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히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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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전직 야구선수 출신으로 킨테츠 버팔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치바 롯데 마린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4구단에서 선수생활을 보냈다.
프로야구 선수로써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킨테츠의 4번 타자로써 랄프 브라이언트와 거포 클린업을 형성하여 1993년 최다안타 1위(.309 147안타 22홈런 80타점), 1994년 타점 1위 및 OPS 1.001로(.316 154안타 33홈런 111타점) 짧은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후 부상으로 인한 급격한 기량 하락 탓에 말년에는 인상적인 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저니맨으로 지내며 희비가 극도로 갈린 현역 생활을 보냈다.
2. 야구 선수 시절[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하치로가타 초등학교 - 하치로가타중학교를 거쳐 아키타현 내에서 야구 강호교이기도 한 아키타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이던 1981년 고시엔 진출권을 놓고 도호쿠고등학교[2] 와의 지역 예선 경기에서 콜드패를 당했고, 그 후로는 고시엔 문턱도 밟지 못하고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게 된다. 고교에서는 통산 32홈런을 기록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반 입시로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에 진학하여 야구부에 입부하였고,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의 우승경력은 없었지만 대신 대학리그 베스트 나인에 선출되어 같은 해 열린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도 출장했다.
이후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1987년 프린스 호텔에 입사했다. 프린스호텔 재적 시절에는 찬스 상황마다 희생타나 적시타를 날리며 팀의 첫 우승에 공헌하였고, 같은 해 사회인 리그 베스트 나인과 아시아 선수권 일본 대표에 선출되어 국가대표 4번 타자도 맡았다.
1989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에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참고로 이해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목되어 입단한 선수가 다름아닌 노모 히데오이다.
2.2.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편집]
전성기였던 킨테츠 버팔로즈 시절.
이시이는 아마추어 시절 일본 국대 4번 타자를 맡을 정도의 장거리 타자였지만, 입단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팀의 주포였던 랄프 브라이언트, 스즈키 다카히사 등이 후지이데라 구장 타격훈련에서 외야 스탠드에 장거리 타구를 뻥뻥 날리는 것을 보고 "나는 중거리 타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며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지명 직전인 1989년 10월의 세이부와 킨테츠의 우승이 걸린 더블헤더 경기에서 세이부를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았다가, 킨테츠의 브라이언트가 세이부의 에이스 카쿠 타이겐과 와타나베 히사노부를 상대로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우자 "저런 팀을 상대하면 고생한다"고 두려운 마음을 품은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프로 1년차는 입단 직전 갑작스럽게 찾아온 급성 간염과 풍진으로 인한 입원 생활로 데뷔가 늦었으나 1군에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주전을 꿰차며 지명타자, 1루수, 3루수를 겸하면서 76경기에 선발로 출장했고 규정 타석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타율 0.300, 22홈런을 기록했고 신인 선수들이 출장하는 주니어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했다. 그 해 노모 히데오가 워낙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탓에 신인왕 수상엔 실패했지만 준수한 성적을 인정받아 퍼시픽리그 특별 표창인 우수 신인상을 받았다.[3] 이후 1994년까지 5시즌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1992년에는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하면서 29개의 홈런을 쳤고, 같은 해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코마츠 타츠오로부터 홈런을 날리는 등의 활약으로 올스타전 MVP를 획득했다.
1993년엔 포지션을 1루수로 고정했고 츠지 하츠히코에 이은 타율 2위(0.309) 및 리그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1994년에는 33홈런 111타점으로 타점왕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지난해에 이어 타율 0.316(리그 3위)의 우수한 성적과 타점 1위 및 1.001의 OPS로(.316 154안타 33홈런 111타점) 그동안의 호조를 유지한다. 이해 이시이의 활약은 전반기까지 최하위에 머물고 있던 팀을 가까스로 공동 2위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시즌 초반인 1995년 5월 18일 오른발 뒤꿈치 균열 골절 진단을 받으면서 이탈이 불가피한 중증이었지만 카케후 마사유키가 가지고 있던 4번 타자 연속 선발 출장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경기 출장을 무리하게 강행했다가 결국 전반기를 끝으로 시즌아웃 되었다.
1996년에는 개막전 2번째 경기에 왼쪽 손목 골절상을 입으며 시즌 2경기만 출전하는데 그쳤고, 손목 부상을 치료하러 LA로 떠났지만 구단측에서는 수술비와 항공비를 본인이 전부 부담하는 차가운 모습을 보였고, 1997 시즌을 앞두고 60%나 연봉을 삭감하자 킨테츠 구단의 냉대에 더 이상 참을수가 없었던 이시이는 1997년 1월 14일에 내야수 요시오카 유지[4] , 투수 이시게 히로시와의 교환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1997년 요미우리로 이적한 이시이는 6월 막판에 1군 승격되었고, 6월 26일 이적 후 첫 안타를 기록함과 동시에 9회 1점 차 상황에서 요코하마의 대마신 사사키 가즈히로로부터 동점이 되는 이적 후 첫 홈런을 날린다. 그 후에도 팀의 65대 4번 타자로서 부진한 팀을 지탱했지만, 8월 초에 또 다시 부상으로 이탈해 그대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1998년과 1999시즌은 이전 시즌 보다 부상도 적었고 출장 횟수도 늘어났으나, 타율이나 홈런수가 킨테츠 시절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중요 상황마다 대타로 투입되어 연장 대타 홈런이나 역전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는 등 쏠쏠한 활약을 해주기도 하였다.
2.4. 치바 롯데 마린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편집]
1999년 시즌 이후인 11월 8일에 좌완 투수인 카와모토 야스유키와의 1:1 트레이드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 롯데 이적 1년차인 2000년엔 4번 타자 자리를 꿰차고 1루수와 지명타자를 오가며 타율 .266, 10홈런 51타점의 준수한 활약을 보여줬으나, 시즌 후반에 또다시 왼쪽 손목 골절상을 당하며 시즌아웃당하고 말았고 이 해가 주전으로 활약한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001년에는 부상 여파에 포지션이 겹치는 후쿠우라 카즈야, 하츠시바 키요시, 프랭크 볼릭에게 밀려나 대타 요원으로 뛰었고, 요미우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대타 역전 홈런을 터트리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지만 시즌 종료 후 롯데에서 방출되면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다.
요코하마로 이적한 2002년에도 대타 위주로 기용됐지만 타율 .208의 극도의 부진을 겪었고,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시합은 10월 14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한때 준주전으로 활약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은퇴시합으로 개최되었고, 7회 말에 팬들의 응원 속에 대타로 나서 투수 이리키 유사쿠[5] 를 상대로 내야 플라이로 물러나며 13년 간의 선수 생활을 끝마쳤다. 은퇴경기 영상
3. 연도별 기록[편집]
4. 은퇴 후[편집]
은퇴 후에는 사업가로서 음식점 등의 경영을 했다. 현역 시절 후쿠오카 원정 때 먹었던 곱창 전골의 맛에 반해 하카타 곱창 전골 체인점의 주인이 되었으며, 2007년 가을에는 고향인 아키타현에도 점포를 입점하는 등 나름 사업가로서 성공한 듯 하다.
야구계에서는 2003년 니혼TV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으며, 2004년 세이부 라이온즈 2군 감독을 맡았으나 1년 만에 퇴임했다.
4.1. 정계 입문[편집]
2010년 2월 14일, 같은 해 여름 참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아키타현 선거구에 입후보할 뜻을 밝혔고, 7월 11일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현직 의원이었던 스즈키 요에츠를 꺾고 첫 당선되었다.
2016년 1월 참의원 문교과학위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17년 9월 참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 문제에 관한 특별 위원장에 취임했다.
2018년 5월 참의원 정치윤리 확립 및 선거제도에 관한 특별위원장에 취임하였다.
2022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되며 3선에 성공하였고, 같은해 8월에 발족한 제2차 기시다 제1차 개조내각에서 국토교통성 부대신과 내각부 부대신, 부흥부 부대신으로 취임하였다.
5. 선거 이력[편집]
6. 기타[편집]
- 정치성향은 대다수의 자민당 의원들처럼 헌법 개정 찬성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우파 성향 정치인이다. 다만 부부별성, 동성혼 등의 젠더 문제는 2016년 조사 당시엔 반대했었으나 2022년에 찬성파에 가까운 성향으로 전향했다.
- 현재까지 총 3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을 거쳤다. 1997년 싱어송라이터 오카무라 타카코와 결혼해 1녀를 두었지만 2003년에 이혼했고(양육권은 오카무라에게 넘어갔다.) 두번째로 2006년 레이싱모델인 후나키 카에와 재혼했지만 얼마가지 않아 이혼했다. 그리고 3번째로 아키타현 프리 아나운서인 이나미 사치코와 재혼했고, 슬하에 1남을 두고 있다.
- 롯데 시절 응원가로 이정현의 노래 와를 사용했는데, 은퇴 후 주인이 없어졌다가 이마에 토시아키에게 유용되어 이마에의 응원가로 유명해졌다. 본인이 현역 시절 꽤 좋아했던 응원가였다고 한다. #
- 현역 선수 시절 애칭은 남자 이시이(男・石井)였다.
-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피살로 자민당과 통일교와의 유착 관계가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이시이가 통일교 관련 회의나 행사에 참석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 #
7. 둘러보기[편집]
[1] 대학 3학년 재학 중 중퇴.[2] 사사키 가즈히로, 사이토 다카시의 모교이다.[3] 참고로 노모 이외에도 후루타 아츠야, 사사키 가즈히로, 신조 츠요시 등 훗날 일본 야구계에서 맹활약 하는 우수한 선수들이 이해 데뷔하였다.[4] 이시이와 같은해인 89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드래프트 3위로 지목된 이후 백업 내야수로 활약했으며, 긴테츠로 이적한 뒤에는 터피 로즈 - 나카무라 노리히로로 대표되는 이테마에 타선의 하위타선 역할을 맡았다. 2023년 현재는 독립구단인 도야마 그린 선더버드의 감독으로 재직중이다.[5] 2003년에 두산 베어스에서 뛰었던 이리키 사토시의 동생으로, 현재 오릭스 버팔로즈 투수코치를 역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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