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희(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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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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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6번
팀 창단

이선희
(1982~1984)


이홍식
(1988)
{{{#ffff00 [[MBC 청룡|MBC 청룡]] 등번호 1번}}}
유백만
(1983~1984)

이선희
(1985~1987)


이용철
(1988~1992)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76번
결번

이선희
(1988~1990)


박완배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6번
장효조
(2000)

이선희
(2001~2007)


성준
(2011)
한화 이글스 등번호 81번
이종두
(2010~2012)

이선희
(2013~2014)


쇼다
(201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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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
李善熙 | Sun-hei Lee

출생
1955년 2월 14일 (69세)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명덕초 - 경북중 - 경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2년 삼성 라이온즈 창단멤버
소속팀
농협 야구단 (1973~1975, 1979~1980)
포항제철 야구단 (1981)
삼성 라이온즈 (1982~1984)
MBC 청룡 (1985~1987)
지도자
빙그레 이글스 2군 투수코치 (1988~1989)
빙그레 이글스 1군 투수코치 (1990)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 (1991~1993)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1994~1997)[1]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1997~2000)[2]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01~2004)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코치 (2005~2007)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13)
한화 이글스 재활군 코치 (2014)[3]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4)[4]
영남대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 (2015~2022)
경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2~)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08~2012)
병역
육군 경리단 (1976~1978)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여담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삼성 라이온즈, MBC 청룡 소속의 투수.

전설을 찾아 이선희편 상, 전설을 찾아 이선희편 중, 전설을 찾아 이선희편 하, 오마이뉴스 이선희 기사.[5]


2. 선수 경력[편집]


경북고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인 농협 야구단 소속으로 뛰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좌완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입단 직후부터 두각을 드러낸 이선희는 1년차에 실업야구 올스타로 뽑히고, 2년차에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경리단 복무 시절이던 1977~78년 동안 노히트 노런을 두 번 기록하고, 1978년에는 실업 리그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국제 무대에서는 일본전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원조 일본 킬러[6] 이름이 높았고,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 월드컵 대회에서는 다승왕, 구원왕, 대회 MVP를 수상하며 대한민국 야구의 세계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다.[7] 일본전에 유독 강한 데다가 군복무를 마친 젊은 좌투수이다 보니 NPB , MLB 스카우트들도 매의 눈으로 지켜봤으나, 자의반타의반으로 1981년까지 실업 리그를 지켰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때 권영호, 이만수, 장태수, 황규봉, 함학수, 오대석 등과 함께 삼성의 원년 멤버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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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로야구 출범 후 그는 스스로를 희생하여 한국프로야구의 성공에 공헌한 숨은 주역으로 변신하게 된다. 바로 원년 개막전,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때 맞은 만루홈런 두 방 때문.

프로야구 사에서 그가 겪은 불운은 1982년 3월 27일 서울 운동장 야구장(당시의 동대문 야구장)에서 열린 개막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MBC 청룡과의 대결에서 7:7 동점 상황이었던 연장 10회 말, 7회부터 등판해 2이닝을 무실점으로 호투한 이선희는 내야수 김인식[8]몸에 맞는 공으로 내보낸 뒤 김용달에게 2루타를 허용, 1사 2, 3루의 위기를 맞았다. 다음 타자는 7회말 동점 3점포를 쏘아 올린 4번 타자 유승안. 5번 백인천과의 외나무다리 승부를 감수하며 그를 고의사구로 거르려 했지만, 그날 경기 수훈 선수 상품인 오토바이에 눈이 먼[9] 유승안이 바깥쪽 볼에 무리하게 배트를 갖다대는 바람에 3루 주자 김인식이 홈에서 태그 아웃당하며 본의 아니게 한숨을 돌렸다. 2사 주자 1, 3루 상황으로 돌변한 후, 이선희는 후속 타자인 백전노장 백인천과의 정면 승부를 피하고 만루를 채우며 이종도와 승부하고자 했는데, 결과는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개막전 끝내기 만루포'(…) 였다.[10]

그의 불운은 시즌을 마무리짓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이어졌다. 삼성이 OB 베어스에 1승 1무 3패로 몰렸던 6차전에 선발 등판한 이선희는 8회까지 3실점으로 잘 버텼으나 9회초 2사 만루에서 신경식에게 밀어내기 볼넷으로 3-4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후속 타자 김유동에게 또 만루홈런을 허용하였고, 신거김 그렇게 시리즈는 OB 베어스의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11] 참고로 결승점은 밀어내기 타점으로 났지만, 만루홈런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였는지 만루홈런을 역전홈런으로 아는 이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이선희는 "한국프로야구의 원년을 빛낸 비운의 투수"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그나마 이건 양호한 평가이다. 김은식에 따르면 삼성의 처음과 끝을 말아먹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니(…) 참고로 이 부분에 대해 김은식은 서영무 감독이 체력이 떨어진 이선희를 계속 마운드에 방치한 것을 첫째 원인으로 평가했다. 즉 이선희만의 잘못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12]

사실 원년 시즌 권영호, 황규봉과 함께 나란히 15승 트로이카로 삼성 마운드를 이끌었지만 만루 홈런 두 방의 충격이 컸던지 1983 시즌 후 두 번 다시 두 자리 승수를 올리지 못했고[13] 1985년 1월 5일 이해창과의 맞트레이드로 철천지 원수MBC 청룡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트레이드 된 그 해 친정 팀이 전후기 통합 우승을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며, 팔을 언더스로 수준까지 내렸음에도 끝내 옛 모습은 회복 못하고 1987시즌 후 은퇴했다.[14]


3. 지도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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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빙그레 이글스 - 한화 이글스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를 맡다가 2007 시즌 종료 뒤 스카우트로 보직을 이동하였다. 그래도 현역 시절에 맛보지 못했던 우승을 코치 시절에는 이루어냈는데, 1999년 한화, 2002년, 2005년, 2006년 삼성 코치 시절 재직시에 우승을 한 적이 있다. 다만 1999, 2005, 2006시즌에는 모두 2군에서 코치를 하고 있긴 했다.

그 뒤 스카우트로 일하다가 삼성 시절에 모시던 김응용 감독을 따라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선임되었다. 보직은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한화, '원조 일본 킬러' 출신 이선희 코치 영입

2014 시즌부터는 재활군 코치로 보직 변경했으나, 6월 26일 부로 김기남 불펜코치와 보직을 맞바꾸어 1군 불펜코치가 되었다. 이후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재계약하지 못했다.

2015년에는 영남대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로 취임했다.

2022년 시즌이 끝난 뒤 김상엽 감독의 뒤를 이어 경주고 감독으로 취임했다.


4. 여담[편집]


  • 윤동균, 김봉연 등과 함께 한국프로야구가 5년만 빨리 생겼더라면[15]라는 단골 떡밥의 주인공이다.

  • 2001년 한국시리즈가 두산의 우승으로 끝이 나자 "어떻게 두산한테 집니까? 두산에 누가 있다고?!" 라고 말했다. 시리즈 시작 전에는 정규 시즌 1위였던 삼성의 우세를 예상한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특히 투수진이 삼성에 비해 매우 빈약했던 두산이 승리하자 실망이 컸던 듯...[16] 그러나 그 후 단 1년만에 그렇게 보고 싶었던 팀의 우승을 보게 되었는데, 우승 직후 이런 말을 남겼다.
…무려 21년입니다. 세월의 무게가 한꺼번에 밀려오더군요. 다들 저보고 안쓰럽다고 해요. 하지만 투수가 홈런 한 두어방 맞는 것은 병가지상사죠. 다만 저의 경우는 너무나 극적인 홈런을 연거푸 맞은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도 제가 있었기에 국내 프로야구의 발전이 한 10년쯤은 앞당겨졌을 겁니다.[17]#

  • 황규봉과는 경상중학교 때부터 야구를 해 온 사이라고 한다. 황규봉이 1년 유급하여 둘이 동기생이다. 이런 사이인지라 황규봉의 사망 사실이 야구와 연을 끊은 황규봉 측이 아닌 이선희 측에서 알려졌을 정도.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2
삼성
38
167
15
(2위)
7
1
0.682
(4위)
2.91
152
11
82
73
67
54
1.35
1983
29
127
5
13
0
0.278
3.76
122
17
(공동 2위)
66
56
66
53
1.43
1984
17
51⅔
2
4
0
0.333
4.53
58
6
26
23
31
26
1.5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5
MBC
28
138
5
7
2
0.417
2.28
(4위)
111
5
59
49
44
35
1.20
1986
7
17⅔
0
2
0
0.000
5.09
25
2
4
12
12
10
1.59
1987
14
38⅓
1
3
0
0.250
5.40
38
1
30
21
23
23
1.59
KBO 통산
(6시즌)
133
539⅔
28
36
3
0.438
3.35
506
42
267
234
243
201
1.38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2년
4완투
3완봉
1983년
3완투
1완봉
1985년
4완투
1완봉
KBO 통산
11완투
5완봉


6. 관련 문서[편집]



[1] ~5월 29일[2] 5월 30일~[3] ~6월 25일[4] 6월 26일~[5] 링크된 기사들은 삼성의 스카우트 시절 취재한 인터뷰인데, 2014년까지 삼성이 정상 자리를 유지할 것이란 예측을 했다. 그리고 그 예측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다.[6] 이후 일본에 강한 후배 좌완투수들에게 '일본 킬러'라는 별명이 영예롭게 붙여졌다. 이선희 이후 김기범, 구대성, 봉중근, 김광현 등이 일본 킬러라는 명성을 얻었다.[7] 당시 감독은 훗날 해태의 절대강자 시대를 이끈 김응용이었다.[8]연천 미라클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 감독을 지낸 김인식과는 동명이인.[9] 결국 오토바이는 끝내기 만루 포의 주인공 이종도에게 돌아갔고, 참고로 이날 프로 1호 타점과 홈런을 기록한 이만수는 등나무 가구 세트와 1호 홈런 부상으로 피아노를 받았다.[10] 2022년 기준에도 끝내기 만루포는 단 9번만 나올정도로 진기록이다.[11] 김유동에게 만루포를 얻어맞은 뒤 이선희는 황규봉에게 마운드를 넘겨준 후 덕아웃 옆에서 글러브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12] 이와 비슷한 참사가 2년 후 경기인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최종 7차전 선발로 재일교포 에이스 김일융을 내세웠는데 경기 중반 이후부터 체력에 한계를 느끼면서 몇 번이나 삼성 덕아웃과 불펜을 바라봤다. 하지만 삼성 벤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8회초 위기 상황에 닥치고서야 부랴부랴 황규봉을 준비시켰다. 결국 김일융은 유두열에게 결승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강판됐고 삼성은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13] 이선희는 빠른년생이라 82년 당시 사실상 30줄에 접어든 상태였고, 실업야구 포함 10년차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이었기에 하락세가 오는 게 정상이었다. 실업야구 시절 혹사에, 그간 국가대표팀 단골 멤버로 불려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하락세가 더 일찍 올 법 했는데도, 노장 소리가 솔솔 나오던 1981년까지 대표팀에 선발되며 빼어난 활약을 하였고 프로에서도 (임팩트가 안 좋아서 그렇지) 첫 해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은 자기관리를 매우 잘했다는 뜻이다.[14] MBC 시절을 포함하면 LG의 트레이드 잔혹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15] 물론 당시 현실에선 어려운, 불가능한 상황이다. 현실은 오히려 5년 늦게 생기는 게 더 맞았던 상황 한국프로야구 문서를 참조하면 너무 급하게 프로야구 리그를 만들어서 생긴 여러 문제를 지금도 남기고 있다. 다만 그런 건 고려 안하고, 그냥 프로야구 출범 직전이 전성기로 기량이 만개했고,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에는 이미 전성기가 끝나 하락세를 걷던 아쉬운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만약에~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 물론 그 상황에서 원년 타율 2위(윤동균), 원년 홈런왕(김봉연), 15승 투수(이선희)라는 기록을 세운 것에서 이 선수들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16] 거기다 두산은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온지라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삼성이 훨씬 유리했다.[17] 실제로 두 번의 만루홈런이 나온 직후, 이것이 한국프로야구를 앞으로 10년은 먹여살릴 거라는 말이 많이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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