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아랍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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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갈등의 배경 1 : 유대인의 이산과 시오니즘
2.2. 갈등의 배경 2 :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
2.3. 20세기
2.4. 21세기
3. 문화 교류
4. 여담
5. 관련 문서
6. 관련 기사


1. 개요[편집]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문서.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마주하는 국가들 은 모두 아랍어권 국가들이다.[1] 이스라엘의 건국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의 나크바로 불렸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아랍 연맹의 여러 국가와 직접적으로 적대하는 관계였다.

아랍 연맹과 이스라엘과의 갈등은 4차례에 이르는 중동전쟁 그리고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이어져,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속한 여러 국가들이나 멕시코 등 신흥공업국들이 몰락하는 등 전 세계 경제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적대 관계는 2020년대 들어 급격히 다각화하는 추세에 있다. 본 문서는 아랍 연맹에 속하는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갈등의 원인이 되는 역사적 배경, 그리고 오늘날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외교 관계를 다룬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갈등의 배경 1 : 유대인의 이산과 시오니즘[편집]


다신교가 일반적이었던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유일신교를 믿는 유다이아의 주민들은 특이한 민족 취급을 받았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다른 종교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미신에 불과하다."라며 유대교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당시 로마인 전반의 유대인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에 맞서 3차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제3차 유대-로마 전쟁 종전 이후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의 유대교 성지인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속주의 명칭도 유다이아 속주에서 일부러 유대인들과 대립하던 역사적 민족 집단의 이름인 블레셋의 이름을 따서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로 변경하였다.

이 팔레스티나 속주라는 이름은 서기 4세기 로마 제국의 국교가 같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가 된 이후에,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오히려 더 심화되면서 그대로 존치되었다. 유대교는 민족 종교로서 로마 제국의 소수민족인 유대인들만이 믿는 종교였기 때문에, 종교적 소수자라는 유대인들의 입지는 변함이 없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유대교는 같은 뿌리를 둔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의 경쟁 상대로 인식되면서 박해의 명분이 외려 강화되었던 것이다. 서기 5세기 무렵에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을 되돌리려던 율리아누스 황제의 유대교 진흥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율리아누스의 사후 그대로 실패로 돌아갔고, 서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을 시 막대한 불이익을 주는 종교정책을 취했다.

서기 4~6세기를 거치며 팔레스티나 지방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둘씩 기독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 일부 유대인들은 동로마 제국의 손이 닫지 않는 서유럽 일대, 페르시아, 아라비아 반도, 에티오피아, 인도, 등등으로 떠나면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점차 전 세계로 확대되기 이른다.

이렇게 전 세계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20세기 들어서 시오니즘 운동의 결과 오늘날의 이스라엘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규모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물론 유대인들이 정착한 땅은 무주공산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주의 측에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출애굽기에 묘사된 유대인들의 가나안 정착에 비교하지만,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인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로 개종한 유다이아 현지인들의 후손으로서 팔레스타인 땅에 정당한 지분권을 두고 있다. 아랍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의 편을 들고 있다.

2.2. 갈등의 배경 2 :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편집]


구약 시대 유다이아 주민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한다. 히브리어는 바빌론 유수 그리고 뒤이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을 해방한 것을 계기로 사용 규모가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는데, 유다이아 주민 사이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였던 아람어[2] 사용이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멸망 이후 히브리어의 몰락은 오히려 더 가속화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유다이아 주민 상당수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군대에 납치되어 알렉산드리아로 강제이주되는데, 이렇게 알렉산드리아로 이주된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모어로 사용되어 되었다.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옮긴 이른바 70인역의 번역 배경 역시 유대인들 중 히브리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인구가 늘어난 것이 계기였다. 시오니즘 운동에는 고대 당시 이미 사어가 된 히브리어 부흥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 측 언어 학자들은 이 히브리어를 복원하는데 아랍어의 어휘와 문법 등을 상당부분 차용하기에 이른다. 아랍어는 히브리어를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참고 대상이었다. 히브리어와 고대 페니키아어, 아람어, 아랍어는 모두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하며, 아랍인과 유대인은 문화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여러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이스라엘의 민족 정체성과 팔레스타인인은 서로를 배타적으로 인식하는데, 그 원인에는 유대인의 선민 사상, 아랍 민족주의, 이슬람주의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아랍권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족주의 상관 관계 그리고 이스라엘 측의 팔레스타인 해석을 비교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서기 7세기 정통 칼리파 시대 당시 이슬람 제국예루살렘을 포함한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일대를 정복하였다. 정통 칼리파 시대 당시에는 이슬람교 신학이 아직 체계적으로 확립되지 않았던 시대로 여타 아브라함 계통 종교와 공존, 화합이 용인되던 시대였고, 중동의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이들을 자신들을 괴롭히던 정교회보다 나은 다른 이단 종파 정도로 여기며. 아랍 무슬림들의 팔레스티나 정복을 환영하였다. 실제로 이슬람 제국의 종교 정책은 동로마 제국보다는 훨씬 관대한 편이기도 했는데,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아브라함 계통 종교로 교리 상당부분을 공유하며, 쿠란에는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이 자주 언급되지만 이들의 행적은 성경에서처럼 구체적으로 시간 순으로 언급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외려 쿠란에서는 이른바 "성서의 백성"이라 불리는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과의 융화 관련한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이슬람 제국은 기독교인과 유대인, 만다야교 신도들을 소수자로서 용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의 종교적 관용은 중세 기준에서의 관용이었다. 이슬람 제국의 기반이 점차 안정화되면서 무슬림들을 우대하고 비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식이 체계화되면서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에는 서로 불평등한 관계의 서열이 확립되었다. 아랍 우월주의 성향이 강했던 우마이야 칼리프조 시대 들어서는 관청에서 아람어와 그리스어 사용이 금지되고 대신 아랍어만 사용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압바스 칼리프조 시대 들어서 팔레스타인 일대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상당수는 지즈야 부담으로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특히 농촌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지즈야는 무조건 화폐로 내야 했는데 이는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는 농민들 입장에서, 외부에서 화페를 "구입"해서 지불해야 하는 이중의 수고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아람어 대신 아랍어를 사용하면서 완전히 아랍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은 고대 이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던, 시대가 지나며 기독교 및 이슬람교로 개종한 유대인, 사마리아인들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3][4]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고대 이스라엘인의 직계 후손이자, 무슬림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을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전통적인 아랍 무슬림들의 가치관 속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2등 신민이었다. 하심 가문에서 시오니즘을 지지하고 유대인들의 이민을 장려한 것 역시, 새로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딤미[5]로서 복종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팔레스타인인 아랍인들의 공적 1호는 맥마흔 선언에서 보듯 아랍인들을 탄압하던 오스만 제국의 튀르키예인들이었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당시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은 전쟁이나 싸움을 전혀 못하는 유약한 샌님들이라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대량이민이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까지는 하지 못했다. 이러한 판단 미스는 시오니스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이스라엘 건국 직전까지 좌파 시오니스트들 상당수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함께 평등하게 하하호호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낙관 속에 빠져 있었다.


2.3. 20세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동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시오니스트들 중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서로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수정 시오니즘 측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진화론, 인종주의 관점에서 축출해야 할 유색인종[6]이라며, 이들에 대해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7] 종교 시오니즘 측에서는 이유는 달랐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하고 절멸시켜야 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붕괴되고, 밸푸어 선언의 결과로 팔레스타인 일대에 영국의 식민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들어서면서 시오니스트들과 아랍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본격화되고 이는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으로 이어졌다.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국지전 수준에서 여러 국가들 사이의 전쟁으로 규모가 훨씬 더 확대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건국 이념으로 삼은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족 해방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자국민들의 단결을 꾀했으며, 이슬람을 국교화한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 이슬람의 3대 성지 중 하나인 예루살렘을 장악한 이스라엘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 사이의 외교 관계는 중동전쟁 이 한 단어로 설명이 끝난다 볼 수 있을 정도이다.


  • 수에즈 운하를 두고 일어난 제2차 중동전쟁은 참여국 규모가 더 확대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미국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였다. 1964년에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설립되어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다.[8]


  •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일격을 날렸으나,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은 결국 전쟁을 무승부 비슷하게 돌려놓는다. 이 전쟁을 계기로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은 "얄미운 이스라엘을 편드는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라는 인식이 각인되었고,[9]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아랍권의 심각한 반미 감정으로 이어진다.[10]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슬람 교리에서는 심판의 날이 오기 직전 유대인들이 무슬림들을 핍박한다는 예언이 있는데,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이를 두고 이스라엘은 적그리스도의 무리이며 미국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를 지원하는 세력이라는 식으로 선동을 한 게 아랍권 무슬림 대중들에게 먹혀들었던 것이다. 한 편 4차 중동전쟁 당시 걸프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하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석유를 감산하여 전 세계 유가가 폭등시키는 전략을 사용하였고,(석유파동 문서 참조) 이 방법으로 유럽과 동아시아 측에 지지를 얻어냈다.

  • 이스라엘의 주변국 중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바로 인구대국 이집트였고, 이스라엘 로비 역시 한동안 미국의 대이집트 외교 정책과 연계되어 있었다. 결국 미국의 주도로 1982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수교를 맺으면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측에 반환되었다. 이집트가 잠잠해지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이웃 국가 중 가장 만만한 상대였던 레바논의 내전에 개입하였는데, 이를 제5차 중동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레바논 내전 당시 친이스라엘 성향 마론파들이 중심이 된 팔랑헤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 순니파 무슬림 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 둘 사이를 중재하면서 힘을 키운 것이 시아파가 주축이 된 헤즈볼라이다.



2.4. 21세기[편집]


오늘날에도 상당수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국가들 역시 이스라엘과 갈등이 크다. 아랍 각국의 국민 여론은 퓨 리서치(Pew Research center) 조사 결과에서 보듯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들어서 아랍 연맹 각국의 대이스라엘 외교정책은 점차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2020년 이전까지는 친미성향 국가인 이집트, 요르단만 수교를 했지만 2020년대 들어서는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등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오바마 정권이 2016년 1월부로 미국이 이란과 핵합의를 시도한 것에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페르시아 만 넘어 이웃한, 자국의 최대 적수인 이란이 미국과 합의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미국 측에 심각한 배신감을 느끼면서 2020년부로 중국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11]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이스라엘과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상술한 바레인과 아랍에미리트 등이 합류하였는데, 아랍권의 공공의 적 이란을 견제하려는 걸프 아랍 국가들의 이해 관계가 이스라엘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아랍의 봄 그리고 그 결과 집권한 이집트의 무함마드 무르시무슬림 형제단 정권의 실정 그리고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모인 ISIS의 만행이 이슬람권 전체에 남긴 트라우마에 있었다. 아랍의 봄 이후 아랍 국가 위정자들은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성직자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이 와하브파 성직자들을 숙청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실망은 아랍 국가의 위정자들 뿐만 아니라 아랍 일반 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2012년 11월 가자지구 폭격으로 아랍권의 반이스라엘 감정은 절정에 달했었으나, 이슬람주의자들의 부조리는 가자지구 폭격보다도 더 심한 트라우마를 주기 충분했다. 무슬림 형제단 정권이 집권 이후 보여준 무능은 심지어 무슬림 시오니즘이 암암리에 아랍권 소셜 미디어에 유행했을 정도로 반감과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세 번째는 팔레스타인 해방 관련한 아랍 국가들의 체념에 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민간인들에게 백린탄 폭격 등 야만적인 공격을 가해도,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며 거부권을 남발하는 바람에 유엔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나 아니면 헤즈볼라 같은 세속주의 정당들 할 것 없이 팔레스타인 팔이나 반이스라엘 감정 선동만 하지 제대로 하는 일은 없다. 제4차 중동전쟁, 2014년 7월 가자지구 폭격 당시 당시 아랍권 편을 들었던 유럽 국가들 역시 유럽 난민 사태 이후로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12] 2006년 레바논 전쟁 이후 잠깐 아랍권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헤즈볼라는 2020년대 들어 레바논의 경제를 말아먹은 원흉으로 지목되어 조롱받는 상황이다. 2010년대 초반 같았으면 아랍에미리트 항공사들이 이스라엘 직항 노선 취항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아랍권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과거에 비하면 비교적 개선되었다 정도이지, 우호관계가 되었다고 단정짓는 것은 곤란하다. 2023년 1월 3일, 이스라엘의 한 정치인이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자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팔레스타인 등이 반발했고, 요르단은 주 요르단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외교적으로 정상화된 것과 별개로 여전히 종교적인 앙금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문화 교류[편집]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은 후무스, 팔라펠 같은 음식의 원조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요리 문서 참조.

팔라펠를 예로 들자면, 팔라펠 자체는 아라비아 반도 무슬림들이 개발한 음식이 아닌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측에서 사순절[13]에 고기 대체용 먹거리로 개발한 요리이다. 문제는 코셔 푸드 원칙 때문에 음식을 가려먹어야 하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부자 아닌 이상 고기를 마음대로 맨날 사먹을 입장이 못 되고 그나마 서민 입장에서 고기 대용으로 먹을만한 음식이 팔라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팔라펠은 이스라엘 음식이라는 등식을 자국민들에게 주입하게 된다. 즉 아랍권과 이스라엘과의 먹거리 관련 문화 분쟁은 엄밀히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역사왜곡이 맞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나름 이유가 있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4. 여담[편집]


이집트와 요르단,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등 이스라엘을 승인한 몇몇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랍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만을 인정하며, 이스라엘 국민들의 입국을 불허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입국 기록이 있을 경우 이들 국가의 입국이 금지된다.[14]

아랍권 국가는 아니지만 이란[15],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역시 이슬람권 국가이니만큼, 이들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도 나쁘다. 그나마 세속화된 중앙아시아 국가들하고 튀르키예하고는 사이가 그럭저럭 원만한 편이며 아제르바이잔하고는 거의 동맹 수준으로 친하다.


5. 관련 문서[편집]




6. 관련 기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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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2] 역시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언어이다.[3] 오늘날 사마리아인과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운 민족집단으로는 팔레스타인인을 들 수 있다.[4] 의외로 놓치지 쉬운 사실이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 베두인은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이 없다. 이스라엘 베두인들의 경우 이스라엘군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는데, 전통적으로 네게브 사막을 중심으로 거주해온 이들은 원래 농촌에서 농경 혹은 도시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전통적으로 상당히 적대적인 관계였다. 이스라엘 베두인들은 아랍어 방언부터 다르다.[5] 무슬림 국가에서 지즈야를 납부하는 비무슬림 피보호 신민[6] 정작 팔레스타인인들은 백인이다.[7] 이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말로 골다 메이어가 남긴 "오늘밤 태어날 수많은 아랍 아기들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다."가 있다.[8] 카다피 정권 집권 후의 리비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지원했다.[9] 쉽게 말하자면 다 이긴 축구 경기를 심판의 잘못으로 비겼을 때, 상대팀 선수보다 편파 판정한 심판이 훨씬 얄미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10] 미국은 이라크 전쟁 이후 등 이라크 등 아랍권 국가에 엄청난 양의 경제 원조를 행했지만, 민심을 얻지는 못했다.[11] 자세한 내용은 중국-사우디아라비아 관계 문서 참조[12] 이슬람주의 선교단체에서 민간인 어린이 사망자 이슈를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 목적 혹은 증오조장 목적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나타나면서 서구 사회 언론에서도 이를 잘 다루지 않게 된 것도 있다.[13] 가톨릭이나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는 사순절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14] 심지어 정치적으로 친미/친서방 국가로 분류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마저 이스라엘 국민의 자국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도 과거에는 이스라엘 국민의 입국을 금지시켰을 정도. 다만 유대인이라도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 유럽, 호주, 캐나다 등 다른 서방국가의 국적을 가진 서방국 국민들의 경우는 입국이 허용되기도 한다.[15] 중동 국가이긴 하지만 아랍 국가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