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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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석영.jpg

출생
1855년(철종 6)
한성부 남부 명례방 명례동계 저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1-2)[1]
사망
1934년 2월 16일 (향년 78~79세)
중화민국 상하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본관
경주 이씨[2]

영석(潁石)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 생애[편집]


백사·이항복(李恒福)의 10대손이며 이유승(李裕承)의 6형제 중 둘째 아들로서 조선 말기의 개화파 문신 귤산 이유원(李裕元, 1814년 ∼ 1888년)[3]에게 입양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임하려(林下廬)에서 살았다. 21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장례원소경을 거쳐 종2품 가선대부에까지 오른다. 1910년 가장 먼저 독립 운동에 뛰어든 동생인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년 ~ 1932년)의 권유로 가곡리의 모든 땅과 재산을 처분하여 형 건영(健榮, 1853년 ~ 1940년), 동생 철영(喆榮, 1863년 ~ 1925년) 회영(會榮), 시영(始榮, 1869년 ~ 1953년) 호영(1875년 ~ 1933년) 등 6형제와 그의 가족들은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를 하였다. 당시 6형제가 가지고 간 돈은 엽전 26가마였으며 그중 이석영은 가곡리의 소유 전답 6,000석 토지를 매각하여 현금 40만원(당시 쌀 1석은 3원이었음)을 내어놓아 가장 많은 액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타 매체를 통해 6형제가 삼한 갑족으로 대대로 갑부 집으로 아는데 실제로 방송에서 나오는 남양주 땅은 죄다 이석영이 양자로 들어간 이유원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이유원은 흥선대원군 시절 유명한 부호였는데 집권 초기에 정치 자금을 제공한 걸로도 유명하다. 당시 기준으로 이석영은 조선의 부호 순위 4위라고. 경기일보에 따르면 이석영이 물려받은 액수는 현재가치로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석영이 유별나게 부자고 나머지 형제의 부도 대단해서, 명동성당 주변이 6형제 집안의 땅이었다. 오늘날에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비싼 동네인 서울 도심의 땅들을 형제끼리 나눠가지고 있었다는 말. 그리고 그러한 땅들과 재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 운동을 위해 쓴 것도 더더욱 놀랍다.

6형제는 제일 먼저 한인 자치 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국내에서 모여든 청년들에게 구국의 이념과 항일 정신을 고취시켜 조국 광복의 중견 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 강습소를 개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신흥 무관 학교의 전신이다.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니 변영태, 성준용, 김련 등 40명이다.

신흥 강습소의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고, 1913년 신흥 중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었다. 1919년 중학교를 폐지하고 신흥 무관 학교[4]로 개칭하니 1920년 폐교 때까지 10년간 2,1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 대첩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때 이석영의 큰 아들 이규준(李圭俊)은 항일 독립 운동가가 일제의 회유로 변절하여 독립 운동 진영에 피해를 주는 자들을 체포 암살하는 ‘다물단’의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북경에서 암살되었다. 이규준의 동생인 이규서는 일제에게 회유당해 변절[5]해서 자신의 숙부인 이회영을 밀고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밀정이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 이규서는 상해한인청년당[6]의 이사를 맡으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했지만 이회영 사후, 밀고 사실이 발각되어 독립 운동가[7]들에 의해 끌려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구가 상해의 친일파를 연쇄처결하도록 결심하게 되며, 결국 다음 해에 옥관빈 피살사건까지 이어진다라고 알려져있으나 이 내용 역시 김구가 공식 발표한 주장이 아니다.

총독부 문서에는 옥관빈에 대해 ‘배일선인’·‘불령선인’ 이라는
언급은 있을지언정 그가 총독부의 밀정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증거없는 무혐의라 결론났다

이규서의 밀정설 역시 확인이 필요하다.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 설립자 이석영은 가난에 지쳐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가 굶어서 별세하였다.[8] 화도읍 가곡리에 이석영이 살던 이하려의 터에는 노거수 은행나무만 서 있으며, 원찰인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3. 기타[편집]


이규준의 후손은 1927년 일제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3명의 딸이 있었으며, 이들이 이규준 사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 딸들은 호적상의 부친 또한 다른 이름으로 올라가 있어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9] 이를 입증할 증거를 대만에서 발견하여[10] . #1 #2 #3 보훈처는 확보한 자료와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종합해 외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후손 확인위원회'에 상정해 2022년 2월 23일 세 딸의 자녀 중 10명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최종 확인했다고 밝혔다. #

남양주시에서 이석영광장과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만들었다. 이석영광장에는 1910년대 독립운동에 관한 작은 전시관과 빵집들이 있다.


4. 참고 문헌[편집]


「남양주100년사」 남양주 문화원(임병규) 2003년, 독립 운동사(국가보훈처)

[1] 도로명주소 미발급.[2] 백사공파 10대손, 시조 35세손 ○영(榮) 항렬.[3] 영의정을 지냄[4] 참고로 신흥 무관 학교의 후신이 되는 학교가 지금도 존재하는데, 바로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다. 물론 지금의 경희대는 옛날의 신흥 무관 학교와는 달리, 군사 관련 학과가 일절 없는 보통의 종합대학이다.[5] 상해거류민회 회장인 이용로가 엄항섭의 처조카이자 연미당의 동생인 연충렬을 회유하고, 연충열이 평소에 친했던 이규서를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고 한다. 이용로와 이규서는 흥사단 활동으로 연계되어 있기도 했다.[6] 조선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다롄 의거 미수 사건을 이끌었다.[7]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 백정기, 정화암, 이달 등[8] 상하이 빈민가를 돌다가 별세[9]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려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또한 이러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0] 해방 전 이규준의3녀 이우숙은 1936년에 중화민국장교와 결혼하였고 1949년에 대만으로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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