反기득권적 성향이 강했던 박정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진 않았다고 한다.[27]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역임했고, 1963년 동방생명을 인수했다.
화폐개혁 실패 당시 이병철이 쓴소리를 한 일화도 있고 해서 이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28] 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근데 사실 이병철은 이런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뭔가 쌓인게 있었는지, 1960년대 중반 정계에 진출하려는 뜻도 아예 없진 않았다고 한다.[29] 그래서 몇몇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대신 그에 대한 대안 확보의 차원에서 언론사를 설립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TBC 동양방송'(1964년)과 '중앙일보'(1965년)였다.[30] 참고로 중앙일보는 현재까지 남아있지만 동양방송은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신문사와 방송국 동시 소유를 금지해서[31] KBS로 통폐합돼 KBS 2TV, KBS 2FM 등으로 전환된다.[32]
2.3. 사카린 밀수 사건과 후계 구도[편집]
우여곡절 끝에 울산에 100만 평 부지를 매입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비료 공장이 완공된 즈음인 1966년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진다.[33] 이 일로 국민적 공분이 일고 당시 정권도 공범에서 심판자의 입장으로 돌변하자, 이병철은 책임을 진다는 명목하에 자신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34] ,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한국비료공장(현 롯데정밀화학)과 경주 최씨 가문으로부터 기증받은 대구대학교[35] 를 정부에 넘기게 된다. 이병철 장남 이맹희에 의하면 이 사카린 밀수 사건은 당시 정권이 정치 비자금 조성 목적으로 삼성의 밀수를 눈 감아주는 한마디로 공범이었는데, 정작 여론이 난리가 나자 정부는 뒤통수를 쳤고 덕분에 삼성 혼자 독박 쓴 것도 모자라 억울하게 삥까지 뜯겼다고 한다.[36] 당시 한국비료는 첫 해 매출액이 그룹 전체 매출액의 30%에 이를 정도로 삼성 입장에서도 알짜배기 기업이었다.[37]
그렇게 한동안 삼성그룹 경영은 장남 이맹희가 이끌게 되지만[38] , 이때도 이병철은 회장직은 유지하며 복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다 이병철에게 밉보였는지 70년대 들어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는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39] , 막내아들(삼남) 이건희가 1976년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차기 수장으로 지명된다. 사족으로 감옥까지 갔다왔지만 자길 홀대하는 아버지에 분노한 이창희가 1969~1970년 무렵 정권 인사들을 끼고 부친을 몰아내려는 쿠데타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연히 눈밖에 난 이창희는 그룹에서 쫓겨났으나 3년이나 부친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용서를 받았고, 이병철은 차남이 산하의 몇몇 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맹희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물증은 없었고 본인도 죽을 때까지 부인했으나, 이병철의 의심을 사 결국 사이가 갈라졌고 용서도 구하지 않아 호암이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보였다는 설도 있다. 훗날 이맹희는 1987년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이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참고로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사한 건 이병철 사후 이건희 체제가 확립된 1993년이다. 참고로 이때 형제간에도 사이가 틀어졌는지 2010년대 이맹희, 이건희간 유산 상속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6년 대한암협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했다. 대구대학은 포기했지만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4년에는 울산에 '삼성석유화학'을 설립했고, 1977년에는 조선소를 인수하여 조선업(현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도 뛰어들었고,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도 설립한다. 방위산업에도 진출하여 '삼성테크윈(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을 설립했다. GE와의 기술제휴로 소위 '제공호'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국산 제트전투기인 KF-5를 생산한 것이 삼성테크윈이다.
2.4. 삼성전자 설립과 반도체 산업 진출[편집]
오늘날 삼성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는 1969년 설립되었다. 허나 처음엔 반발도 심했는데, 이병철이 1967~8년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고 밝히자 금성사(현 LG전자) 등 정재계에서 반발이 있었다. 이에 이병철은 삼성전자는 'TV, 라디오, 냉장고 등 생산품 중 극히 일부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사업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1969년 1월 13일 현 삼성전자의 전신인 '삼성전자공업'이 설립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 직원 수는 고작 36명이었다.[40]
이때만 해도 삼성전자는 첫해 매출이 370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오늘날 삼성전자와는 비교도 안되는 작은 규모로[41] , 국내에서도 금성사에 밀리는 2등 신세였다. 그래서 1970년대에 삼성전자가 수원에 새 공장을 지을 때 43만평 규모로 지으려고 했는데, 이때 임원들이 회사 규모에 비해 공장 부지가 너무 크다고 반대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말하며 43만평을 고집했다.
일본 히타치 공장이 40만 평인데, 그것보다는 커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사업을 했으면 언제고 일본 기업을 이겨야 될 거 아이가? 그러니 저기보다 3만 평이라도 더 커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이가? 안 그렇나? 어디 내 말이 틀렸나? #
1982년 암 수술의 고비를 넘기고 만 72세 노구의 몸으로 이병철은 보스턴 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 수여식을 위해 미국에 방문했는데 이때 세계 최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이병철은 이 당시에 대해 미국이 설계한 생산설비를 도입한 일본이 자동차, 반도체 등의 미국 시장을 거꾸로 침식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이 위기에 제때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기이한 현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년 전인 1980년에 일본의 후지(富土) 화학 회장 이나바 슈조(稻葉秀三)와의 대담 중 나온 발언을[42] 떠올리며 세계 최강 미국도 흔들리는 판에 삼성도 새로운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결심을 한다.
사실 삼성의 반도체 산업 진출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라 1974년 이병철의 3남 이건희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키는[43] 과정에서 반도체 사업을 이미 겪어본 바 있었다. 당시 삼성반도체는 말만 반도체 회사였지 트랜지스터 생산이나 겨우 하는 기술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44] 이병철은 삼성반도체 회생 과정에서 NEC에 자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기술 협력 요청마저 NEC가 거절하자 대체 반도체가 뭐길래 NEC가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여러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국, 일본 업체들이 선점한 상황에서, 세계 1등 수준이 되어야 승부를 걸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도박과 다름없었다.
1983년 3월 이병철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고, 기술진 확보를 위해 미국에 있던 유학파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원래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기로 했었으나 실제로 마이크론에 가보니 마이크론측의 태도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단 2명만이 마이크론 사내에 들어 갈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출입도 못했다고 한다. 들어간 2명마저도 제대로 된 연수는 커녕 질문도 받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설을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기초적인 D램 기술 자료를 받은 것 정도가 전부였다. 결국 삼성은 자체 개발하기로 방향을 틀었고, 연구진들이 거의 맨땅에 헤딩하는 각오로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불과 1년도 안되어 1983년 11월 64K 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세계 3번째 개발이었다. 삼성이 이렇게 단기간에 해낼 것이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개발한 64K D램은 국가등록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84년 10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당시 삼성 반도체에서 겨우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 가격을 기존 3달러에서 1달러 80센트로 인하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들이 덤핑 공세에 나서며 가격이 30센트로 폭락한 것. 이에 삼성이 20센트 가격으로 대응하면서 1984년 한 해에만 1,300억 원의[45] 적자를 보게 되었다.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손을 떼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했으나, 이병철은 "내 눈엔 돈이 보여."라 말하며 꿋꿋이 밀어붙였다. 64K D램 가격이 폭락했지만, 다른 1,000여종의 반도체는 이익이 나는 만큼, 앓는 얘기를 자제하고, 계속 공장의 생산라인 증설에 나서며 신제품 개발에 나선 것이다.
1984년 10월, 악몽의 덤핑 공세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업계에서 기적이라 부른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19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비록 개발 전후에 적자를 보더라도, 확고한 기술력과 관리 능력이 갖춰진 이상,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는 건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256K D램 제품은 시장 출시 1년 만에 세계 D램 시장의 1/10을 점유, 64K D램으로 적자를 보는 와중에도 삼성전자는 시장에서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이후 이건희 대에 이르러선 미국, 일본의 선두주자들을 차례로 추월하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글로벌 기업으로 꽃피게 된다.[46]
1986년 1Mb D램 개발에 성공했지만 1Mb짜리를 최초로 개발했던 도시바와는 2년의 기술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1987년에 한 언론에서 "한국 반도체는 일본 것을 베꼈다"는 식의 보도가 나왔고, 이를 본 이병철은 분노하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으로 가서 "우리가 일본 것 베꼈다는 게 사실이가? 기껏 남의 거 베끼라고 평생을 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줄 아나? 영국은 증기기관 하나를 개발해서 세계를 제패했다. 우리 반도체도 그런 역할하라고 시작한 거 아이가?"(#)라고 말했다. 이에 직원들은 반드시 16Mb D램을 독자 개발해서 다시는 모방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삼성전자는 1989년에 16Mb D램을 1위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1개월까지 줄이며 세계 2번째로 개발하고,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로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2.5. 사망[편집]
1980년대 자동차와 전자는 융합된다고 본다고 적극적으로 자동차 사업 진출을 원했지만, 이땐 중공업 중복 투자 정리가 중요한 과제였고, 자동차 산업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를 겨우 마친 시절이라 포기했다.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꽤나 고생을 했다. 평소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47] 했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호흡기 전반과 흉부 건강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또한, 치아 건강도 좋지 못했는데 특히 치주 손실이 심각[48] 해 말할 때나 저작시 통증이 극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말년의 모습에선 이런 건강 문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말년의 여러 인터뷰에선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며, 목소리가 거칠고 발음이 정확하지 많은 모습을 보인다. 또한, 치주 문제로 인해 입술을 항상 오므리고 있었다.
결국 10년에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11월 19일 저녁 5시 5분,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77세로 사망했다.
사후 이태원동 자택에 빈소가 차려져 당시 국회의장 이재형, 민정당 총재 노태우, 민주당 총재 김영삼, 평민당 총재 김대중, 릴레이 주한미국대사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했다. 뉴스데스크.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1월 23일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시신은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는데, 본인 의지와 달리 묘 위치가 삼성물산 구역으로 되어있다 보니 후손들의 배임 논란이 있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맏아들 이맹희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3남 이건희 역시 폐질환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 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49] 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는 삼성의료원에 입원 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났으며, 이재용도 집 공기 상태가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3. 사업 철학[편집]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을 가졌다. 이병철은 36세 때인 1945년 8·15 해방 직후 사업보국의 신념을 다진 것을 회상하며 "이와 같은 각성은 그 후 기업을 일으키고 경영하는 데 있어 일관된 나의 기업관이 되어 왔다. 사회일반의 이해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때로는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자신이 세운 원리•원칙은 무조건 지키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무조건 지켜 이병철이 출근해 결재를 하다가 펜을 딱 놓는 시간은 오후 12시 30분 점심식사 시간이었다고. 딱히 정해진 출근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심지어 귀빈들 맞는 영빈관 격인 승지원이나 자택에서 일을 보기도 한 아들 이건희와는 다른 부분이다.
《호암자전》에서
며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
노동조합을 부정적으로 봐서 삼성의 '무노조 원칙'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선 인재를 모신다는 식으로 노동 조건을 본인이 보장해주겠다는 마인드였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50] , 결국 노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자체는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후 삼성의 무노조 원칙은 2대 이건희 회장까지 내려오다가[51] 3대 이재용 회장대에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포기하고, 노조 설립을 허용하면서 사라졌다.
3.1. 인재 관리[편집]
"조직이 사람을 움직이는 기업은 망하지만, 사람이 조직을 움직이는 기업은 발전한다."
"말하는 걸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렸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익히는 데는 60년이 걸렸습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경영의 기술보다는 그 저류에 흐르는 기본적인 생각, 인간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나는 경상적인 사업의 사소한 일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다만 유위한 인재를 찾아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왔을 따름이다."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키운 인재들이 성장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좋은 업적을 쌓은 것을 볼 때 고맙고, 반갑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하지 마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내 경험으로 보면 입사 1, 2년이 지나면 신입사원의 5%는 탈락하고 30%는 우수한 인재가 된다. 문제는 나머지 65%의 사람이다. 반 수 이상을 점하는 이들은 환경과 지도 여하에 의해 좌우된다. 조직력이란 바로 이들을 인재로 만들어나가는 힘이다."
Q : 이 회장은 경영철학에서 인재 육성이 중요과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A : 지금 삼성그룹은 10만 명 정도의 종업원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교육을 중요시하도록 하기 위해 의무라든가 사람 됨됨이를 입사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그룹 내에는 4개의 사원연수소를 갖추고 그중에는 외국어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연수원도 마련돼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은 기초일 뿐이고, 입사 후 교육을 통해 성장케 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984년 5월 22일자 일본 경제전문지 <<재계>>의 창간 30주년 특집호에서, 이병철과 반도체 투자를 결심한 당시 상황을 대담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사람 욕심이 많아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진대제, 이윤우를 비롯해 이임성(샤프전자 고문), 이상준(미국 자일록 기술개발 책임자), 이일복(전 인텔 근무), 이종길(미국 인터실, 사이너텍 CMOS 제조수율 개선 기술자), 박용의(미 웨스턴디지털, 인텔 메모리 설계 기술자)로 대표되는 박사급 인재들을 데려왔고, 초창기 미국에서 생활하듯 청바지 차림으로 첫 출근을 한 황창규를 용인하며, 그를 나무라려 하는 임원을 말리기도 했다.
생전의 이병철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 이렇게 눈여겨 봐뒀다가 일을 맡긴 사람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상기한 서울 탈출 당시 운전사 위대식 건도 그렇고, 대구 과수원과 양조장, 삼성상회를 건실하게 경영한 이창업이[52] 건넨 3억 원으로 재기할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제일모직 공장을 지을 때는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에 읽고 충격을 받은 <여공애사(女工哀史)>[53] 의 영향으로 사원들의 기숙사를 짓는 데도 공을 들였으며,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 사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지자, 원하는 계열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1954년 제일모직 공장을 대구에 세울 때 공장보다도 기숙사를 먼저 세웠는데 생산직 근로자를 위한 국내 최초의 기숙사였으며, 방에는 스팀 난방이 들어오고 목욕탕, 세탁실, 다리미실, 미용실이 있는 등 당대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시설이었다. 급여 또한 좋아서 당시 제일모직 근로자의 증언에 따르면 월급으로 동생들의 학비와 다섯 식구 생활비까지 충당 가능했다고 한다.
1956년 삼성물산이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한 이래 198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원 선발 최종면접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회장이 O를 친 사람은 반드시 채용, < > 표시를 하면 면접 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사람(이게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X표는 뽑지 말아야 할 사람이었다는 후문이다. 지원자의 신발이 더러운 것을 보고 면접장에서 쫓아냈다는 말도 있다. 또 카더라에 따르면 관상을 봤는지 회장 옆에 일본의 골상학(骨相學) 전문가나 국내 유명 관상가가[54] 동석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인물인지 여부를 판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하며 선우용녀가 먼훗날 밝힌 바에 따르면, 1960년대 이병철이 소유한 TBC 방송국 전속 무용수 시험[55] 에서도 이병철이 관상가를 데리고 와 직접 면접을 봤다고 한다.[56] 방송국 직원 면접에서도 회장이 직접 와서 그랬을 정도면, 다른 회사 면접 역시 관상가와 이병철이 면접을 다 봤을 거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1965년에는 5.16 군사정변 직후 처형당할 뻔한 홍진기를 포섭해 중앙일보를 창간, 일찌감치 자사에 우호적인 언론을 만드는[57] 안목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록 고용된 사장이지만, 전직 국무위원이자 수재로 유명했던 홍진기를 대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으며[58] , 나중에는 맘에 들었는지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 홍라희다. 때문에 이후 이건희 후계 체제 과정에서 홍진기가 이병철에 영향력을 행사한거 아니냐는 루머도 있지만, 피해 당사자인 이맹희부터가 음모론일 뿐이라며 부정했다. 애초에 후계 구도 관련해선 비록 <호암자전>에는 자식들에게 흠이 될 부분이나 칭찬하는 대목이 거의 없지만(호암이 후계자 이건희를 직접 언급하는 대목도 "의욕이 있었다." 정도로 간략하게 묘사됐다.) 상기되어있듯 차남은 군부에 이병철의 비위를 밀고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장남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했다는 의심을 받은 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굳이 영향력 행사와 관련해 직접적으로 밝혀진 사례가 있다면 장인이 경영 수업을 해준 것 정도인데, 이건희의 증언에 따르면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을 현재 사례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 방식의 교육을 해줬다고 한다.
신현확 관련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신현확은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을 맡아 4.19 혁명이 일어난 이후 체포되었다. 당시 분위기상 신현확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신현확이 체포되기 전 이병철에게 전화하여 돈을 요청했는데 이병철은 신현확이 끈 떨어진 연 신세임에도 이를 들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수십년간 이병철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전두환 정부가 집권하고 장남인 이맹희의 경북고 동창들이 요직에 앉아 이제 친구 맹희에게 삼성을 되찾아 주겠다는 움직임이 생긴다. 그러자 후계 구도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한 이병철은 1986년 신현확에 전화하여 삼성물산 회장직을 권유한다. 처음 신현확이 거절을 하자 이병철은 "빚을 이제 갚아 주셔야겠습니다"라고 처음으로 그 일을 말하며 설득을 하였고 신현확은 그제서야 삼성물산 회장직을 수락했다. 당시 TK 인맥의 대부격이던 신현확이 버티자 이후 신군부 세력들은 삼성의 후계 구도 개입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기업이든 최고경영자를 잘 두어야 기업이 잘 굴러간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입사원을 뽑은 후에는 가급적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경영자의 요건을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에 무척 신경썼다고 한다. 그 요건이란 '1. 덕망을 갖춘 훌륭한 인격자여야 한다. 2. 탁월한 지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3. 신망(信望)을 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4. 창조성이 풍부한 인물이어야 한다. 5. 분명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6.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7.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4. 경쟁자들[편집]
5. 생가[편집]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이병철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달성공원역 근처에 있는 옛 삼성상회터에는 삼성상회 실물을 1:250으로 축소한 청동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근처 오토바이골목 안에 이병철의 고택이 있는데, 삼성상회 사업을 할 때 거주했던 곳이다. CJ의 역사관에는 홀로그램으로 이 회장의 흉상을 구현해 놓았다.
그 외 삼성그룹에서 옛 제일모직 공장 부지에 기부채납한 대구오페라하우스에는 이병철의 동상을 설치해 놓았으며, 근처 도로의 명칭도 호암로로 변경하였다.[66] 이병철이 건설자금을 지원했다는 혜화동 경주이씨중앙화수회회관 앞에도 이 회장 흉상이 있다. 또한 삼성이 운영에 참여하고 있는 성균관대학교에도 이병철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6. 여담[편집]
- 가끔 인터넷에 이병철이 이완용 후손이라는 포스팅이나 그림이 떠돌기도 하는데(디시인사이드 정보전사 글이라든지),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기업가 이병철은 동명이인일 뿐이다. 이완용은 우봉 이씨, 이병철은 경주 이씨라서 본관부터 다르다.
- 막내 딸인 이명희를 유독 예뻐했다고 했다. 그녀의 오빠 이건희가 이명희를 두고 "장미처럼 자란 막내"라는 표현을 할만큼 아버지의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명희는 이후 신세계 회장이 되어서 보인 뛰어난 경영능력 덕분에 리틀 이병철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대표적인 재계 라이벌보다 여자 관계는 점잖았다지만, 그도 자유롭지는 않다. 4녀는 대구 삼성상회에서 만난 박소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일본인 소실인 구라다와의 사이에서는 1남 1녀가 있었다. 말년에는 박모씨가 오랜 기간 옆을 지켰다고 한다. 그 중 일본인 처인 구라다 여사가 유명하다. 장남 이맹희의 자서전에 의하면 본인과 남동생 이창희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그 소실 집에서 지냈는데, 두 사람이 너무 많이 먹어 생활비가 부족해(...) 감정의 골이 깊어지던 와중[67] 계란 한판을 하루만에 다 까먹은 일로 크게 다투게 되고, 이맹희는 이병철에게 매타작을 당한 뒤 한국으로 강제귀국하게 된다. 두 아들은 귀국 후 친모이자 이병철의 정실인 박두을에게 그간 일을 고했고, 평소에도 장남 사랑이 지극하던 어머니 박두을은 소실의 행동을 매우 괘씸하게 여겨 격노했다고 한다. 당대 제일 부호의 가족사였던 만큼 세간의 관심이 컸으며, 훗날 김영하, 박봉성 같은 만화가들이 여기서 모티브를 딴 기업 만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말년에 함께 살았던 박모씨의 아들인 임씨는 일인시위, 책출판 등으로 삼성가를 머리 아프게 하기도 했다.#
- 사망 한 달 전 천주교 절두산성당 신부 박희봉(1924~1988, 세례명 이시도로)은 이병철의 요청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싶어한다."는 말과 함께 당시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정의채[68] 몬시뇰에게 만남을 주선했고, 정 몬시뇰은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보단 사전에 문제점을 정리해서 보내주면 심도 있게 답변해주겠다고 하자 이병철은 "신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라는 물음부터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까지 여러 철학적 질문을 A4용지 5장 분량으로 작성해 답을 구했다고 한다. 정의채는 답변을 정성껏 준비한 뒤 이병철을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지만, 이병철의 건강이 악화되어 답을 듣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고.[69] 참고로 이병철은 유교 → 불교 → 원불교 신자였다.
- 1980년대 한국 3대 부자였다. 당시 한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단 3명이었는데, 바로 이병철과 정주영, 신격호.[70] 이병철은 이미 해방 전후 조선인 최고 부자 중 하나였고, 해방 이후에도 1960년대부터 오랜기간 재계 1위 자리를 고수했다.[71] 그래서 부자의 대명사로 그를 뜻하는 돈병철이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 성격이 깍듯한 12살 차이나는 동생인 한화그룹 창업주 김종희를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1981년 김종희가 급작스레 사망하여 장남 김승연이 29살의 나이로 회장직에 올랐을때 이병철이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 영남 출신이라 호남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루머도 있으나[72]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에도 호남 지역 수재들이 삼성 임원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일례로,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사장단에 새로 발탁된 몇몇 호남 출신 인사들은 이병철 시절에 입사해, 성과를 쌓아 임원까지 승진한 사람들이다. 이들 역시 세간의 루머와 다르게 의외로 지역색이 옅었다며 놀라워했다는 후문.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아무리 회사에서 사내 정치가 중요하다지만 지역 단위에서부터 파벌이 갈라져 버리면 회사 분열은 순식간이므로 지역 감정을 줄이는 것이 도덕성 이전에 경영 면에서도 좋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사에서는 얼마나 일을 잘 하느냐가 문제지 출신 지역 같은 건 상관없기 때문이다.
- 1983년에 한국을 방문한 스티브 잡스와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의 잡스는 태블릿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삼성이 그 부품을 조달할 수 있는 협력사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본 것. 이병철은 스티브 잡스와의 만남 이후 그에 대해 'IBM과 맞설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이병철은 양복도 일반 브랜드 양복이 아니라 도쿄의 한 골목에 있는 어느 개인 양복점에서 맞춤식으로 지은 양복만을 입었고, 만년필은 항상 워터맨을 썼는데 수십 개를 사서 쓰다가 그중에서도 가장 필기감이 좋은 것들만 찾아서 썼을 정도로 '일류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위 내용은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도 탑승감이 좋은 독일제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만 쓴다고.[73]
- 이병철은 평소에 일본의 경제 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를 만나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 "하세가와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경남 의령군에서 가칭 호암문화예술제를 개최하기로 하면서 그 홍보를 위해 2021년에 '호암이병철대로', '삼성이병철대로'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한 바 있다. 해당 행사는 '의령 리치리치 페스티벌'이라는 명칭으로 이듬해에 개최되었다.
- 40세가 되는 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다만 1970년대에 고등학교 진학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남자도 20대 초반 정도에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 이전에는 40대에 할아버지가 되는 일이 제법 흔한 일이긴 했다.[74]
6.1. 수집광[편집]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미술품 수집에도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호암미술관에 있거나 현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옮겨진 어마어마한 국보급 문화재들은 이병철이 주도적으로 모은 것들이다.
이병철은 자신이 모은 미술품을 관리할 후계자로서 홍라희를 택했는데, 박물관 설립 전부터 홍라희에게 매일 10만원 상한으로 돈을 주며 3달 동안 인사동에 나가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켰다고 한다.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5만 원이었다니 2010년대 기준으로 매일 대략 500만 원어치의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셈. 이는 수집광 기질을 심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미술계의 메카인 인사동에서 노하우와 안목, 인맥을 쌓을 수 있게끔 그녀를 키워내기 위함 아니었겠냐는 의견도 있다. 하여튼 이후 홍라희는 한국 미술계의 대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재벌로는 이례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발굴단에게 단지 터의 크기를 물어보고는 당시 돈 3만 원을 선물하고 떠났다고 한다.
수집 뿐만 아니라 나무도 좋아했는데, 공장부지 안에 있는 나무마다 번호를 붙혀 관리하게 했고, 나무 그늘 밑에 맥문동을 심어 지피식물로 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준 인물로 약용 식물로 쓰이던 맥문동이 조경 식물로 활용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태산목을 특히 좋아해 이병철 생가와 제일모직 부지에도 태산목을 심어놓았다.
7. 가족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범삼성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수상 경력[편집]
- 금탑산업훈장 (1969)
- 대통령표창 (1971)
- 제2회 세계최고 경영인상[75] (1979)
- 국민훈장 무궁화장 / 훈일등서보장(일본) (1987)
9. 저서[편집]
- 호암자전 - 중앙일보사. 1986.(초판) / 나남. 2014.(재판)
10. 대중 매체[편집]
1983년 MBC 드라마 야망의 25시[76] , 1993년 MBC 드라마 제3공화국,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정욱이 연기했다. 제3공화국에서는 이병철이란 실명으로 나왔고 야망의 25시에서는 모티브를 딴 인물인 최일제, 영웅시대에서는 마찬가지로 국대호란 인물이 연출되었다. 영웅시대의 경우 1부 청년 역은 전광렬이, 2부 장년 역은 정욱이 연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욱이 이병철 전문 배우로 대중에게 각인이 되다보니, 이를 이용한 정욱이 아들의 다단계 사기 행위에 이병철과의 관계를 과장하는 등 협조하는 바람에 구속당한 흑역사를 기록하고 만다.
2005년 드라마 제5공화국의 국제그룹 해체 에피소드에도 등장하나 배우는 미상이다.
이병철에 해당하는 배역이 직접 나온 장면은 아니지만, SBS 드라마 야인시대 1화, 최종화, 제3공화국 23화, 영웅시대 56화에서 국회의사당에서 김두한이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이를 두둔하는듯한 정부 인사들에게[77] 오물을 투척하는 장면을 내보였다.
2022년작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이성민 분)이 이병철을 주요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78]# 분장 스타일과 대구식 동남 방언 말씨 등이 생전 이병철과 흡사해 환생했다는 농담도 나올 정도였다. 다만 생전 이병철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표정이나 말투는 매우 흡사하지만, 평소 스타일은 점잖아서 드라마처럼 과격하진 않고 좀 더 조근조근하게 독백식으로 말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