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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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애라.jpg

이명
이애일라(李愛日羅)

심숙(心淑)
본관
전주 이씨
출생
1894년 1월 7일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1922년[1] 9월 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다. 이애일라(李愛日羅)라고 불리기도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애국부인회를 지도하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도했다.

2. 생애[편집]


1894년 1월 7일 한성부에서 아버지 이춘식(李春植)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직을 맡다가, 이규갑을 만나 20살에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는 남편을 따라 충청남도 아산군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공주군 지역에서 교사직을 하게 된다. 이규갑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고 교편을 내려놓자 이애라도 이에 따라 교편을 내려놓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게 된다.

3.1 운동 당시에는 애국부인회를 지도해서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출옥한 후 다시 애국부인회를 이끌고 이번엔 군자금 모금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헌병이 쳐들어와 이애라의 100일 된 아기를 다짜고짜 땅에 내동댕이쳐 즉사하게 하는 극악무도한 일을 당하고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이 무렵 남편 이규갑은 이애라의 도움을 받아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러시아로 망명해 한국독립군사관학교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지속했다. 이 때문에 이애라는 출옥한 뒤에도 남편의 행방을 시도때도 없이 추궁당했다. 견디다 못해 아산으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오래 버틸 수 없어 러시아로 망명하기로 한다.

이애라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함경북도까지 갔다가 거기서 일본 경찰에게 잡혀 다시 고문을 받는다. 계속된 고문으로 이번에는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었기에 일제는 의사를 불렀고, 천운으로 부른 의사가 이애라의 큰조카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모르는 척 하며 "상태가 위독하니 격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해 이애라는 석방될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애라는 다시 상봉한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다.


이 말을 하고 며칠 뒤 후유증이 겹쳐 숨을 거뒀다. 사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충남 아산의 충국순의비에 이름이 새겨진다.


3.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15~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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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수이씨세보 신(信)편 상권 516쪽에는 1921년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