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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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883년 5월 30일~1909년 10월 28일
관은 원주이고 이름은 이연근(李淵根)이고 자는 성서(聖瑞)이고 호는 일순재(一順齋)이며, 항일의사(抗日義士)이다.


2. 일생[편집]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 이영화(李英華)의 15세손(世孫)이요 심제(心濟) 이상용(李祥龍)의 증손(曾孫)인데 효겸(孝兼) 이원선생(梨園先生) 이영랑(李永郞)을 아버지로 현풍곽씨(玄風郭氏)를 어머니로 고종(高宗 20) 계미(癸未) 1883년 5월 30일 나주(羅州) 이동(梨洞) 본제(本第)에서 태어났다.
1906년 광무(光武 10) 병오(丙午)에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 반대(反對)하여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이 순창(淳昌)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격문(檄文)을 내어 모병(募兵)하니 이연근(李淵根)은 그 향군대장(餉軍大將)이 되고 마을 대밭 속에 철공폐(鐵工蔽)를 만들어 병기제조(兵器製造)와 군량수집(軍粮蒐集)에 힘썼다.
1907년 융희(隆熙) 원년(元年) 정미(丁未) 밀사사건(密使事件)으로 민심(民心)이 소란하자 동년(同年)3월(月)에 병력(兵力)을 보강(補强)하고 나주(羅州) 농소산(農所山)에 본거(本據)를 옮겨 무예수련(武藝修鍊)과 작전연습(作戰練習)에 힘을 다 하였다.
동년(同年) 5월 함평(咸平)의 침남일(沈南一)<守澤>, 강무경(姜武景)과 합류(合流)하여 나주(羅州) 서호리(西湖里)의 일본헌병(日本憲兵)을 기습(奇襲)하여 20여명(餘命)의 적(敵)을 사살(射殺)하고 많은 무기(武器)도 노획(鹵獲)하였다.
융희(隆熙 2) 무신(戊申) 1908년9월 박사화(朴士化)<華>, 이재대(李載大)와 합류(合流) 나주(羅州) 고막원(古幕院)의 일본(日本) 헌병대(憲兵隊) 길전(吉田) 차량부대(車輛部隊)를 뒷산으로 유인하고 도중(途中)에 매복기습(埋伏)奇襲)하여 수십(數十)여명(餘命)을 사살(射殺)하였다.
동년(同年) 11월 박사화(朴士化)<華>, 박민수(朴珉洙)와 합류(合流)하여 나주(羅州) 고막원(古幕院)의 일본(日本) 헌병(憲兵)을 백서(白書)에 불의(不意) 습격(襲擊)하고 적(敵) 수명(數名)을 사살(射殺)하였다.
1909년 융희(隆熙 3) 기유(己酉) 일본(日本)이 우리 국군(國軍)을 강제(强制) 해산(解散)하자 의병(義兵)들이 능주(綾州)<화순군(和順郡) 도곡면(道谷面) 남정리(南亭理)> 돌장지(乭墻址)<돌담터>에 집결(集結)하고 왜군(倭軍)을 크게 쳐부술 계책(計策)을 꾸미는데 10월28일 일본군(日本軍)이 나타나자 이연근(李淵根)은 나주(羅州) 광주(光州), 화순(和順), 창평(昌平), 보성(寶城)의 각 의병(義兵)들과 합세(合勢)하여 이연근(李淵根)은 그 선봉장(先鋒將)으로 적군(敵軍)을 맹공(猛攻)끝에 격퇴(擊退)하였으나 뜻밖의 적(敵)의 후군(後軍)이 다시 나타나 격전(激戰) 삼서야(三書夜)에 아군(我軍)의 시석(矢石)이 탕갈(蕩渴)한지라 오호라 앙천통곡(仰天痛哭)할지고 의사(義士)는 여기서 장렬(壯烈)히 치명진중(致命陣中)하였다.
동지(同志) 아장(亞將) 박사화(朴士化)<華>가 치상(治喪)하는데 이연근(李淵根)은 얼굴빛이 붉고 위엄(威嚴)이 늠름함이 마치 적(敵)과 맞설 때의 열기(烈氣)가 그대로 있는 듯 하였다.
동료(同僚) 의병(義兵)들에 의하여 고향(故鄕) 이동(梨洞) 안산(案山)에 반장(返葬)하고 돌을 세워 기리는데 그 명(銘)에 말하기를 “가슴속에 간직한 도략(韜略)은 일찍이 손오(孫吳)의 병법(兵法)이었네. 아! 우리 이연근(李淵根)은나아감에 빠르고 물러섬에 느렸던가, 육덕(育德)에 힘쓰고 나라만을 알았네. 큰 용기(勇氣) 넘쳤으나 시운(時運)이 맞지 않아, 애산(崖山)의 열절(烈節)과 문산(文山)의 충절(忠節)만 이 전(傳)해지네. 외로운 단충(丹忠) 끝까지 다하다가 겨우 27에 난학(鸞鶴)과 함께 가니, 아! 앞으로 큰일을 누구에게 의탁(依託)하랴”하였다.
계미(癸未) 1923년9월17일 서울에서 사대전례(四大典禮)를 복구(復舊)하고자 송은(松隱) 상서(上書) 이근호(李根澔)와 함께 성균관(成均館)의 전신(前身)이던 도화원(道和院)을 창설(創設)한 도화원(道和院) 원임총장(原任總長) 분성인(盆城人) 김공(金公) 세배(世培)가 향교문묘(鄕校文廟)와 제전(祭田)의 실태(實態)를 알고자 나주(羅州)에 왔다가 이연근(李淵根)은 사적(事蹟)을 듣고 감격(感激)하여 이연근(李淵根)은 행상(行狀)<실적록(實蹟錄)>을 지었는데 그 한구절(句節)에 “공(公)의 불행(不幸)은 실로 오백년(五百年) 종사(宗社)의 불행(不幸)이라 어찌 죽고 싶은 통분(痛忿)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 행상(行狀)은 일본치하(日本治下)에는 깊이 묻혔고 후손(後孫)또한 미약(微弱)하여 다만 촌로(村老)의 전설(傳說)로만 나돌 뿐이더니 광복(光復)하고나서 늦게나마 나주(羅州) 향교(鄕校)의 옛 기록(記錄)에서 이연근(李淵根)은 사적(事蹟) 문건(文件)이 나와 나주(羅州), 광주(光州), 전주(全州), 남원(南原)의 4장관(長官)이 통문(通文)하고 도천(道薦)하니 1985년 성균관장(成均館長)의 포창장(襃彰狀)이 내렸고 이 고을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공산면(公山面) 남창리(南昌里)에 충의비(忠義碑)를 세워 이연근(李淵根)은 기리고 있다.


3. 기타[편집]


포천(抱川)사는 동래인(東萊人) 정구영씨(鄭九永氏)는 감격(感激)하여 다음과 같은 시(詩)를 바치었다.
國軍이 傾蹙하여 外敵이 執權함에
李義士님 義憤心을 火炎처럼 터뜨리어
敵의 肝膽 떨게하신 忠誠이여 義氣여
怨讐를 盡滅코자 武器도 創造하여
敵雲을 해치려고 奇襲戰도 펴시더라
國權恢復 외치시던 오 ! 忠誠이여 義氣여
豪邁하신 將軍英姿 온 누리에 龜鑑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