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희(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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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의 전 군인. 예비역 육군대장. 前 제25대 제3야전군사령관. 前 제32대 합동참모의장. 前 제41대 국방부장관.
2. 생애[편집]
1945년 8월 12일 강원도 원주시 출신으로 1964년 경기고등학교(60회)를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26기로 1970년 임관했다. 당대 최고 명문인 경기고 출신에 서울대 위탁교육을 다녀온 점에서 알 수 있듯, 군내 대표적인 엘리트 군인으로 꼽혔고 작전과 전략, 정책 분야에서 모두 두각을 드러냈다. 군 생활 내내 청와대 외교안보담당관, 합참 군사전략과장, 30사단장,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제5군단장, 합참 전략기획 및 작전본부장, 3군사령관 같은 요직을 맡으며 잘나갔다.[2]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의 첫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9월까지 재직했다.
3. 주요 경력[편집]
- 1970. 3.〜1972.3 임관 후 제21보병사단에서 소대장, 작전교육장교
- 1972. 3.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사회학과) 위탁교육
- 1974. 3. 육군사관학교 사회학강사
- 1975. 9. 제33보병사단 101연대 9중대장
- 1978. 4.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훈육관
- 1979. 4. 육군대학 정규과정(소령)
- 1980. 3.〜1986. 12 7사단 작전처 보좌관, 정보참모, 대대장, 작전참모
- 1986. 12. 육군 제88사격훈련단[3] 부단장
- 1988. 12.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C3I과장
- 1989. 11. 제9보병사단 29연대장[4]
- 1991. 4.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 군사전략과장
- 1992. 2. 청와대 국방담당비서실 외교안보담당관
- 1994. 7.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연수
- 1995. 5. 육군본부 전력기획참모부 전력계획처장
- 1996. 11. 제30기계화보병사단장(소장)
- 1998. 4. 국방부 정책기획국장
- 1999. 10. 제5군단장(중장)
- 2001. 11.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본부장
- 2002. 4.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 2003. 4. 제3야전군사령관(대장)
- 2005. 4. 합동참모의장 겸 통합방위본부장
- 2008. 2. 국방부 장관
4. 상훈[편집]
- 1983. 10. 보국훈장 삼일장
- 1989. 4. 대통령표창
- 1996. 10. 보국훈장 천수장
- 2001. 10. 보국훈장 국선장
- 2006. 11. 보국훈장 통일장
5. 여담[편집]
- 전형적인 무골, 맹장이면서도 지장을 겸비한 지휘관이었다. 현역 군인 시절에는 할 말이 있으면 꼭 하는 강직함,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는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나친 엘리트 의식과 자존심을 단점으로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함께 근무했던 이들에 따르면 그는 항상 먼저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하는 스타일이어서 범접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강한 자존심은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원인이 된다.
- 김성회 전 의원의 군 생활을 꼬아버린 인물이다. 이상희 장군이 30사단장이던 시절, 작전참모가 김성회 당시 중령이었는데 둘이 궁합이 상당히 안 맞았고 근무평정을 짜게 주었다고 한다. 결국 김성회를 내치고 당시 기갑수색대대장이던 중령을 새 작전참모로 데려오는데 그 사람이 박찬주이다. 박찬주가 실력이 있어서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 신동아 기사 그래서 장관 시절에 군사보좌관으로 데려가서 썼다.
- 육사 26기의 선두주자였다. 중장, 대장 진급을 동기인 신일순과 같이 했지만 이상희는 합참 전략기획본부장과 작전본부장을 맡으면서 대장 진급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동기인 양우천은 중장 진급을 2차에 했기 때문에 이상희에 비하면 밀리는 형국이었고, 대장 진급 때 따라잡는다. 이후 이상희가 핵심 요직인 3군 사령관을 맡고 합참의장까지 오르지만 신일순은 연합사 부사령관 시절에 비리가 걸려서 전역했고, 양우천은 2군 사령관에서 군 생활이 끝났다.
- 이상희 장관은 하나회 인사가 아니었지만 하나회 출신이자 육사 14기 선배였던 이종구 전 국방부 장관이 같은 전의 이씨였던지라 뒤에서 장관이 될 수 있도록 힘을 써줬다는 후문.[5]
6. 비판[편집]
2009년 국방예산에서 전력증강과 직결되는 방위력 개선 부문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려는 것에 항의하여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서 "경제가 어려워 재정을 긴축해야 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국방력을 좌우하는 전력증강분야가 아닌 인건비·급식·주거 등 경상운영비에 국한되어야 합니다. 병영환경의 불편은, 지난 60년 동안 참아왔듯이 앞으로도 몇 년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습니다."[6] 라는 내용을 담은 게 알려지면서 장병들의 대우를 소홀히 취급한다는 일부 비판이 있었고 현역과 예비역들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른바 "편안한 군대보다 강한군대" 발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창군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이 장관뿐만 아니라 역대 대부분의 직업군인들이 이러한 각오와 희생을 바탕으로 군의 전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히려 용기 있게 할 말을 한 것이라는 군 내부나 일각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당시 장교들이나 부사관들 그리고 군무원들은 별다른 원성이 없었고 오히려 이상희 장관을 적극 지지하기까지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미연합군의 구호는 Fight Tonight이다.[7] 당장 오늘 밤 전쟁이 나도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예산 삭감은 청와대, 대선캠프에서 온 경제관료 출신인 장수만 국방부 차관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 장관은 이 사건 이후 청와대와 갈등을 겪다 2009년 9월 물러났다.
7. 둘러보기[편집]
[1] 중종(조선)때 병조판서를 역임한 신암 이준민의 후손이다.[2]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고 능력을 널리 인정받았지만, 엘리트주의가 강했고 말도 직설적으로 하는 편이라 위아래와 잘 융화되지 못했고 특히 하나회 동기들의 집중 견제를 받아 대령을 3차에 진급했다. 하나회 척결 이후로는 순풍을 탄 듯 군내 요직을 섭렵하며 잘나갔다.[3]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사격선수의 발굴과 양성을 위해 1985년에 창설했으며 훈련 및 지도를 육군이 전담하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정호용 대장이다.[4] 전두환 前대통령도 29연대장 출신이다[5] 이종구 전 장관과 같이 육사 14기로 입학했으나 중간에 건강을 이유로 자퇴하고 서울대로 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이었다. 그러나 친분 자체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이종구는 다른 예비역 장성들이 박근혜를 도울 때에 이명박을 뒤에서 지원하게 된다.[6] https://news.mt.co.kr/mtview.php?no=2009082810400339989[7] 포병에서는 이를 착안하여 Fire Tonight을 외쳤다. 의미는 오늘 밤에라도 당장 사격한다는 것. 대표적으로 육사 40기 염완균 예)준장이 2포병여단장 시절 구호로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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