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유발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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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승엽에게 밀린 선수들
4. 기타 피해자(?)



1. 개요[편집]


이승엽의 경우 유독 매스컴과 팬들의 관심이 뜨거운 선수다 보니 상대적으로 이승엽에게 기록을 허용한 선수가 지나치게 과장돼서 부풀려지거나, 반대로 이승엽 때문에 기록을 폄하당하는 등 본의 아니게 피해자가 생기게 되었다. 이하는 그 피해자 명단. 특히 그중에는 양준혁이 있다.


2. 이승엽에게 밀린 선수들[편집]


  • 양준혁: 양준혁 본인이 공공연히 언급했듯이 양준혁은 이승엽에게 밀려 단 한번도 KBO MVP홈런왕을 차지하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다른 비율 스탯에서 항상 1, 2위를 오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에 비해 인기를 끌지 못했고, 이는 본인에게 콤플렉스가 되어 버렸다. 이 때문인지 본인의 선수 시절을 회상할 때는 자주 본인이 2인자였음을 언급한다. 게다가 은퇴 이후엔 본인의 통산 기록 1위를 이승엽이 은퇴하기 전 상당수 갈아치워버렸다. 그래도 이게 양준혁의 어마어마한 통산 기록이 재조명받는 계기가 되긴 했으니..... 다만 세이버스탯으로 따지자면, 양준혁은 플레이스타일의 화려함이 부족할 뿐[1] 통산으로든 커리어하이로든 이승엽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역대 최고의 토종 좌타자이며, 오히려 커리어하이 wRC+는 양준혁이 이승엽보다 훨씬 높다.[2] 다만 해외리그, 국가대표로 실적을 남긴 이승엽의 평가가 양준혁보다 높은 편. 이는 김태균과 이대호의 비교에도 적용되는데, 김태균이 이대호보다 KBO 리그 통산 성적에서 우세하고 커리어하이도 비등하지만 이대호의 해외리그 실적이 우세하기 때문에 이대호가 더 높게 평가된다.

  • 심정수: 현대 유니콘스 시절 비율과 누적 양면으로 이승엽에 비해 크게 손색없는[3] 활약을 펼쳤지만 하필이면 현대는 연고지 이전 등의 문제로 인기가 없었던 데다[4] 이승엽의 인기가 워낙 높다보니 매스컴에서도 심정수에게 큰 주목을 하지 않았던 것.[5] 이 때문에 사실상 매스컴의 비호를 거의 받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6]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역 당시에는 이승엽에 비해 상당한 저평가를 받았었으며, 은퇴 이 후에는 이 기록마저도 약물 빨이라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2003년에 친 홈런 53개는 2014년까지도 깨지지 않은 역대 단일 시즌 홈런 3위[7] 기록, 심지어 세이버스탯과 OPS등 실질적인 성적은 심정수가 더 우세했음[8]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이승엽의 56홈런과 같은 해에 세워진 기록이라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래도 삼성으로 와서 홈런왕과 타점왕을 양준혁의 지원 아래 이루고 은퇴했다. 그래도 지금은 현재 박병호나 최정 등등 홈런을 목표로 양산하는 선수들이 거론되면 이승엽과 함께 항상 옆에 언급이 되는 단골이다.

  • 박병호: 이 쪽은 국거박 악질 팬들과 기레기들의 비교질 때문에 저평가를 받은 케이스. 오죽 했으면 이승엽이 2014년 목동구장에서 본인도 홈런은 1개밖에 못 쳤다며, 박병호보다 목동에서 홈런개수가 적은 사람들은 비난할 자격이 없다라고 일갈하기도 했었다. 자세한 건 목동드립 문서 참고. 하지만, 이승엽이 자기도 목동에서 얼마 못 쳤다고 박병호 까지 말라는 말들을 서슴없이 일갈한 사례로 오히려 자기 홈런을 깰 수 있는 건 박병호 뿐이라고 했다. 다만 이승엽도 한때는 작은 구장인 대구에서 플레이했다고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다. 이후 목동을 사용하지 않는 2016년부터는 문학을 사용하는 SK에게로 논란이 넘어갔고 2018년, 박병호가 KBO로 돌아온 후, 잠실 다음으로 큰 구장인 고척돔에서 부상으로 113경기만 플레이하고도 43홈런으로 단 1개차이로 홈런 공동 2위에 오르면서 많이 사그라드는가 싶었지만 2020년 역대 개인 최악의 시즌을 보였다 무려 타율 0.223 고작 93경기 나왔으면서 삼진이 114개 작년에 122경기 나와 117 삼진이었는데 작년 삼진과 고작 3개차이다.

  • 이종범: 이 쪽은 팬덤간의 감정싸움과 지역발언 때문에 피해자가 된 케이스. 원래 시초는 양준혁과의 비교 했었는데 이게 "투수는 선동렬,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인생은 이호준 사랑김동주" 이라는 말 때문에 이승엽에게까지 번진 케이스. 일단 이승엽과 이종범의 공통적인 포지션은 다르다. 이승엽은 팀 선배 양준혁 처럼 좌완에 외야수와 1루수만 가능했고 이종범은 오른손 잡이들이 쓰는 우완 글러브를 끼고 다녔고[9]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이 가능한 선수였다. 단 타격 기록에서는 주루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이승엽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10]

  • 신윤호: 2001년 MVP는 1차 투표에서 투수 3관왕(다승&세이브포인트&승률)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신윤호가 1위, 이승엽이 2위를 기록했다가, 신윤호와 이승엽만을 후보로 한 2차 투표에서 이승엽이 압도적으로 이겨서 이승엽이 MVP를 수상했다. 만약 2차 투표가 없이 그대로 결정났다면 신윤호가 MVP를 수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1차 투표에서 이기고도 2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은 역시 인기도. 여기에 호세도 있었는데 배영수와의 벤치 클리어링으로 그만 출장 정지 당하고 말았다. 이 때 호세 성적은 양준혁/이승엽 하고 타격과 홈런왕을 경쟁하고 있던 선수였다.

  • 장성호: 이승엽에게 밀려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이 보는 1루수는 홈런을 많이 칠 줄 아는 게 정석이라고 정작 이 사람은 안타 생산과 출루율을 기반했던 타자였으니 뭐...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은 24개인 1999년이다. 대신 2002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했는데도 밀렸다. 이유는 하필 이승엽과 장성호의 팀 최종전이 시즌 종료 날이였고 이승엽은 무안타 였다가 연장전에서 역전 결승 홈런을 치는 바람에 전부 묻혔다. 거기에 남은 시즌 경기가 아예 끝나고 관전하러 갔던 심정수도 봉변을 당했다. 홈런 랭킹 공동 1위였는데, 이승엽의 당일 날 홈런으로 공동 홈런왕은 무산이 되었고 리그 MVP도 경쟁에도 패배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챙겼으니 이거야말로 상대방들 입장에서는 빡칠 만하고 이승엽은 신났다.

  • 이호준: 프로 통산 300홈런 이상을 기록했으나 역시 이승엽에게 밀려 골든글러브를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2003년 36홈런을 기록했으나 당시 아시아 최다홈런이였던 이승엽에 밀렸고 2012년 커리어 첫 골든글러브 수상 가능성이 생겼지만 127경기 중 1루수로 80경기를 출전한 이승엽이 지명타자 후보로 선정되고 골든글러브을 수상하면서 결국 수상하지 못하였다.

  • 최준석: 2015년 3할 30홈런 100타점 각종 지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지명타자 골든글러브가 유력했으나 당시 이승엽 인기에 밀려서 수상에 실패하면서 논란이 있는 편이다 . 선수 본인으로서는 지명타자로는 골든글러브를 수상한적이 없기에 상당히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고 골든글러브 인기투표에 최대 피해자 중 한명으로 언급되고 있다.

3. 이승엽에게 기록을 허용한 경우[편집]


현재 감독에서는 한분이나 계신다.

  • 이정민: 널리 알려졌듯 2003년 당시 기준으로 아시아 신기록이었던 56호 홈런의 희생양이 되는 바람에[11] 한동안 허용투수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렸었다. 이 당시 이승엽의 홈런이 워낙 큰 이슈다 보니 이정민이 홈런을 맞는 영상은 당시 수 없이 재생되었으며, 어느 한 뉴스 자막에는 "허용투수"라고 큼지막하게 나왔다. 이 후에도 이승엽의 기록이 경신될 가능성이 희박한지라 당분간 자료화면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예정.

  • 윤희상: 양준혁이 기존에 세웠던 351호를 갱신하는 이승엽의 KBO 통산 352호 홈런을 맞으면서 역시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윤희상의 경우에는 이정민과 달리 기존에도 인지도가 어느 정도 있는 선수였고, 이후에도 좋은 활약을 보인데다, 56호 홈런에 비해 팬들이나 언론의 관심도도 비교적 적었던지라 아예 허용투수가 선수 본인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이정민 만큼의 피해를 보진 않았다.[12] 그리고 이제는 이승엽이 홈런을 칠 때마다 통산 최다 홈런이 경신되기 때문에, 이 기록에서는 홈런을 허용한 투수가 기록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승엽의 인천 마지막 경기였기도 했던 2017년 9월 1일 양준혁의 기록을 경신하는 KBO 통산 2루타 신기록(459개) 허용투수가 된다.

  • 이강철: 현 kt wiz 감독. 1995년 5월 2일 이승엽의 데뷔 첫 홈런을 허용하면서 허용투수가 되었다.

  • 구승민: 포항에서 롯데와의 경기 전 삼성 엘지 잠실 경기에서 엘지선수들이 이승엽과의 승부를 피하는 모습을 보여 볼넷으로 내보내 팬들의 야유를 받았고 프로야구 최초 통산 400호 홈런을 맞은 선수는 구승민 선수가 되어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하필이면 1대 허용투수였던 이정민과 같은 롯데 자이언츠 소속. 이분도 당분간 팀 선배처럼 자료화면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예정.

  • 유창식: 이승엽의 통산 400번째 2루타를 허용하면서 피해자가 되었다. 게다가 바로 이전에 정근우의 도루 기록을 허용한 전과도 있어 기아 팬들이 기록 제조기라며 까고 있다. 그리고 유창식은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을 남겼다.

  • 이재우: 2016년 9월 14일 대구 한화전 한일통산 600홈런을 허용하며[13] 허용투수가 되었다. 최형우-이승엽 백투백 홈런은 덤.

  • 송창식: 2017년 5월 21일 대전 한화전에서 한국 프로야구 최초 개인 통산 450호 홈런을 허용하면서 허용투수가 되었다. 러프-이승엽의 백투백 홈런은 덤.

  • 김성민: 2017년 7월 29일 고척 넥센전에서 통산 4000루타를 허용했다. 맞을 당시 아쉬워하는 표정은 덤. 여담으로, 삼성은 이날 경기에서 1 대 14로 대패하였다.

  • 한현희: 2017년 10월 3일 이승엽의 은퇴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며 이승엽의 마지막 홈런을 허용했다. 2012년 6월 29일 이승엽에게 투런홈런을 맞으며 역대 최소경기 1000타점 기록도 허용했었다.

  • 김원형: 현 SSG 랜더스 감독. 2003년 6월 22일, 이승엽의 세계 최연소 300홈런을 허용했다. 그것도 초구에.

  • 강병규: 이쪽의 본좌 중 한명. 예능에서 어찌나 우려 먹었는지 자기가 이승엽의 기록에 이바지 했다고 자폭했다. 참고로 어떤분어느 프로에서 이걸로 강병규를 엄청 놀려 먹었다.


4. 기타 피해자(?)[편집]


  • 이승엽: KBO리그에서 동명이인이 있었다.

  • 카와시마 료: 그란도시즌을 헌납한 투수. 시즌중의 평범한 피홈런 하나에 고통받는 피해자. 근데 좀 당해도 싼 것이, 혐한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시즌을 시작하면서, 슈트를 겨우내 연마했는데, 연습경기부터 던져보겠다더니, 제구가 아직 부족해서 데드볼이 나올 수 있는데, 마침 한국팀과의 연습경기라서 던지기에 딱이라는 말을 했다. 일본선수가 아니라 한국선수는 맞혀도 된다는 걸로밖에 해석이 안되니, 좋게 해석할 거리가 없는 발언. 단 이는 진상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한국기자가 언론에 보도한 그대로를 받아들인 해석이다. 실제로 이는 지나친 피해망상이고, 일본 국내선수에게 던져서 맞혔다간 같은 리그이다 보니 후일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데 맞혀도 다시 볼 일 없는 해외팀과의 경기이니 실수로 맞혀도 뒤끝이 없고, 해외팀끼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얼굴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어색한 사이라 어지간하면 벤치클리어링이나 보복도 잘 안 하니까 실수해도 괜찮다는 차원의 이야기이지 혐한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나간 이야기.

  • 조인성: 2002년 한국시리즈에 이어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홈런을 허용할 당시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특히 이 홈런의 경우 전자는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를 견인하는 홈런이었다는 점, 후자는 이승엽이 한국 복귀 이 후 무려 10년만에 한국시리즈에 나서서 홈런을 때려냈다는 점 때문에 한동안 조인성과 이승엽을 엮는 드립이 인기를 끌었었다.

  • 이와세 히토키: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하필이면 준결승전에서 이승엽에게 승부의 향방을 가름짓는 결정적인 홈런을 허용하는 바람에 국내에서는 한국의 승리를 견인한 열사 李와세로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자세한건 항목 참고.

  • 인지도에서 밀려버린 다른 동명이인들[14]

  • 이송정: 힐링캠프에서 밝힌바에 따르면 이승엽이 본인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전제로 이송정에게 청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엽의 행선지는 다들 알다시피... ??? : 야 너네 우리 무시하냐?

  • 선동열: 이승엽에게 와도 자리없다는 독설을 했는데, 정작 이승엽은 복귀 후 나이에 맞지않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반면에 이 시기에 감독으로 선임한 선동열이 KIA 타이거즈를 망치며 이 발언이 재조명 받아 이승엽이 좋은 성적을 낼때마다 까이게 되었다.

  • 카와카미 겐신: 2005년 5월 20일의 주니치 드래곤스 : 지바 롯데 마린스(교류전)전에서 8회 2사까지 퍼펙트 게임 페이스로 호투를 펼치는 중 이승엽을 상대로 3B1S까지 몰리게된다. 안타를 맞느니 볼을 던지고 노히트 노런을 노릴 수도 있었지만 가와카미는 이미 노히트 노런 기록을 보유해서인지 퍼펙트 게임을 목적으로 스트라이크 승부를 했다가 홈런을 맞았다(해당 영상 링크 : #). 구단의 첫 퍼펙트 게임 달성은 놓쳤지만 피안타는 위의 홈런 하나뿐이며 사사구 없이 완투 승리를 거뒀고, 동시에 선발 멤버 전원으로부터 탈삼진을 기록할 정도의 보기 드문 기록을 달성했다.[15] 하지만 퍼펙트 기록을 저지 당한 것이 무척 아쉬웠는지, 훗날 이승엽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고 만난 경기에서 복수성 빈볼을 던졌지만, 이승엽은 이걸 극복하고 어퍼덱으로 꽂아버리는 홈런으로 화답했다(해당 영상 링크 : #).

  • 이시이 히로토시: 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군 투수코치이자, 2006 WBC 1라운드 한일전에서 홈런을 헌납한 좌완 마무리 투수.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다카쓰 신고, 이가라시 료타와 함께 필승조 계투로 활약했고, WBC가 있기 직전 시즌에 37세이브를 거둬 리그를 대표할 마무리로 성장했으나, 이 시기의 이시이 히로토시는 어깨 통증을 안고 있었다. 원래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꿨으나, 후루타 아쓰야 감독이 취임하면서 보내주겠다던 구단이 입을 씻어버려 상당히 구단측과 문제가 커졌다. 후루타 감독과도 미묘한 분위기였다는 것이 정설. 구단을 정식으로 고소하는 방안까지 오르내리던 차에 몸에도 어깨에 부상이 와버렸고, 결국 구단이 타팀 이적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술비를 대주었는데, 이후 별반 활약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후루타가 진구 구장으로 와서 이시이의 은퇴식에 참석한 것은 나름 미담. 여하간 시기적으로 이승엽에게 홈런을 내준 이후로는 커리어가 쭉쭉 망해버렸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이시이 가즈히사와는 다른 사람임을 주의. 후루타는 이 사람까지 포함해서 두 명의 이시이가 있으면 우승할 수 있다고 별렀으나,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팀을 떠났다.

  • 돈트렐 윌리스: 이시이 히로토시야 성치않은 몸으로 스스로 망가졌다곤 하나, 돈트렐 윌리스는 이시이보다도 더 처참하게 망가졌다. 2005 시즌 22승 10패 ERA 2.63사이 영 상급 성적을 냈지만, 2006 시즌을 기점으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고 말았다. 고질적인 제구력 불안이 터져서 망가진 케이스.

  • 한신 타이거스: 지바 롯데 시절 2005년 일본 시리즈, 이승엽에게 3홈런을 얻어맞으며 33-4라는 굴욕을 당했다. 이승엽이 일본 통산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상대팀도 한신이고, 한일통산 400호 홈런도 한신이 허용했다.[16]

  • SBS Sports: 일본에서 뛰는 이승엽의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2006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 경기 중계권을 사들이면서 한국프로야구중계는 녹화방송 혹은 결방처리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 중계만 하게 된다. 중계 첫 해부터 이승엽의 맹활약으로 인해 인기나 시청률 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것에 고무된 SBS Sports 측은 이승엽의 재계약 소식이 들리자마자 재빨리 중계권 계약을 연장했다. 그러나, 이후 이승엽이 깊은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라인업에서 제외되다못해 심지어 아름다운 2군행 2군까지 내려가는 일이 생기자 비싼 돈을 들여서 중계권을 사들인 SBS Sports도 골치를 앓게 된다. 심지어 이승엽의 부진이 극에 달했던 2008~2009년에는 이승엽은 나오지도 않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를 중계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그 와중에도 한국프로야구 중계를 해주지 않자 이에 뿔난 한국프로야구 팬들은 가루가 되도록 SBS Sports를 깠고 KBO 또한 "한국프로야구 중계 이따위로 할 거면 중계권을 회수한다"라는 말들을 들었다.

  • 최준석: 2015년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이 유력했으나 이승엽의 이름값에 밀려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성적으로 보자면 최준석이 우세했기에 논란의 여지가 많다.

  • 타이론 우즈: 98시즌에 당시 기준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42홈런)하며 MVP를 딴 상태에서 이승엽의 인기(사실은 국뽕 기자들의 되도 않는 트집)에 밀려서 골글 수상에 실패했다. 이외에도 이승엽에 필적하는 기량을 과시했던 그를 견제하기 위한 우즈존의 피해를 엄청나게 받았다. 결국 한국 시절에는 광활한 잠실구장+우즈존 탓에 전반적으로 이승엽에 밀리는 기록을 찍었지만, 일본에 가서 잠실을 탈출해서 우즈존이 사라지고 한국시절보다도 장타력이 늘어나면서 이승엽을 이기게 된다.

[1] 힘 좋은 출루머신이라는 양준혁의 플레이스타일은 스타성에서 심각한 피해를 보기 쉽다. 비슷한 유형의 선수로는 조이 보토김태균이 있는데, 이들이 좋은 타자라는 건 누구나 동의하지만 실력을 스타성이 따라가지 못한다.[2] 93양준혁(212.0)>96양준혁(207.0)>02이승엽(198.5)>99이승엽(191.8)[3] 2003년 한정이면 비율로 이승엽보다 뛰어난 게 맞지만 현대 시절 전체로는 누적이든 비율이든 이승엽보다는 아래.[4] 오죽했으면 2003년, 이승엽과 라이벌 구도를 유지하며 대부분의 기록에서 무쌍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KBO 올스타전에 팬 투표로 못뽑혀 감독 추천 선수로 참가하는 굴욕을 겪었었다. 정작 이승엽도 팬 투표순위에선 양준혁에게 밀렸다. 다만 이 경우는 해태-LG팬들의 표가 양준혁에게 갔을 가능성이 높다.[5] 사실 지금의 심정수에 대한 평가도 현역 시절보다 오히려 은퇴 이후에 더 좋아졌다고 봐야 한다. 현역 시절에는 이승엽에 묻혔다가 오히려 은퇴하면서 당시의 기록들이 재발굴 되고 재평가 되었기 때문.[6] 오죽하면 은퇴 직전 도박 사건이 터졌을 때 심정수가 범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 해명기사를 제대로 쓰는 기자조차 없었다.[7] 사실 1, 2위 기록이 모두 이승엽의 03년도 56호, 99년도 54호라 개인으로 따지면 2위.[8] 03심정수 (OPS:1.197 WAR:10.19 wrc+:210.7), 03 이승엽 (OPS:1.127 WAR:8.39 wrc+:191.2), 02이승엽 (OPS:1.125 WAR:8.96 wrc+:198.5), 99이승엽 (OPS:1.190 WAR:8.91 wrc+:191.8)[9] 이종범은 선천적인 왼손잡이다. 알만한 야구팬들은 이종범이 당구를 칠때 보면 알 수 있다.[10] 포지션이 다르다고 해서 통산 성적으로 이대호를 구자욱보다 못한 선수라고 보는 이는 없지 않은가? 물론 구자욱은 젊으므로 누적 성적을 만들 수 있지만 이종범은 이미 은퇴했으니 선수 시절의 기록으로 평가해야 한다.[11] 홈런 맞은 게 딱히 굴욕이라고 하기도 힘든 게 이정민은 홈런을 맞을 당시 베테랑이기는커녕, 프로 2년차 대졸 신인에 불과한 25살 된 어린 선수였을 뿐이다. 거기다가 하필이면 이날 이정민은 프로 데뷔 첫 승을 거뒀었다. 때문에 첫 승이라는 소중한 기록은 묻혀버린 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축하 대신 이승엽의 들러리로 한동안 언론매체에 의해 격하당해야 했다는 점은 그야말로 비극이라 볼 수밖에.[12] 그리고 그 다음해 '불알타' 사건 때문에 역대급 임팩트로 그 이미지가 되어 너무 주목이 되어서 타자 김문호와의 관계만 한국 야구팬들에게 각인이 되는 바람에, 이승엽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이 없는 수준이 되었다. 사실 그 해 윤희상이 부상으로 1년간 선수 생활을 못 하게 된 건 불알타 사건이 아니라 그로부터 한달 뒤 송광민의 타구를 손에 맞아서 손뼈가 부러진 비극 때문이었는데, 야구팬들은 심지어 그 시즌 아웃을 불알타 사건 때문인 것으로 잘못 기억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불알타 사건은 검진 후 치명적 부상(전치 2주)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오히려 운동선수에게 손뼈가 부숴지는 부상이 실제 1년만 쉰게 다행일만큼, 잘못하면 선수생활을 접을만큼 훨씬 심각한 것임에도 윤희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건 큰 주목이 안 되고, 몇 년째 그 사건만 계속 주목 된다.[13] 포크볼을 던졌는데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14] 이승엽(동명이인) 문서에는 없지만, 국민타자 이승엽이 한창 맹활약했던 2000년 당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동작구 갑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동명이인 이승엽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상도동을 끼고 있는 이 선거구에서 이승엽 후보는 당시만 해도 상도동계의 좌장이던 한나라당 서청원 후보와 개표 내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단 146표(0.16%) 차로 낙선했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는 전설의 문세표가 있어서 이승엽 후보는 별 주목을 못 받았다.[15] 출처 : 위키백과 가와카미 겐신 항목[16] 게다가, 한신의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은 일본 야구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다만 400호는 도쿄돔에서 허용했고 허용투수는 완투패했다. 참고로 이승엽과 같은팀 선발투수는 전직 메이저리거인 우에하라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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