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미 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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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3년

호류지 지역의 불교 기념물
法隆寺地域の仏教建造物

1993년

히메지 성
姫路城

1994년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古都京都の文化財(京都市、宇治市、大津市)

1995년

시라카와고고카야마
역사 마을
白川郷・五箇山の合掌造り集落

1996년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원폭 돔)

原爆ドーム

1996년

이쓰쿠시마 신사
厳島神社

1998년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古都奈良の文化財

1999년

닛코의 신사와 사찰
日光の社寺

2000년

류큐 왕국의
구스쿠 유적지와 관련 유산

琉球王国のグスク及び関連遺産群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
紀伊山地の霊場と参詣道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2011년

히라이즈미
: 불교 정토 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정원, 고고 유적군

平泉 - 仏国土(浄土)を表す
建築 ・ 庭園及び考古学的遺跡群


2013년

후지 산
: 성스러운 장소 그리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

富士山 - 信仰の対象と芸術の源泉

2014년

토미오카 제사 공장과 관련 유적지
富岡製糸場と絹産業遺産群

2015년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

明治日本の産業革命遺産: 製鉄・製鋼、造船、石炭産業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ル・コルビュジエの建築作品
- 近代建築運動への顕著な貢献


2017년

신이 사는 섬
무나카타 오키노시마와 관련 유산군

「神宿る島」宗像・沖ノ島と関連遺産群

2018년

나가사키 지역의
은둔 기독교 유산

長崎と天草地方の潜伏キリシタン関連遺産

2019년

모즈·후루이치 고분군
: 고대 일본의 무덤
百舌鳥・古市古墳群 - 古代日本の墳墓群

2021년

홋카이도 · 북도호쿠의 조몬 유적군
北海道・北東北の縄文遺跡群

자연유산

1993년

야쿠시마
屋久島

1993년

시라카미 산지
白神山地

2005년

시레토코
知床

2011년

오가사와라 제도
小笠原諸島

2021년

아마미 오시마, 도쿠노시마,
오키나와섬 북부와 이리오모테
奄美大島、徳之島、沖縄島北部及び西表島




파일:120110812173951.jpg
은광 개발을 위해 판 갱도를 마부(間歩)라고 하는데 현재 약 700개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 일반에 공개된 유일한 마부인 류겐지마부(龍源寺間歩).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이와미 은광과 문화경관
영어
Iwami Ginzan Silver Mine and its Cultural Landscape
일본어
石見銀山遺跡とその文化的景観
프랑스어
Mine d’argent d'Iwami Ginzan et son paysage culturel
국가·위치
일본 시마네현 오다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7년[1]
등재기준
(ii)[2], (iii)[3], (v)[4]
지정번호
1246

1. 개요
2. 역사
3. 등재 현황
3.1. 은광 유적과 광산 마을
3.2. 이와미 은광 가도
3.3. 항구와 항구 마을
4. 여담



1. 개요[편집]


일본 시마네현 오다시에 있는 은광 유적.[5] 전국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일본 최대 규모의 은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은광의 전성기에는 전 세계의 연간 생산량의 1/15를 차지할 정도였다.[6][7] 참고로 이 당시 일본 전체 은 생산량은 150톤 정도로 추정되며 세계 생산량의 30%다.

비슷한 곳으로 볼리비아포토시(Potosí) 은광이 있으며 이쪽은 아예 도시 규모의 은광으로 16세기 한때 전 세계 은 생산량의 60%인 250톤의 은을 생산하여, 막대한 은의 유럽유입으로 인한 인플레, 이른바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이쪽도 이와미 은광처럼 초반엔 부진하다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법의 도입으로 막대한 생산량을 달성했다.


2. 역사[편집]


긴잔큐키(銀山日記) 등에 나타난 기록상으로는 14세기 초반부터 이미 일대에서 노천 채굴이 이뤄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인 광산 개발은 하카타의 상인 가미야 주테이(神屋寿貞)가 스오우오우치 요시오키[8] 지원을 받아 1526년에 시작했다. 이후 조선연산군 시대에 발명된 연은분리법이 일본에 전해지는데 이 연은분리법을 이용하여 은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자 막대한 부를 생산해내는 이와미 은광을 노리고 주변에서 각종 전쟁이 발발하기 시작했다. 당장 1537년에 윗영지 이즈모아마고 츠네히사군대가 오우치 요시오키가 영지를 비운 틈을 노리고 쳐들어와 광산을 강제 점령한다. 2년 후 오우치 가문이 다시 은광을 탈환했지만 다시 2년 후 아마고 가문은 은광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최종 승리자는 오우치 가와 아마고 가를 모두 이기고 1561년에 주고쿠의 패권자가 된 모리 모토나리였다.

이와미 은광을 점령한 모리 가는 광산과 주변을 개발하며 약 20년간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모리 데루모토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미 은광 덕분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죽고 전국의 패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가자 데루모토는 히데요시에게 정복되었고 은광은 모리, 도요토미 가문의 공동 소유가 된다. 이로 인해 예상할 수 있는 결과처럼 이와미 은광은 임진왜란에 들어가는 군사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히데요시 사후 전국을 장악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세우면서 전국에 있는 금광과 은광을 모두 강제 몰수한다. 그리고 각 광산을 관리할 자를 보내는데 이와미 은광에는 오쿠보 나가야스(大久保長安)를 파견한다. 나가야스는 다시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할 사람을 두고 막부를 위해 본격적으로 은광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17세기 초반에 이와미 은광은 최대 전성기를 맞아 매년 막부에 15톤 가량의 은을 공물로 바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에 은이 넘쳐나게 되자 이는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명나라, 네덜란드영국, 포르투갈과 일본이 무역이 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또한 무역 거래를 통해 조선에 흘러들어간 일본 은이 조선 후기 경제를 지탱하는 기축통화 역할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은이 무한대로 산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와미 은광도 17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점차 고갈되기 시작한다. 갱도를 더 깊이 파야됐고 그럴수록 채굴 난이도가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생산량을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갱도를 팠지만 폐쇄되는 갱도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럼에도 생산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 여파로 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유출되는 은을 군 막부가 통제한 것이 18세기 이후 조선 경제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일본이 세계 1위의 은 생산국이었던 시기는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 개설 초창기에는 이와미 은광 등지에서 산출된 은을 주요 결제수단으로 교역을 했으나, 은 생산량은 해마다 매우 불규칙했고, 오래지 않아 고갈되어 한동안은 막부가 보유한 금으로 무역 결제를 하는 등 임시적인 대응을 하던 중, 때마침 쿠보타 번(아키타 번)에서 대규모 구리 광산(인나이 광산)이 개발되어, 이후로는 구리가 나가사키를 통한 국제 무역에서 일본의 주된 수출품이자 결제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명나라와 서양 국가들 또한 주화를 주조하기 위해 대량의 구리가 필요했으므로 은의 산출이 격감한 이후에도 명나라 상인들이나, 네덜란드 상인들이 나가사키를 찾을 충분한 유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66년에 일어난 조슈 정벌전쟁에서 막부군이 조슈 번에 패전한 여파로 은광은 막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어 대정봉환을 거쳐 메이지 시대가 열리자 새 정부는 이와미 은광을 민간에 넘겨 민영화해버린다. 운영권을 넘겨받은 회사는 이름을 오모리 은광(大森銀山)으로 바꾸고 재개발을 시도했지만 예전 같지 않은 채굴량과 구리 개발에 나섰다가 입은 손실, 몇 번의 자연재해를 겪은 끝에 운영을 포기하여 이와미 은광은 1943년 폐광되었다.

2007년 이와미 은광과 문화 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이와미 은광과 광산촌, 항구까지 은을 반출하기 위해 만든 가도(街道), 항구마을, 은광 개발 초기 쟁탈전 당시 축조했던 산성의 성터, 사원 등 14곳의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3. 등재 현황[편집]



3.1. 은광 유적과 광산 마을[편집]


  • 긴잔사쿠노우치(銀山柵内)
은광 개발 당시 주변에 두른 목책과 내부의 각종 유물들.
  • 다이칸쇼 터(代官所跡)
은광을 지원하기 위한 대기소, 간이 감옥 용도의 건물.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 라칸지 오백나한(羅漢寺五百羅漢)
암반 3곳에 굴을 파서 각각 불상과 오백나한을 안치했다.
  • 미야노마에 지구(宮ノ前地区)
다이칸쇼 터 근처에 있는 은 제련공방 유적.
  • 오모리 은광 중요 전통 건조물군 보존지구(大森銀山伝統的重要建造物群保存地区)
오모리 마을은 은광 근처에 있는 광산촌으로 에도 시대의 무사들과 상인들의 옛 저택과 사원, 신사 등 150채 가량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 야타키 성터(矢滝城跡)
은광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 유적으로 은광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유노쓰오키도마리도를 두고 야하즈 성터와 마주하고 있다.
  • 야하즈 성터(矢筈城跡)
은광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 유적으로 유노쓰오키도마리도를 사이에 두고 야타키 성터와 마주하고 있다.
  • 이와미 성터(石見城跡)
은광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던 산성 유적으로 은광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 쿠마가이가 주택(熊谷家住宅)
광산촌에서 가장 큰 건물로 당시 유력했던 상인의 저택.


3.2. 이와미 은광 가도[편집]


  • 유노쓰오키도마리도(温泉津沖泊道)
은광에서 온천마을 유노쓰와 오키도마리 항구까지 이은 12km의 도로.
  • 도모가우라도(鞆ヶ浦道)
은광에서 도모가우라 항구까지 은과 은광석을 반출하기 위해 만든 7km의 도로.


3.3. 항구와 항구 마을[편집]


  • 도모가우라(鞆ヶ浦)
16세기 초중반에 은광에서 채굴한 은과 은광석을 규슈하카타까지 보내기 위해 사용된 항구.
  • 오키도마리(沖泊)
16세기 후반에 주로 사용된 항구로 은의 수송과 물자 보급, 군사 시기 역할을 담당한 항구.
  • 유노쓰 중요 전통 건조물군 보존지구(温泉津伝統的重要建造物群保存地区)
오키도마리의 배후에 있는 마을로 고풍스러운 온천마을로 유명하다. 오모리 마을만큼 이곳도 에도 시대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있다.


4. 여담[편집]


에도 시대에는 이와미 은광 쥐잡이(石見銀山ねずみ捕り)라는 쥐약이 유명했다. 이것은 삼산화 비소 화합물로 만든 쥐약으로 약칭으로는 이와미 은광(石見銀山) 또는 고양이 불필요(猫いらず)라고도 불렸으며 에도 시대 가부키, 괴담, 라쿠고 등에서도 주요 소재로 다뤄졌을만큼 유명한 독극물이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서 길가를 지나다니는 상인이 이와미 은광을 외치거나, 독살당한 시체의 부검 수사를 담당한 난방 의사가 이건 이와미 은광이다라며 부교쇼(奉行所, 지방관청)의 도신(同心, 관청에 소속된 하타모토 출신 관원들)들에게 적들의 실체와 단서를 알려주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제시된 대사이다.

물론 이와미 은광 쥐잡이는 이와미 은광에서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이와미 은광에서는 비소가 산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시기 이와미노쿠니(石見国) 서남부에 소재했던 사사가타니 광산(笹ヶ谷鉱山)에서 산출된 비소화합물로 만든 것이다. 원래 사사가타니 광산은 아연의 채굴장으로 유명했으나, 별도로 생산되던 비소를 이용해 쥐약을 만들었고, 상품화 과정에서 이와미 은광의 인지도를 빌려 팔아먹은 것이다. 그만큼 이와미 은광의 인지도가 높았던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소가 전혀 생산되지 않던 이와미 은광에서는 은 산출량 감소에 따라 은광보다는 쥐약으로 전국적인 인지도를 쌓게 되면서 쥐약 생산지라는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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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0년 부분수정[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5] 이웃 돗토리현이와미초라는 동네가 있지만 아무 관련없다.[6] '은을 통해 본 16세기 한일 비교와 교류' 무라이 쇼스케(村井章介) / 2002년 강원대 학술회[7] 다만, 은 생산량 추이는 해마다 매우 불규칙하게 급증감을 거듭했다.[8] 주코쿠 4개국, 큐슈 2개국을 영지로 거느린 서일본 최대의 다이묘 세력이었다. 오우치 가문은 조선왕조실록DB에 대내전 이라고 검색만 해보아도 관련 기사가 수백건씩 나올만큼 조선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조선 건국 초기부터 수시로 독자적인 사신을 보내기도 했었고, 교토 정부에도 다른 어느 다이묘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의 막대한 금을 헌상하여 관직을 받아내기도 했을만큼 부유한 세력이었다.