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와라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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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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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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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장
이시와라 간지
石原莞爾 | Ishiwara Kanj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nji_Ishiwara2.jpg

출생
1889년 1월 18일
일본 제국 야마가타현 니시타가와군 쓰루오카시
사망
1949년 8월 15일 (60세)
일본국 도쿄도
복무
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09년 ~ 1941년
최종 계급
중장
주요 참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제대 이후
리츠메이칸대학 교수 (1941년 ~ 1942년)
1. 개요
2. 생애
3. 세계최종전쟁론
4. 만주국과 육군의 총아, 그리고 몰락
5. 세계최종전쟁론이란?
6. 군 예편 이후의 삶
7. 평가
8. 미디어
9. 참고항목



1. 개요[편집]


이시와라 간지일본 제국육군 군인이자 동시에 독특하게도 사상가이다. 그는 만주파의 수반이었으며, "쇼와유신론"을 주장하여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과 함께 황도파 청년장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자신은 2.26 사건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 황도파의 정치 생명을 끝장냈다. 그 뒤로는 통제파의 영수인 도조 히데키와 사사건건 대립하다 도조 히데키에게 숙청당했다. 그래서인지 천황 히로히토는 이 사람을 두고 "잘 모를 인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을 요약하면, '동양과 서양의 대표 국가가 준결승을 치르면 결승전(세계 최종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을 맹주로 하는 아시아연합국가가 그 최종 전쟁에서 이기면 현인신(現人神) 천황을 중심으로 평화롭고 과학기술이 발전한 지상낙원이 올 것이다. 그러니 일본은 국력을 길러야 한다.' 정도가 된다.

이렇게만 본다면 그저 중2병 몽상가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서양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은 아시아 각국을 친구로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만주국은 일본인들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오족협화'의 왕도정치가 구현되어야 하며, 또한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처음에는 만주 점령을 의도했지만, 이후 만주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기에 관동군을 이용하려고 하였다.[1]

보면 이런 이상주의자적 면모에다가, 자신이 주장하는 영구적 세계평화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후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하는 등 여러모로(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4차원 사상가였다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대동아공영권과 함께, 당대 일본아시아주의가 도달한 또다른 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이름이 '이시하라(いしはら) 간지'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시와라(いしわら)가 맞는다. 현대 가나 표기법으로 바뀌기 전 어말과 어중에 오는 は(하)행은 わ(와)행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2. 생애[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nji001.jpg
어린 이시와라 간지

야마가타현 니시타가와군 츠루오카정[2]의 하급무사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 도호쿠 지역은 당시 일본에서도 아직 발전이 안 된 가난한 지역으로 옛날에는 머리도 좋고 성적이 우수하지만 집안이 가난한 인재는 학비가 면제되고 국가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군사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02년, 센다이 육군중앙지방유년학교에 입학, 1905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입학,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1기로 진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0년 4월부터 1912년까지 조선군(조선주둔 일본군)에서 2년간 군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때 1911년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을 이끌고 가까운 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며 중국의 앞날을 축복하는 등 중화민국에 대해 상당히 큰 기대를 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쑨원위안스카이의 타협이 이루어져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에 오르더니 졸지에 중화제국이 탄생하는가 하면,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중국이 군벌 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되자 중국인들의 정치적 능력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이후 육군의 엘리트들이 그러듯이 1915년에 당시 일본 육군 장교의 최고 엘리트 코스인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기간 동안 일필휘지로 군사적인 각종 건의를 하였고[3] 최종적으로 차석으로 졸업했다. 차석으로 졸업한 이유가 재미있다. 수석 졸업자는 천황과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시와라가 평소 거침없는 발언을 하는 탓에 사고를 칠까 두려워 일부러 차석을 주었다고 한다.

이 거침없는 발언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 생활 때에도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나니와부시(浪花節)[4] 연기자인 도츄켄 구모에몬(桃中軒雲右衛門)이 조선 각지에서 공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시와라 간지의 부대에도 방문하게 되자, 연대장이 기차역으로 구모에몬을 마중 나가라고 명했다. 그러자 이시와라는 "구모에몬은 그쪽(나니와부시) 계열에선 최고의 인물인데, 일개 소위인 제가 가기엔 예법상 실례일 것 같습니다. 연대장님이 직접 마중을 나가심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반론했다. 그러자 연대장은 의외로 순순히 이를 수락했다고.

또한 육군대학 시절 '기관총의 효과적인 운용 요령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출하자 "기관총을 항공기에 장비시켜 술주정꾼이 걸으면서 소변을 보듯 전방위 화망을 형성해 적 행군 종대에 퍼붓는다."라는 대답을 구술했다는 야사도 있다.

육군대학 졸업 후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들에게 제공된 국비장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했다. 당시 유럽에서 퍼져있던 황인종 멸시 사상[5]을 접하고,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래서 파티 등에 참석할 때는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포크와 나이프를 안 쓰고 직접 지참한 젓가락을 꺼내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화론의 반발로 일본과 중국이 힘을 합쳐 서양 열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학을 가기 직전인 1920년일련종 계열의 신흥종교인 국주회(国柱会)[6]의 열렬한 신도가 된다.[7] 이 국주회의 교리가 <세계최종전론>의 모티브가 된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1923년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은 니치렌 대사가 설법한 세상이 종말로 치달리는 변환기에 들어선 증거라고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베르사유 조약 조인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겪은 직후, 일본 군부는 앞으로 전쟁이 물량전·소모전·보급전·과학전이란 교훈을 깨달았다. 다만 그렇게 가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논리적 결과가 나와서 그 반동으로 정신력 제일주의로 후퇴해버린 것이다.[8] 그래서 황도파 파벌은 일본이 장기전을 하면 러시아처럼 왕정이 망할 것이라며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린 전면전은 안 될 거야 그러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이길 수 있게 알아서 기자.'는 결론을 내렸다.[9] 그러나 간지가 속한 통제파는 "우리도 경제 발전으로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 다만 자유방임 경제 말고 계획 경제 통제로."라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통제파 장교들인 간지나 나가타 데츠잔, 스즈키 데이치나 이케다 스미히사는 "빨갱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2.26 사건 당시에는 궐기군에 의해 살해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나 실제로 습격을 받지는 않았다. 이시와라는 2.26 사건에 대한 토벌명령 하달을 강력하게 상주하였고, 쇼와 덴노는 훗날 이에 대해 "이시와라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르겠다. 만주사변의 장본인이긴 하지만 이때의 태도는 정당했다."라고 회고했다.

사실 통제파라곤 해도, 정작 '자원 부족의 국가 일본'란 본질적인 문제에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주를 차지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공업화를 추진해서 궁핍한 나라 일본을 풍부한 나라로 바꾸려는 급진파가 이시와라 간지였다. 그의 사상은 통제파의 주장과 엇물리는 점이 있지만, 본인의 인맥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았다.


3. 세계최종전쟁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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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본부 작전과장 시절(1935년)

1928년 1월. 육군 내부 공부 모임인 목요회에서 이시와라 간지는 〈우리의 국방방침〉이란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최종전쟁론(1940)이라는 소책자를 집필하였다. 세계최종전쟁론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 이시와라는 군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양상을 예측했는데, 국가의 총력을 기울이는 형태가 되리라 하였다. 후반부는 내용이 몹시 짧아서 사실 분량적으로는 전반부와 대등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시와라의 종교적 믿음을 후반부에 집중하여 서술하였다.

이시와라 간지는 후반부에서 말법시대가 오는 시점을 계산하려고 석가모니의 열반 연도에서 더하기 빼기 계산을 한다. 그런데 이시와라는 이 중요하기 그지없는 후반부의 숫자 계산에서 일절 연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명을 매우 두리뭉실하게 한다. 세계최종전쟁론을 다 읽어보아도 정확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소리인지 알기 어렵다.

이시와라는 어떤 불교학자의 주장을 따랐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본인이 저서를 집필할 무렵을 불멸 후 243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시와라가 생각한 석가모니의 입멸 연도는 기원전 490년쯤이 된다. 이시와라가 따른 이론에서는 불멸 후 2500년 뒤에 말법시대가 온다 하므로, 대략 2010년 무렵에 말법시대가 된다. 집필 시점에서는 70년 뒤인데, 전반부에서 자기가 군사적으로 50년쯤 뒤에 큰 변동이 온다고 예측한 바와 별로 차이가 안 난다고 물타기하여 20년을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말법시대는 1990년쯤이 된다.

이시와라의 종교적 계산에는 일련종 계열 종교인 국주회(國柱會)의 영향이 있었다. 이시와라는 국주회를 설립한 다나카 지카쿠(田中智學 1861-1939)라는 종교인의 주장을 믿었다. 다나카는 1904년 출판한 '묘종식목강의록'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본화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는 현명한 왕과 본화를 믿지 않으려는 많은 어리석은 왕들의 다툼이 될 때에는, 여기서 세계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중략)

…비로소 전 세계 국가들이 참회하고 깨달아, 본화의 큰 위신력을 두려워해서, 세 가지 큰 비법의 큰 진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세계 각국의 왕과 신하 모두가 이 법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지카쿠는 1918년에 한 강의에서 "지금으로부터 48년 후(1966), 일천사해개귀묘법(一天四海皆歸妙法)이 일어난다."라고 주장했다. 간지는 세계최종전쟁론에서 지카쿠의 주장을 신뢰하여 인용하였다. '일천사해개귀묘법'이란 천하가 법화경(여기서는 니치렌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저 텍스트는 이시와라 버전으로 번역되어, '세계최종전론(1940)'에 다음과 같이 변해버렸다.

니치렌 성인은 장래에 대한 거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 그것이 어떤 것이냐면,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에 일찍이 없던 큰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때 혼게조교가 다시 세상에 오셔서, 본문의 계단을 일본국에 세우고, 거기서 일본의 국체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통일을 실현할 것이다. 그렇게 예언하시고 돌아간 것이다.


이시와라가 매우 두루뭉술하게 설명하였고, 앞에서 한 소리와 뒤에서 한 소리가 충돌하기도 하지만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1966년쯤 천하(동양?)가 다나카 지카쿠의 주장대로 니치렌의 가르침에 귀의한다.
  • 1970년쯤 내(이시와라) 주장대로 총력전 형태로 세계최종전쟁이 일어나 동서양이 대결하며 단기간에 끝난다.
  • 법화경의 예언대로 1990년쯤 세계가 단일국가로 통일된다.

목요회에서 이시와라 간지가 강연할 당시 동석하여 이 주장을 듣던 통제파 장교인 나가타 테츠잔[10]은 '왜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하나', '중국 진출 같은 위험한 짓을 무릅쓰면서까지 대일본제국강대국이 되어야 하는가'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했다.

이시와라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수행력 따윈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일어날 것이고, 일본은 거기에 이겨야 한다'고 경전에 적힌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천사해개귀묘법을 위해, 만보산 사건, 나카무라 사건봉천군벌과 일본과의 국지적 충돌 때마다 암약하면서 만주 침탈의 기회를 노렸고 1931년 9월 18일,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 혼조 시게루를 부추겨 급기야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시와라는 일본이 이 최종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대국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이 풍부한 만주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천에 옮겼다. 결국 중앙정부의 맛간 대응과 관동군의 폭주가 더불어 만주는 일본제국의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4. 만주국과 육군의 총아, 그리고 몰락[편집]


1940년에 간지가 쓰던 자전적 에세이 '전쟁사대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쇼와 2년 늦가을, 이세 신궁에 참배했을 때, 국위가 서방에 찬연하게 빛나는 영위를 받고서 돌아왔다.


1943년 이시와라는 자신을 찾아온 이지치 노리히코란 청년이 그 '영위'가 대체 뭐냐고 묻자 답해주었다.

"눈앞에 지구의 모습이 드러났으며, 금색의 빛이 일본에서 만주를 향하여 비추었다."


그렇다. 그는 세계 최종 전쟁을 위해 만주를 침공하란 계시를 받은 것이다.

오족협화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만주의 땅과 공업 시설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인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아시아 여러 민족이 협력해서 세계최종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시와라는 세계최종전쟁에 필요한 물자 생산 기지, 만주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초고속 경제발전을 하고 있던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따와 '제1차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11] 그러나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부실한 게 많았다. 1941년 결과를 보면 실제로는 전체 목표의 반 이하의 성과를 거둔 것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대공황 시기의 미국과 비교해서 1966년쯤 되면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관동군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만주국에 큰 영향을 발휘하던 협화회를 대신하여 철권통치를 하자 이시와라 간지의 이상은 박살나고 말았다. 그리고 도조 히데키와의 투쟁에서 패하여 본토로 쫓겨나고 만다. 이후 국민정부가 중국을 통일한 주권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참모본부에서 대표적인 중국과의 친선을 주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1936년, 해군대신 나가노 오사미 등이 장제스를 반성시키기 위해 하이난 섬을 침공할 것을 주장하자 육군은 중국과의 어떠한 전쟁도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번 닥칠 뻔한 중국과의 전쟁위기를 해소했으며 1936년 무토 아키라 대좌 등이 수동사변을 일으켜 내몽골을 침략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무토 아키라에게 "각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배웠을 뿐입니다."라고 조롱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에, 이시와라는 참모본부의 작전부장의 요직에 있었다. 그는 "동원할 수 있는 병력으로는 중국과의 전면전이 불가능하다. 현황에서는 전쟁확대의 위험이 크고 그 결과 밑없는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며 중일전쟁을 반대했다. 육군참모총장 타다 하야오 등도 동조하여 참모본부는 확전을 주장하는 육군성과 대립했으나, 내각과 해군성, 외무성까지도 전쟁 코인에 미쳐서 대중 확전을 지지했기 때문에 성과는 없었다. 물론 이시와라의 대중확전 반대도 이시와라가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라는 낙관적인 이유는 저어얼대 아니고 이시와라의 전략에서 주적은 어디까지나 소련이고 만주사변에서부터 모든 것이 소련의 적화 위협에 맞서 일본의 국력을 키워 궁극적으로 영미와 대결할 실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며 중국은 그 과정에서 협력대상인데 오히려 주적을 팽개치고 협력대상과 전쟁하는 것은 자살행위로 봤기 때문이라는 딴에는 현실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나파견군과 관동군의 폭주로 겨우 소강상태에 빠졌던 전국이 확대되고 장제스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군을 대대적으로 북상시키기 시작하자 이시와라도 루거우차오 사건이 장제스와 스탈린이 합동으로 일본을 공격하려는 반일 음모라는 무토 아키라의 주장에 경도되어 일시적인 확전을 지지하였고 대중 병력 증파를 승인하였다. 허나 소련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확실해지면서 더 이상의 확전에 격렬히 반대하였고 제2차 상하이 사변 중 발생한 우쑹 전투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마쓰이 이와네 장군이 타이완에서 1개 연대를, 본토에서 3개 사단과 1개 포병연대를 차출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9월 28일 작전부장에서 짤려서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쫓겨나게 된다. 여기서 또 반전이 있는데, 후일 2차 고노에 내각이 출범하여 1940년 장제스와 협상을 시도하자 여기에 대해서 장제스와는 이미 협상할 가치가 없다고 이번에는 대중 화평에 대해서 반대했었다.


5. 세계최종전쟁론이란?[편집]



그럼 과연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까지 대비해야 하는 '세계최종전'은 무엇일까.

이시와라가 상상한 세계최종전쟁은[12] 총력전이며, 단기전이다. 그는 병기의 발달로 전쟁기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보았다. 국지전이나 전초전은 여럿 있겠지만 전면전은 단기간에 끝난다고 주장했다.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에 진학한 엘리트 군인 출신인 이시와라 간지는 세계 전쟁사를 연구하고 분석해서, 전쟁의 양상을 지구전(소모전)과 단기 결전이 반복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현재 상태(제2차 대전)은 소모전이지만, 멀지 않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단기 최종전이 발생하리라 예견했다.

러일전쟁에서는 기껏해야 기관총대포 정도였지만, 1차대전이 되자 항공기, 독가스, 잠수함, 전차가 등장했다. 무기의 파괴력은 나날이 진화해 언젠가는 대도시나 나라 자체도 한방에 부숴버릴 결전 병기가 등장할 것이라 주장했다. 당연히 '결전 병기'는 산업력과 과학력이 우월한 국가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부유한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시와라가 육군 중장, 교토 제16사단장으로 재직할 1940년 4월 29일 당시 〈세계최종전론〉이란 강연을 하고 강연 내용을 출판했다. 그는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로 독일의 과학력을 언급했다.

연합군 측은, 몇 년 전 독일이 라인 진주를 결행했을 때 프랑스가 베르사유 조약을 근거로 독일에 대해 일격을 가하자고 주장했으나 영국이 이에 반대했고, 그 후에도 작전 계획에 있어 시시때때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프랑스의 전의는 제1차 유럽대전만 못했고, 마지노 선 연장도 계획에 머물렀을 뿐 거의 구축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제6절 제2차 유럽대전 31쪽.

그리고 이시와라 간지는 저서인 세계최종전쟁론에서 상기한 문장을 근거로 물질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거국일치를 이루는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수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화학 공업의 발달로 합성 석유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 덕에 독일은 다시 세계 전쟁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라 주장하며, 앞으로 30년 후 다가올 세계최종전쟁을 대비해서 일본도 첨단 과학 무기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래식 항공기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자유롭게 성층권에서도 행동할 수 있는 근사한 항공기[13]

를 빨리 만들어 내야 합니다. 또한 단숨에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결전 병기가 나와야 합니다…

(중략)

…파괴도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최후의 대결승전에서 세계의 인구는 절반이 될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세계는 하나가 됩니다…그런 놀라운 과학의 시대에는 물이나 공기 같은 단순하고 무진장한 원료온갖 물자가 다 생산될 수 있게 되므로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놀랄만한 산업혁명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척척 만들어 내게 됩니다.

결국 이시와라 간지는 군대에서 잘리고 만다.

단, 퇴역 당한 것은 비단 사상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시와라 간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관동군을 주축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만주를 충분히 공업화한 다음에 중국 침략을 수행해야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사와라 간지는 이에 반대하다가 육군성 대신이던 도조 히데키의 미움을 사서 퇴역당하게 된 것이다. 다분히 사적인 감정이 개입된 이런 인사조치에 육군대학교동기였던 당시 육군성 차관 아나미 고레치카 중장이 항의하다가 도조한테 학을 떼고 차관직을 그만두게 된다.


6. 군 예편 이후의 삶[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nji_Ishiwara.jpg
1945년의 이시와라 간지

그러나 제2차 만주국 5개년 계획은 없었다.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사와라 간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반세기나 일찍 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사와라가 예상했던 단숨에 대도시나 나라 자체도 한 방에 부숴버릴 결전병기그당시 산업력과 과학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개발해서 일본에 사용했다. 결국 일본은 패망했고, 만주국은 멸망했다.

퇴역 후 이시와라는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2년간 군사학을 가르쳤지만 그를 위험분자라고 판단한 도조의 명을 받은 육군 헌병대특별고등경찰이 그를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하여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과달카날 전투 직전, 당시 해군 대좌였던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리츠메이칸 대학에 있던 이시와라 간지를 방문해 지구전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전쟁의 승부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일본군의 작전은 이미 공격중단점을 넘어버렸다. 전투력은 원칙적으로 근거지부터 전장까지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하므로 지구전을 수행하려면 시작부터 반드시 공격중단점을 확정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지나(중국)사변부터 이번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도조가 일으킨 이 전쟁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전쟁이다. 도대체 실패할 것이 뻔한 전장에 부대를 파견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해군에 건의했다.

현대전은 제공권이 없으면 재해권을 장악할 수 없다. 지금 제공권이 이미 상대방에게 넘어간 상황이므로 아군은 즉시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해야 하며 육군도 즉각 솔로몬 군도와 비스마르크 제도 및 뉴기니를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아군이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버마의 국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중부에서는 필리핀을 포기하고 싱가포르와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하는 자원지대를 견고히 유지하며, 또한 본토 주위의 사이판 섬, 티니안 섬과 괌 섬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것도 일시적인 대책으로 전쟁의 최종적인 패배를 막을 수 없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14]

그의 저술인 세계최종전쟁론은 한국에서는 2015년 9월 길찾기에서 출간되었는데 부제인 '만주국을 세운 이시와라 간지의 망상이론'에서 보다시피 그의 '망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기 위해 번역 후 출간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책이다.

뜬금없지만 이시와라가 예언한 세계최종전쟁이 일어난다던 60년대에 실제로 날뛰던 무뢰배 무리들이 있었는데, 바로 극좌파인 적군파다. 게다가 이놈들은 대전략 수립 부문에서 이시와라 책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뭔가 위험한 사상을 가진 군인은 잘리게 되어 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하던 간지가 잘리고 만 것은 당연한 결과인 셈. 하지만 이시와라의 경우는 자른 놈들이 더 위험한 놈들이었다는 게 재미있는 부분.

도조 히데키에게 반대하고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정작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상 도쿄 전범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기는 커녕[15], 증인으로 출석하여 도조에게 불리한 증언을 잔뜩 하고 패망으로부터 정확히 4년 뒤인 1949년 8월 15일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일련종의 매장시설에 묻혔다.

다만 종전 이후에는 그의 〈세계최종전쟁론〉이 의미를 많이 잃었기에,[16] 주장이 수정되었는데 어찌보자면 이 최후의 수정이야말로 그의 사상이 (긍정적 의미로) 완성된 도달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17]

일본은 헌법 제9조를 중시하며 몸에 무기로 불릴만한 조그마한 쇳조각 하나 지니지 말고 양대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분쟁을 방지하여 최종전쟁이 일어나는 일 없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들은 중국을 지배하게 되는 세력이 국민당이나 공산당 중 누가 되더라도 항상 중국과 협력하여 동아시아적 지도 원리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작지만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조는 사상은 커녕 생각 자체가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대립은 성립하지도 않았다.

세계최종전쟁론 159페이지, 이시와라 간지.

또한 전범재판 당시 증인으로 증언하기에 앞서, 중국 충칭 통신특파원으로 현지에 도착한 기자로부터 취재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기자가 "만주국의 운영은 만주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통제한 괴뢰정권 아닙니까?" 라고 묻자, 괴로운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마음에 그리던 이상향으로 만들기 위해 착수했던 만주국 건국이 나와 같은 이상향에 대한 뜻을 품지 않은 다른 일본인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짓밟혔다. 그 때문에 내가 만주에 살던 중국인들에게 했던 약속을 배신하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연히 전쟁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독립에 협력해주었던 중국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우리와 함께 만주국을 이상향으로 만드려 노력했던 이들에 대해서 중국 정부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다음은 일본의 국회의원인 타케다 쿠니타로의 증언이다.

이시와라 장군은 일본이 과거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사과하면서, 군대를 갖지 않기로 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국가들이 신뢰할 수 있는 평화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에 대한 어느 정도의 회피 의도는 있을 수 있고, 여전히 망상형 이상주의자적 면모가 남아있지만,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인정했다는 면에서는 다른 가해자들보다 횔씬 나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로 반성의 기색을 보였는데, 1937년에 자신이 총리 입각을 방해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찾아가서 사과하기도 했다.[18]


7. 평가[편집]


이렇게 보면 터무니 없는 몽상을 전개하다가 조기에 퇴장해버린 군국주의자 쯤으로 여겨지고 그게 사실이긴 하다. 그럼에도 이시와라 간지가 전쟁 전후의 일본에 남긴 족적은 적지 않다.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다가 잘렸다는 사실 때문에 전후에 좀 나은 인물로 평가된 점이 있기도 했고, 그가 주창한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종 전쟁'이라는 개념은 전후 일본인들의 전쟁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시와라는 일본군의 여러 인물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전략적 사고란 것이 있었으며 자신의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상을 전개했다. 다른 일본 군인들의 저술이랍시고 있는 것들은 자기 변명조의 회고록이나 사실관계 서술에 머무는 증언록 등일 뿐, 나름의 자기 논리에 따라 주장을 세운 저술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 이시와라 자신도 "당신과 도조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 아니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소박하나마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도조 히데키는 그냥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일 뿐이므로 대립이라고 할 것도 없다." 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혼조 시게루도 이시와라 간지의 구상을 보고 자넨 천재야라고 칭찬하였다. 육사 출신 전략의 천재답게 그가 저술한 세계최종전쟁론에서 만주의 상황과 '동북의 장쉐량이 베이징에 박혀있어 관동군을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는 공산군과 내전으로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등 주변의 정세에 전략적 예측도 제법 훌륭했다. 그리고 만주를 노리는 지정학적인 요소와 자원이 필요한 경우도 다 예측할 줄 알았다.

물론 그런 이시와라가 품은 사상이라고 해봐야 절대 좋게 봐줄 수 없는 것들이긴 했지만, 요점은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그가 훗날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묘사하여 유명해진 아돌프 아이히만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한 독자적인 신념에 기반하여 행동한 이상주의자형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이시와라를 현실을 잘못 읽었을 뿐, 동아시아 통합의 이상에는 진심이었던 사람, 일본 군부의 이단아이자 한 가닥 양심 쯤으로 여기는 동정적 시각이 적지 않은데, 한국에서도 20세기까지는 그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또는 적어도 친숙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민단 결성에 참여하고 이후 단장까지 역임하면서 한일 교류에 기여했던 조영주는 그 이전까지는 이시와라가 주도했던 동아연맹협회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적극적으로 협회 활동을 했었다. 역시 이시와라가 주도한 만주 산업개발 5개년계획이 한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모델이 되었던 것 또한 잘 알려진 이야기.

그러나 이 사람은 모략과 월권, 항명 행위로 군 내부의 조직윤리를 무너뜨리고, 군 내의 하극상과 모험주의에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일본군의 악습을 스스로 실천한 인물이다. 거기다 패전 이후에도 만주사변이 자위적 조치였다는 견해를 바꾸지 않으면서 단지 그릇된 결과에 대해서만 사과를 표하는 위선적 태도를 보인다. 이시와라 간지를 신념을 가진 이상주의자로만 보는 시각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8. 미디어[편집]


야스히코 요시카즈무지갯빛 트로츠키에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오족협화 운운하던 만주국이 일본인들의 땅도둑질 장소가 되었다고 개탄하고 지금 소련과 붙으면 중화기가 형편없는 일본군은 전멸당할 것이라고 비웃는 등 다른 일본군들보다야 조금 깨어 있는 인물로 나오지만 잘 쳐봐야 무력한 몽상가다. 만주국에 트로츠키를 불러들여 소련을 치겠다는 커다란 몽상에 빠져 음모를 꾸미나 결국 부하이던 츠지 마사노부의 폭주 때문에 음모가 어그러지자 찌질거리는 모습으로 실제 인물이 잘 반영되었다는 평이다.

카와구치 카이지의 만화 지팡구에선 난데없이 빼어난 현자 기믹으로 등장하였다. 도조 히데키와 대립했단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이시와라의 미래 예측이 비록 신흥종교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나 일본의 평균 시대상을 앞서갔다는 면도 있고 해서. 이시와라의 문제는 초강대국과 산업세계의 대두를 예견한 것 자체가 아니라, 일본이 바로 그러한 초강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타국에 대한 침략과 점령을 필수로 여긴 그 사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을 시작으로 일제가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자 수뇌부가 미쳤다고 판단하고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휘하 "적은 경성에 있다!"를 외치면서 관동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오족협화는 커녕 조선인을 노예로만 여기는 부하들에게 실망하여 거병명분을 만들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선 총독 암살을 위한 정보를 넘겨준다. 그리고 일본의 내란이 끊이지 않자 일본 자체가 실패했다고 여기며 조선을 후원하는 선택을 하게 되고, 내란이 종결되자 군을 떠나 만주국의 민정부장을 거쳐 관동군의 도쿄 입성 후로는 육군대신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회귀자인 김구가 보기에도 시대를 앞서간 발상을 하는 자라 자신과 같이 미래에서 온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할 정도. 덕분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이 소설의 인기 캐릭터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미화된거냐면 그렇지만도 않은게, 작중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미친놈이라 평한다. 심지어 임명한 노부히토 천황마저. 노부히토가 그를 임명한 것은 홍사익을 비롯한 재일의 집권에 의해 생기는 불만을 다른 곳에 돌리고 혹시 모를 군부의 폭주를 감시하려는 의도라 한다. 간지 본인도 자신만 감시해도 군부 폭주의 절반은 막을 수 있을거라고 인정할 정도. 또한 범아론을 주장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멋대로 군대를 움직여 만주사변을 일으킨 자가 할 소리는 아니라며 뻔뻔함에 기막혀하는 장면도 종종 나온다.

갬블링 1945에서는 일본 육군의 사조직 일원중에 하나로 나오는데, 이들의 정보를 알고 있던 안경남은 범아론을 주장하는 그가 가장 미친자라며 제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경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9. 참고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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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상층부에서는 '관동군은 만주 독립에 관여하지 말 것'이라는 지시를 보냈지만, 이시와라는 '관동군 내에서 뜻 있는 이들은 일본군 국적을 버리더라도 만주 독립에 매진할 것'이라는 패기 넘치는 결의로 무시해버렸다.[2] 현 츠루오카시[3] 당시 육군대학교는 매주 군사 레포트 제출을 요구하였는데 이시와라는 레포트 제출 기한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앉은 자리에서 레포트를 줄줄이 써서 낸 다음에 제출했는데 그 내용이 언제나 훌륭했다고 한다.[4] 로쿄쿠(浪曲)라고도 한다. 한국의 판소리와 형식이 약간 비슷한 1인 창극이다.[5] 그 뿌리는 몽골의 유럽 침략부터 시작된 아시아인들이 불행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미신과 황인종을 미개인으로 깔보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도 유대인을 황인종 취급을 했다.[6] 특히 천황을 높이 떠받드는 종파였다. 쉽게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종말의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종교에서는 그 메시아역은 부처이자 현인신 천황. 대표적 슬로건이 팔굉일우(八紘一宇). 유명한 신자로는 미야자와 겐지가 있다.[7] 일련종 계열은 한국에서는 창가학회가 유명하지만, 국주회는 전전에는 창가학회보다 주류였던 종파로, 창가학회와는 다른 성향의 종교다.[8] 일본이 서구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식 물량전을 감당할 만큼 경제발전을 할 시간에 그들이 지금 수준에서 정체하지는 않을 테니까.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도 중국에서 국지적으로는 물량전을 해봤지만 이걸 전구단위로 확장하면 답이 없다는 결론을 진즉에 냈고, 이후 군축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조직을 유지하려다 보니 사람으로 그것도 현역을 완편하지 않는 부대가 늘면서 기계화와 화력강화는 물건너가게 된다. 그 상태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은 어떻게 감당했지만 기어코 할힌골 전투까지 갔고, 소련군 무서운 줄은 알아도 미군 무서운 줄은 모르고 북방이 막혔으니 대신 남방으로 틀었다가...[9] 다만, 그렇다고 군인이 대놓고 '우린 영미 못 이김'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병교전에는 "언제라도 공격, 공격", "기습을 하면", "정신력 제일"이면 이긴다고 써놓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약소국을 상대할 때 내지는 제한전 시의 기준이고, 강대국과는 아예 전쟁을 하면 안 된다암묵적 불문율을 전제했다. 그러나 2.26 사건으로 황도파는 나가리되었고 이 교리의 내막을 모르는 통제파가 강대국 대상으로도 무조건 돌격을 해 버린 끝에..[10] 그나마 일본군 중에 판단력은 정상적인 인물이었다[11] 계획안 자체는 당시 만주국 산업부 차관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입안하였다.[12] 아이러니 하게도 이 세계최종전쟁론은 훗날 적군파에게 영향을 준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13] 항공기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미사일을 통해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14] 육군은 도조를 '도조 상등병'이라고 조롱한 이시와라의 의견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으며, 해군은 만약에 육군이 다른 경우가 없으면 소련과 전쟁할 궁리를 할 것을 두려워 하였고 그리했다가 육군이 군사예산을 독점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15] 참고로 같은 시기 만주군 참모로서 만주사변에 관여했고 나름대로 친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싱가폴에서 체포되어 이후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만일 이시와라가 저런 짓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이타가키와 같이 사형당했을 지도 모를 일.[16] 스스로가 예언한 1966년보다 25년이나 빨리 미국과 전쟁이 났다.[17] 뒤의 발언들은 〈세계최종전쟁론〉 한국어 번역본에 첨부된 보론(인간 이시와라 간지)에서 발췌하였다.[18] 이에 대해 보론의 저자는 블로그에 '이시와라 간지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1차 사료로 이시와라 간지를 욕할만한 사람들이 죄다 전범이 돼 죽어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는 1차 사료의 대부분이 이시와라 간지를 존경한 사람들이 쓴 글들이라는 점'이라고 작성하여 무조건적인 긍정은 위험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