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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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공무원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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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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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규
李世圭

파일:이세규 의원.jpg}}}
출생
1926년
충청남도 공주군
사망
1993년 7월 24일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1]
(現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로 163 일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1묘역 248호
배우자
권혁모
자녀
슬하 2남 2녀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8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7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8년 ~ 1969년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제11사단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선거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군인이자 정치인.


2. 생애[편집]


1926년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태어났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7기로 졸업하고 6.25 전쟁 당시 초급 장교로 최전선을 누빈 참전용사이다. 이후 국방대학원을 수료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별을 달 정도로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세규는 고급 장교들 치고 부패와 횡령에 손을 대지 않은 자들이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던 당시로서는 굉장히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대령 시절에 매월 자신의 봉급 절반을 불우이웃을 위해 썼는지라 어려워진 집안 살림 탓에 손님이라도 오면 항상 대접하는 것은 콩나물국 한 그릇 뿐이어서 콩나물 대령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비록 일찌감치 장군이 되었어도 갈수록 장기집권에 관한 야욕만 강해지던 군사정권에 회의를 느끼고 3선 개헌에 대해 완곡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가 박정희에게 밉보인 이세규는 결국 소장 진급에서 미끄러진 후 1969년 11사단장 직을 끝으로 자진해서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군문을 나선 이세규는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치를 시작했고,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이던 김대중의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며 군 장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의 편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세규는 당시 야당으로서는 가뭄에 단비같은 국방 안보 전문가이기도 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의원 재직 중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이 터지자 684부대를 북한이 보낸 무장공비라고 발표했지만, 이세규가 684부대는 사실 대한민국 정부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파 비밀부대 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무장공비 운운은 거짓말임이 탄로났다.[2]

이 폭로 때문에 이세규 의원은 박정희에게 요주의 인물로 단단히 찍혔고 10월 유신이 선포된 직후 이세규 의원은 조윤형, 김상현, 강근호, 류갑종, 김경인, 김녹영, 김한수, 조연하, 최형우, 나석호, 박종률 등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사실 이 폭로 외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해 왔는지라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이미 상기한 바와 같이 이세규는 현역 군인 시절에 3선 개헌에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고... 10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후 박정희는 직접 손을 봐줘야 할 야당 국회의원 리스트를 작성하여 보안사령관 강창성에게 제시하면서 모조리 잡아들여 유신 체제를 지지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 때 강창성이 "각하, 지금이 비록 계엄 중이라고 해도 보안사 수사관들이 능수능란한 정치인들을 제대로 수사하긴 어려울 테고, 무엇보다도 이 사람들을 전부 잡아들이면 국민들은 정치적 보복이라고 인식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주장하면서 일부 온건한 이미지의 인물은 빼자고 이야기를 하자 박정희는 "그럼 임자가 알아서 해." 라며 허락하였고, 고령의 윤길중4.19 세대의 상징성이 있는 이기택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강창성이 "이세규 의원은 군에서도 명망이 높은 인물이라 체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주장하자 박정희는 "이세규만큼은 안 돼! 김대중에게 붙어먹은 아주 악질이야!!" 라면서 분노하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3] 이 에피소드는 이세규 의원이 얼마나 성품이 강직한 인물인지를 잘 보여준다.

수사기관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바로 정계를 떠났고, 여생을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린 끝에 1993년 7월 24일 국군수도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67세.


3. 여담[편집]


  • 이세규가 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아내와 자녀들이 면회라도 갈 때에는 "민간인이 사병들을 먹일 식량을 축낼 수 없다" 라면서 가족들이 먹을 쌀이나 부식은 직접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이러니 군용차량 탑승 같은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고 가족들은 한 겨울에도 쌀자루를 지고 버스터미널 에서 사단장 관사까지 수 km 길을 걸어가야 했다.

  • 어느 날 군수참모가 이세규 사단장의 아내에게 차비를 보탠 것이 들통나는 바람에 군수부서 전체가 검열을 받을 정도로 노발대발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이세규는 매년 연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단 장교들에게 청주 댓병을 돌리는 등 부하들에게 어느 정도 인심을 쓰는 면도 있었다.

  • 하루는 이세규가 저녁상을 물리고 당번병에게 "오늘은 못 보던 나물이 있더라"며 물으니 당번병은 "쌀이 조금 남았길래 시장에서 나물과 바꿔왔습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답했는데, 이세규는 "네 이놈, 나라의 쌀을 팔아서 반찬을 사왔다고?!" 라며 불같이 화를 내며 회초리로 당번병의 종아리를 쳤다고 한다... 그리고 종아리를 맞고 흐느끼던 당번병을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조용히 타일러 주었다.

  • 보안사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한 이세규는 자결을 시도하려 혀를 깨물었지만 잘못하여 의치만 부러지고 말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장군님 왜 이러십니까" 라고 질겁하자 이세규는 입에 피를 가득 머금은 채로 "장성으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는 더이상 살 이유가 없다... 항장[4]도 이렇게 모질게 대하지 않는다! 네놈들은 군인도 아니야!!" 라며 일갈하였다고 한다. 이 때 부러진 의치는 부인 권혁모 여사가 남편의 유품으로 평생 간직하였다.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국회의원)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4,969,050 (44.38%)
당선(9번)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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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도병원이 현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99년이다.[2] 훗날 실미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이미 사망한 후라 이세규 의원의 비서가 대신 인터뷰를 했다.[3] 백무현 화백의 만화 박정희에서도 강창성이 자칫 보복인상을 줄지도 모르니 일부 제외해야 한다고 하자 실미도 특수군 난동을 폭로한 김대중편 이세규만은 절대 봐줄수 없어! 아주 악질이야!라고 역정을 내며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4]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한 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