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야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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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발단
3. 전투의 흐름
3.1. 요도가와 제방의 전투
3.2. 나가시마, 에치젠 잇키 섬멸
3.3. 텐노지 전투, 제1차 키즈가와 해전
3.4. 키슈 정벌
3.5. 제2차 키즈가와 해전
3.6. 강화
4. 전투의 영향


1. 개요[편집]


石山合戦(いしやまかっせん, 이시야마 합전)

일본의 전국시대에서 겐키(元亀) 원년(1570년) 9월 12일부터 텐쇼 8년(1580년) 8월 2일[1]까지 벌어진 전투. 정토진종 혼간지 세력과 오다 노부나가 세력이 오늘날의 오사카시 츄오구 (셋츠노쿠니 이시야마)에서 맞붙었다. 잇코잇키 중 가장 규모가 컸었으며, 이 전투가 끝나면서 일본 각지의 잇코잇키는 그 수가 크게 줄어들다가 끝났다.

정토진종 혼간지 세력이 주축이었지만, 모든 정토진종의 파들이 혼간지를 지지하지는 않았고 혼간지 하에 놓인 곳이라도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노부나가 쪽에 붙은 곳도 있었다.


2. 발단[편집]


이 전투에서 혼간지 세력이 농성했던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는 본래 혼간지 8대 법주였던 렌뇨(蓮如)가 은거지로 삼은 장소로, 당시에는 오사카고보(大坂御坊)라고 불렀다.

본래 혼간지는 키나이 지방에서 교토의 야마시나(山科)을 중심으로 삼고 있었는데, 잇코잇키를 배경으로 삼아 계속 강성해지는 혼간지 세력을 두려워한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가 일련종(日蓮宗)의 신도들과 결탁하여 잇키를 일으켜 텐몬 원년(1532년) 8월에 야마시나혼간지를 불태워버린다. 이로 인해 혼간지 세력은 새로운 본거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그 당시 카가지역에서 혼간지의 세력이 강성했으나 신자들의 왕래가 불편하고 교토에서도 먼 곳인데다가, 일전의 다이쇼 잇키(大小一揆, 쿄로쿠의 착난)로 인해 혼간지 세력을 향한 불신감이 팽배했던 지역이었다.

이에 혼간지 10대 법주인 쇼뇨(証如)는 교토에서 가깝고 왕래도 편한 오사카고보(이시야마고보)를 새로운 본거지로 삼아 이시야마혼간지로 개칭했다. 교통의 요지였던 이시야마혼간지는 계속 발전해 나갔고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번 공격을 했지만 이시야마 지역은 제법 높은 산이 많아 방어에 유리했던데다가, 야마시나 사건을 기억한 혼간지 세력이 군비를 늘렸기에 공격은 전혀 소득이 없었다. 다른 다이묘들은 혼간지의 무력을 두려워하여 동맹을 맺기도 했고 11대 법주인 켄뇨(顕如)는 몬세키(門跡, 황족이나 귀족이 승적에 이름을 올려 주직을 얻는 것)를 받아 중앙권력과도 연결이 강해졌다.

이런 와중에 에이로쿠 11년(1568년)에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대하여 교토에 입성한다.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의 무력을 가지고 교토에 입성했기에 그가 차기 쇼군직을 물려받는 게 확실해졌고 키나이 지역은 거의 다 노부나가에게 넘어간다. 노부나가는 쇼군가의 명의로 각지에 사신을 보내 군자금을 납부할 것을 요구했고, 혼간지 쪽에도 교토고쇼의 복구라는 명목으로 5천관이 부과되었는데 켄뇨는 이를 상납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은 에이로쿠 12년(1569년)이 되자 노부나가와 요시아키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해 8월 노부나가는 미요시 정벌을 감행했고 당시 요시아키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었던 관백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는 켄뇨에게 미요시 세력을 지원할 것을 건의했다. 단, 이는 노부나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아니며, 요시아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로서 훗날 코노에 사키히사는 노부나가 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3. 전투의 흐름[편집]



3.1. 요도가와 제방의 전투[편집]


겐키 원년 9월 12일, 켄뇨는 혼간지 내에 '노부나가가 혼간지를 폐쇄하라고 했다'는 방문을 뿌리고 미요시 삼인중을 공격하기 위해 셋츠의 후쿠시마(福島)에 진을 친 노부나가의 군대를 공격했다. 혼간지 군은 그대로 이시야마를 나와 14일에는 요도가와제방(淀川堤)에서 오다군과 직접 맞붙었다. 이 전투는 오다측의 우세로 끝나고 혼간지 군은 농성 준비를 했다. 오다군은 이 때 시가의 진(志賀の陣)에서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히에이잔의 엔랴쿠지 세력(노부나가 포위)을 상대하고 있어 사면초가 상태였으므로 조정에 사자를 보내 혼간지 세력의 무기를 거두게 하는 칙서를 내리게 하고, 이시야마에 감시병을 붙여두는 정도의 활동만 하고 전투는 피했다. 따라서 혼간지측의 1차 거병은 1달도 안되어 사실상 종결되었다.

한편 나가시마(長島)[2]의 켄쇼지(願証寺)[3]에서는 잇코잇키가 일어나(나가시마 잇코잇키) 오와리국의 코키에(古木江)성을 지키고 있던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오키를 자해로 몰아넣는 등 대놓고 노부나가를 적대했다. 노부나가는 이에 분노하여 1571년(겐키 2년)에 나가시마 섬멸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많은 병사를 잃었다. 노부나가는 가신들에게 일향종 금지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다케다 신겐의 중재로 화의에 그치기도 했다. (이는 켄뇨의 아내와 신겐의 아내가 친자매사이였기 때문) 텐쇼 원년(1573년)에는 다시 나가시마를 공격하나 또 실패.

단, 노부나가와 혼간지 세력은 직접 병력을 내보내 싸우지만 않았다 뿐이지 정보전은 매우 치열하게 진행했다. 켄뇨는 늦어도 겐키 3년(1572년)말에는 신겐과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등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노부나가를 동서에서 포위할 포위망을 짰으며, 요시아키도 이 때를 노려 신겐에세 교토로 입성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노부나가 측도 우에스기 켄신에게 우호공작을 벌이고 조정외교를 펼쳤다. 말하자면 냉전의 시기였던 셈이다.


3.2. 나가시마, 에치젠 잇키 섬멸[편집]


텐쇼 원년 (1573년) 에 노부나가는 아자이와 아사쿠라 세력을 섬멸하고 에치젠 지역을 손에 넣었다. 이에 아사쿠라의 세력이었던 에치젠에는 전 아사쿠라 가신이었던 마에바 요시츠구(前波吉継, 1541 ~ 1574)를 슈고다이(守護代)로 임명해 통치를 맡겼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요시츠구가 슈고다이에 임명된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실명했으며, 다음해 1월에는 잇코잇키 세력과 연합한 코쿠닌 영주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리고 잇키에 끼여든 코쿠닌 중에서 오다쪽 인물들을 솎아내면서 잇코잇키가 에치젠 국을 장악하게 된다. (에치젠 잇코잇키) 이는 노부나가에게는 쓰라린 손실이었다.

이를 파악한 켄뇨는 처음에는 시치리 요시치카(七里頼周, 1517 ~ 1576)를 보내고 후에 시모츠마 라이쇼(下間頼照, 1516 ~ 1575)를 슈고다이로 임명한다. 이로 인해 노부나가와 혼간지 세력의 화의는 파기되고 텐쇼 2년(1574년) 4월에 혼간지 세력은 다시 거병한다.

혼간지 세력은 나가시마, 에치젠, 이시야마 3군데에서 노부나가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 입장이 달라 협력관계가 없는 게 약점이었는데, 노부나가는 이걸 이용해 각개격파 작전으로 나갔다. 같은 해 7월 노부나가는 대동원령을 내려 나가시마를 육상과 해상에서 양면으로 공격하여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이에 견디다 못한 나가시마의 혼간지 세력이 9월 29일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으나 노부나가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부 죽였다. 항복을 허가받지 못한 곳에서는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바람에 피해를 입자 철책으로 둘러싸고 불을 질러 죽였다.

텐쇼 3년(1575년)에는 혼간지와 결탁했던 미요시 야스나가를 항복시키고, 타케다 카츠요리를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배시킨 노부나가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준 후, 동원령을 내려 8월에는 에치젠으로 향했다. 이 때 에치젠의 상황은 막장이었는데, 혼간지에서 보낸 시모츠마가 중세를 거두어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급기야는 잇키 내에서 잇키가 벌어지는 사태까지 터졌다. 이를 이용한 오다군은 연전연승을 거두어 순식간에 에치젠을 평정하고 카가국 남부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노부나가는 9월에 기후로 돌아와 이시야마를 견제했다.

거점 3곳 중 2곳을 잃었고, 그 중 하나는 철저한 몰살을 당한 혼간지 세력은 켄뇨가 노부나가에게 조서와 맹세서를 보내 다시 화의를 맺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대응을 보고 용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내용으로 노부나가에게 유리했다. (당시 노부나가는 모리, 우에스기, 타케다에게 포위된 상태였으므로 화의는 나쁘지 않은 선택)

한편 츄고쿠에서는 모리가문은 자신의 휘하에 있다 오다로 편을 바꾼 빗츄(備中)[4]의 미무라(三村)씨를 빗츄병란으로 멸망시키는 등 동쪽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로 인해 육로로는 하리마(播磨)[5]까지 침공이 가능해졌고 해로 쪽으로는 세토내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혼간지 세력과 연대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3.3. 텐노지 전투, 제1차 키즈가와 해전[편집]


텐쇼 4년(1576년) 봄, 켄뇨는 모리 테루모토에게 보호를 받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만나 3번째로 거병을 했다. 노부나가는 4월 14일, 아케치 미츠히데 에게 명해 이시야마혼가지를 3방향에서 포위했다. 허나 포위되었어도 키즈(木津, 오늘날 오사카의 나니와 구)와 오간(楼岸, 오늘날 오사카시 츄오구)을 통해 해상에서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고, 오다측에서 키즈를 공격하자 역으로 1만 이상의 대군을 풀어 오다군을 격퇴하고 텐노지 요새까지 쳐들어왔다. (이 때 포위군의 대장인 한 나오마사가 전사했다) 위기를 느낀 미츠히데는 요새에 틀어박혀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이 소식을 듣고 노부나가는 즉시 병사를 모았으나, 워낙 갑작스럽게 실시한 징병이라 병사들의 집결이 늦었다. 기다리다 지친 노부나가는 일단 3천명만 동원해 요새를 포위하던 1만 5천명의 혼간지 군에게 싸움을 걸어 포위를 돌파하고 요새의 아케치 군과 합류하여 격퇴전에 나선다. 한창 농성전을 준비하던 혼간지군은 헛걸음 친 격이 되었고 즉시 후퇴한다. (텐노지 전투) 이후 노부나가는 포위군 대장으로 사쿠마 노부모리를 임명하고 이시야마혼간지를 완전히 포위했다.

경제적으로 봉쇄를 당한 혼간지 세력은 모리측에 구원을 요청했고, 모리 가문은 이에 응하여 무라카미 수군 등 자세력의 수군 700~800척(실제로는 600척 정도로 본다)를 동원하여 물자를 싣고 나타났다. 이에 노부나가 측은 구키수군 등 300척을 동원해 봉쇄를 감행했으나 숫자에서 앞섰던 모리측이 화공으로 배를 불태워서 대승리를 거둔다. (제1차 키즈가와 해전) 노부나가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삼면의 포위만 강화하고 병사를 철수시켰다.


3.4. 키슈 정벌[편집]


텐쇼 5년(1577년), 혼간지와 협력하던 키이(紀伊)의 사이가(雑賀)와 네고로지(根来寺)[6]가 오다군에 내응했다. 노부나가는 이를 받아들이고 준비를 끝마친 2월 13일 키슈 정벌에 나선다. 이는 주변의 황폐화를 우려한 사이가측에서 항복을 선언하고 노부나가가 이를 받아들여 곧 종결되었다.


3.5. 제2차 키즈가와 해전[편집]


앞전의 키즈가와 해전에서 패배한 후, 노부나가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명하여 대포를 장비한 배를 건조할 것을 명했다.[7] 한편으로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도 배를 건조할 것을 지시하였다. 구키 쪽의 선단은 오오미나토를 출발하여 오사카를 향해갔는데, 이를 감지한 사이가 측의 선단이 공격을 했으나 구키 쪽이 대포를 사용해 압도해버리고 7월 17일에는 사카이에 도착하여 항로를 봉쇄해버린다.

같은 해 11월 6일에는 모리 측에서 600척을 다시 끌고 키즈가와로 나왔다. 이 때 또 다시 화공을 시도했으나, 구키 요시타카는 상대편 다이묘가 탑승한 군함을 파악한 후, 그 배에 텟코센을 접근시켜 가까이 오면 일제 포격으로 침묵시키고 밀착했을 시 철갑에 부딪혀 배를 파괴하는 전법을 구사해 모리수군을 몰아냈다. (제2차 키즈가와 해전)


3.6. 강화[편집]


제2차 키즈가와 해전의 결과 제해권이 오다 세력의 손에 들어가 혼간지 세력은 더는 보급을 받을 방법이 없게 되었다. 텐쇼 7년(1579년) 10월에는 아리오카 성이 함락되고 미즈키 성의 정세가 상당히 악화되어 혼간지 세력은 강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조정에 타진하게 된다. 이런 행동을 기대하던 노부나가 측도 바로 조정에 사자를 파견하여 강화를 맺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윤3월 7일에 노부나가와 혼간지 측이 강화에 이르게 되어 근 10년간의 이시야마 전투는 드디어 종결된다.

이후 이시야마 성은 노부나가에게 넘어갔으니 실화(신장공기에는 햇불의 불똥이 튄 것이 원인으로 기록)로 인해 완전히 다 타버렸다. 이 때문에 켄뇨는 일부러 불을 놓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으나, 1년간의 조사 결과 혐의없음이 입증되어 의심을 벗을 수 있었다.


4. 전투의 영향[편집]


켄뇨가 이시야마에서 물러난 후 강경파였던 쿄뇨가 이시야마를 점거했기 때문에 혼간지는 켄뇨와 쿄뇨의 2파로 분열되었고 켄뇨는 강화조약을 위반했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쿄뇨가 이시야마에서 철퇴하는 것으로 내분은 일단락되고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자 조정의 개입으로 켄뇨와 쿄뇨는 화해를 했으나 켄뇨는 쿄뇨를 폐적하고 온건파인 3남 쥰뇨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허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쿄뇨에게 다시 혼간지가 돌아가나, 이들의 어머니였던 뇨슌니(如春, 1544 ~ 1598)가 켄뇨의 유지를 히데요시 측에 전하여 쥰뇨가 다시 법주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쿄뇨는 오사카의 오오타니혼간지(大谷本願寺)를 근거지로 삼고 계속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게이쵸 7년(1602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토지 기부를 받아 교토의 시치죠카라스마루에 히가시혼간지를 세우니, 혼간지는 동서로 쪼개졌다.

한편 전국 각지의 진종 사원에 남은 기록을 보면 자랑스러운 무용담, 충절담은 기록에 남아있어도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죄의식과 반성은 전혀 없어 혼간지 신도들의 '정의의 싸움이었다'는 의식이 반영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 양력으로 환산하면 1570년 10월 11일~1580년 9월 10일[2] 현재의 일본 구와나시[3] 일본 구와나시에 있는 정토종 절[4] 현재의 오카야마현 서부[5] 현재의 효고현 남서부[6] 일본 간사이 지방 와카야마현 이와데시에 있는 진언종 총본산[7] 이것이 바로 텟코센이란 배인데, 기존의 안택선을 더 크게 만든 뒤에 투포환과 불화살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상부 구조물 겉에 3밀리의 철판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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